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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50

        

         대강 정리하자면 그런 거다.

         

         마르티나를 비롯해 여기저기 파견 근무하는 잠복 요원들에게 일종의 ‘스카우트 리스트’가 하달되어 있으며, 나는 그 중에서도 굉장히 흥미로운 아웃사이더(…)로 성향 파악부터 시작해서 현장 접선자에게 많은 재량권이 부여되어 있는데.

         

         신기하게 커스텀 된 사이버웨어 방화벽과 안쪽 사무실에서 보낸 시간으로 보건대 개발자의 소양도 충분히 있는 것 같고.

         경력과는 별개로, 자신의 위장 신분을 단시간 내에 간파한 솜씨를 보면 해킹 솜씨도 어마어마한 걸로 보이니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정도로 설명되겠네.

         

         ……전자는 몰라도 후자는 내가 금세 파악한 다음 댁을 도발한 게 아니라, 그냥 완전 사전 지식에서 우러난 순수한 실수였는데 말이지.

         

         아니, 애당초. 게임에서도 주인공한테 시원하게 정체를 밝힌 이유가 한가락하는 능력자들이 알아봐 주는 걸 상정한 현장 직원 나름의 인맥 쌓기 과정이었어?

         

         쓰읍… 그게 말이 돼?

         

         “당장 사장님부터 시작해서. 여기 널린 게 현업 프로그래머인데, 네가 너무 부주의하게 행동한 건 아니고?”

         

         “비록 보호 중요도(Priority)가 좀 낮게 잡혀 있기는 해도. 제 신원은 엄연히 엘리시움 데이터 프로텍션의 관리 하에 있답니다?

         

         오너인 리틀 헤멧 씨야 로보틱스랑 전자 공학 쪽 전문가이시니 이걸 홀로 뚫기는 힘드신 데다가… 사실 눈치챈 실력자들은 벌써 다 본사랑 지사에서 한 자리씩 꿰차고 일하고 있죠? 덕분에 저까지 대접받는 면도 좀 있겠네요~“

         

         모든 이들이 너처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버려라.

         이쪽이 특별히 유능한 게 아니라 댁이 조심성이 없었던 거다…라는 논리로 초점을 슬쩍 돌려보려고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은 채 그런 대답을 들었다.

         

         게다가 자회사의 보안을 자랑하는 척하며 ‘날 알아본 사람들은 벌써 다 엘리시움에 잡혀 가서 열심히 일하고 있어.’ 라니!

         

         가벼운 인사나 탐색전을 벌이러 온 게 아니라, 싹수가 괜찮은 뉴비를 마주치자마자 뿌리까지 제초하러 접근한 거셨구만 이거.

         

         이건 게임에서도 따로 언급이 없어서 전혀 몰랐던 부분인데.

         어쩐지 가게 명성이나 인기에 비해 마르티나 본인을 제외하면 어중이떠중이밖에 없더라니, 그녀가 보이는 족족 쓸만한 인재들을 엘리시움으로 헤드헌팅을 해갔다면 앞뒤가 맞는다.

         

         고작 필드 에이전트에 불과한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권한이나 인맥들이 있나 했더만 그런 거였냐고…!

         

         “…어이가 없네. 그렇게 함부로 찔러보고, 쉽게 인정하다가 입 싼 바보가 신상을 뿌려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엘리시움한테 원한 있는 놈들한테 집단 린치라도 당하게?”

         

         “소문이 돌면 얼른 성형 수술로 얼굴부터 뜯어고치고 보직부터 어디 내근직으로 옮겨서 짱박혀 지내야지. 하지만 대부분은 그런 영양가 없고 후환이 걱정되는 일을 저지르기보단 내 얘기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던데.”

         

         혹시 나는 다른 기발한 생각이 있냐는 듯, 허리를 숙이며 기웃거리는 마르티나에게 고개를 내저어 보였다.

         

         굳이 사서 적을 만들 필요는 없는 노릇이지.

         

         …아, 그래서 용케도 그녀가 몇 년이고 계속 이 근방에서 진득하게 활동할 수 있던 건가? 보통 유능한 해커는 꼭 자산이 아니더라도 문제가 터졌을 때 잃을 게 많은 법이니까? 허어.

         

         “그래, 좋아. 좋다고. 네 처신술이야 내가 나서서 주제넘게 신경 쓸 거리가 아니니 그렇다 치고. ‘나’는 기업의 울타리 안에 있는 게 맞다는 것처럼 말한 건 대체 뭐야?”

         

         “너처럼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기술자들이 인생의 이정표도 없는 채 막연하게 굴러먹으며 살다가, 엉뚱한 길로 빠지거나 어디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나자빠지는 게 문제라는 거지. 엘리시움은 물론 당사자에게도 큰 손해 아니겠어?”

         

         말 자체는 청산유수처럼 막힘없이 쏟아지지만 아직도 아까 전에 떠든 장황한 소개, 거대한 질서니 몸을 의탁하라니 하는 수상한 판촉 문구 같은 것에 대한 설명이 없었기에.

         

         나는 여전히 떠들 테면 떠들어보고 아니면 이만 가보겠다는 스탠스를 유지했다.

         아니, 유지하려고 했었다. 여지껏 입으로는 이러쿵저러쿵 태도를 바꿔도 눈웃음만은 잊지 않고 제공하던 마르티나의 시선에 섬뜩한 불길이 일렁이기 전까지는.

         

         “……중개인(Broker), 사수(Gunner), 전열(Pointman), 솔로(Solo; 단독 행동자). 결국 전투나 해결사 일을 생업으로 삼는 용병 나부랭이나 무법자들은 결국 집단과 전쟁을 벌여서 이길 수 없지만. 반대로 여러 사례가 말해주듯 해커는 얘기가 다르지.

         

         어마어마한 원천 기술을 보유한 과학자처럼 파멸적인 특이점을 만들어내고, 우리 사회를 유지하는 기반을 무너트릴 수 있는 포텐셜을 가졌을지도 모르는 괴물 새끼들이 곳곳에 숨어있다니… 차라리 누구나가 인정하는 울타리 안에 있는 편이 난 모두에게 행복한 결말이라 보는데.”

         

         혐오, 경외, 공포, 감탄. 이 중 어느 것과도 다른 의심과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그녀는 조심스럽게 이쪽을 다그쳐왔다.

         

         흡사… 살아있는 생체 시한 폭탄을 해체하려는 기능공처럼.

         

         “혹시 용병 생활하면서 이 짓거리 오래 하다간 정말 객사할 것 같다는 공포를 느낀 적은? 어느 날 너랑 원수진 새끼가 고용한, 방문을 부수고 들어온 청부업자에게 머리가 날아가는 상상은? 드로이드로 아예 주변을 둘러친 걸 보면 안전을 끔찍이 챙기는 것 같은데.”

         

         “……글쎄.”

         

         딴에는 소심한 방구석 해커를 겁줘서 끌어들이고자 한 건지 모르겠지만.

         원래 범인凡人의 평범한 마인드를 장착한 나에겐 환생 초창기의 우울한 기억을 되새겨주는 거슬거슬한 자극이 되었다.

         

         호텔 벽조차 다 막아주지 못하는… 밤이면 밤마다 어디 골목에서 울려 퍼지는 아득한 총성, 저절로 몸을 경직시키게 되는 의중을 알 수 없는 시선들, 불빛에 따라 흔들리는 거리의 그림자.

         

         신스웨이브 같은 사이버펑크와 연관된 음악 장르가 낭만과 자유, 세기말 감성에 대한 그리움으로 탄생했다 하던가?

         

         자유와 낭만은 다르게 말하면 방임과 무법이라고. 멀리서 볼 때는 마냥 아름다웠던 도시 야경도, 안에서 지겹도록 보기 시작하면 안구에 대한 고문 겸 온갖 위협이 도사리는 함정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지금이야 뭐, 나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다 하면 과하게 반응해줄 좋은 인연들이 엄청 많아져서… 응.

         

         – …제압할까요? –

         

         대체 왜 이 바보야.

         

         잠시 제로와 몰래 톡탁거리는 걸로 술렁거린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혔으나, 마르티나는 내가 평정을 되찾기 전에 어떤 식으로든 명확한 대답을 듣겠다는 듯이 한발짝 다가왔다.

         

         “아마 다른 곳에서 들었을 스카우트 제의와는 성격이나 뉘앙스가 좀 달라서 당황스러울 수 있겠지만. 단순한 직장이나 좀스런 수준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약속하는 게 아니라 손가락질 받지 않을 위치, 비슷한 동류들과 함께 지낼만한 보금자리(Shelter)를 주는 편이 좋지 않겠어?”

         

         “…….”

         

         어차피 부리고 싶은 사치는 혼자 지내면서 질리도록 즐겨봤을 테니까… 라며 뒷말은 굳이 밖으로 꺼내지 않고 흐렸지만 요지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여기까지 듣고 거절한 이가 딱히 없었다는 호언장담이 이해가 갈 정도로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설혹 시간을 좀 달라며 면전에선 거절했어도, 나중에 생각이 정리되면 다시금 그녀를 만나러 제 발로 돌아오게 되겠지.

         

         하루하루 격변하는 세태에 누구보다 잘 적응하는 네트워크 망령들이라 해도 변화를 두려워하고 안정을 추구하는 건 사람의 본성.

         

         메가 코프 스카우터께서 네 능력을 엘리시움이 높이 산다며 함께 더 나은 미래에 이바지하자 꼬드긴다면.

         당장 구체적인 급여 제시는 없어도 반평생 음지에 머무르던 해커의 인정 욕구나 외로움을 달래주어 끌어내는 데엔 이만한 미끼도 없긴 했다.

         

         엘리시움이라… 솔직히 일반인은 상상도 못할 무수한 가능성들을 플레이해본 나로서도 미지의 영역이 많은 기업이라 조심스러웠다.

         

         원래 겉으로 깨끗한 척하는 놈들이 뒤에서는 더 무섭다고. 인류의 의료를 책임지겠다며 복지에 앞서는 에나마조차 흑백이, 공과 사가 어마어마하게 또렷한데 뇌 주물럭거리는 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애들은 오죽하겠어?

         

         …아무래도 ’이미 존나 망한 지구 생태계를 일일이 고치려 드느니, 그냥 다들 손잡고 가상 세계로 대피해서 행복하게 사는 건 어때요?’ 같은 소리를 공공연하게 하는 머리속이 꽃밭인 친구들이기도 하고.

         

         하지만 말이다.

         

         “마르티나 씨… 댁이 그렇게까지 열렬한 기업 신봉자라곤 아니라 봤는데요.”

         

         “거기에 기대 월급 받아먹고 사는 처지인데, 명령에 충실하고 사훈 좀 존중하며 사는 게 어때서?”

         

         쾌활하게 대꾸한 그녀가 바쁘게 상품을 고르는 척 옆으로 잰걸음을 쳐서 다가왔다.

         피차 입안에서 중얼거리는 수준의 음량을 증폭 송수신하고 있는 상태인데 누가 듣기라도 할라 겁난다는 것처럼.

         

         “……본심은?”

         “널 스카우트할 수 있으면 인센티브만 천만 단위로 우습게 나올 테니까?”

         

         나는 너털웃음을, 저쪽은 대화가 잘 풀린다 여겼는지 그윽한 미소를.

         자신도 결국 똑같은 한 명의 해커라며 동질감을 이끌어내기까지, 거의 교과서적으로 사람 홀리는 모습에 내심 박수를 쳐주었다.

         

         말단 사원들이 윗선의 이상에 잘 공감하지 못하는 건 어디 가나 마찬가지라는 거겠지만, 그녀의 경우엔 아무리 봐도 한 편의 잘 짜인 연극이니 곧이곧대로 삼켜서는 안 될 말씀이다.

         

         “아, 지출이 많아서 당장 원한다면 내 몫에서 반도 더 떼어줄 수도 있답니다? 어때, 어때? 근처에 괜찮은 식당이 있는데 거기서 차분히 얘기하는 건?”

         

         호랑이 새끼 또한 결국엔 호랑이듯, 그녀 또한 이 메트로폴리스를 터전으로 삼은 거미. 요소요소에 아는 얼굴을 만들어 둘 수 있다면 크레딧을 좀 써서라도 빚을 지우겠다는 태도마저 산뜻했다.

         

         역시 재밌다.

         

         정작 구체적인 내용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고, 가자는 대로 따라가면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까지는 갇히는 신세가 될 수도 있지만. 본인 자신의 매력이 넘치는 여자가 준 제안인 시점에서 고려해볼 여지가 생긴다는 게.

         

         환심을 살 거라면 제대로 샀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인연 장사로 목표를 이루려 한다는 점만 보면 미스터 K가 떠올라서 짜증날 수도 있지만, 그녀는 외려 연관 퀘스트가 잘 풀리면 만족하고 은퇴하는 캐릭터니까.

         

         그렇지만 개인적으론 지금 이러쿵저러쿵 엮이기보단 나중에 자연스럽게 곁다리로 끼어들고 싶은데요. 음….

         

         …아니지? 역으로, 잘 생각해보자.

         다른 말로 하면 현장 요원인 마르티나, 모든 재량권을 부여받았다는 얘만 잘 구워삶아 놓으면 엘리시움의 추적도 몇 달은 느슨해지는 셈이 아닐까?

         

         어쨌거나 민간 해커를 잠재적인 위협으로 본다는 것도 본사의 방침이 분명하니까, 발걸음을 늦추는 장난을 쳐서 대비할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을지도.

         

         “입사 제의…? 협박? 아무튼! 엘리시움의 보호 하에서 활동하라는 충고 잘 들었어. 돌아가서 아주 긍정적으로 검토해볼게. 그러니 상부에는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고 말해줄 수 있을까? …아! 가는 길에 쓸만한 선물도 챙겨주는 조건으로.”

         

         “흐응…… 아나스타샤 양은 이대로 구두 약속에 연락처 교환만 하고 헤어지긴 위험한 유형이라 보는데… 거기에 선물?”

         

         “그럼. 당신과는 진심으로 좋은 관계를 이어 나가고 싶으니까, 지금 내가 줄 수 있는 최고의 배려쯤은 얼마든지 해줄 수 있지.”

         

         완전 어리둥절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선물이라는 단어가 가진 선천적인 마력에 이끌렸는지 그녀의 어깨가 간헐적으로 움찔거리는 게 눈에 띄었다.

         

         어쩌지, 손바닥이라도 펼친 채 팔을 뻗어야 하나?

         아니면 해커답게 사이버웨어로 뭔가를 전송해줄 참인가?

         

         머리속에 어떤 상상이 한창인지는 몰라도 위의 두개 중 하나라면 아쉽게도 모두 틀렸다. 그런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걸 나는 확실히 보증해줄 참이었으니까.

         

         “이따 나가는 길에 웬 도깨비(Oni) 무늬 가득한 츄리닝 입은 이상한 사람한테 납치당하면 내가 ‘절대’ 손끝 하나 건드리지 말랬으니 바로 풀어달라고 하면 돼.”

         

         “……………………그게 무슨?”

         

         경직, 혹은 석화(石化; Petrification)에 더 가까운 격한 반응. 그리고 잠시 후에 재부팅에 성공한 마르티나가 매섭게 주변을 살피다 이내 한 곳을 바라보고 굳었다.

         

         나도 제로가 말해주는 걸 따라서 읊는 거에 불과하긴 한데.

         어… 정확히 짚어 말하자면 서바이벌 코너 반대편으로, 메인 카운터를 지나쳐, 정문 너머, 대로 건너편에 있는 골목 그림자 속?

         

         하여간 물리적 거리가 얼마인데 그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관심을 이렇게 빨리 알아채다니.

         

         감 이전에 눈에 박은 임플란트가 보통 좋은 게 아닌 모양이다. 음… 부럽네. 이 거리에서 그런 것도 살필 수 있고.

         

         “자… 잠깐! 분명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고 방금 말하지 않았어!?”

         

         “응, 그러니까 안 다치고 빠져나갈 수 있게 탈출구를 준비해주는 거잖아?”

         

         오, 아무리 그래도 저런 도시 괴담에 나오는 생명체 같은 걸 직격으로 봐 버리면 그 견고하던 웃는 얼굴도 흔들리는구나.

         

         어디선가 밑도 끝도 없이 솟아나기 시작한 식은땀을 연신 훔친 그녀가 다급하게 떠들었지만 나는 괜찮으니까 안심하라는 뜻으로 달래 주었다.

         

         좋다. 이러면 이제 그녀가 협조를 거부해도 엘리시움 측에선 ‘어이씨. 에나마가 여기서 왜 튀어나오는데!’ 하면서 멋대로 혼란을 겪겠지.

         

         불쌍한 일개 해커 같은 거에 좀 신경 쓰지 말고 거 공룡들끼리 영역 싸움하면서 서로 눈치나 보시라고요. 예?

         

         그런데 조금 의외네.

         난 약간 ‘내 배려가 어때?’ 같은 느낌으로 찌르면, 저쪽은 ‘이런 부분까지 신경을 써 주다니… 좀 더 시간을 두고 신중하게 접근해야겠어!’ 비슷한 방식으로 응수할 줄 알았는데.

         

         너무 이쪽에만 편리한 예상이었나? 아니면 설마….

         

         “혹시나 해서 미리 말해 두겠는데, ‘저건’ 딱히 내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친구가 아니다? 굳이 분류하자면… 자연 재해 비스무리한 거지.”

         

         “그건 반대로, 안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내가 무사하리라는 보장도 일절 없는 거 아니야!?”

         

         “……부탁 정도는 생각보다 착실히 들어주는 불법 스토커. 라고 지금이라도 정정해도 괜찮을까?”

         

         탁…!!

         

         어이쿠. 얘기를 그만하고 싶어 졌는지, 첫만남에 이만큼 떠들었으면 충분하다 여긴 건지 마르티나가 먼저 거칠게 손에 들고 있던 칩 케이스를 선반에 내려놓고 등을 돌렸다.

         

         시원섭섭한 태도지만 보류라는 애매모호한 대답을 손에 쥐고 돌아가게 된 입장에서는 화를 내는 것도 어쩔 수 없으려나.

         

         하지만 목적한 시간 벌이가 성공했다면 우리로선 최상의 결과를 얻은 셈이다. 이 정도면 당면했던 위험은 무사히 넘겼다고 해도 되리라.

         

         “아나스타샤… 당신, 두고 봐요. 오늘 진 빚은 반드시 갚아줄 테니까…!”

         “…엥?”

         

         적어도 마지막에 고개만 어깨너머로 돌린 그녀가, 눈물투성이인 상태로 이를 갈면서 말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고.

         

         이거 어떻게 들어도 훈훈하게 헤어지는 분위기는 아니지? 저것도 긍정적으로 빚을 갚겠다 표현한 게 아닌 것처럼 들리는뎁쇼. 저기요?

         

         우당탕탕!!

         

         “이런 썅! 저저…! 왜 애꿎은 광고판을 넘어트려!?”

         

         뭐라 제지할 틈조차 없었다.

         

         위아래 복층으로 된 큰 가게지만 도난 이슈 때문인지 직원 전용 후문을 제외하면 1층 정문밖에 손님이 나갈 구멍이 없는 서킷 리파이너리에서 대탈출을 감행한 어느 손님 때문에.

         

         문밖으로 뛰쳐나간 마르티나가 다짜고짜 정문 근처에 비치되어 있던 입간판은 모조리 넘어트리면서 코너를 돌아 사라졌고.

         무려 6차선 도로를 뜀박질 두세 번으로 주파한 검은 형상이 그 뒤를 미친듯이 따라가는 진풍경에 일대의 시선이 모조리 쏠렸다.

         

         결국 남은 건 입구가 개판이 되었다면서 쌍욕을 갈기는 헤멧과 눈치 보면서 슬금슬금 뒷정리에 나서는 직원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뭘 더 해. 그냥 저랑 관계없는 일입니다~ 하고 딴청이나 부렸지.

         

         ……그녀에겐 따로 해명하자.

         

         그야, 나랑 이야기 나눈 사람이라고 마사나리가 보이는 족족 다 잡아다 심문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 엘리시움 스카우터 씨의 경우엔 너무 수상하게 주변에서 장시간 기웃거리긴 하셨다.

         

         얼른 쇼핑을 마치고 나가는 길에도 추격전을 펼치고 있는 것 같으면 최대한 말려야지.

         

         – 이미 둘 다 탐지 범위 바깥으로 벗어났습니다만. 원하신다면 정비 중인 다른 기기들을 지금 곧바로 가동하여 이 구역으로…. –

         

         “…오케이. 그럼 나중에 할까!”

         

         추격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아직 닫히지 않은 일대일 채널에 개인 연락처를 툭 던져 놓은 채 기지개를 쭉 폈다.

         

         복잡한 생각은 이만하자. 어느 쪽이던 진짜 진짜 막다른 곳에 몰리면 나한테 연락을 하든, 더 본격적인 문제로 커지기 전에 상부 지시를 기다리든 하겠지.

         

         이래서 기업 애들은 건드리기 무섭다니까. 도무지 중간이 없어요 중간이.

         

         “으휴….”

         

         하여간 이러면 나는 여러모로 많이 홀가분해졌다.

         

         갑자기 튀어나온 곤란한 인카운터와 사생활 따위는 모르는 보디가드(바란 적 없음)도 한데로 뭉쳐서 사라졌겠다. 가게 사장님과는 아예 같은 편을 먹었으니 눈치 볼 것도 없겠다.

         

         남의 일에 쓸데없이 관심 많은 인간들마저 소란을 쫓아 밖으로 나갔으니 어디 느긋하게 쇼핑을.

         

         그래, 이번에야말로 그 놈의 망할 사격술이나 교전법 관련 칩을 사서 근처에 대형 이벤트가 벌어질만한 장소나 좀 육안으로 확인해두고 가서 쉬어야겠다~ 한 그때.

         

         

         “뭐여, 서킷 리파이너리 건물이 왜 이렇게 작고 초라하지? 잘못 찾아온 건 아닌데… 에이씨. 모르겠다. 가격만 양심적이면 되지 내 처지에 뭘 따지고 앉았냐….

         

         

         “….”

         

         ……정말. 정말로 오랫동안 들어보지 못한 그리운 언어가.

         툭툭 끊어지는 음절과 각진 발음마저 사랑스러운 내 모국어, 한국어가 고막을 간질였으니.

         

         지극히 당연하게도. 직전까지 세상엔 너무 호기심이 넘치는 사람들이 많다며 중얼거린 게 무색하게 내 모든 정신은 무슨 저주에 걸린 것 마냥 가게 입구를 서성이는 추정 한국인에게 못박힐 수밖에 없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그들은 각자 무엇을 보고 어디로 향하는가.

    분량이 또 욕심내서 쓰다 보니 곱빼기 덮밥이 됬네요.
    ‘앗, 이걸 상하로 나눠 올리고 연참인 척할까!?’ 잠깐 나쁜 생각을 했지만, 원래 여기까지가 한 편으로 예정하고 있었기에… 부디 재밌게 봐주셨다면 좋겠습니다.

    항상 읽어 주시는 걸로도 모자라 댓글 달아 주시고, 추천까지 눌러 주시는 모든 분들께 무한한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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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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