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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51

        

         언어란 무엇일까.

         

         당연히. 지금 여기서 음성이나 문자로 이루어진 의사 전달 수단이니 뭐니 하는 사전적 정의에 대해 고리타분하게 토의하고자 꺼낸 게 아니라, 잠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로서 언어가 품은 가치를 찬양하듯 떠들고 싶었다.

         

         내가 이 동네로 넘어오자마자 망할 자동화 포탑에 갈려 나갔을 때 얼마나 물리적 뇌 손상이 심했는지, 재생 과정에서 대체 어떻게 돼먹은 업그레이드를 시도했는지는 몰라도 자의식은 이미 나와 ‘나’가 혼재했던 상태.

         

         그렇다고 괴리감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거의 대격변이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는 어마어마한 수준의 변화를 겪은 것 치고는 굉장히 부드럽게 융화했다고 생각한다.

         

         …살짝 주제에서 탈선한 얘기를 돌려서, 아무튼 하고 싶었던 말은 그거다.

         게임 특성이나 초상 능력이 생긴 걸 깨닫기 이전에 나는 대화를, 사고 자체를 영어로 하고 있었다는 것.

         

         음, 딱히 한글이나 한국어를 잊어버린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혼자 상념에 잠기는데도 자연스럽게 일순위로 사용하는 게 영어, 그 다음이 분명 내 근본이었을 한국어. …왜 이해되는지 모를 키릴 문자와 러시아어가 곁다리처럼 마지막으로 떠오를 뿐.

         

         당장 그때야 살려면 뭐든 손에 잡히는 대로 쏘고 터트리고 하느라 바빠서 별생각이 없었는데,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부턴 기분이 꽤 찝찝했었다.

         

         사람의 말에는 힘이 깃든다.

         

         말장난과 속임수가 일상이며 사기꾼이 판을 치는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온갖 것들이 사라지지 않은 채 꾸역꾸역 기록으로 남아 언젠가 숨통을 옥죄어오는 이 세계이기에, 더더욱 입밖으로 내뱉어진 순간에만 현실이 되는 언어가 고귀한 무게를 지니는 걸지도 모른다.

         

         국가라는 개념이 파멸한지 어언 백여 년, 인종의 용광로라 불리던 이 미합중국 땅이 몇 세대나 뒤섞였어도 여전히 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마음의 창 역할을 하는 개념.

         

         결국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먹기도 힘든 매운 한국 음식을 찾아다니는 기행까지 벌이고, 두 손으로 껴안기도 힘들만큼 소중한 인연을 잔뜩 얻었다 스스로 위로까지 했거늘.

         

         단순히 누군가가 물 흐르듯 구사하는 잃어버린 모국어를 듣는 것만으로도 지독한 노스탤지어(Nostalgia; 향수)에 시달린 건 대관절 어째서일까.

         

         – …아샤님, 괜찮으십니까? –

         

         “괜찮, 괜찮아. 쉿. 잠깐만 말 걸지 말… 아니지, 아예 저 사람 쪽에서 나는 소리 좀 증폭해서 들려줘.”

         

         바로 조금 전만 해도 다른 사람들이 다 난장판을 만들며 뛰쳐나간 마르티나에게 관심을 쏟아서 편하네~ 남 일에 기웃거리는 문화 좀 없어져야 하네~ 신나게 씹어댄 주제에.

         

         나는 정말 일말의 염치도 없이 몸을 경직시킨 채 귀를 쫑긋거리는 걸로도 모자라 제로까지 총동원해서 감시 체제에 돌입했지만 부끄럽지 않았다.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오, 그냥 조금 엿듣기만 하는 게 뭐가 어때서!

         사람 한 명 살리는 셈치고 좋게 좋게 넘어가 주십쇼. 거 부탁입니다…!

         

         “씁, 망했다. 어째 내부 구조도 꽤 다른 것 같네 이거….

         

         “……우와.”

         

         남자. 사실 애매하게 호르몬 맞는 트랜스젠더나 CD(Cross-Dresser; 이성이 주로 입는 패션을 입은 사람)도 태연하게 많은 동네인지라 속단하기는 조금 이르지만 생물학적 남성이라 추측되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아론의 느끼한 어조, 쇼우의 부드러운 말투. 그 어느 쪽과도 다른 투박하고 머뭇거리는 기색이 가득한 억양임에도 나에겐 웬만한 음악보다 감미롭게 들렸다

         

         토종 한국인 구경까진 차마 바라지도 않는다. 나도 양심이 있지.

         

         설령 혼혈이라 해도 한국어를 저렇게 쓸 줄 안다면 동양적인 외모가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기대를 가지고 그를 훔쳐봤지만 이게 웬 걸,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너무 적었다.

         

         뭘 그렇게도 꽁꽁 싸매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가? 게다가 또 저런 포스트 아포칼립스 냄새나는 건 어디서 주워 온 걸까.

         

         두상과 머리카락은 걸쳐 입은 해진 외투에 얼기설기 붙어있는 후드가.

         얼굴에는 낡고 여기저기 흠집이 잔뜩 난, 아래턱 부분이 툭 튀어나오고 정작 정화통은 깨진 것 같은 구형 방독면이.

         그 밑으로도 몸 대부분을 엉망진창 망가지고 사이즈도 똑바로 맞지 않는 먼지투성이 슬랙스 셔츠와 카고 바지가 가리고 있어서 인종은커녕 나이대조차 똑바로 짐작하기 어려웠다.

         

         종합적으로 패션 스타일을 평가하자면….

         

         …소신 발언. 저거 황무지 쪽 개척 마을에서 지낼 때나 자주 보던 여행객 & 무법자 코디인데, 진짜 뭐야 이 놈.

         

         진짜 어디 재활용품 수거함이나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던 옷가지를 되는대로 주워 입었나? 하는 엉뚱한 상상이 들 지경이다.

         

         하여간 자칫 좀 격식 따지는 가게나 구역 경계에서는 통행 거부당할 수준의.

         

         위험한 분위기를 풍긴다기 보단 정말 형언하지 못할 정도로 고생에 찌든 내를 자랑한 남자는 구태여 안쪽까지 꼼꼼하게 살필 필요성을 못 느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어벙하게 가게 내부 전경을 두리번거린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터벅터벅 걸어 들어와서는 곧장 헤멧이 앉아있는 메인 카운터로 향했다.

         

         “…자네도 상담인가? 살 물건이 있으면 꼬리표(Tag)를 떼야 하니 일단 들고 오게나. 먼저 계산한 다음 나가는 길에 집겠다고 괜히 경보 울리게 만들지 말고.”

         

         핫…! 거 제로한테 마사지 받으시기 전에도 그 정도로만 서비스하시지.

         

         직전에 맞이했던 어느 손님에게 아주 호된 경험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혹은 본인이 만족하는 계약을 맺은 참이라?

         

         퉁명스러운 부분은 조금 남아있어도 아까와 비교하면 상당히 누그러진 태도로 난쟁이 사장님이 장사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조금 쾌활한 모습으로 후다닥 다가섰으니.

         

         “오, 과연… 지금은 이런 느낌이구나. 어… 실례합니다? (Excuse me?) 저는 찾고 있슴다… 번역 도구를? (I’m looking for the… um… translation tool?) , 한국어 영어. 쌍방향!? (English and Korean, both ways. Ok!?)”

         

         “…이런 시벌놈이? 따로 찾거나 구체적으로 원하는 물건이 있으면 먼저 검색부터 해 와! 그러고도 정 없으면 네 입맛에 맞는 걸 찾아주던, 커스텀 해서 만들어주던 할 테니까!”

         

         “푸흡…?!”

         

         전혀 예상치 못한 꽁트에 입가를 감싸 쥐고 제로 0호기의 옆구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래, 더럽게 어렵지 영어. 나도 따로 공부할 것 없이 뇌에 인스톨된 점은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환경에 따라 악센트가 다를지언정 저렇게 대충 배워 놓고 번역기로 때우려는 녀석이 있을 줄이야.

         

         하다못해 통합 언어 패키지 칩이라도 머리에 꽂지, 그 와중에도 지출을 아끼려고 딱 2개 국어만 담긴 저가형 상품을 찾는 짠돌이 정신은 가히 완벽.

         

         심지어 지칭하는 물건이 정확하지 않아서, 오죽하면 간신히 눌러쓴 헤멧의 접객용 가면이 한방에 날아가기까지 했다.

         

         막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점심 무렵과는 달리, 처리할 일이 많아 바쁘게 컴퓨터를 두들기고… 직원에게 업무 지시를 하고… 전화로 약속 잡느라 정신없던 그로서는 저런 영문모를 주문을 한 손님이 약간 짜증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빨리 와다다 쏟아 내시면 보나마나 상대방은 또 못 알아들을 것 같은데요.

         

         “네? 예?? 서치 더 네트워크 퍼스트라니 뭘…. 아! 씨이, 이건 또 뭐라고 하지. 죄송한데, 내 사이버웨어가 죽음. (Sorry, my cyberware is… dead.) 지금 못써요! (Can’t use, right now!)”

         

         “허이구? 이거 가지가지 하는 분이 오셨구먼. 지 대가리 간수도 못하고, 잘 났어 아주 그냥!”

         

         아, 미치겠다.

         

         “으, 크큭. 흡!”

         

         – …둔한 저에게도 기뻐하시는 것처럼 느껴지긴 합니다만. 정말 괜찮으신 건 맞습니까? –

         

         끄덕끄덕.

         힘겹게, 끓어오르는 감정의 격류에 몸부림치는 날 쓸데없는 이목으로부터 가려준 제로의 품안에서 고개를 어찌저찌 움직였다.

         

         변함없이 한 손은 꿋꿋이 입을 가리고.

         다른 쪽은 이젠 숫제 근육 땅기는 느낌이 오기 시작한 배 근처를 움켜쥔 채로 부르르 떨며.

         

         이 기쁨을 어떻게 표현해야 얘도 알아들을까? 공유해주고 싶었지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 미안하게도.

         

         정말 어쩔 수 없는 게 아닌 이상, 절대 영어로 떠들기 싫은 불쌍한 한국인이 외국인을 마주쳤을 때 어쩔 수 없이 바디 랭귀지를 비롯해 모든 노력을 다하는 장면을 본 이 즐거움을.

         먼 미래에 모든 노림수와 우연이 들어맞아서 돌아가는데 성공했을 경우에나 볼 수 있을 줄 알았던 그리운 풍경을 엿본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을.

         

         오늘 집에 돌아가면 제로에게 어느 웃긴 게임 폐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자. 방금 그렇게 정했다.

         

         한 때 꿈에서 겪은 정체불명의 ‘힘’이 해를 끼칠까 걱정돼서 이 바보한테는 중요하지 않은 부분은 숨기려고 했는데, 이 나-아나스타샤Anastasia-의 근원과 관련된 건… 얘도 알고 싶어할 테니까. 최대한 조심해서 풀어 봐야지.

         

         “흐하핫…! 하아… 너무 재밌네. 이래서 커뮤니티 해커 애들이 심심하답시고 도청 같은 걸 저지르는 건가?”

         

         – 그건 어설프게 실력 있는 놈들의 같잖은 일탈이 아닐까요. –

         

         실리적인 목적이 없는데 취미가 도청이라면 과연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어쨌거나.

         

         뭐, 남이 고생하는 모습을 반찬삼아 눈물이 맺힐 정도로 웃는다며 손가락질 받아도 얼마든지 달게 인내하겠다.

         

         나는 실제로 저 두서없고, 영 똑바로 맞물리지 못하는 두 남자의 엎치락뒤치락 대화에 엄청 위로 받고 있었으니까.

         

         “대체 칩을 달라는 게야, 프로그램을 전송받겠다는 거야! 이따 미팅하러 가야 하는데 갑자기 어디서 이런 원시인이 튀어나와선…. 음? 이거? 여기다 담아서 달라고??”

         “아니, 시발! 진짜 아무것도 없으니까 제일 싼 걸로 달라는데 왜 이 아저씨는 자꾸……. 아! 터치 패드! PDA! 베리 굿!!”

         

         좋다고 쌍따봉을 날리다가, 예상 지불액이 적힌 카운터 화면을 보곤 이내 비명을 지르는 괴인에게 호감이 무럭무럭 솟았다.

         

         “응, 안되겠다.”

         

         …하, 진짜 도저히 못 참겠다.

         원래는 적당히 엿들으며 여기서 구태여 한국어를 쓰는 건 어떤 사람인지, 혹시 코리아 타운이나 숨은 한인 모임 같은 게 있는지 눈치 볼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더는 뒤에서 구경하는 것만으론 참을 수 없다.

         

         대화하고 싶다. 시시콜콜한 잡담이라도, 할 짓 더럽게 없는 해커가 지나가면서 흘리는 괜한 참견이라도 좋다. 한국어가 통하는 사람과 잠시 말을 나누고 싶어졌다.

         

         게다가 헤멧은 지갑이 얇은 손님의 상담에 굳이 음성 번역을 시도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 같았지만.

         동업자의 골칫거리라면 또 본의 아닌 한국어 전공자인 내가 중간에서 도와주는 게 그림이 예쁘지 않겠나? …반론은 어떤 식으로도 받지 않겠어.

         

         우리의 귀한 손님께서 어색하거나 불쾌하지 않게.

         어디까지나 여기 관계자라는 느낌으로 간섭하면 괜찮지 않을까?

         

         어떤 부자들은 고향 기분 한 번 내려고 돈을 무지막지하게 쓴다는데, 정통(?) 모국어로 정신 치유(Theraphy) 받은 대가로 전자제품 한두 개쯤은 얼마든지 사줄 수 있지. 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대충 북두의권에서 마차 볏짚 무더기 속을 파헤치다가 켄시로와 눈이 마주친 오묘한 짤)

    표준 발음은 꽁트가 아니라 콩트(Conte)라지만 일상적인 감각을 살리고 싶어서. 네.

    ‘여기서 끊다니… 이 악마 새끼!’ 같은 댓글들을 보고 좋아하셨다니 다행입니다 히히~ 하면서 잠들었는데, 바로 멍석말이 당하는 꿈을 꿨습니다.
    웹 연재라 살았네요. 휴우.

    체스4 님의 10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재밌게 읽어 주셨다니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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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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