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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54

       연성진을 그려 판자촌을 다시 세웠다. 비록 움집을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했지만, 비바람 피하는 덴 문제가 없었다.

       

       도와주는 과정에서 금안족의 호의를 받아냈다. 레니냐의 중재로 에테르는 이들과 웬만큼 친해졌다.

       

       금안족이 착하니 뭐니 해도 일단 지성체 아닌가. 쓰면 뱉고, 달면 삼킨다. 어디서나 칭찬과 도움은 최고의 무기였다.

       

       “여러분은 눈동자 색이 곱고 아름다우시니 하는 일마다 복될 것입니다.”

       

       에테르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아니, 아주 조금은 마음에 있다. 자신 또한 같은 종족이었으니까.

       

       이상한 일이었다. 종족에 관계없이 몰살하기로 하지 않았는가. 에테르가 보기엔 이 세상은 더는 맑아질 가망이 없었다.

       

       탁한 기류가 주류라면 자신은 차디찬 삭풍이 되어 세계선을 무너뜨리고자 하였다. 이것에 악의라고는 티끌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오늘, 에테르는 모처럼 만난 ‘순수한’ 동족 앞에서 격려의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바닷가의 금안족은 처량했다. 마왕군에 따르지 않고 끝까지 지조를 지킨 결과였다.

       

       “저 같았으면 이런 처사에 화가 나서 국회에 불을 지르러 갔을 겁니다.”

       “그래도 그건 안 되죠.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잖아요.”

       “……다들 인품이 훌륭하십니다.”

       

       에테르는 한숨을 쉬었다.

       

       호구 종족 같으니라고.

       

       “교수님은 인족이신데, 저희를 차별하지 않으시는군요.”

       “세상에 어떤 종족이 미천하겠습니까?”

       “존함이 하이젠버그라 하셨지요?”

       “네.”

       “조만간 답례하러 찾아가겠습니다.”

       

       에테르는 슬며시 웃으며 됐다고 답했다.

       

       곧 멸망시킬 종족의 호의 따위, 불편해서 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 어디까지나 불편해서 그렇다.

       

       그보다는 레니냐.

       

       작금의 관심사는 오직 레니냐였다.

       

       “저, 선생님. 저희 집이…….”

       “알아.”

       

       레니냐의 집이 새벽에 전복됐다. 어느 정도 고치긴 했지만, 아무래도 불안하다.

       

       에테르는 건축에 밝지 않았다. 이번에는 어떻게든 넘겼지만, 다음에도 안전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만약 레니냐가 리바이어던에게 당하기라도 한다면, 자신은 어떻게 반응할까.

       

       슬퍼할까?

       

       분노할까? 

       

       아니면….

       

       “…허어?”

       

       내가 이걸 왜 걱정하는 거지?

       

       입맛이 쓰라렸다.

       

       에테르는 정신을 차리고는 레니냐에게 물었다.

       

       “생필품이나 교과서는 전부 잃어버렸니?”

       “몇 개는 찾았지만 못 쓸 수준이 되었어요. 책은 전부 젖어서 찢어져 버렸고요.”

       “그래, 그렇구나.”

       

       레니냐는 침통한 표정이 되어있었다.

       

       생필품은 어떻게든 알바를 해서 사면 된다. 하지만 교과서는… 너무 비쌌다.

       

       200쪽짜리 얇은 교재 하나에 100엘랑 선이다.

       

       한국 돈으로 12만원. 정말이지, 장사치 새끼들이 따로없었다.

       

       “교과서는 왜 사물함에 두고 다니질 않았니?”

       “작년엔 그랬는데요…….”

       “그랬는데?”

       “…….”

       

       레니냐는 입술을 안으로 말아넣었다. 기다란 귀는 힘없이 축 내려가 있었다.

       

       “됐다, 말 안 해도 돼.”

       

       에테르는 입술을 자근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보면 볼수록 멸망시키고 싶은 나라였다.

       

       “어떤 면에서는 제국만도 못한 나라구나.”

       

       마왕령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제국은 늘 인재가 시급했다. 정령을 쓸 수 있는 이들도 적었다. 그런 지정학적 요소 때문에 에테르는 노예 탈출 이후로 편한 삶을 보낼 수 있었다.

       

       일리야드는 아니었다.

       

       대다수 엘프가 정령에게 세례를 받는다.

       

       정령이 마도를 보조한다면 같은 ‘파이어 볼’이라도 그 위력이 배가 된다. 같은 양을 노력하고도 더 노련하게 마수의 공격을 막을 마도사를 육성할 수 있는 환경인 것이다.

       

       심지어 카우렐리아는 위치도 좋다.

       

       해안가는 수비에 용이하다. 마도사들을 포대와 함께 횡으로 배치한 뒤, 전초지역에 지뢰와 기뢰를 겨자씨 뿌리듯 흘려놓으면 그만이다. 그것만으로도 어지간한 전쟁 대비는 된다.

       

       그런 조건이 엘프를 자만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금안족을 구닥다리 계산기로 여기도록 만들었다.

       

       레니냐는.

       

       이제 레니냐는….

       

       “…따라오렴.”

       

       에테르는 레니냐의 어깨를 슬며시 밀었다.

       

       “어딜 가시게요?”

       “교과서 새로 사야지.”

       

       레니냐의 눈동자가 멍해졌다.

       

       네? 하며 어리둥절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에테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레니냐를 떠밀었다.

       

       어어, 하는 사이에 서점에서 교재와 필기구를 사서 돌아왔다. 

       

       목적지는 컨테이너가 줄지어 있던 남서쪽 해안가가 아니었다.

       

       “저, 선생님. 연구실에는 왜…….”

       “이제부터 여기를 네 집처럼 여기렴.”

       “네? 하지만….”

       “어차피 여기서 인턴 하겠다며.”

       

       대학원생의 8할은 연구실에서 먹고 잔다. 어디서 나온 통계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까 믿거나 말거나.

       

       아무튼, 중요한 건 이번 일을 핑계로 레니냐를 늘 곁에 둘 수 있다는 점이었다.

       

       “선생님, 저희 조례까지 1시간밖에 안 남았는데…….”

       “그렇구나.”

       

       레니냐의 눈가에 얕은 잔주름이 보였다. 피곤한 모양인지 눈그늘도 생긴 채였다.

       

       “힘드니?”

       “…조금은요.”

       “그러면, 뭐.”

       

       오늘 1교시는 자신이 수업한다. 장장 3시간에 걸린 강의.

       

       그렇게 아홉 시부터 정오까지 수업하고 나면 학생들은 파김치가 된다. 사랑하는 제자에겐 독과도 같은 스케줄이다.

       

       그러니까, 오늘은.

       

       “휴강해야겠구나.”

       “…네?”

       

       에테르는 레니냐를 간이침대에 눕혔다.

       

       “자렴.”

       “하, 하지만…!”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하아암….”

       

       길고 진득한 하품이 몇 초간 이어졌다.

       

       밤에 동족을 대피시키고 마법을 쓰느라 힘들었겠지. 야간행군을 하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폭신폭신한 침대에 눕기 무섭게 곯아떨어진 레니냐. 얼마 안 있어 쌕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애구나.”

       

       고작 교수라는 직책을 달았을 뿐인데, 학생을 가르치다 보니 무언가를 알 것만 같았다.

       

       에테르는 슬며시 웃으며 일어났다.

       

       공강을 하더라도 조례시간엔 가야 한다. 그것이 담임의 역할이니까.

       

       

       **

       

       

       수해복구는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하지만 세실이 일을 처리하는 속도는 빛과 같았다. 대부분은 마력만 충분하면 금방 해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제가 더 움직여야 할 건 없나요?”

       “네, 아카데미 내부에는 더 없는 것 같습니다.”

       

       비서의 말을 들으니 몸이 풀어졌다.

       

       추후 집계된 통계를 확인한 결과, 인명피해는 없었다. 건물 몇 채가 살짝 훼손되기는 했지만 큰 손실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전 걱정이에요. 이대로 가다가 일리야드가 대규모 습격을 받으면 어떻게 하죠?”

       

       뭘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해.

       

       “싹 다 숯불구이로 만들어야지요.”

       

       세실은 눈을 찌푸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산소를 만난 불씨처럼 타올랐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한시라도 빨리 일정을 정상화하는 대신, 상층부는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덜컥.

       

       비서가 나간 뒤, 본격적으로 쉴 시간이 주어졌다.

       

       ‘피곤해.’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몸은 쉬더라도 생각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마왕군.

       

       이번 건으로 확실해졌다. 마왕군이 다시금 세계수를 노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세계수에 위치한 바람의 로드스톤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일이 잘못된다면 마왕이 부활할 것이다.

       

       마왕이 지상에 현현하면 세실조차도 막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설화 속 마왕은 최상급 정령을 쉽게 찢어죽였다고 하니까. 최상급 정령을 넷이나 보유한 세실은 딱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렇다고 일리야드 학생들에게 세계수를 보여주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령을 통한 세례, 여신의 신탁, 샘에서의 제계 등등. 더 높은 위계의 마도사가 되기 위해선 못해도 한 번은 세계수를 방문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누굴 맡겨야 하는지….”

       

       세실은 머리를 감싸며 끙끙거렸다.

       

       아이들을 견학시킬 때 동반할 교수가 필요한데, 조건이 여러모로 빡빡했다.

       

       그 교수는 마수나 마수의 끄나풀이 아니어야 하고, 사사로운 이익보다는 대의를 위할 줄 알아야 한다. 특히 학생을 두루 돌볼 수 있을 만큼 선량해야 한다.

       

       이 조건에 모두 해당하는 교수는 많지 않았다.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세실이 아는 한 그들은 전부 저번 습격에서 죽거나 큰 부상을 입었다.

       

       이리저리 고민하던 찰나, 세실의 머릿속에서 한 인물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라면.”

       

       세실은 부재중 쪽지를 남기고는 황급히 코트를 걸쳤다.

       

       아직 확인할 것이 남아있었다. 서둘러 다리를 움직였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북쪽에 위치한 화계마도 연구동이었다.

       

       아스테야 하이젠버그.

       

       세실은 그녀가 있는 연구실을 찾았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레니냐는 침대에 누워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집 잃은 그녀를 아스테야가 직접 데려와 눕힌 것이다.

       

       그녀와 해안가에서 헤어지기 전. 세실은 아스테야의 또다른 ‘악의’를 감지했다. 정령들은 감지하지 못한 기운이었다.

       

       그야 당연했다.

       

       ‘레니냐를 자기 학생으로 만들려는 계획이시구나.’

       

       세실이 감지했던 악의는, 교수라면 누구나 가지는 악의였기 때문이다!

       

       이해한다. 이 정도야 애교 수준이지. 세실은 피식, 하고 비음을 흘렸다.

       

       오히려 자기 학생을 제 연구실에서 ‘생활’하게 하는 교수는 많지 않다. 단순히 노예로 굴리기 위해 같은 공간에 두는 것 말고, 저렇게 딸처럼 대해 주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아…. 총장님.”

       “앗. 오셨나요?”

       

       때마침 아스테야가 조례를 마치고 돌아왔다.

       

       “저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뇨, 다른 게 아니라….”

       

       멈칫.

       

       세실은 잠시 말을 끊고 생각에 잠겼다.

       

       아스테야 교수가 학생들을 귀하게 여긴다는 건 알겠다. 그렇지 않다면 하이엘프인 유피엘 피어바인이 그렇게 따를 리가 없었고, 레니냐도 그녀를 보자마자 격하게 환영했을 리가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무언가 명료하지 않은 점이 하나 있었다.

       

       “오늘 새벽에 제를 지내신 것 말인데요.”

       

       제사를 끝마치자마자 해룡이 내린 비가 멈춘 것.

       

       “언제부터 지내셨나요?”

       “한 30분 되었습니다.”

       

       30분이라.

       

       지나치게 짧다.

       

       혹시 그때, 깜빡거리던 것이 군사적인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더라면….

       

       절레절레.

       

       순간 불경한 생각이 들었다. 세실은 고개를 털어내면서도 의심의 싹을 거두지 못했다.

       

       남을 의심하는 건 좋은 버릇이 아니다. 하지만 의심의 끝은 신뢰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아스테야를 마수로 몰아세우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녀가 마수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으면 좋겠다.

       

       즉.

       

       인간형 마수가 연기를 부리는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토록 참된 교수는 좀처럼 찾기 어려울 테니까.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믿거나, 믿지 않거나.

       

       답은 간단하지 않은가.

       

       “후우.”

       

       세실은 심호흡하고는 입을 열었다.

       

       “선생님께 드릴 부탁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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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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