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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54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이었는데.

        

       “크읏……!”

        

       내 몸이 뒤로 당겨졌다.

        

       “언니!”

        

       클레어가 기겁해서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서걱, 서걱, 뭔가 썰리는 것 같은 기분 나쁜 소리가 들리고, 내 쪽으로 피가 몇 방울 튀었다. 아니, 과연 몇 방울뿐이었을까? 내 얼굴에 와닿은 피가 그 정도였을 뿐이지, 실제로는 훨씬 많은 피가 튀었으리라.

        

       내 피는 아니었다.

        

       나를 잡은 황제의 피였다.

        

       목덜미 뒤쪽을 잡아채인 나는 그대로 뒤로 잡아당겨졌다. 강화복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으로도 황제의 힘에는 완벽하게 대응할 수 없었다.

        

       어쩌면 너무 급하게 달린 나머지, 황제에게 잡히는 순간 자세가 무너져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대로 뒤로 날아가서 바닥에 등을 대고 미끄러지고,

        

       쾅!

        

       다리를 벌려 피하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 있던 내 다리는 그대로 조각조각 잘리거나 곤죽이 되었으리라. 황제의 검격이 그대로 내 다리가 있던 곳을 내리쳤다.

        

       ……죽이지는 않겠다는 건가?

        

       황제는 몸 여기저기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안쪽에 튼튼한 방어구를 입고 있었던 듯하지만, 사방에서 검격을 두들겨 맞으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는 법이다.

        

       “흠.”

        

       하지만 황제의 몸에서 흐르는 피도, 황제를 쓰러뜨리기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네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네 능력이 막히리라 생각하기 때문인가?”

        

       그야 당연하지.

        

       지보 조각만으로도 나는 능력을 쓰고 며칠 동안 정신을 잃을 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완성된 지보 앞에서 그런 짓을 하겠냐고.

        

       차라리 그보다는 나와 함께 온 다른 사람들을 믿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철컥.

        

       리볼버의 실린더를 비웠다. 총이 앞으로 꺾이면서 안에 있던 빈 총알들이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내가 대답하지 않은 것을 보고, 자신도 굳이 말을 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황제는 나에게 달려들었다.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

        

       “윽!”

        

       어느새 달려온 앨리스가 내 앞에서 황제의 검을 받아내며 신음을 흘렸다. 앨리스의 검 끝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흠.”

        

       양손으로 겨우 검을 막아내고 있는 앨리스를 보며 황제는 한차례 그런 소리를 내더니, 검을 거두어들였다—

        

       아니, 거두어들인 것이 아니라, 그저 들어 올렸을 뿐이었다.

        

       앨리스가 다음 동작을 다시 이어 나가기 전, 황제는 그대로 다시 검을 내리쳤다. 양손으로 있는 힘을 다해 내리친 것도 아니었는데, 앨리스의 몸은 휘청였다.

        

       “네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은 여전하구나.”

        

       “…….”

        

       앨리스의 등이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기대에 못 미치긴.

        

       앨리스는 나보다 훨씬 더 뛰어난 애다. 검술도, 공부도. 내가 몇 번이고 시간을 돌려가며 겨우 이해하는 것을 앨리스는 언제나 한 번에 이해하고 따라 할 수 있었으니까. 검술이야 뭐 나는 거의 포기했고.

        

       멋대로 기대하고, 멋대로 그 안에서 탈락시키고. 하긴, 애초에 황제는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었다. 다른 무언가를 사랑할 수 있는 이이긴 했지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해 그런 존재를 희생시키는 것도 서슴없이 하는 인간.

        

       탕!

        

       앨리스의 옆으로 총을 쏘자, 황제는 뒤로 물러났다.

        

       그래, 아무리 검술이니 뭐니 해도 결국 총에 맞으면 상처가 생기고 피가 나는 게 사람이지.

        

       챙!

        

       황제가 뒤로 물러선 바로 그 자리에 뱀처럼 꿈틀거리는 검기가 날아오고, 황제는 그걸 귀찮다는 듯 검을 휘둘러 막아냈다. 하지만 마냥 쉽게 막아낸 것은 아닌 모양이다. 검술에 대한 기대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하긴 했지만, 클레어의 검술은 그냥 무시할만한 것이 아니니까.

        

       원작에서는 황제의 아이 중에서도 딱히 밀리지 않는 것처럼 묘사되었다. 순서를 세우자면 루카스보다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마냥 무시하기에는 검격이 매섭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쉬익, 하고 빠르게 찌르는 것 같은 검격이 또 한 번 연속으로 날아들었다.

        

       샤를로트.

        

       어느새 클레어 쪽으로 합류한 샤를로트는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황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럴 만하지, 응. 그래도 저 눈이 나를 향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샤를로트의 검에는 이미 피가 묻어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몇 명을 베어 넘긴 모양이었다.

        

       “우리가 시간을 벌게.”

        

       앨리스가 작게 말했다.

        

       저 앞쪽에서 기사들이 이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로티는 이쪽도 보고 있어. 미아랑 선생님들도 이쪽으로 오고 있으니까…… 틈이 나는 대로, 장치에 가는 거야.”

        

       “알겠습니다.”

        

       앨리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신의 힘이라는 것이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지, 나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모른다는 이유로 포기할 수는 없다. 적어도 눈앞에 있는 것들, 당장 손이 닿는 것부터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쪽이 낫겠지.

        

       “좋아, 그럼.”

        

       앨리스와 샤를로트의 눈이 한순간 마주쳤다.

        

       “간다!”

        

       앨리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를 박찼다.

        

       황제와 직접 대치하고 있던 클레어와 샤를로트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기사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오로지 황제만을 바라보면서 세 사람은 달렸다.

        

       그 세 사람의 노력이 헛되게 할 수는 없지.

        

       나는 다시 한번 앞으로 달렸다.

        

       그리고—

        

       아.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에 날카로운 아픔을 느꼈다.

        

       “실비아!?”

        

       누구의 목소리인지 모를 비명이 들렸다.

        

       왼쪽 어깨가 뜨겁다. 달리기 위해서 힘차게 휘두르던 팔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상처를 살필 시간은 없었지만, 그래도 총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볼 틈은 있었다.

        

       황제는 총을 들고 있었다.

        

       ……내가 가지고 다니던 총과 같은 총. 하지만 조금은 더 낡아 보이는, 총.

        

       이제 와서 보니, 내 권총이 이리저리 구르면서 새로 생긴 상처가 그 총에도 있었다. 자세하게 보이는 건 아니지만, 몇 개의 크게 긁힌 상처가.

        

       아, 그렇지, 참.

        

       이 세계가 아무리 ‘원작’에 가까운 세계라도, 어쨌거나 현실은 현실.

        

       사람이 검을 휘두를지, 방아쇠를 당길지는, 그 무기를 쓰는 사람의 생각에 달렸다.

        

       황제가 쓰러뜨린 자기 딸이 쓰던 총을 주워서 쓰는 것도, 황제 자신의 마음이었다.

        

       황제 쪽을 향해 조준하지 않고 총을 갈겼다. 저쪽에서도 몇 발 정도 총소리가 들렸지만, 우리 모두 서로를 맞추는 데는 실패한 것 같았다.

        

       시간을 돌릴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내 시야에 들어온 세 사람과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

        

       눈을 부릅뜨고 나를 봤던 앨리스는 황제를 베고 있었다. 황제는 검을 휘두르다가 급하게 총을 꺼내 들기라도 했는지, 앨리스의 검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그 공격을 맞아주고 말았다. 팔에서 피가 튀는게 보였다. 치명상인가?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고통을 느낀 듯 황제는 얼굴을 찡그렸다.

        

       뒤이어 검을 휘두르려고 하는 황제였지만, 동시에 날아드는 두 검격에 몸을 뒤로 뺄 수밖에 없었다. 뱀처럼 굽이치는 검격의 중심을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검격이 파고들었다. 그 궤적이 지독하게 올곧지만, 극도로 빠른 검격과, 느리지만 불규칙하게 굽이치는 검격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세 사람으로부터 황제가 몇 걸음 멀어졌다.

        

       기사들은 황제를 보호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앨리스, 클레어, 샤를로트가 기사들에게 베이는 일은 없었다.

        

       시간을 돌리면— 돌려서 내가 멀쩡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저 세 사람이 멀쩡할 수 있을까?

        

       총에 맞는 원인을 원천 봉쇄하면 저 세 사람은.

        

       생각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내 다리는 움직이고 있었고, 시야 한구석에서 빛나는 장치는 점점 더 가까워졌으니까.

        

       탕, 탕.

        

       뒤쪽에서 총격이 날아들었다. 내 쪽으로 달려들던 기사 몇 명이 피보라를 일으키며 쓰러졌다. 로티가 쏘아준 탄일까?

        

       ……시간을 돌리면,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내릴 수 있는 결정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장치를 만지는 건 한 손으로도 충분하니까.

        

       나는 그야말로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총을 그대로 땅에 떨어뜨렸다. 어차피 안에는 총알도 없다. 가지고 있어 봐야 휘두르는 데밖에는 쓰지 못할 테지.

        

       그대로 오른손을 뻗어, 눈앞에서 돌아가는 톱니바퀴를 잡았다.

        

       팔에 힘을 줘 잡아당겼다. 발로 장치를 밀어내면서 최대한 세게 잡아당겼지만, 쉽게 빠지지는 않았다. 톱니바퀴가 돌아가면서 손가락이 아슬아슬하게 그 사이로 빨려 들어가려던 때, 겨우 드륵 소리를 내면서 톱니바퀴가 바깥쪽으로 움직였다.

        

       치익, 하고 강화복이 불길한 소리를 냈다. 어깨 쪽의 관 중 몇 개가 터졌는지, 그곳에서 증기가 새어 나오며 아래 있는 옷을 적셨다.

        

       여전히 피가 뚝뚝 흐르는 왼팔에는 감각이 없었다.

        

       “크윽……!”

        

       이를 악물고, 온 힘을 다해서 체중을 뒤로 싣자,

        

       “아……!”

        

       톱니바퀴가, 내 쪽으로 딸려 나왔다.

        

       그리고 그 틈으로 안쪽이 보였다.

        

       “……앨리스……?”

        

       그 안쪽에, 내가 잘 알고 있는 얼굴이 있었다.

        

       마치 편안히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는 앨리스가.

        

       —장치를 완성하는데 팬그리폰의 피가 필요하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였던 걸까—

        

       “안 돼, 실비아……!”

        

       뒤쪽에서 누군가 그렇게 크게 외쳤다.

        

       무언가 묵직한 것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쿵, 이번에도 서걱거리는 소리가 몇 번 들렸지만, 역시 이번에도 그 소리가 멈추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 소리가 나에게 닿는 것보다 빠르게, 기계 안쪽의 앨리스가 눈을 떴다.

        

       그리고 푸르게 빛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클레어에게 맡긴 지보에서 나는 빛과 같은 빛이었다.

        

       아주 잠깐, 우리 둘 사이의 세상이 멈췄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앨리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가 여기까지 이렇게 오게 된 것, 시간을 몇 번이나 돌려가며 오게 된 모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았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엘스트릭 님, 후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 글을 쓰던 순간부터 꾸준히 성실하게 끝까지 써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 성격상 하루를 쉬면 이틀을 쉬게 되고, 이틀을 쉬면 다시 사흘을 쉬고 싶게 될 거고… 지금까지 해온 대부분의 일들이 그런 이유로 흐지부지 끝나버려서, 노벨피아에 처음 글을 쓸 때는 억지로라도 매일 글을 써보자고 생각하며 글을 썼습니다. 처음에는 몇 분에 불과했던 선작이 수십, 수백명이 되고, 매일매일 일어주시는 분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사실 쓰면서 귀찮아서 쓰지 않고 지나가고 싶었던 날도 있었지만, 그렇게 많은 분들이 보고계시는 글을 책임감 없이 유기할수는 없다는 생각에 매일 계속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오늘도 이렇게 글을 올릴 수 있었던 건 그때부터 지금까지 저의 글을 한번이라도 읽어주신 모든 분들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정말 감사합니다. 독자 여러분 덕분에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글을 써나갈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언제나 읽어주실만한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마지막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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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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