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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54

    아린세이아.

     

    이곳은 5000년 전과는 역시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지만, 창 밖으로 보이는 저 붉은 바탕에 흰색 날개가 그려진 저 깃발은 틀림없이 아린세이아의 그것이었다.

     

    “하하하하하!”

     

    루크는 크게 웃었다.

     

    그토록 의문이던 사라진 역사의 중심지가, 이렇게나 가까운 곳에 있었다니!

    루크는 곧 방 안을 샅샅이 들춰내기 시작했다.

     

    레니에의 필체로 작성된 연구노트는 그닥 어렵지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찾아낸 연구자료들을 하나씩 살피던 루크는 깨달음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이 아카데미에서 배우는 그 문법의 시초라는 것을.

     

    “바알 니에르, 그게 바로 그대였어. 그랬군, 그랬던 거야.”

     

    어째서 굳이 여성의 이름이 바알이었고, 또 어째서 굳이 니에르라는 이름을 사용했던 것인지 이제야 명확해진다.

     

    “정말로 재미있는 비틀기였다, 레니에.”

     

    레니에가 과거 자신이 연구한 모든 학파의 진리를 통합하고 취합하여 만들어낸 것이 바로 ‘클래스’의 비밀.

    때문에 클래스마법은 그 어떤 학파와도 닮았으며, 동시에 닮을 수 없었던 것이리라.

     

    기뻤지만, 정말로 더할나위 없이 기뻤지만, 동시에 한편으로는 눈물도 났다.

     

    그렇다면 대체 어째서 아린세이아는 멸망했고, 어쩌다가 자신의 아공간에 자리하게 된 것일지…….

     

     

    루크는 짐작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루크는 웃음을 잦아들이며 눈물을 살짝 닦아내고 중얼거렸다.

     

    “그래, 그런 거였군. 레니에.”

     

    루크는 너무나 익숙한 모습으로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드는 레니에의 형상을 보고, 마찬가지로 서랍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서랍에 들어있는 것은 한 권의 종이뭉치였다.

    제대로 된 표지도 없고, 설명도 쓰여있지 않지만 루크는 그것이 무엇인지 너무나 정확히 알았다.

     

    그것은, 분명한 마도서였다.

    책장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자신의 숨겨진 마도서.

     

    “너도 결국…….”

     

    루크는 그 마도서의 책장을 넘겼다.

     

    ‘……그렇기에 물질계에 마법으로 완전한 불사를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마법사 그 자신은 불사에 이를 수 없다. 인간은 신의 창조물이고, 따라서 인간은 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신’이라는 것이 우리들의 머리 위에 존재하며 주사위 놀음을 하는 이상, 그 천장은 절대 깰 수 없다.’

     

     

    ‘이와 같이, 신이라는 것은 결국 어떻게든 인간을 억제한다. 신의 마력인 신성력과 인간의 마력인 마나가 서로 섞이지 않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신을 죽여야 한다. 그것이, 인간을 여신의 노예에서 진정으로 해방시키는 길이다. 하지만 신이라는 정신생명체는 단 한명의 진실된 신도만 있더라도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모두에게서 신을 잊혀지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었다.’

     

     

    이제서야 비로소 온전히 떠오른 기억에, 루크는 지긋이 눈을 감았다.

     

    “모두에게서, 잊혀지는 것을 택해야 했던 거로군.”

     

    ———–

     

    사실, 루크의 ‘불사 연구’라는 것은 표면적인 연구였다.

     

    언데드 같은 영락한 반쪽짜리 부정이 아닌, 영원히 신의 손발로서 쓰임받는 감옥과도 같은 불사도 아닌.

    스스로의 의지를 가진 온전한 인간으로서 온전한 불사를 추구한다니, 그런 건 불가능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던 루크다.

     

    이미 그것에 대한 실험이나 연구는 이론조차 가능하지 않다는 걸 진작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루크가 진실로 연구한 것은 달랐다.

     

     

    ‘신을 떨어트리는 방법’.

     

     

     

    성녀이자 용사로서, 여신의 손발이 되어 여신에게 영원히 볼모로 잡혀버린 레니에의 구출을 위해.

     

     

    ‘내가 아니면 레니에는 절대 풀려날 수 없어.’

     

     

    그것은 선과 악, 또한 삶과 죽음의 구분조차 신에 의해 정해지는 신화시대의 종말.

    이 시대의 그 누구도 바라지 않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 그 누구도.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시선을 피해야했다.

    절대로 여신에게 들켜선 안될 일이었으니.

     

     

    모든 것은 물질계와 완벽히 유리된 공간인 아공간에서 벌어진 연구이다.

    여신은 자신이 ‘어떤 연구’를 하고 있는지는 전혀 몰랐을 것이다.

     

    레니에조차 단순한 ‘불사 실험’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니까.

     

     

    필수적인 준비를 모두 마친 루크는 모든 권력을 내려놓고 한적한 마을에 은거했다.

    스스로가 권력이나 재물에 흥미를 잃고 허무해진 것처럼 보이도록.

     

    떨어진 재료를 구하는 것은 몰래 가문을 이용했다.

    가끔 마을을 찾아와 조언을 구한다는 형식적인 말들로 시선을 피하며.

     

    그러면서 동시에 겉으로는 이 한적한 삶에 만족하는 것 처럼 연기했다.

    그 누구도 자신이 뒤에서 그런 연구를 한다는 것을 알 수 없도록.

     

     

    하지만 거듭 무리한 실험에 의해, 육체가 죽는 것은 신경쓰지 않았다.

     

     

    “루크님, 연구도 좋지만 이젠 건강을 챙겨야 할 때가 아닐까요?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저는 더 오랫동안 당신을 보고 싶어요.”

     

    언제나와 같이 달콤한 말이었다.

    솔직히, 그녀가 자신에게 그리 말할 때면 당장 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은 더없는 낭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며 자신의 마음도 흔들리는 것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여신의 조언에 의한 행동이겠지, 그녀는 여신의 분신이자 손발이니까.

     

    그것이 정말로 그녀 스스로의 의지가 맞는 것인지 알기 위해서는 나아가는 길 밖에 없다.

    레니에를 온전한 존재로 거듭나게 할 방법은 단 하나 뿐.

     

    뒤늦게 진리를 알아버렸으나, 깨달음이 늦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짧다.

    계속 한계까지 달리지 않으면 도착지점을 볼 수도 없을 것이 분명하기에 루크는 끊임없이 자신을 혹사시켰다.

     

    백마법이건 흑마법이건, 어떤 학파라도 개의치 않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마법을 동원해서 신의 격을 끌어내리는 방법에 대해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그렇게 약속의 때가 왔을 때, 물질계의 관리자인 용들이 그를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쿵, 쿵, 쿵.

     

    대기가 요동치고, 대지가 울렸다.

    숲의 모든 것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 처럼 루크를 옥죈다.

     

    하지만 루크는 조금의 변화도 없이 그대로 서있다.

    단지 품에 고양이를 안고서.

     

    “어리석은 자여, 그대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정녕 모른단 말이냐?”

     

    “이래서 여행길에 마법사를 넣어선 안된다고 이른 것이거늘…….”

     

    “발전에는 필시 종말이 온다. 그 마계의 사례를 보고도, 신의 뜻을 부정한다니. 그대는 모든 생물의 반역자다!”

     

    현재 물질계를 관장하는 각 세계들이 한곳에 모이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밤이 찾아온 듯 한 어둠 속에서 루크는 너무나 평온히 그들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 거대한 몸집의 생물들이 단 하나의 작은 인간을 둘러싼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가 모여 개미를 신기하다는 듯 관찰하는 것만 같아 웃음이 나올 뿐이다.

     

    “로드는 아직인가?”

     

    비웃음섞인 루크의 목소리에 드래곤들은 노성을 내질렀다.

     

    “네 이놈! 어찌 그분을 그리 가볍게 부르는가!”

    “이런 건방진……!”

    “고작 다 죽어가는 인간 주제에!”

    “오만하기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같은 외침이다.

    제 몸을 가누는 것 조차 어려워하는 노인을 향하기엔 너무나 가혹한 충격.

    허나, 루크의 당당함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대여.”

    그 때, 그 어떤 존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인 존재가 마침내 등장했다.

     

    -쿠궁……!

     

    단순한 착지만으로 대지가 뒤집힐 듯이 떨린다.

    엄청난 낙하충격으로 발생한 흙먼지가 자욱하게 깔린다.

     

    그가 흙먼지를 쓸어내듯 날개를 펼치자, 그 거대한 날갯짓 한번은 마치 태풍과도 같은 바람으로 거칠게 모든 불순물을 시야에서 깨끗하게 지워버린다.

     

     

    다른 용들의 두배는 되는 정도의 압도적인 크기.

     

     

    그러나 루크는 로드를 올려다보면서도 품에 안긴 고양이를 쓰다듬을 뿐, 여전히 평온했다.

     

    “이걸로 전부 모인건가? 용이여.”

     

    로드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마법사의 왕, 루크 이루시. 그대가 우리를 대신해 악으로 타락한 용, 시가르마타를 저지해준 그 공로는 인정하는 바이다.”

    “황송한 말이로군.”

     

    온건한 투의 루크의 대답에 드래곤 로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 지금 이 모든 행위를 취소한다면, 그대의 영혼은 필시 여신님의 축복을 받아 죽어서도 낙원으로 갈 수 있을 거라 장담해주지.”

    “하하, 낙원이라…….”

     

    루크는 큭큭대며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

    하지만 용들은 인간의 표정을 읽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다.

     

    웃기지 않은가?

     

    저 오랜 세월을 살아온 용들이, 한낱 인간의 웃음조차 구별하지 못하다니 말이다.

     

    그만큼 인간을 별것 아닌 존재로 알고 있다는 것이겠지.

     

    여신의 하수인 주제에 말이다.

     

    “나의 영혼은 이미 나의 몸을 떠났다. 멍청하긴.”

     

    그 말에 로드가 흠칫 놀라며 황급히 외쳤다.

     

    “……잠깐, 너는!”

     

    이미 자신의 몸은 죽었다.

    때문에 영혼도 몸을 떠난지 오래다.

     

     

    자신은, 이제는 그저 죽은 루크 이루시를 연기할 뿐인…….

     

     

    “너는 루크 이루시가 아니로구나! 너는 그의……!”

     

     

    그렇게, 모든 용들은 물질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고 말았다.

     

     

     

    그것이 잊혀진, 아니.

     

    반드시 잊혀져야 했던 역사의 페이지.

     

    ‘잊혀질 전투’의 전말이었다.

     

    ——

     

    루크는 떠오른 마지막 기억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정말로 루크 이루시가 아니라는 것 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자신은 죽어 있었으니까.

     

    “나는 기껏해야 그의 껍데기라고 했지.”

     

    생물조차 아닌, 마지막까지 이어진 그의 의지에 불과하다는 걸, 어렴풋이 깨닫는 중이었다.

     

    대마법사가 아니라, 대마법사였던 것.

     

     

    마지막에 그의 몸을 넘겨받은, 의지 그 자체.

     

     

    루크 이루시의 서클.

     

     

    그것이 바로, ‘나’다.

     

    ———-

     

    그렇게 레니에는 신화시대의 마지막 신이 되었다.

    영락한 신의 존재를 더 이상 그 누구도 믿지 않게 되고 말았으니. 

     

    루크는 어째서 자신이 스스로를 루크 이루시라고 생각하고 정의내렸는지 이제야 알았다.

    어째서 시가르마타가 자신을 ‘찌꺼기’, ‘껍데기’, ‘망령’따위로 불렀는지도.

     

    자신은 그의 서클, 서클은 스스로를 의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루크 이루시’라는 이름은, 그야말로 자신의 존재이자 의의와도 같으니 당연히 자신을 루크 이루시로 고집스럽게 정의할 수 밖에.

     

    루크는 아린세이아의 정원에 앉아, 자신의……. 아니, 루크 이루시의 조각상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레니에는 결국, 스스로 잊혀지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을 정도로 자유로워진 것이니 말이다.

     

    “하하, 이 광경을 보면 결국 그대의 꿈은 이뤄졌나보군.”

     

    아니, ‘우리’의 꿈이었던가.

     

    주인에 비하면야 굉장히 짧은 기간 건네받은 의지였으나, 결국 그 의지를 받들어 실행한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그와 자신은 레니에에 대한 생각만큼은 일치했었다.

     

    덕분에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이겠지만.

     

    여신을 물질계로 끌어내려 영락시키다니…….

     

    그리고 그를 위한 그릇이 바로 이 몸이었다.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마수의 육과, 그것을 지탱할 가장 강력한 드래곤하트…….

    그 키메라에 여신을 가둔다.

     

    그렇기에 이 몸은 불사에 도달했다.

    결론적으로, 자신은 ‘불사 연구’를 성공시켰다.

     

    그러니, 자신은 레니에에게도 거짓을 말한 적이 없게 된다.

     

    ‘이 경우엔 거짓말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지…….’

     

    루크는 그런 것은 아무렴 어떤가 하는 생각으로 아린세이아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공연히 웃음이 터져나온다.

     

    “하지만, 레니에는 여신에게서 자유로워지고 나서도 미련하게도 3000년이나 더 아린세이아를 이끌었던 모양이야.”

     

    하지만 그녀가 존재하는 한, 이 세상은 발전도 후퇴도 없는 평탄한 세상이 계속해서 이어졌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놓지 못했던 것이다.

     

    아린세이아는, 그녀가 루크를 추억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으니.

     

    그래서 잊혀질 것을 다짐하고도 온전히 지워내지 못해 아린세이아를 이 공간에 옮긴 것일터다.

     

    “그대가 어디에서 듣고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루크 이루시.”

     

    루크는 크게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중얼거렸다.

     

    “레니에가 그대를 사랑한 것은 여신의 의지가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로 진정 사랑했다.”

     

    그렇지 않고서, 어찌 이런 것을 만들었겠는가.

     

    루크 이루시의 조각상 앞에 헌화했다.

    어쩐지 눈가에 맺힌 물기가 볼을 타고 한줄기 흐르는 느낌마저 든다. 

    “그곳에선 모쪼록 평안하길. 루크 이루시.”

     

    잘 있거라, 루크 이루시.

    내가 연기해야했던 나의 아비여.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정말 저도 이렇게 오래 쓰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죄송해요ㅠㅠ!!!

    여기서 이렇게 제목이 대마법사였던 ‘것’이 된 이유가 나오네요.
    반드시 꼭 풀어 드리고 싶었던 이야기인데, 너무 갑작스러웠던 건가 싶긴 합니다만, 이건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풀겠어 하고 깊은 고민 끝에 써내려갔습니다.

    처음부터 ‘잊혀질 전투’가 왜 ‘잊혀질’이라는 단어를 썼느냐고 지적해주시는 댓글들이 많았는데, 그걸 듣고도 제가 고치진 않았습니다.
    그건 이런 이유에서 였어요!
    (만약에 ‘잊혀진’ 이라고 적힌 것이 있으면 제가 잘못 적은거니까, 그건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건 제가 발견하면 수정할게요!)

    이렇게, 루크 몸의 재료가 모두 명확하게 드러났네요.
    현재 루크의 몸은 레비의 ‘몸’+파르바티의 ‘심장’+루크의 ‘서클’에 더불어, 여신(에레)까지 짬뽕된 극한의 키메라!

    잠깐, 근데 이러면 루크는 정말로 루크와 레니에의 딸…? 이었던 것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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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다시 대마법사를 꿈꾼다 대마법사였던것은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5000 Years in the future, the Archmage Luke Irushi opened her eyes again. The world has changes so much.

Horseless carriages, an entertainment box with audio and video, food and spices she has never seen before…

And, a changed magical system!

It wasn’t just the world that chan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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