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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54

        

         시간을 잠시 거슬러올라… 때는 오후 네 시경.

         장소는 회색 지대에서 인근 상업구로 향하는 뒷골목 어딘가, 여기에 굉장히 처량한 몰골의 한 남자가 있었으니.

         

         “아으으…… 시바아아알! 진짜 더럽게 배고프고 배 아프다….”

         

         훌쩍.

         의식적으로 팔을 움직이기도 귀찮았는지, 아니면 그런 식으로 거동하면 복부 쪽 근육이 꾸욱 당겨서 아픈 게 싫었는지 머리만 돌려 어깨 부근에 얼굴을 문질렀다.

         

         거지 꼴을 보다 못해, 매니저가 사망자로부터 벗겨낸 옷가지 중에서 몸에 맞는 걸 대충 주워 입으라 배려해준 물건이라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걸친 게 없는 것보단 무조건 나았으니까.

         

         은혜로운 마취가 풀려, 전날 이판사판으로 참여한 일용직 아르바이트의 거센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주린 배를 움켜쥔 채 힘겹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물론… 나머지 한 손은 외투 주머니 안에 있는 선불 카드를 끊임없이 더듬으며 어디로 사라지지는 않았나 확인하느라 바빴고.

         

         돈,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화폐인 크레딧 자체는 있다. 아껴 쓰고 계획적으로 정량의 칼로리만 섭취한다 치면 한두 달 식비는 너끈하게.

         

         무척이나 빡빡하고… 구차하고… 건강에는 지독하게 나쁘겠지만 입 자체는 또 즐거운 게 정크 푸드라는 녀석이 아닌가.

         

         “……뒤지게 힘들다.”

         

         한숨, 그리고 정신을 다잡는 기합의 혼잣말이 허공에 바스러졌다.

         

         하지만 아직 찾는 물건의 정확한 가격을 보기 전엔 함부로 낭비해선 안 되는 피 같은 군자금이라는 사실이 그를 식당이 아닌 전혀 다른 곳으로 꾸역꾸역 움직이게 만들었다.

         

         아무튼 남자의 현재 목적지는 서킷 리파이너리 본사 빌딩.

         

         그가 아는 한도 내에서, 현재 입점 거부당하지 않고 가볼 만한 가장 괜찮은 가게 중에서도 떨이하는 저가품부터 고급 방첩 장비까지 폭넓은 선택지를 보장하는… 네오 헤이븐 기준 초 화이트 기업 겸 전자제품 매장.

         

         이윤은 소프트웨어 판매나 데이터 칩 쪽에서 챙기고! 실물 제품 유통은 전용 층에서 일종의 미끼 상품처럼 싸게 싸게 돌려서 손님을 끌어 모으는 전략이라 했으니, 잘 하면 전재산(15만C)을 다 쓰지 않고도 망할 번역기를 구할 수 있으리라.

         

         다만 손쓰기엔 늦어도 너무 늦은 짤막한 후회가 그에게 있다면….

         

         “영어 회화 연습 좀 언제 해 둘 걸…!”

         

         단순히 거리가 멀기는커녕, 세상에 누가 이런 차원을 넘는 대규모 납치극을 예상했겠냐마는.

         ‘수상한 게임 클리어 보상 = 이세계 행 티켓?’이라는 특정 분야에선 생각보다 꽤 고식적인 클리셰를 무시한 대가가 이거다.

         

         당장 먹고 죽을 돈도 모자란데 원활하게 대화를 나누기 위해 따로 투자까지 필요한 처지. 망할.

         

         솔직히 손짓발짓까지 섞으면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라 생각하지만, 복잡한 고유 명사의 향연이나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어조엔 답이 없는 상황이라는 걸 며칠간 겪어서 마음이 조급했다.

         

         …말이 제대로 안 통한다는 걸 알게 된 시점에서 그나마 사람들에게 있던 미약한 호의도 금방 사라진다는 점을 깨달은 이래론 특히나 더.

         

         하여간 무지막지하게 큰 네오 헤이븐이라 해도, 다양한 컨셉 플레이와 공략을 적극적으로 시도한 덕분에 약간의 꼼수 같은 돌아가는 길을 알아서 다행이다.

         지금의 자신은 불심 검문이라도 걸리면 내밀 신분증조차 없는 신세니까… 라고 한탄하며 그는 마침내 큰길가로 빠져나오는데 성공했다.

         

         자, 이제 여기서 고개를 들면 저 앞에는 자신이 여기 사장이라는 걸 강조하듯 키도 잡아 늘리고~ 얼굴도 미남처럼 깎고~ 머리숱까지 두 배로 과장해서 표현한 미스터 빅 헤멧의 악취미적인 동상이 반겨줄 것이다.

         

         현실은 난쟁이 소인이면서 그런 사기를 치는 게 과연 맞나 싶지만 이미지 자체는 확실하게 각인되었으니까. …그런데 이건 뭐다냐?

         

         “…엥? 어??”

         

         깜빡이는 네온 간판엔 분명 알파벳 모양으로 또박또박 서킷 리파이너리가 표현되어 있고.

         

         어딘가 삐뚤빼뚤하게 놓인 입간판들도 칩이나 전자기기 관련인 걸 보면 분명 여기가 맞는데… 원래 이렇게 영세하지 않았는데 분명. 더 크고 화려하고 잡다한 상호 간판들도 없는 일대의 랜드마크 비슷한 건물 아니었던가.

         

         음… 너무 시기가 일렀나? 아직 떼돈을 벌고 사업이 대성하기 전일지도.

         

         붕붕.

         

         남자가 고개를 거세게 털었다.

         사소한 오차에 너무 집착해봐야 소용없었다. 아니, 소용이 아니라 생산성이 없는 거지. 지금은 그저 어리숙한 손님을 속이지 않고 물건을 싸게 팔아 주기만 한다면 뭐든 좋으니까.

         

         불안감을 애써 덧씌우려는 듯, 자꾸만 멋대로 입밖으로 새어 나오는 혼잣말을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는 용기를 내서 어수선한 가게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칩, 가격표, 영어, 꼬부랑 필기체, 이상한 문자. 그런 난잡하고 어지러운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눈에 익은 무언가를 찾다 보니.

         정면 카운터에 기억보단 많이 허름하고 앙상한 보행 로봇에 앉아있는 꼬질꼬질한 한 난쟁이가.

         

         여기에 납치당한 이후로 거의 처음 보는 아는 얼굴이 반가웠다. 설령 그게 눈 호강과는 거리가 먼 남자라 할지라도.

         

         그래서 그는 냅다 카운터에 달라붙었다.

         정확하게 건넬 인사나, 어떤 물건을 찾고 있다는 걸 알릴 문장도 미처 뇌내에서 완성하지 않은 채로!

         

         “…자네도 상담인가? 살 물건이 있으면 꼬리표(Tag)를 떼야 하니 일단 들고 오게나. 먼저 계산한 다음 나가는 길에 집겠다고 괜히 경보 울리게 만들지 말고.”

         “…Here for a ‘Consulting’ aye? If not, grab whatever the fuck you’re interested in and then comeback before paying the price. Instead of causing the shitty alarm by the tag.”

         

         “…….”

         

         와, 씨발. 이거 제대로 조졌다.

         와다다 쏟아진 슬랭 포함 실전 압축 외국어의 향연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먼저 말이 걸리기 전에 깔끔하게 용건을 밝혔어야 하는데.

         

         하지만 실수는 만회할 수 있다. 헤멧의 기분이 썩 좋아 보인다는 점이 특히나 고무적.

         

         요렇게 저렇게 잘 비벼보며 두뇌를 200% 가동한다면… 저녁에 쓸 식비 정도는 남길 수 있지 않을까, 행복한 상상으로 힘을 충전한 그는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협상에 나섰고.

         

         …….

         

         “이 썅노무 시키야! 생활 소음은 차단하면서 말소리는 잡아주는 건 주변 어디를 가도 이거보다 싼 모델은 없어! 어느 깡촌에서 살다 온 놈이길래 이렇게 싼 것만 찾아!?”

         

         ‘시발! 저도 딱히 그러고 싶은 건 아닌데요?!’

         

         눈물과 함께, 속으로 차마 던지지 못한 변명을 주워 삼켰다.

         정말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못해 바닥에 가까운 예산 때문에.

         

         다른 건 몰라도 썅노무 시키(You fuck nugget!!) 하는 대목에선 로봇 팔에 이마빡을 찔릴 뻔했고, 또 아주 유창한 발음으로 마법의 단어를 내뱉는 게 들려서 욕을 먹고 있다는 사실만 알았다.

         

         다음에 목돈이 생긴다면 시민증과 사이버웨어 중 어느 걸 먼저 구해야 하나… 먼저 고민하고 있었는데, 불법체류자로 걸려서 외곽 지역으로 쫓겨날지언정 사이버웨어 임플란트를 빨리 이식받아야 한다는 점도 재차 확인했고.

         

         어쩌지. 아니, 이걸 진짜 어쩌냐.

         그 아르바이트를 또 하기엔 물리적으로 무리인데… 그냥 안면몰수하고 외상이라도 달아달라고 매달려 봐? 막상 흔쾌히 수락하셔도 보증할 신원이 없어서 경찰에 신고 당할 텐데?

         

         나… 혹시 이번에야말로 막혔나? 이대로 서서히 있는 돈이나 까먹다가 굶어 죽어?

         

         잘 찾아보면 드론 택배 서비스로 배달하기 곤란한 물건들을 배달하는 막노동 정도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위험성이나 신용을 얻는 부차적인 문제는 한쪽에 접어 놓더라도.

         

         그러나 그걸 ‘제때 찾아낼 수 있냐’와 ‘그렇게 연명하는 게 정말 살아있는 건지’에 대한 대답은 애매하다.

         

         다짜고짜 이런 신세에 처한 경위도 억울한데 마음먹은 대로 풀리는 일도 하나 없는 현실에. 슬슬 포기라는 잿빛 글자가 심장을 좀먹어 들어가고 있던 참에.

         

         등 뒤편에서 옥구슬 굴러가는 듯한 청아한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안녕, 헤멧 사장님. 혹시 많이 바빠? 계산하려고 하는데.”

         

         

         “헙!?”

         

         반사적으로 샌 비명이 입밖으로 사출되기 전에 삼킬 수 있었던 건 숫제 기적에 가까웠다.

         

         그녀 또한 알아듣기 힘든 언어로 떠들고 있다는 건, 직전까지 영어가 너무 복잡한 게 나쁜 거라며 씹어댄 게 무색할 정도로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나긋나긋한 태도, 부드러우면서도 발랄한 하이 톤 음색. 자칫 의식을 집중하면 깨진 정화통을 무시한 채 향긋한 체취마저 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분위기.

         

         머리보다 몸이 한 발 앞서 멋대로 전율한 것처럼.

         지금 바로 근처까지 예고도 없이 다가온 상대가 누군지 남자는 정말 단박에 알아챘다.

         

         허구한 날 유저끼리 이상한 주제로 치고 박게 만드는 탑 서브 히로인, 원작 부동의 0티어 동료 발렌타인 자매의 동생 쪽. 개판 시나리오의 유일한 이정표, 수상하게 스크린샷 업로드하는 팬 비중이 높은 캐릭터.

         

         …그리고 아마 모든 해답과 실마리를 그 손에 쥐고 있을지도 모르는 소녀, 아나스타샤 발렌타인.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반가웠다.

         보이지 않는 실에 이끌려 만나게 된 기분이라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존나 오싹했다. 피부에 돋은 소름이 안 사라지리만치.

         

         그러니까……… 그, 왜 여기서 갑자기 나오십니까?

         

         아니, 그야 등장 인물들. 캐릭터들에게도 다 사생활이 있을 것이고, 게임에서도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경우가 많아서 불편하긴 해도 주인공이 부를 때마다 나타나는 NPC 같은 느낌이 적어서 신기하다는 소리가 많았으니까.

         

         그녀는 특히나 이스터에그나 베일에 싸인 뒷설정이 많은 캐릭터여서 엉뚱한 곳에서 마주치는 이벤트도 자주 있는 만큼 맞닥트리는 게 엄청 이상하진 않지만… 하필 지금??

         

         ‘……으어억!? 정신 차려!’

         

         가급적 냉정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판단하려던 머리가 옆을 지나가는 아나스타샤의 찰랑이는 단발, 숏 보브 컷이라 하던가? 하여간 윤기나는 머릿결과 재킷 칼라 위로 살짝 드러난 하얀 목덜미를 보자마자 귀신같이 얼타려는 걸 깨닫고 퍼뜩 의식을 되돌렸다.

         

         꼭 그녀가 패시브 스킬로 주변에 두르고 다니는 걸로 유명한 인공지능 로봇의 기척을 새삼 자각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미인이라는 맹독에 자연스럽게 홀리고 자빠져 있을 여건이 못됐기 때문에.

         

         이럴 때가 아니다. 생각, 죽어라 생각해야 한다.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할 수 있다면 편하겠지만, 이 온갖 음모와 계략이 판치는 세계에서 그런 안일한 마음가짐을 품기엔 그는 아는 게 너무 많았다.

         

         자, 정말 안 좋은 쪽의 가능성을 떠올리기는 싫지만 억지로라도 대가리를 굴려보도록 하자.

         

         당장 크게 짐작가는 건… 애당초 주어진 정보가 너무 적어서 몇 가지밖에 손으로 꼽을 수 없을 것 같긴 한데.

         

         우선 첫번째. 그녀가 실제로 날 이곳으로 끌어들인 초과학적 주체가 맞고 현재 나를 잡아가기 전에 재미 삼아서 구경하고 있는 와중이다!

         

         어… 이건 너무 절망적인데? 무조건 해코지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단정할 근거도 없고, 며칠간 도시에 방치한 것에 대한 설명도 힘드므로 진실은 아니겠지만.

         만일 이 가정이 맞다면 벌써 자신의 손을 떠난 수준의 문제라는 점에 그는 기분이 우울해지는 걸 느꼈다.

         

         그래… 뭐, 어쩔 수 없는 건 없는 거고. 두번째.

         근처에서 해괴한 언어와 억양으로 떠들어대는 놈을 보고 신기하게 여기고 살펴보러 온 것이다.

         

         글쎄, 기본적으로 ‘올바른 행동’에 긍정적인 상호 작용을 돌려주는 게 아나스타샤이기는 해도. 방금 만난 생판 모르는 남에게 비싼 물건을 사줄만큼의 무골호인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독할 때는 독하고, 뭔가를 저질러야 할 때는 일을 어마어마하게 키우는 한이 있더라도 완수하고야 마는 고집스러운 인물이라면 모를까.

         

         이것 좀 봐라.

         생긋 미소 지으며, 대신 돈을 내면서 원하는 걸 사줄 테니 그렇게 열 내지 말라고 눈웃음을 치는 건 반칙이라 본다. 왜 이런 호의를 베푸는 거지. 대체 왜?

         

         공공설비가 없는 구역의 공기가 너무 나빠 급한 대로 주워 쓴 방독면이 아니었더라면 표정 관리에 실패하고 헤벌쭉한 걸 진즉 들켰을 거란 무서운 상상도 잠시.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한국이었으면 감히 판매가를 책정하기는커녕 어디 박람회장에서 장갑 낀 전문가가 선보이게 생겨 먹은 PDA를 선물 받는 흐름이 되었기에, 그는 우물쭈물 카운터 테이블로 다가갔고.

         

         “…아?”

         

         밀봉되어 있던 박스에서 꺼내서 킨 터라 누군가가 장난을 쳤을 리도 없거늘.

         이제 막 전원이 들어온 패드 화면에 떠오른 기묘한 문구를 멍하니 본 채, 남자는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고민하기 시작해야만 했으니.

         

         

         [ 아나스타샤 발렌타인으로부터 차원 균열 간섭기의 설계도를 공유 받기. ]

         

         

         …최후의 세번째 경우의 수. 아직 그 어느 것도 현실이 되진 않은 상태이며,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미래는 지금부터 직접 만들어가는 것.

         

         고작 삼사일쯤 지났을 뿐이지만.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한 탓에 공포와 외로움으로 무너져가고… 꺼져가던 그의 심지에 새로운 불꽃이 붙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팬이에요~

    9시 30분쯤에 정시 업로드 예약을 걸고 화장실을 갈까… 하다가, 수정하면 좋을 문장이 생각나서 그냥 들어갔습니다.
    10시 13분에 쥐 난 다리를 부여잡은 채 기어서 빠져나왔습니다. 장기가 주인 닮아서 뒤지게 일을 안 하네요.

    항상 재밌게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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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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