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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55

       그래, 시작할 때부터 이상하긴 했다.

        

       게임이건, 소설이건, 만화나 영화건, 원래 그런 것들의 ‘스토리’는 그 자체로 완성되는 법이다. ‘외부에서 끼어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그런 스토리로 완결이 나는 하나의 작품일 뿐이니까. 만약 외부에서 뭔가가 끼어들었다면, 그 시점에서 원작 같은 것은 아무래도 의미가 없어진다. 애초에 처음 존재하던 것과는 그저 다른 작품이 되어버릴 뿐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나는 이 세상을 ‘작품 속’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작품 속’이라고 느끼는 동시에 ‘현실’이라고 느꼈다. 상식적인 부분에서는 이 세계는 분명 ‘현실’이다.

        

       게임에서는 시간제한이 없다. 오전과 오후로 나뉘기는 하지만 그 ‘이벤트’ 안에서 어느 지역을 몇 번을 가건, 심지어 꽤 거리가 있는 곳을 이동하건, 특정한 트리거를 일부러 선택해 시간이 흐르도록 하지 않는 이상은 그 오전 시간 내에 내가 원하는 것을 다 할 수 있다.

        

       상점에 들러서 캐릭터의 장비를 맞추거나, 필요 없는 물건을 팔거나. 캐릭터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숨겨진 이벤트를 찾아보고 사이드 퀘스트를 해결하거나.

        

       하지만 현실은 게임과는 다른 법이다. 그 모든 일을 ‘오전 내’에 하려면 당연히 시간이 부족하다. 레오나 클레어는 무척 성실해서 그 모든 일을 새벽부터 일어나 처리하는 것으로 해결했지만…… 혹시라도 그 두 사람에게 다른 어떤 일이 일어난다면 그 이벤트들은 애초에 실행조차 되지 못했겠지.

        

       내가 이 세상을 ‘단순한 게임 속’이라고 느끼지 못한 것은 그런 이유였다.

        

       게임에서는 상점에서 물건을 팔 수 있다. 게임 내의 자금이 지나치게 부족하면 클리어가 너무 빡빡해지기 때문에 넣은 게임적 요소다. 당연히 이 세상에서는 아무 상점이나 들어가서 내가 들고 있던 물건을 팔 수는 없다. 가게 주인이 좀 특이한 사람이라서 받아준다면 모를까.

        

       장비에 마르마로스를 박아넣는다든지, 재고가 없는 물건을 주문하고 기다린다든지. 게임 안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번거로운 부분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내가 이 세계를 ‘게임 속’이라고 느끼게 할만한 부분도 많았다.

        

       지형지물이 게임 안과 너무 비슷했다. ‘던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곳은 내가 기억하던 그 모습과 너무 비슷했다. 마법의 종류가 같다. 기본적으로 구매할 수 있는 장비의 이름도 같다.

        

       심지어 현실이라기에는 영 이상한 부분도 존재했다. 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한 방의 바로 앞에 당당히 설치되어있는 치료 장치. 엄청나게 오랫동안 방치되었는데도 누가 가져가지도 않은, 누가 가져다 두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 귀중품.

        

       게임에서는 ‘그냥 유저들의 재미와 편의를 위해서’ 있던 것들이, 이 세상에는 당당하게 존재했다.

        

       ……그 모든 ‘비논리적인’ 것들은, 누가 만들어낸 걸까? 무슨 의도로 만든 것일까? 굳이 ‘내가 기억하는’ 게임 안의 내용과 같을 이유가 있었을까?

        

       아니, 애초에 ‘실비아 블랙’이라는 캐릭터가 그곳에 있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짤깍, 하고 머릿속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다.

        

       앨리스의 푸른 눈은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그 표정은 소름 끼치도록 무표정했다. 앨리스가 나에게 보여줄 만한 표정이 아니었다.

        

       마치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이곳에 내가 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실비아 블랙이라는 캐릭터가, 만약 누군가의 의지로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끼워 넣은 존재라면.

        

       이 ‘앨리스’는—

        

        

        

       미래의 황제가, 자신의 승리를 위해서 보낸 전령.

        

        

        

       —이라고, 생각했던 이유가 뭐지?

        

       어째서 이런 존재를 만들어 보낼 이가 반드시 황제여야 했던 거지? 황제가 그렇게 생각해서?

        

       아니면 이 ‘앨리스’ 때문에 내 능력이 봉인되는 것을 보아서? 황제가 ‘여신의 힘’을 경계하기 때문에, 팬그리폰의 지보는 여신의 힘을 억제하거나 찬탈하기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그래서 여신이 그 지보를 부순 것이라면.

        

        

        

       혼돈어린 미래는 알 수 없다. 예전에 곁다리로 들은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세상 모든 입자의 움직임을 파악하여 미래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양자역학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가 끼어들었던 것 같은데, 나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었다.

        

       팬그리폰은 여신의 질서를 깨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건 반쪽짜리 성공이었다. 만약 팬그리폰이 저 자리에 직접 들어가 장치를 완성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지만, 그러기 전에 여신이 지보를 파괴하여 버렸으니까.

        

       질서가 완전히 깨지고 세상이 다시 완벽한 혼돈 속으로 잠겨 드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질서를 관장하던 여신이라면.

        

       ……황궁 깊은 곳의 예언서는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존재했던 것일까.

        

       누가, 어떤 이유로 그토록 많은 예언을 써서 엄중히 보관하고 있던 걸까.

        

       팬그리폰은 분명 혼돈을 그리워했을 텐데. 그가 그런 예언을 써서 보관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런 생각을 나는 미처 하지 못했다.

        

        

        

       나는 지보가 두 개라고 추측했다. 하나는 여신의 힘을 찬탈하기 위해 팬그리폰이 만들어낸 것, 나머지 하나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신의 힘이 깃든 것.

        

       결과적으로, 지보는 두 개가 맞았다.

        

       나는 그걸 지금 깨달았다.

        

       하지만 그 지보는 ‘원래 있던 것’이 아니다.

        

       이 ‘앨리스’가 어떤 방법으로 옮겨온 것.

        

       황제가 자신이 찾던 지보의 조각이라고 믿어서, 이미 찾아냈던 나머지 지보와 조합했던 그 조각.

        

       만약 여신이 이 완성되어있는 세상에 ‘실비아 블랙’이라는 존재를 밀어 넣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 ‘누군가를 속일 수’ 있었다면—

        

       ……그런 짓을 ‘한 번 더’ 하지 못할 거라고 가정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닐까.

        

        

        

       나는 ‘앨리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기계장치 안으로. 빛이 뿜어져 나오는 장치 안으로.

        

       기계장치 안에서 ‘앨리스’가 손을 뻗었다.

        

       우리 둘의 손이 맞닿았다. 처음으로.

        

       그녀의 손은 시체처럼 차가웠다.

        

       “……앨리스가 아니였구나.”

        

       속았다.

        

       타임 패러독스니 뭐니 하는 것을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애초부터 나처럼 ‘저 너머’에서 온 존재라면, 미래의 존재일 이유가 없을 테니까.

        

       공간과 시간의 틈, 창백한 푸른 빛이 새어 들어오던 그 공간.

        

       ‘앨리스’와 닿는 순간, 나는 드디어 나를 기다리던 존재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옛날 옛적, 다시 한번 질서가 무너지려던 그 순간.

        

       여신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시간을 조금 더 길게 두고 생각하면 되는 일일 뿐이라고.

        

       다시 처음부터 하나하나, 차근차근 준비하여, 먼 미래에 있을 어떤 사건을 준비하면 되는 일이라고.

        

       빛이 들어오던 틈이 닫혔지만, 여전히 여신을 믿는 이들의 믿음은 굳건했다.

        

       그 희미한 연결을 통해 여신은 천천히 느긋하게 다시 질서를 확립해나갔다.

        

       세상에 믿음을 흩뿌리고, 신도를 늘려 영향력을 확대한다. 자기 힘 아래에 질서를 재확립하고 세상에 개입할 기회를 만들어 나갔다.

        

       질서에 기반하여 산출해낸 미래에 대한 사실을 뿌려 사람들이 현상에 대한 확신을 하게 하고, 필요한 무대를 하나씩 완성해나갔다.

        

       마치 혼자서 체스를 즐기듯.

        

       즐겁게 퍼즐을 맞춰나가는 어린아이처럼.

        

       그리고 마침내, 그 무대가 갖추어 졌을 때, 여신은 자기 체스 말을 판 위에 올려둔 것이다.

        

       —여신이라도 시간을 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간을 돌릴 수 없다면 수를 물리면 그만이다.

        

       자신의 의지 아래에서 흐르는 질서의 순리에 따라, 이미 움직인 별들의 위치를 바꾸고, 회전축을 뒤로 되돌린다. 기어가던 벌레를 다시 돌려두고, 늙어버린 짐승들의 세포를 원래대로 바꾸어둔다.

        

       딱 하나 바꾸지 않는 것이 있다면.

        

       자기가 판 위에 올려둔 사랑스러운 체스 말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그들의 기억만큼은 그대로 두는 것.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마침내 자기가 원하던 결론에 다다르도록.

        

        

        

       그러니까, 아가, 어서 오렴.

        

       네가 원하던 결말이 여기 있단다.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어. 아무도 고통받지 않을 수 있어. 내가 나의 힘으로 그렇게 만들 테니까.

        

       식민제국 아래에서 신음하는 불쌍한 사람들도.

        

       아편에 찌들어 현실을 보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선택지 없이 몸을 팔고 학대당하는 아이들도.

        

       내가 만들어낼 세상에선 존재하지 않을 거란다.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을 테니까.

        

       완벽한 균형과 질서 아래에서.

        

       그러니, 이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란다.

        

       이게 정해진 결말이야.

        

       

        

        

       

       

       

       

        

       누구 마음대로?

        

       내가 해피엔딩, 해피엔딩 하니까 그 생각을 영 다르게 해석한 모양인데, 내가 생각하는 ‘해피엔딩’은 그런 게 아니다.

        

       식민제국 아래에서 신음하는 사람들? 나랑은 좆도 상관없는 사람들이다. 불쌍하긴 하다. 그들이 해방되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는 생각한다.

        

       그런데, 그래서?

        

       선택지 없이 팔려 다니는 아이들은 불쌍하다. 수없이 죽어 나가고 자길 지켜줘야 할 어른들에게 겁탈당하는 아이들을 구해주고 싶다는 생각은 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아편에 찌들고 지주에게 재산을 빼앗기고 노동을 착취당하고 부당한 취급을 당하고—

        

       그게 내 알 바냐?

        

       그건 씨발 원래 내가 살던 세상에서도 그랬어.

        

       애초에 사람의 눈에 보이는 건 결국 자기 자신과 자기 주변 사람들 뿐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해피엔딩은 아무런 상처도 없이 완벽하고 누구나 다 행복한 세계가 아니다. 주인공과 히로인이 맺어지거나, 마왕을 쓰러뜨려 전쟁을 끝내거나, 숨어있는 악당을 찾아내거나—

        

       그 누구도 마왕을 쓰러뜨리는 이야기에서 ‘그래서 전후에 경제가 어떻게 파탄된 상태고 세금이 어떻고’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러니까.

        

       내가.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이 전쟁에서 내가 좋아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상태로 승리하는 이야기.

        

       그리고, 당연하지만 그 사이에 내가 당당하게 함께 하는 이야기.

        

       그게 내가 생각한 해피엔딩이다.

        

       그 외에 다른 건 알 바 아냐. 멋대로 정하고 이야기 끝내려고 들지 마라.

       

       

       그래, 뭐, 민주주의가 정의로워 보였다느니 하는 말을 했던 것 치고는 좀 이중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뭐 어쩌라고.

       

       

       내가 내 기준으로 판단하겠다는데.

        

        

        

       그리고 말이다.

        

       애초에 세상을 몇 번이고 원래 상태로 되돌릴 수 있는 정도의 존재가 왜 스스로 나서지 않고 나나 가짜 앨리스를 만들어 넣었던 걸까.

        

       그것도 일부러 내 능력을 교란해가면서 거짓말까지 하고.

        

       ……아직 완벽하게 세상에 개입하지 못하는 거지?

        

       혹시, ‘진짜 지보’가 실제로는 효과가 있는 거 아냐?

        

       교회 세력한테 미리 모으라고 했던 거, 사실은 그냥 황제가 다른 쉬운 길을 찾게 하려고 했던 거잖아. 교회가 열심히 모으면서 격렬하게 반항하면 황제는 조금 더 꾀를 부릴 테니까. 게다가 혹시라도 황제가 찾을 수 있었을지 모를 흩뿌려진 지보 조각도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고.

        

       가짜 앨리스 몸속에 있는 ‘당신이 만든’ 가짜 지보를 넣어서 보내고, 거기서 힌트를 얻은 황제가 자기 꾀에 넘어가도록.

        

        

        

       그만큼 ‘지보’가 완성되는 게 두려웠던 거 아냐?

        

        

        

       “왜 악당들은 막판에 자기 계획을 다 떠벌리는지 몰라. 그래서 꼭 반격의 기회를 주잖아.”

        

        

        

       나는 잡고 있던 앨리스— 아니,

        

       가짜의 손을 뿌리쳤다.

        

       얼마나 앨리스를 닮았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었건, 이것은 앨리스가 아니다.

        

       그렇게 행동하도록 정교하게 만들어졌을 뿐.

        

       “언니!”

        

       클레어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거칠게 내 어깨를 잡아당기고,

        

       동시에 푹,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다음 회차는 2시 이전에 올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늦게 올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다음화 보기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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