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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55

     닷새 사이의 장례식.

     그 동안 나는 이런저런 온갖 상황이 일어날 것을 대비하여, 백은을 통한 환각에 진입하여 장례식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들을 망상했다.

     -발자크 남작의 유산은 내 것이에요! 나는 그의 내연녀였죠! 결혼은 하지 못했지만, 이 뱃속에는 발자크 남작의 아이가 자라고 있어요!

     갑작스러운 유족의 등장.

     

     어머니 한 명 이후로 아이를 따로 낳지 않거나 양자를 들이지는 않았지만, 남자인 이상 따로 누군가 정부를 데리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이 경우를 어떻게 생각을 했냐하면, 누아르가 죽고 나서 이런 이들이 미친듯이 많이 찾아왔기 때문에.

     장례식을 주도하는 상주였던 내게 누아르의 허벅지에 달라붙어있던 모기들이 원하던 것은 하나 뿐이었다.

     책임.

     누아르의 정부로서 살며 가만히 침대에서 애교만 속삭여도 남들이 한 달 동안 버는 돈을 주머니에 챙길 수 있었던 자들.

     그런 자들이 어디 쉽게 일하러 가겠는가, 아니면 이전의 생활을 청산하고 새 삶을 살아가겠는가.

     그런 이들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들은 쉽게 번 돈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고, 누아르의 장례식장에 갓 태어난 아이까지 데리고 찾아와서 누아르의 유산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 정리하기는 했다.

     장례식이 끝나고 난 뒤, 제국법과 개인적인 무력을 동원하여 전부 다 수습해내기는 했다.

     지브롤터의 조용한 마을에 보육원을 만들고, 그곳에 제국에서 고용한 유모를 통해 키워내기로 했다.

     

     정부들은 뭐 제국의 귀족이나 기업 후손들과 엮어 지브롤터에서 치워버렸다.

     그들이 제국인들의 노리개로 살아가든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어느날 시체로 발견되든, 그들이 지브롤터를 떠난 이후로는 누구 하나 장례식에서 난동을 부렸던 것처럼 다시는 지브롤터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대책을 내놓을 생각이었다.

     죽이는 것도 방법이고 협박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나는 매국노 그레이가 아니라 19세의 미성년자 그레이 총독이기에 적당한 선에서 수위를 조절하고자 했다.

     ‘좋게 좋게 해결하면 그게 제일 좋은 거지.’

     

     최선은 그 정부가 차마 렘부르 군터 남작가를 이어받겠다고 나서지 않을 경우.

     만일 그녀가 끝까지 렘부르 군터의 자산을 노리려고 한다면, 나는 그녀에게 렘부르 군터가 가진 모든 것을 물려주려고 했다.

     -그러면 렘버리도 물려받아야 하는데….

     -…이 뱃속의 아이가 그분의 유산이라고 한 거였어요! 렘부르 군터 남작가를 이어받을 생각은 없답니다!

     렘버리라는 빚까지.

     빚도 자산이다.

     렘버리는 순수하게 악성 채무라는 이미지가 있기도 하지만, 귀족 이상의 계급에게 있어서는 빚은 미래를 위한 가치투자로서 일시적인 채무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래서.

     “실례합니다, 귀부인. 고인과는 어떤 관계셨는지?”

     “아, 그, 그게.”

     실제로 한 명, 상복을 입었지만 어딘가 발자크 남작의 시신까지 보겠다며 안치실까지 찾아온 중년의 여인이 있었다.

     “그냥, 체스 친구였습니다.”

     “체스 친구라. 고인께서 체스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는 했죠. 이제는 체스판까지 처분하여 빚을 갚아야 할 정도라, 몹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체, 체스판까지 처분한다고요?”

     시체로부터 무언가를 뜯어낼 수 있지 않을까싶던 까마귀같은 여인은 시체에 독이 들었다는 것을 깨닫고 식겁하며 물러났다.

     “예. 고인의 채무가 생각보다 상당한 편이라. 외손으로서 떠앉기에도 부담스러운 규모라, 만일 상속을 받는다면 남작성을 통째로 매각하는 것도 생각 중입니다.”

     “아, 그, 그렇군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예, 부인.”

     정부로 추정되던 여자는 그렇게 물러났다.

     체스 친구?

     은어도 적당해야지, 남녀가 체스를 둔다는 건 단둘이 있을 상황이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물론 체스를 여자랑만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남자들끼리 체스를 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건 결코 은어로서의 체스를 말하는 게 아니다.

     순수한 의미에서의 체스 대결.

     하지만 승패를 거는 게 아니라, 승패에 따라 돈이나 재산 등을 거는 내기 체스.

     -발자크 남작과는 제법 오래 체스를 하고는 했지. 그는 질 때마다 자기 재산을 걸었소. 여기, 내기 체스에서 진 빚을 갚겠다고 하는 계약서요. 보증인도 따로 있지. 그렇소. 렘부르 군터 남작이 진 빚을 받으러 왔소!

     장례식임에도 불구하고, 발자크 남작이 진 빚을 받아내기 위해 유족들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닥달하는 이가 있을 줄 알았다.

     “크흠. 본인은 이반 상회의 상단주로서, 발자크 남작과는 제법 오래 관계를 유지해왔던 사람입니다.”

     실제로 나타났다.

     귀족의 장례식에 그 가문과 거래하던 상단주가 오는 건 흔한 일이 아니고, 그의 품에는 돌돌 말린 양피지가 보였다.

     “그렇군요. 혹시 렘버리와 관련이 있습니까?”

     그리고 나는 그런 자들에 대한 정보를 이미 꿰고 있었다.

     “그, 갑자기 무슨…?”

     “오로솔 아카데미 협곡재단 이사장으로서 렘버리 관련 업무를 처리하다가 몇 가지 재미있는 게 보이더군요. 가령, 렘버리 캠프의 텐트를 칠 때 학생들에게 지급되는 천이….”

     “그, 그만! 워,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서로, 없던 일로 하시죠. 믿음과 신뢰로서.”

     “크, 크흠….”

     나는 그들과 적당히 거래를 하는 걸로 몇 가지 빚을 없앴다.

     

     너무 과격하게 압박하면 안 된다.

     노스트럼인들 중에는 수세에 몰리면 무력을 행사하려고 하는 자들도 있었으니까.

     ‘이번에는 없네.’

     용역깡패들이 없다.

     장례식장에 쳐들어와서 집기를 부수고 상복을 입은 이들을 향해 고성을 지르고, 연회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술을 퍼마시고 음식을 게걸스럽게 처먹는 야만적인 이들이 없다.

     어떻게 장례식에까지 와서 행패를 부릴 수 있는가?

     

     가능하다.

     ‘그게 일이니까.’

     양심의 가책을 내려놓고, 어차피 한 번 보고 평생 안 볼 사이라고 생각하고, 이전에 일말의 면식도 없는 생판남을 상대로 하며, 얻어내고자 하는 빚의 일부가 자신의 수고비로 들어오는 경우라면 장례식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제국 부자들이 고용한 노스트럼 용역기사들이 좀 많이 그랬지.’

     용역기사.

     그들은 몰락기사들이었다.

     왕국이 몰락한 이후, 귀족들은 기사들을 해고했다.

     더 이상 무력을 갖출 필요가 없게 되면서 기사들은 한순간에 무직백수가 되었고, 가진 것이라고는 통일제국에서는 그다지 쓸모가 없는 검술과 무력 뿐.

     그들은 찾아가는 곳을 가리지 않았다.

     왕국의 영웅적인 사기꾼에게 당하여 거리에 내려앉게 된 제국 부자들을 상대로도 찾아갔고, 제국 귀족에 의해 집도 땅도 빼앗기게 된 이들의 장례식장에도 찾아갔다.

     나도 경룡장에서 신세를 지기도 했다.

     

     나로서는 그들을 고용하여 주로 경룡장에서 파산하여 신세 한탄을 하며 애걸복걸하는 이들을 쫓아내는데 주로 이용하기는 했지만, 일부 귀족들은 사설 무력조직으로 고용하여 조직적인 폭력배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뭐, 이번에는 그런 이들이 없었다.

     설령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전직 기사였던 이들이기에 무력으로 뻗대고 드러누울 곳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이들이다.

     그레이 지브롤터, 마스터가 상주로 있는 곳에 나설 리가 없다.

     심지어 그레이 지브롤터 뿐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있지 않은가.

     ‘아버지 덕이 좀 크긴 크네.’

     크림슨 지브롤터.

     여러 가지 정치적이나 경제적인 이유를 떠나서, 크림슨 지브롤터라는 사람 한 명의 눈치를 보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나마 단 두 명만이 직접 시체를 보러와서 나를 상대로 어떻게 말을 붙여보려고 했지만, 안치실로 내려오기 전에 아버지를 만나자마자 바로 그 생각을 접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그렇게, 나의 걱정은 그저 기우에 불과했다.

     장례식에 찾아와서 사고를 치는 이도 없었고,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은 그저 우리에게 황금만 몇 차례 기부하기만 했다.

     아카데미에서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온 누아르라거나, 아직 제 한 몸 건사하지 못하는 여동생들을 노리는 암살자가 나타난 것도 없었다.

     오히려 암살자들을 암살하는 그림자들이 주로 활동한 게 그나마 장례식장 근처에서 있었던 죽음의 흔적 정도 뿐.

     아마도 그것은 전부 크림슨 지브롤터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하여, 장례식은 비로소 마지막 날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화장하죠.”

     우리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제단을 만들어, 시신을 불태우기로 결정했다.

     * * *

     

     바르셀로나 중앙광장.

     

     화륵.

     불이 붙는다.

     나무로 쌓아올린 제단의 위, 반듯하게 누워있는 마석으로 만들어진 석관에 불이 옮겨붙어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다.

     시신이 타는 악취는 없다.

     시신에 뿌려진 솜누스 꽃가루라거나 약초 덕분에 악취는 그다지 심한 편이 아니다.

     -거, 갈 때는 가장 화려하게 가는구만.

     귓가에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아마 나 말고도 이 자리에 찾아온 마스터들도 들었겠지만, 당사자는 눈치를 채지 못한 모양이다.

     하지만 마스터들도 지적하지 않는다.

     딱히 지적할 이유도 없고, 혼잣말로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이기는 해도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니까.

     -저 관 속에 황금이 채워져있다지?

     -가득 아니야?

     -가득은 아니겠지. 그냥 적당히 덩어리들이 놓여져있겠지.

     관 속에는 황금이 있다.

     발자크 렘부르 군터 남작이 캐내려고 하던 금광의 땅을 기사들을 동원하여 땅 전체를 파낸 결과, 우리는 그가 곡괭이를 뻗어냈던 곳에서 엄청난 크기의 금맥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고인 가시는 길에 노잣돈이라도 하라고 금덩어리를 시신 옆에 함께 붙여뒀다.

     그것이 죽은 뒤에 하는 짓이라고 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기도 하지만, 원래 그런 건 살아있는 사람이 마음 편하라고 그러는 거 아니겠는가.

     “…….”

     

     타오른다.

     약초로 억눌렀음에도 알싸하게 느껴지는 미약한 시체 타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그리고 그 냄새는 역설적이게도 나를 조금은 안도하게 만들었다.

     “괜찮소, 부인.”

     아버지가 어머니를 가슴에 품고 토닥인다.

     통곡하지는 않지만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며 몇몇 이들이 안타까워하지만, 저 눈물 중에 과연 죽은 아버지에 대한 애도는 몇 %나 될까.

     1%?

     그보다는 적을 것이다.

     0%까지는 아니겠지만.

     ‘해방의 눈물이지.’

     오래 전부터 발자크 남작은 어머니를 구속하려고 했다.

     자식을 자신의 부흥 수단으로 봤고, 어떻게든 부유한 가문의 남자에게 시집보내어 자기가 떵떵거리며 살려고 했다.

     지브롤터 가문은 충분히 부유하지 않냐고?

     전제가 있다.

     자신이 사위 덕을 보는 것도 보는 거지만, 그를 통해 막대한 자산을 굴리고 사치와 향락을 즐길 수 있는 그런 가문과 사돈을 맺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저기 관 속에 있는 금덩어리를 하루에도 수십 개씩 사용할 정도의 자산으로 사치를 부리고 낭비하는 삶을 바란 인간이다.

     이해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황금에 파묻혀 살아가기를 바라니까.

     매국노 그레이로서의 삶을 한 번 살아본 나였기에, 나는 그 심정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한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해보지 못한 이들은 불타는 발자크 남작의 제단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죽어서 부자가 되다니, 정말이지. 쯧쯧.”

     죽고 난 뒤에 부자가 되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죽음은 인간의 완성이라고 누군가는 말하지만, 이렇게 끝나는 것이 완성이라고 한다면 참으로 덧 없고 부질없는 것 아닐까.

     이왕 죽는다면.

     누군가를 위해서, 가장 가치있는 걸 남겨두고 죽는 것이-

     구구구.

     “……?”

     아래에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응?”

     “잠깐, 지금 무슨?”

     

     마스터급들이 가장 먼저 느꼈다.

     “땅이, 울리고 있…?”

     콰ㅡㅡㅡㅡㅡㅡ아아앙!!

     거대한 폭발.

     혹시 테러인가?

     나는 본능적으로 아스타시아를 지키듯이 손을 뻗었으나-

     “혀, 형?!”

     “…….”

     아스타시아는 아니고, 누아르였다.

     옆에 있던 웬즈데이가 누아르를 지키려고 하다가 어색하게 손을 뻗었으나, 나는 폭발이 일어난 방향에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저게 뭐지?”

     생전 처음 보는 광경.

     “……황금의, 분수?”

     모두의 시선이 불타는 시신이 아닌, 성벽 너머로 보이는 황금빛 분수에 고정되었다.

     

     * * *

     수맥이 터졌다.

     지하수가 금맥을 뚫고 터져나왔다.

     막대한 사금을 머금고 터져나온 지하수는 분수와도 같았고, 바르셀로나의 기사들이 파낸 구역은 물론이거니와 그 아래까지 물이 범람하여 호수를 이루었다.

     흘러내리는 물 사이에 섞인 반짝이는 무언가.

     막대한 양의 사금에 사람들은 넋을 잃었다.

     그리고 모두가 칭송하며, 애도를 표했다.

     비록 죽었으나 기어이 또다른 금맥을 찾아내어 황금의 호수를 만들어낸 노인을 향해.

     그 호수는 노인의 이름을 기리는 의미에서, 모두가 [발자크] 호수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그를 애도하며, 모두가 칭송했다.

     사금공(沙金公)을.

     죽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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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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