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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56

        이제야 알겠다.

        ​

        마왕님께서 왜 아무런 능력이 없던 그녀를 주워다가 마왕군의 최고 간부로 삼았는지를.

        ​

        주군께선 소녀의 지성을 보았던 것이다. 비록 몸도 약하고, 신분도 천하며, 전투에 별다른 재능이 없는 자였지만….

        ​

        – 자, 이제 사천 중 누가 최약체지?

        ​

        시간만 있다면 압도적인 병기를 생산할 수 있는 존재였기에.

        ​

        “흐흐.”

        ​

        얼마 전의 일을 떠올린 길라흐는 고소를 지었다.

        ​

        분노처럼 치솟던 불기둥과, 하늘 위를 용처럼 날아오르던 버섯구름.

        ​

        모조 세계수를 불태우던 그 자리에선 에테르를 등한시하던 자신조차도 우뚝 굳을 수밖에 없었다.

        ​

        그것은 여신에 준하는 권능이었다.

        ​

        “만약 주군께서 그만한 권능을 지닌 상천을 잡아 드신다면…….”

        “정령계는 물론이고, 여신의 고유한 영역까지도 잿더미로 변하겠지.”

        ​

        창천과 호천은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

        “창천. 제가 마왕군에 몸을 맡긴지 꽤 되었지만, 이 정도로 통렬하고 우아한 배반은 처음으로 봅니다!”

        “배반은 무슨. 가축을 길러 잡아먹는 것이 무슨 배반이던가?”

        “그거 명언입니다! 으하하하!”

        ​

        더는 화낼 일이 없었다.

        ​

        상천에게 공적이 돌아가는 일은 없을 터이다. 주군께서 자신을 홀대하는 일도 없으실 것이다.

        ​

        원래부터 모든 건 마왕님의 계획 아래에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

        “어쨌든 상천은 오도 가도 못한다.”

        “그렇다면 그녀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개뿐이겠군요.”

        ​

        마수라는 것을 들켜서 정령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거나.

        ​

        아니면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와 마왕님의 대업을 위한 밑거름으로 쓰이거나.

        ​

        “그렇지. 그러니 너무 심란해하지는 말게.”

        “이거, 간만에 좋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후하하하!”

        ​

        길라흐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을 보러 떠났다.

        ​

        마왕성 최상층은 텅 비었다. 창천 파스모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남지 않았다.

        ​

        “…….”

        ​

        정적이 구름처럼 흘렀다.

        ​

        창천은 네 마디 관절로 이루어진 팔을 흐느적거렸다. 모자를 고쳐 쓰고, 몸에 두른 붕대를 꽉 동여맸다.

        ​

        “…끌끌.”

        ​

        드워프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

        봄이었다.

        ​

        ​

        **

        ​

        ​

        [그렇지, 그러니 너무 심란해하지는 말게.]

        [이거, 간만에 좋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후하하하!]

        ​

        “흐음.”

        ​

        침을 꼴깍 삼키며 관측을 종료했다. 마침 마력이 떨어진 탓에 몸에서 힘이 쫙 빠졌다.

        ​

        “뭐가 보이니?”

        ​

        앞뒤로 노란 머리카락 둘이 자신을 압박해온다.

        ​

        젠장, 숨 막혀.

        ​

        “왜 친한 척이야?”

        “저희 이제 동료잖아요.”

        “으, 오글거려.”

        ​

        로즈마리는 모처럼 도우러 온 클라라 하스펠트를 밀쳐냈다.

        ​

        인간과 부대끼며 사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다만 두 언니의 신변이 걱정될 뿐.

        ​

        “인간, 일단 정령 빌려줘서 고마워.”

        ​

        로즈마리는 옷소매에 손을 넣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살았던 시절에서 나름 쓰이던 예법이었다. 

        ​

        정령마도라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대단했다.

        ​

        클라라에게 시일야방성대떼 스킬을 사용하여 얻어낸 정령들은 틱틱대면서도 로즈마리에게 힘을 빌려주었다.

        ​

        비록 불의 정령이 내보낸 마나가 몸에 받지 않아 효율은 떨어졌지만, 마왕성을 염탐하는 덴 문제가 없었다.

        ​

        아무튼.

        ​

        “아쉽네.”

        “뭐가요?”

        ​

        로즈마리는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

        “아무래도 동맹을 연장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

        ​

        **

        ​

        ​

        오전 수업은 휴강으로 처리했다.

        ​

        좋아하는 학생이 있었고, 못내 아쉬워하는 학생도 있었다. 에테르는 어느 쪽도 나무랄 생각이 없었다.

        ​

        어쨌든 손실은 존재했다. 3시간 분량의 진도가 뒤로 미뤄진 것이다.

        ​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니다.”

        ​

         레니냐는 오후 1시가 다 되어서야 일어났다. 그녀는 시계를 확인하자마자 이불킥을 시전한 뒤 고개를 숙였다.

        ​

        “선생님과 학급 친구들에게 해를 끼쳤으니 이걸 어떻게 해야….”

        “너무 상심할 필요 없어. 수해 때문에 너 말고도 어젯밤 잠을 못 잔 학생들이 많았거든.”

        ​

        에테르가 조례를 갔을 때 몇 명은 결석한 상태였다. 또 몇 명은 오긴 왔으나 피곤에 찌든 얼굴이었다.

        ​

        그야 그렇다. 아카데미 전체가 잠길 뻔했는데.

        ​

        다음 날 출석을 체크하고 수업까지 나가는 건 너무한 짓인 것 같았다.

        ​

        [네가 드디어 융통성이라는 걸 배웠구나.]

        “…….”

        ​

        내면의 목소리는 무시하자.

        ​

        이건 어디까지나 레니냐의 도움을 받아내기 위한 포석이다.

        ​

        [언제는 유피엘만 신경 쓰라더니.]

        “…흐음.”

        ​

        생각해 보니 레니냐도 꽤 도움이 되겠구나 싶었다.

        ​

        눈썰미가 좋고 톡톡 튀는 생각을 지닌 학생이다. 어쩌면 흑주 연구에 상당한 역할을 할지도 모르겠다. 정 그게 아니더라도 연구준비에 필요한 잡일 정도는 맡길 수 있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고.

        ​

        ‘나’의 말이 맞았다. 본인에겐 다 생각이 있었다.

        ​

        “당분간은 네게 개인 교습을 해 줄게. 처음 1개월은 딱히 일하지 않아도 되니까 학업에만 집중하렴.”

        ​

        에테르는 일부러 관용을 베풀었다.

        ​

        예상외의 말을 들은 레니냐는 눈을 깜빡이며 귀를 꼿꼿이 세웠다. 귀를 저렇게 세우는 건 엘프가 놀랐다는 뜻이었다.

        ​

        “정말… 그래도 되나요?”

        “그럼.”

        ​

        에테르는 새로 산 교과서를 건넸다. 이어서 필기구와 생필품도 주었다.

        ​

        “저, 선생님.”

        “왜?”

        ​

        레니냐는 귀를 파닥거리며 물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기꺼워하는 분위기만큼은 숨기지 못하는 듯했다.

        ​

        “왜 저에게 이렇게나 많은 걸 해주시는 건가요? 저는 아직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는데…….”

        “혹시 월급에서 변제할 거라고 생각하니?”

        “기브 엔 테이크를 생각하면 그게 맞는 행동이고 절차일 거예요.”

        ​

        레니냐의 마지막 말에, 에테르는 짧게 신음했다.

        ​

        “흐음.”

        ​

        기브 엔 테이크라.

        ​

        많이 익숙한 표현인데.

        ​

        에테르는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

        그리고 그대로 레니냐의 이마에 가져간다. 

        ​

        딱, 하는 소리가 뒤이어 났다. 레니냐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이마를 쓰다듬었다.

        ​

        “학생은 돈 걱정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모든 것에는 대가가 있는 게….”

        “어허.”

        ​

        타악!

        ​

        정신을 못 차린 것 같아서 딱밤을 한 대 더 먹였다. 윽, 하는 신음이 들려왔다.

        ​

        어째 금안족은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하면 공부 열심히 하는 걸로 대가를 치르렴.”

       

        열심히 공부해서 나라와 세상에 공헌하라.

        ​

        이 또한 어디선가 들어본 말이었다.

        ​

        자꾸만 기시감이 느껴졌다.

        ​

        “…아, 알겠습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레니냐. 그녀의 눈가에 촉촉한 기운이 감돌았다.

        ​

        슬퍼하고, 동시에 기뻐하고, 그러면서도 미안해하고.

        ​

        지금, 아주 진귀한 감정 표현을 보고 있다.

        ​

        금안족이 이런 복합적인 심상을 품는 일은 매우 드물다. 보통 기뻐하면 씩 웃고, 슬퍼하면 한숨을 쉬는 것이 전부다. 눈물을 글썽이면서 웃는 얼굴은, 마왕의 저주가 사라지지 않는 한 평생에 한 번 보기 힘들 것이다.

        ​

        “이 은혜는, 나중에 반드시 갚을게요.”

        ​

        에테르는 움찔 떨었다. 그러나 곧 평정을 되찾고 씨근거리던 숨을 가다듬었다.

        ​

        미안하지만 나중은 없다. 없을 것이다.

        ​

        “…마음대로 하렴.”

        ​

        대충 둘러댄 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레니냐와 더 대화했다간 동족인 걸 들킬지도 모른다는 판단에서였다.

        ​

        만약 들킨다? 레니냐의 성격 상 바로 삼진아웃이다.

        ​

        그러니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

        똑똑.

        ​

        그때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

        “선생님, 저예요.”

        ​

        누구인가 했더니, 유피엘이었다. 에테르는 유피엘을 안으로 들였다.

        ​

        그녀는 책 한 권을 들고 찾아왔다.

        ​

        “공부하다가 모르는 게 생겨서….”

        ​

        휴강일에도 알아서 공부하다니. 병나발 부는 대학생이 많은 걸 고려하면 기특하다. 에테르는 씩 웃으며 유피엘에게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

        “앗….”

        “…….”

        ​

        유피엘과 레니냐의 눈이 마주쳤다.

        ​

        “여긴 왜….”

        ​

        레니냐를 본 유피엘은 돌처럼 굳었다. 레니냐는 서둘러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

        유피엘은 하이엘프. 레니냐는 금안족 엘프.

        ​

        같은 엘프지만, 서로의 신분 격차는 어마어마하다. 비록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는 해도 레니냐는 유피엘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

        혹시 모를 일이다. 둘을 붙여놓는다면 어색한 기류가 흐를지도…. 아니, 이미 흐르고 있다.

        ​

        “사정이 있단다.”

        ​

        에테르는 유피엘이 말을 꺼내기 전에 선수를 쳤다.

        ​

        집이 홍수에 뒤집혔다고 말하기엔 레니냐의 체면이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사정 설명은 돌려서 해야겠지.

        ​

        “레니냐 양은 오늘부터 학부 인턴을 하기로 했어. 그래서 당분간은 선생님 연구실에서 생활할 예정이란다.”

        “아, 학부 인턴이요….”

        “이해해 주겠니?”

        “물론이에요. 원래 선생님 연구실이잖아요.”

        ​

        유피엘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

        저번과 비슷한 반응이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

        “질문 있니?”

        “앗, 여기 이쪽에 밑줄 쳐놓은 부분이요….”

        “가져와 보렴.”

        ​

        에테르는 자연스럽게 노트를 건네받았다.

        ​

        총천연색으로 필기된 공책이었다. 유피엘은 분홍색으로 밑줄 그은 부분을 차례대로 질문했다.

        ​

        그동안에도 유피엘은 사각을 흘끔거렸다.

        ​

        레니냐가 있는 방향이었다. 레니냐는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다가 교과서 읽는 시늉을 했다.

        ​

        “…아, 이해했어요.”

        “이제 더 없니?”

        “없어요.”

        ​

        정신을 차려보니 오후 수업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에테르는 눈을 깜빡이다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

        [설명 잘하네.]

        ​

        또 다른 자아가 아닌, ‘에테르’ 자신이 유피엘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다.

        ​

        설명하면서 ‘이건 왜 모르지?’라고 물을 법한 일도 천천히 알려주었다. 예전의 자신과는 다른 점이었다.

        ​

        순간, 머릿속에서 미묘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

        이대로라면 학생들 교육을 자신이 맡아도 되는 게 아닐까?

        ​

        “…….”

       

        아니, 아니지.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 내가 왜 학생들을 가르쳐? 자신은 세계수를 불태우기 위해 잠입한 것이지, 학생들 가르치려고 온 게 아니다.

        ​

        물론 학생들에게 환심을 사면 들킬 위험이 줄어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가까이 지내면….

        ​

        – 마왕군 때려치우고 이쪽으로 오라고!

        – 비록 적이지만 저는 존경해요.

        ​

        …역으로 먹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세계수 터지는 거 못 보고 사라질 수는 없다.

        ​

        – 다 끝나면 나와 같이 사는 거야. 약속했다?

        ​

        “윽….”

        ​

        아, 젠장.

        ​

        또다.

        ​

        또 머리가 지끈거린다.

        ​

        “선생님, 어디 아프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

        에테르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

        이마를 짚어보니 머리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어젯밤 비를 맞아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감기 기운이 있는 모양이다.

        ​

        이상한 몸이다. 몸은 강철인데, 왜 감기에 드는 것인지.

        ​

        “이러다가 오후 수업에 늦겠다. 볼 일 있으면 둘 다 가 보렴.”

        ​

        유피엘과 레니냐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레니냐는 새로 받은 책을 챙기며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

        “유피엘은 안 가니?”

        “저….”

        ​

        또 다시 입을 우물거리는 유피엘.

        ​

        꽈악.

        ​

        영롱한 바다색 눈동자에 힘이 들어간다. 유피엘은 에테르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

        “선생님, 부탁이 하나 있어요.”

        “말해 보렴.”

        ​

        꼴깍.

        ​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

        잠시 후, 유피엘이 입을 뗐다.

        ​

        “저도 인턴 시켜주실 수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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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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