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256

       “언니!?”

        

       클레어가 지르는 비명을 들었지만, 앨리스는 그런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실비아가 여기 오기 전에 했던 말을 생각하면, 당연히 이 상황의 중심은 실비아였다.

        

       실비아가 여기 오기까지 어떤 힘을 사용했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정말로 여신의 힘인지는 실비아 본인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종종 볼 수 있었던, 사제들의 신성력과는 명백하게 다른 힘이었다. 만약 실비아의 힘이 정말로 여신의 힘이었다면 어째서 사제들이 쓰는 그 신성력과는 다른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실비아 본인이 아니라면 ‘상황’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실비아가 세운 계획을 돕기 위해 이렇게 모인 거였는데.

        

       등 쪽에서 칼에 찔린 실비아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아니, 표정도 변하지 않았다.

        

       실비아의 눈은 먼 곳을 보는 것처럼 풀려있었다— 칼에 찔려서?

        

       클레어가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기사 몇 명 정도가 클레어를 잡으려 했지만, 날아오는 총탄에 한두 명씩 쓰러졌다.

        

       앨리스도 뛰었다.

        

       피가, 피가 흐르고 있었다. 황제의 몸에 보이는 베인 상처에서 흐른 피는 아니었다. 저건 분명히 실비아의 피였다.

        

       망가진 장갑판을 떼어버려서, 실비아의 등을 보호해줄 만한 부분은 없었다—

        

       탕!

        

       하지만 다음 순간 그런 소리가 들렸다.

        

       “……아!”

        

       실비아의 풀렸던 눈에 다시 빛이 돌아왔다.

        

       쿨럭거리는 입에서는 피가 울컥울컥 올라왔지만, 실비아는 아직 살아 있었다.

        

       뒤이어서, 다시 탕, 탕, 탕, 하고 총소리가 들렸다. 황제에게 달려들 때 들고 있던 리볼버는 아니었다. 어느새 꺼내든 자동권총에서 불이 뿜어졌다.

        

       황제는 몸을 틀었지만, 실비아가 자기 옆구리 쪽으로 총구를 돌려 쏜 총알 몇 발이 스치는 것을 피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황제의 손은 여전히 실비아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스륵, 하고 실비아의 몸에서 칼이 빠져나왔다.

        

       쿨럭. 실비아가 다시 한번 기침을 하고, 피가 입술을, 턱을 적셨다.

        

       딱 한순간이지만, 그런 실비아와 황제를 향해 시선이 모였다. 각자 상대를 맡은 일행들도, 그리고 그 일행들을 막고 있던 상대들도.

        

       심지어 황제와 함께 온 기사들까지.

        

       극도로 짧은 한순간 이 넓은 공간이 침묵에 휩싸였다가, 다시 깨졌다.

        

       목표가 바뀌었다.

        

       실비아의 일행들은 오로지 실비아를 돕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자기 앞에 있는 존재의 사연이 어떻든지, 지금 자기 기분과 목적이 어떻든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애초에 여기에 이렇게 사람이 모이게 된 이유가 실비아였다.

        

       실비아가 아니었다면 황제는 이렇게 움직이지 않았을 테니까.

        

       반대로, 그 앞을 막고 있던 인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최종목표는 황제의 계획이 제대로 마무리되게 하는 것. 그렇게 해서 여신의 힘을 찬탈하는 것.

        

       걸음의 방향이, 검의 방향이, 총구의 방향이, 지팡이 끝의 방향이 바뀌었다.

        

       수많은 검격이, 마법이, 총탄이 한 방향으로 향했다.

        

       아마 실비아도, 황제도 그 모든 것을 피하는 것은 어려우리라.

        

       실비아가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피에 젖어있었고, 고통으로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평소의 실비아라면 거의 보이지 않을 모습이었을 텐데.

        

       실비아의 검은 눈동자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군가를 찾는 것 같은 그 눈이, 앨리스와 한 번 마주쳤다.

        

       순간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실비아의 찡그려졌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여전히 고통에 찌푸린 표정이긴 했지만, 앨리스는 순간 그 표정이 웃는 표정처럼 보였다.

        

       아니, 정말로 웃는 표정이었을 것이다.

        

       실비아의 입이 작게 움직였다.

        

       괜찮아.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언제나 정중한 말투를 쓰던 실비아가 처음으로 건네는—

        

       실비아의 시선이 다시 돌아가서, 이번에는 클레어를 보았다.

        

       앨리스보다 먼저 달리면서 주변에 검기를 흩뿌리던 클레어는 앨리스보다 훨씬 빠르게 실비아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수많은 검기와 마법이 어지러이 뒤섞였다. 개중에는 서로 부딪히고 상쇄되어 도중에 깨어져 나간 것도 많았다. 수많은 파편과 가루가 아름답게 반짝이는 장면은, 그 아래의 피 흘리는 이들만 없었다면 누군가 축제라고 생각했을 법도 한 모습이었다.

        

       붉은색과 푸른색, 녹빛과 얼음에 반사된 빛이 차례대로 실비아의 얼굴을 비추었다. 한순간 실비아의 어깨를 잡고 있던 황제의 손이 결국 실비아를 놓쳤다.

        

       하지만 실비아의 몸이 향한 쪽은 기계장치의 쪽도, 그 아래 떨어져 있던 ‘지보’의 쪽도 아니었다.

        

       *

        

       있는 힘껏 달리던 클레어는 급하게 발의 속도를 줄였다.

        

       황제에게서 벗어난 실비아가 클레어 쪽으로 뛰어왔기 때문이었다.

        

       실비아는 이미 피를 많이 흘리고 있었다. 그대로 부딪혔다면 무사하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끼익, 하며 고무를 덧댄 신발의 밑창이 바닥과 마찰하는 소리가 들리고—

        

       “클레어!”

        

       실비아는 그대로 클레어에게 달려들었다.

        

       클레어가 넘어지지는 않았다. 달려들던 실비아가 다리에 힘이 풀리기라도 했는지 그대로 클레어 쪽으로 푹 넘어지긴 했지만, 클레어가 그대로 실비아를 부축했기 때문이다.

        

       “언니, 괜찮아?”

        

       그렇게 말하고 나서 클레어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전혀 괜찮아 보이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미 입 근처는 피가 잔뜩 흐른 뒤였고, 실비아를 거의 안듯이 부축하고 있는 손에도 피가 잔뜩 묻어나왔다. 몸에서 막 흘러나온 피에는 아직 온기가 있었다.

        

       “클레어.”

        

       “어……?”

        

       언제나처럼 부르는 이름이었을 텐데.

        

       실비아가 급하게 부르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어째서인지, 그 목소리는 얼마 전까지 듣던 실비아의 차분한 목소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어린 시절에 들었던—

        

       “지보, 가지고 있지?”

        

       “아, 응.”

        

       “좋아.”

        

       실비아의 말에 클레어는 눈을 깜빡였다. 그렇게 피를 흘리고, 그런 상처를 입고서도 실비아는 힘 있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순간 실비아의 손이 교복 안주머니로 쑥 들어오는 바람에 클레어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실비아는 얼굴 하나 바꾸지 않고 주머니 안쪽의 지보를 꺼내 들었다.

        

       안주머니에 간신이 들어갈 수 있을 법한 크기의, 완성되지 못한 톱니바퀴.

        

       “그걸로 뭘 하려고……?”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어?”

        

       실비아의 수수께끼 같은 말에 클레어는 다시 눈을 깜빡였다.

        

       *

        

       솔직히 생각할 시간이 아주 짧아서 이게 완벽한 계획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사실은 ‘지보’를 막을 다른 ‘지보’로서 챙겨온 거고, 내가 황제와 마주했다가 빼앗기면 곤란하니 나보다 훨씬 실력이 좋은 클레어에게 맡겨둔 거였지만……

        

       게다가 지보 자체가 반응하는 것도 클레어한테 확실하게 반응했고.

        

       내가 조금 전 보았던 그 진실을 생각해보자면—

        

       내가 가면녀 앞에서, 그러니까 그 가짜 앨리스 앞에서 능력을 제대로 쓰지 못했던 이유는 ‘여신이 그렇게 조절했기 때문’이다. 황제를 속이기 위해서.

        

       물론 그게 이중, 삼중으로 이루어진 함정일지도 모른다.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도 이미 다 파악하고 있을지 모르지.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분이 나쁘잖아.

        

       나는 누가 공략한 것을 보기 싫어서 내가 먼저 일본판을 직구해다가 하나하나 번역하고 플레이하며 공략을 쓰던 인간이다. 게다가 내가 해둔 스토리 해석과 남들이 해둔 스토리 해석이 다른 것도 기분 나빴고, 아예 정발도 되지 않던 물건이 드디어 한국어로 번역되어 들어온 뒤에도 고유명사 번역으로 열심히 씹기도 했었다.

        

       그 성격이 돼먹지 않은 성격이라는 건 알고 있다. 이 세상에서야 남들이 나더러 이런저런 이유로 존경받을만한 성격이라고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나는 내가 잘 안다.

        

       내가 원하는 스토리가 아니라면, 몇 번이고 시도해서 원하는 스토리로 바꿔버리겠다.

        

       회사에서 스토리를 쓰고 있는 원작이라면 몰라도, 이 세계라면 다른 이야기니까.

        

       만약 여신이라는 존재가 나를 고른 기준이 ‘이 세계관을 좋아하고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지나치게 강한 현실과 가상공간을 구분 못하는 찐따새끼’였다면 제대로 골랐다.

        

       그런데, 그런 찐따새끼를 골랐으면 그 찐따식 사고방식도 미리 생각해 둬야지.

        

       클레어의 품에서 꺼낸 지보는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당연히 내 쪽이 아니라 클레어 쪽으로.

        

       나에게는 ‘자신이 세계를 원래대로 돌렸다’라고 표현했지만, 나는 그거 안 믿는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구라만 친 존재의 말을 어떻게 믿겠는가.

        

       분명 나한테 양도된 힘이 있을 거다. ‘내부에서’ 바꿔야 하는 것이 있을 테니.

        

       그 양도된 여신의 힘이 진짜 여신의 힘만큼 완벽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어차피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이 ‘지보’도 완벽하지 않으니까.

        

       여신의 계획대로였다. 여기까지는.

        

       “클레어. 잠깐 여기 손을 대주겠어?”

        

       “아, 응…….”

        

       상황이 어떤지도 잘 모르는 얼굴로, 클레어는 얌전이 내 말에 따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착한 동생이라니까.

        

       자, 이제 어쩔까.

        

       나라는 존재 때문에 바뀌어버린 스토리라인.

        

       완벽하지는 않은, 잠시 양도된 여신의 힘.

        

       그리고 역시,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 여신의 힘을 막기 위해서, 찬탈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물건.

        

       그 물건을 확실하게 사용할 수 있는 존재.

        

       “클레어, 잘 들어. 시간이 없으니까.”

        

       여전히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인간들이 있었다. 주변에서 필사적으로 막아내는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여전히 시간이 없는 건 확실했다.

        

       “셋까지 셀 거야. 그리고—”

        

       제대로 될까?

        

       그런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알았어.”

        

       나의 설명을 들은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말했다.

        

       “하나.”

        

       세상을 자기가 생각하는 완벽한 세계로 만들고자 하는 여신.

        

       “둘.”

        

       그런 여신에 반발하면서도, 정작 결과는 여신의 힘을 찬탈한 새로운 신이 되고자 하는 황제.

        

       그 둘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둘 모두에게 나는 그냥 도구일 뿐이다. 애정을 가졌는지는 잘 모르겠고, 나를 활용한다고 어디까지 활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쪽의 결과건, 그 결말에서 나는 행복하지 못하게 되겠지. 애초에 존재 자체가 없던 것이 될 수도 있고.

        

       그건 해피엔딩이 아니다.

        

       한순간 돌아본 시야에, 동료들이 들어왔다. 다들 아직 살아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동시에 나와 클레어를 지키기 위해 모여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앨리스와 다시 한번 눈을 마주쳤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다시 한번 앨리스에게 눈을 살짝 휘어 보이곤, 클레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결의의 찬 두 눈동자가 내 시야 안에 꽉 찼다.

        

       “셋.”

        

       내 마지막 말에, 클레어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도 동시에—

        

       “다시!”

        

       —다시.

        

       처음으로.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약속했던 시간보다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번 화는 이런 결말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진짜로 다음화부터 ‘1화부터 끝까지 다시!’같은 일은 없습니다.

    그보다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중요한 부분만 콕콕 찍어서 스토리를 전개해보고자 합니다. 너무 질질 끌지 않도록 유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언제나 저의 소설을 읽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

    정기후원해주시는 분들, 언제나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

    Ilham Senjaya 님, 후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익명으로 후원해주셨기에 독자닉네임 기능으로 인사드립니다!

    건강관리를 나름대로 한다고 하면서 살고는 있는데, 이게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특히 사실상 운빨로 걸리는 병은 뭐 답이 없더라구요. 게다가 개인적으로 걷기 이상의 운동을 극도로 혐오하는 성격이라서 건강관리가 더 어려운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도 최근에는 집 밖에 나가는 취미를 생각해보고는 있습니다. 카메라를 좋아해서 카메라를 샀고, 카메라를 샀으니 어디 놀러나가서 사진이라도 찍어와야죠. 서울 근교라면 차 없이도 캠핑은 가능할 것 같고… 그래도 최근에는 여유가 생겨서 이런저런 취미활동에 눈독을 들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건강히 오랫동안 글을 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그렇게 하고 싶고요. 언제나 저를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콜라버섯 님, 후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을 쓰는 내내 제가 즐거울 수 있는 것은 저의 소설을 읽어주시고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글에 대한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독자 여러분 덕분이고요. 그러니 이 글은 애초에 처음 저의 글을 읽어주신 분들이 아니었다면 세상에 나올 수도 없었던 글입니다. 제가 글을 쓸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언제나 그 사실을 잊지 않고 독자 여러분을 위해 보답해드릴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후원 감사드립니다. 마지막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다음화 보기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