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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57

     제국력 99년 6월 21일.

     겨울과 봄이 지나가고, 어느덧 여름이 다가와 서서히 날씨가 따뜻해지기 시작하는 시기.

     발자크 남작이 죽어 사금공으로 칭송받고 발자크 호수로 그 이름을 남기게 된 날로부터 약 4개월이 지났다.

     

     렘부르 군터 남작령은 왕실에서 직접 관리하는 구역이 되었고, 모르가니아 가문에서 파견된 행정관이 남작대행으로서 영지를 관리하게 되었다.

     영지를 빠르게 발전시키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으나, 영지에서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유지할 수는 있는 정도.

     렘버리로 인한 부채나 개인이 진 빚은 발자크 호수로부터 나오는 사금으로 전부 대체되었다.

     

     어떻게 물가에서 흘러나오는 사금을 직접 채취해서 빚을 가져가라고 하냐면서 억울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죽은 자를 상대로 지옥에 쫓아가서 빚을 독촉하는 게 아니라면 누가 빚을 대신 갚아줄 수 있을까.

     유족?

     지브롤터에?

     렘부르 군터라는 꼬리표가 사라졌다는 것만으로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지브롤터성으로 돌아가더니 일주일 뒤에 축제를 연 지브롤터 후작가를 상대로?

     빚에 대한 계약서는 사실상 휴지조각이 되었고, 그나마 돈이라도 건지려면 사금을 채취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금은 일단 당연한 거고, 바르셀로나 어딘가에 있을 또다른 금광을 찾아내는 것은 이 나라에서 돈 좀 만진다 하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되었다.

     귀족들은 기사들을 동원했다.

     기사들에게 검 대신 삽을 들게 하고, 채광용 땅굴을 파는 게 아니라 아예 거대한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바르셀로나 총독부는 파낸 흙더미를 옮겨다가 벽돌을 구워냈다.

     

     간혹 일부 금가루가 섞이는 경우도 있기는 했지만, 고작 그 금가루를 얻으려고 벽돌을 긁을 바에는 발자크 호수로 가서 뜰채 하나를 휘저어 사금공의 축복을 얻는 쪽이 더 이득이었다.

     수많은 벽돌, 기사라는 인력, 그리고 기사 뿐만 아니라 각 영지에서 지원을 나온 무수히 많은 인력.

     롤랜드 후작가라거나 귀족 중 일부는 가문 내에서 보유하고 있는 사병까지 동원하여 바르셀로나의 땅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사병이 없는 가문에서는 용병을 고용하는 방식으로 영지의 노동자들을 불러다 바르셀로나로 보냈다.

     순식간에 바르셀로나에 유동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 모든 인파를 관리하기에는 다소 역부족으로 보였으나-

     -제국의 건축기술을 도입하여 빠르게 현재 인구집중의 문제를 해결한다. 지금 우리에게 급한 건 먹고 자는 문제지, 왕국이냐 제국이냐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레이 지브롤터 총독은 제국을 동원하여 문제를 해결했다.

     아이페리아 인더스트리라는 상단(기업)으로부터 막대한 물자를 구입하여 열차로 가져왔으며.

     제국의 건축설계사와 왕국의 대지마법사를 연결시켜 벽돌로 만든 집을 대량으로 빠르게 지어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이건 집이 아니라 어디 감옥이 아니냐’라고 할 정도로 디자인이 단조롭고 직선적이었으나, 적어도 하루에도 수백-아니 수천 명씩 몰려드는 유입 인구를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적절한 기술이었다.

     식량도 충분.

     심지어 인간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오물에 대한 문제 또한 하수도 시설을 만드는 걸로 빠르게 수습해내는 모습을 보였다.

     도시 지하에 어떻게 그런 대규모 시설을 만들 수 있었는지 제국의 건축설계사들도 궁금해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근육질에 귀가 뾰족한 땅요정들이 삽을 들고 바르셀로나 지하를 정비했다는 말만 있을뿐.

     지브롤터 기사단 바르셀로나 지부의 단장을 겸하고 있던 카를로스 경이 ‘이런건 엘프가 아니야’라고 하면서 술에 취해 절규했다는 뜬소문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바르셀로나는 변했다.

     아직 구 시가지는 노스트럼의 정취가 그대로 남아있지만, 총독을 중심으로 새롭게 정비된 새로운 주거구역은 제국 특유의 공장식 건물과 각진 상자형 주택들이 늘어서게 되었다.

     영지민들의 저택 내부에는 별도의 화장실이 설치되고, 오물은 땅 위가 아닌 지하로 내려가 어딘가로 사라지게 되었으니.

     그레이 지브롤터 바르셀로나 총독이 부임하고 약 반 년.

     총독 부임 초기에는 암살이나 테러가 횡행하였으나, 이제 바르셀로나 영지에 사는 이들은 하나둘 슬그머니 입밖으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어라?

     제국적으로 사는 거.

     이렇게 편했던 건가?

     

     -혹시 시대에 뒤떨어지고 있던 쪽은, 내 쪽?

     무엇보다.

     세금을 내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 이렇게 편했던 걸까?

     영지에서 나오는 황금을 이용하여 영지를 고작 반년만에 이런 신세계로 만든 그레이 지브롤터가 사실은 옳았던 것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지금까지 잘못된 세상에서 살고 있었던 게 아닐까?

     물을 긷기 위해 우물로 갈 필요 없이 수도꼭지를 들기만 하면 물이 흘러나오고(사용할 수 있는 물의 양은 제한되어있지만).

     

     수도꼭지의 방향을 바꾸면 따뜻한 물이 흘러나오고(일정량을 사용하면 다시 온수가 나올 때까지 시간이 걸리지만).

     아이페리아 상회라는 곳에서 골드나 탈러를 내면 물건을 다양하게 사들일 수 있으며(간혹 골드를 냈다가 가짜 골드라는 것에 낭패를 겪기도 했지만).

     바르셀로나가 아닌 지브롤터 영지 내부의 여러 구역을 열차와 마도자동선 등을 타고 이동할 수 있게 되었으며(영지 자체를 벗어나는 건 허가를 받아야 하지만, 이는 당연한거고).

     본래의 지브롤터가 이미 수년 전부터 제국식 문화를 받아들여 그렇게 발전되어 있다고 하던데 그곳을 직접 구경하고 관찰하고 경험하게 되었으니.

     바르셀로나의 사람들은 직감했다.

     아.

     더 이상, 이전의 삶으로는 돌아갈 수 없겠구나.

     역체감이라고 하는 말이 이런 것이로구나.

     사람들은 하나둘, 우스갯소리로 그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제국 문화가 머릿속에 쑤셔박혀서, 이제는 제국것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려어엇ㅡㅡ!!

     “…미친놈들인가?”

     어젯밤 술집에서 남자들이 지껄이던 음담패설이 떠올라, 나는 아침부터 머리가 아파왔다.

     약 반 년.

     바르셀로나는 반쯤 제국식 도시로 탈바꿈했고, 영지민들은 이제 더 이상 바르셀의 흔적을-황금여명을 찾지 않았다.

     그리고 그 발전의 기반에는 모두 황금이 있었다.

     막대한 황금이 있었기에, 영지민들은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스스로 바뀌어나갔다.

     제국만세, 까지는 아니더라도.

     덮어놓고 제국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것보다, 제국의 것이 좋은 게 있다면 들여와서 우리가 써도 문제는 없으리라고.

     노스트럼의 황금여명이 뿌리깊게 드리웠던 바르셀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보수적이고 순수했던 황금색 밀밭의 수수한 소녀는 이미-

     -흐아앙! 제국의 것 굉장해요오오!!

     “…씁.”

     뭐, 그렇게 되었다.

     실제로 그런 느낌이기도 해서, 나는 바르셀로나 영지민들이 술자리에서 자조적으로 내뱉는 그런 말에 헛웃음이 나올지언정 일부러 그걸 억제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그저.

     

     “슬슬, 자리를 비워도 될 때가 되었나.”

     반 년 가까이 달려온 결과, 이제 총독이 일주일 정도 자리를 비워도 될 정도로 바르셀로나는 안정되었다는 것에 만족하고 있기에.

     “더 더워지기 전에 얼추 정리된 게 정말이지 다행이군.”

     시간이 되었다.

     누군가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을 마무리 할 시간이.

     * * *

     늦은 밤, 바르셀로나 모 출입금지구역.

     바르셀로나 총독부로부터 마도바이크를 타고 약 30분 정도 달려야 나오는 평지의 위, 벽돌로 쌓은 5m 짜리 울타리가 펼쳐진 제국식 공장의 출입구가 열린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미리 ‘공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로버트 경이 나를 맞이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날이 갈수록 표정이 더 좋아지는 것 같은데?”

     “그야 이제 더 이상 땅파고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로버트 경 뒤에 있는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

     로버트 경의 뒤, 강인한 체격의 ‘여인’들이 피식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두들?”

     “아아.”

     어느날 갑자기 바르셀로나의 땅-정확히는 지브롤터 땅에 나타난 수수께끼의 근육질 여성 인부들.

     “마음 같아서는 우리도 당장 저기 협곡을 파내려가는데 같이 하고 싶지만, 황금의 땅에 구멍을 파내려가는 것도 우리의 임무이니.”

     막 남자처럼 우락부락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실전으로 다져진 압축근육이라는 게 무엇인지 보여주는 존재들.

     “가만히 숲에 있는 것보다 이렇게 몸을 움직이니 이 얼마나 보람찬 일이란 말인가.”

     “땅을 뒤엎는 건 우리에게 맡기시게. 후후후.”

     그녀들은 로버트 경 만큼이나 다부진 체격을 자랑하며 삽을 들고 땅을 파내는 이들로, 세간에서는 ‘굴착 요정’이라고 불리우는 여인들이다.

     “하아. 처음 봤을 때는 이런 모습은 아니었는데.”

     “로버트 경이 진짜 처음을 못 봐서 그래.”

     “그건 저도 별로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지금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취향의 차이 아닐까?”

     바르셀로나의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한 굴착 요정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제국의 그림자?

     보육원의 고아들?

     다 아니다.

     백옥같은 하얀 피부.

     귀에 걸려있는 인식저해 마법을 해제하면 드러나는 뾰족한 귀.

     그렇다.

     

     이들은 백금경 산하에 있던 엘프들이다.

     그 수가 그렇게 많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한 명 한 명이 상급 기사에 준하는 일당백의 전력을 가지고 있다.

     정정.

     기사라기보다는, 상급 노동자들이다.

     이들이 왜 이렇게 우리 지브롤터에 협력하고 있는가?

     “그레이 경.”

     “예.”

     “얼마 전에 총독부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서 청년과 같이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결혼할 것 같다. 해도 상관없나?”

     “얼마든지요.”

     인간사회에 녹아들고 싶어하기 때문.

     노스트럼 사람들이 제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에 체질이 변하는 것처럼, 엘프들에게는 인간 사회 전체가 새로운 자극이 되고 있기 때문.

     “엘프라는 걸 숨긴 채 살아간다면 분명 수명에 관한 문제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뭐…남자 입장에서는 죽을 때까지 평생 아름다운 미녀와 함께 살아간다면 나쁠 것도 없죠.”

     “음. 그렇군. 하지만 들리는 바에 따르면, 노스트럼 남자들은 이런 근육질의 여성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그건 노스트럼의 잘못된 인식입니다. 나리아 여왕을 보셨던 걸 기억하십니까? 앞으로는 그녀와 같은 체격을 가진 이들이 인기를 끌 겁니다.”

     “음. 그렇다면 알겠네.”

     엘프들은 더 이상 숲에서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것은 백금경이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대비도 대비지만, 노스트럼이 아닌 지브롤터라면 엘프들도 충분히 융화되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기 때문.

     “그레이 경. 귀는, 여전히 드러낼 수 없나?”

     “예.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괜히 귀가 드러난다면 당장 우리 국왕 전하께서 엘프랑 한 번 어떻게 해보고 싶어서 난리가 날 테니까요.”

     엘프라는 종족에 대한 환상을 가진 이들이 너무나도 많다.

     지브롤터에 있는 이들은 그나마 아름다움에 어느정도 내성 같은 게 있기는 하지만, 노스트럼 전체는 아직 제국적 인식이 부족하다.

     “나리아 여왕이 즉위하고 관련된 법이 제정되고, 엘프들이 기꺼이 귀를 드러내고 인간과 함께 살아갈 때까지 앞으로 반 년 남짓입니다.”

     “으음, 기다리지. 세인트 지오, 그 폐왕이 사라질 때까지.”

     

     엘프들이 대외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당연히 세인트 지오 때문이다.

     미인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양반인 만큼, 엘프를 내놓으라고 또 무슨 미친 짓을 벌일지 모르니까.

     “그런데, 그레이 경. 저걸 무능왕에게 보여줬을 때 받아낼 걸 생각해봤나?”

     “아, 그거요.”

     엘프들이 건물 안쪽, 굳게 닫혀있던 두터운 철문을 좌우로 열어젖혔다.

     구구구.

     아래에 달린 철제바퀴가 굴러가며 철문이 열리고, 팟하는 소리와 함께 조명이 반짝인다.

     “내부에 들어갈 가구만 빼면 사실상 다 만든 셈이네만.”

     반 년.

     “설마 모든 걸 황금으로 만들지 않았다고 다시 만들라고 하지는 않겠지?”

     “…….”

     

     황금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전열함 한 척이 공장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황금의 방주.

     “앞으로 반 년 뒤면 죽일 거라서요.”

     죽기 전에 무능왕에게 보여줄 가장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선물이며.

     “나리아가 성인이 되면, 더 이상 살아있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하늘을 나는,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을 위한 아주 특별한 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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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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