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258

       세상에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었으니, 하나는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천명(天命)이다.

       

       천명이란 곧 여신의 명령이다. 평소 은둔하며 살아가는 대정령들이 오늘 모인 것 또한 그 명령 때문이다. 회합 장소로 예정했던 ‘안온의 나루터’에선 벌써 두 명의 정령왕이 도착해 있었다.

       

       “나머지 둘은 왜 이리 늦는가?”

       “어젯밤 넥타르라도 한잔한 거 아닐까요?”

       

       상반신을 홀랑 벗은 남정령이 코웃음을 쳤다.

       

       그의 이름은 ‘이프리트’. 모든 불의 정령을 통솔하는 화계의 군주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 번 모이기 더럽게 힘들군!”

       

       쾅! 이프리트가 책상을 내리쳤다.

       

       그는 불같은 성격이라 잠깐의 기다림도 참지 못했다. 

       

       그런 이프리트를 달랠 수 있는 건 한 명밖에 없었다.

       

       “화군(火君)께서 부지런한 것일 뿐이니 너무 화내지 마세요. 정각이 되면 다들 올 거랍니다.”

       

       바로 옆에서 기분을 맞춰주고 있는 여인. 그녀는 수계(水界)를 관장하는 통솔자로, 자애롭고 인자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물의 정령왕, ‘시큐엘’이었다.

       

       “저기 봐요. 나머지 셋이 오고 있잖아요.”

       

       시큐엘은 물꽃을 쓰다듬던 손으로 어느 곳을 가리켰다. 그녀의 말마따나 체격이 바위 같은 남자가 척척 걸어오고 있었다.

       

       “안녕들 하신가!”

       

       땅의 정령왕, ‘노움’.

       

       “지군(地君)이 왔군. 나머지 하나는 어디 있지?”

       “그녀는 위에 있잖소.”

       

       노움이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프리트의 시선이 창공을 향했다.

       

       그곳에는 한 여인이 둥실거리며 떠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등에 달린 리본을 어루만지다가 차분히 내려왔다. 머리에는 월계관을 쓰고 있었는데, 그것이 보이는 옷의 전부였다.

       

       그 외에는 의복이랄 게 없었다. 색감을 탄 공기로 천을 입긴 입었으나 야릇한 밤옷처럼 반쯤 비춰 보이던 탓이었다.

       

       “…….”

       

       꾸벅.

       

       반나체의 여인이 고개를 숙이더니, 질소 화합물처럼 살며시 내려앉았다.

       

       “에어리얼까지 전부 모였군!”

       

       노움이 호탕하게 웃으며 인수를 세었다.

       

       주변에는 상급 정령과 최상급 정령들로만 구성된 문무백관이 대기하고 있었다. 마왕군이 급습하더라도 문제없을 전력이었다.

       

       심지어 이곳은 정령계에서도 가장 깊숙한 ‘안온의 나루터’. 얘기가 새어 나갈 가능성은 만에 하나 없으리라.

       

       “좋소, 서로 오랜만이니 사담부터 좀 나눕시다.”

       “잠깐만요.”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찰나, 시큐엘이 막아섰다.

       

       “아직 한 명이 착석하지 않았어요.”

       “뭐라?”

       

       시큐엘은 손을 흔들었다.

       

       최상급 정령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방향이었다.

       

       “앨리스, 이제 그만 나오세요.”

       

       시큐엘의 부름에 눈을 감고 있던 한 여정령이 고개를 숙이며 나왔다.

       

       “당신도 앉아야지요.”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또 이러신다.”

       

       나루터 중앙에 마련된 의자는 총 다섯 개. 이프리트는 왜 다섯 개인지 알지 못했다. 아무래도 저 여정령을 앉히려는 듯했다.

       

       그런데 저 정령이 당최 누구란 말인가.

       

       허리까지 떨어지는 머리카락은 첫눈처럼 곱지만, 목소리에는 초췌하고 탁한 기색이 깔려있었다. 눈은 여전히 감고 있어서 어느 계통의 정령인지 알 길이 없었다.

       

       “저는 원래 자리로 돌아가서 말씀만 듣겠어요.”

       “사양치 말고 이쪽으로 오세요, 얼른.”

       “다른 정령왕께서 윤허하지 않으실까 봐 그렇습니다.”

       “됐으니까 빨리요.”

       

       이프리트는 슬슬 인내심이 달했다. 그리고 이는 다른 왕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좋으니 그냥 들어와서 앉으시오.”

       “수군(水君)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이유가 있겠지. 얼른 앉게!”

       [끄덕끄덕.]

       

       세 정령왕의 눈치를 보던 여정령은 마지못해 다섯 번째 의자에 앉았다.

       

       여정령의 팔 주변은 쇠사슬과 갈고리로 돌돌 말려있었다. 총 108개로 이루어진 사슬 더미에선 각각 섬전이 튀겨 나왔다.

       

       “…그 아이는 누구지?”

       

       이프리트가 물었다.

       

       “아틀라스의 친척이지요.”

       “뭐라…!”

       

       세 정령왕은 깜짝 놀라며 입을 떡 벌렸다.

       

       전군(電君) 아틀라스. 그는 오래전 마왕에게 살해당한 정령왕이었다.

       

       “그때 식솔들도 전부 죽었다고 들었는데?”

       

       전계마도의 정령왕이 시해되었을 때, 마왕은 그의 구족을 멸하였다. 구족을 멸했다는 것은 전계정령을 몰살했다는 말과 똑같았다.

       

       “눈을 떠 보게!”

       [끄덕끄덕!]

       

       정령왕들이 독촉했다. 백발의 여정령은 슬며시 눈을 뜨며 목례를 올렸다.

       

       “…….”

       “…….”

       “…….”

       

       나루터 정자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이럴 수가.”

       

       여정령의 눈은 금빛이었다.

       

       즉, 그녀는 가녀린 금안들의 정당한 보호자이자 차기 전계 정령왕의 적법한 후계인 것이다.

       

       “자네, 아까 이름이 뭐라고…?”

       “앨리스라고 합니다.”

       “일이 어떻게 된 건가? 여태 어디에 있다가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거지?”

       “말씀드리자면 깁니다.”

       

       앨리스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제아무리 정령왕이라지만 전계마도의 정령은 매우 오랜만에 보거나, 아니면 처음으로 본다.

       

       특히 노움과 에어리얼은 대전쟁 이후 즉위했다. 수백 년 통치하면서 앨리스는커녕 전계정령을 한 개체도 보지 못한 셈이다.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뒤로 엘리스의 기나긴 설명이 시작됐다.

       

       “저는 전란 당시 갓 태어난 하급 정령에 불과했습니다. 하여 여신님의 명을 받고 마왕의 눈을 피해 있었습니다.”

       

       앨리스는 다른 세계에서 지내다 왔다. 여신의 칙명이었다. 그곳에서 누군가를 잘 보살펴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그곳에 있는 동안 시간의 축이 뱀처럼 꼬이고 뒤틀렸다. 하여 앨리스는 오랜 시간 아렌스 대륙에 있지 않다가, 최근에 이르러서야 시큐엘과 접촉한 것이었다….

       

       그것이 요약의 전부였다.

       

       “하나도 거짓이 없으렷다.”

       “여신님께 맹세합니다.”

       “흐음.”

       

       세 정령왕이 침음을 삼켰다.

       

       “신기한 일이로구나.”

       [끄덕끄덕.]

       

       세계에 제한적인 영향만 끼치는 여신님께서 정령 하나를 콕 집어 다른 세계의 특사로 임명했었다니.

       

       그만큼 당시 상황이 급박했다는 뜻이었다.

       

       “좋아, 그렇다면 우리와 동석해도 문제없지.”

       [끄덕끄덕.]

       “그런데 수군(水君)은 이 정령의 생존을 어찌 알았소?”

       

       물의 정령왕, 시큐엘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야 여신님께서 귀띰을 해주셨으니까요.”

       “그렇군.”

       

       전계 최후의 정령이다. 상냥하고 아량이 넓은 대정령과 먼저 대화를 나누어야 대우가 알맞을 것이다.

       

       시큐엘은 자신이 맡은 역할을 착실히 해냈다. 덕분에 다른 정령왕도 지금에 이르러서야 얼추 납득할 수 있었다.

       

       “전계정령은 예전에 멸족한 줄 알았더니, 생존자가 있었군.

       “이렇게 좋은 날 술이 빠지면 섭섭하지! 하하하! 여봐라!”

       

       노움은 상급 정령들을 시켜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가져오게 했다.

       

       정사를 논의하기 전 가볍게 술로 몸을 덥힌다. 포도를 비롯한 과채를 즐기고, 잠시 마음을 추스르는 시간을 가졌다.

       

       정결하고도 은은하게 취한 분위기 속에서, 정령왕들은 본제를 꺼내기 시작했다.

       

       “오늘 이렇게 모인 이유는 이번 엘프들이 신목(神木)을 대규모로 견학하기 때문이다.”

       “허허, 매년 있는 일이지!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나?”

       “제 휘하 정령들이 보고를 올렸어요. 조만간 세계수가 큰 위험에 빠질 것이라면서.”

       [끄덕끄덕.]

       

       시큐엘과 에어리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두 정령왕은 각각 물과 바람을 관장한다. 물과 바람을 매개로 한 정령들은 멀리에서 오는 소문도 들을 수 있었다.

       

       “마왕군에 불온한 움직임이 있다고 들었어요.”

       “아, 그건 이 몸도 알지. 하하!”

       

       넥타르에 취한 노움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얼마 전 대지가 흔들렸지. 아주 크게 말이야! 그 때문에 내 친척들이 한동안 잠을 자지 못하였네!”

       “그게 무슨 징조일까요?”

       “그건 여신님만이 알겠지!”

       

       정령이라고 모든 사실을 정확히 알아내는 건 아니다.

       

       그들 또한 일개 종족이다. 단지 여신과 가장 가까운 종족일 뿐.

       

       “나로선 강력한 지진파가 생겼다는 것만 알 수 있었네. 만약 무언가가 폭발해서 생긴 지진이라면 에어리얼이 알 걸세.”

       [휙, 휘익.]

       “응? 안다고?”

       [끄덕끄덕!]

       

       에어리얼은 열심히 팔을 휘적거리며 설명했다. 그녀는 팔을 번쩍 들어서 버섯을 여러 번 그렸다.

       

       [휫, 휘익!]

       

       동시에 휘파람을 불며 폭발을 묘사한다.

       

       조그마한 체구의 소녀가 온갖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으니, 그 모습을 다른 정령왕들이 보기엔 퍽 어리숙하고 귀여웠다.

       

       “그래, 그렇군.”

       

       나머지 정령왕은 저마다 다른 미소를 지었다.

       

       “그 정도로 파괴력과 폭발력을 지닌 마법을 구현할 수 있는 존재가 마왕군에 있는 거겠죠. 대체 누구일까요?”

       “일단 최소 사천(四天)급이겠지.”

       

       정령왕들은 턱을 괸 채로 추리를 이어나갔다.

       

       “민천 요르문간드는 아닐 거다! 그 녀석의 기술에는 하나같이 형태가 없어!”

       “호천도 아니겠지요. 그자는 고문과 암살이 특기지,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는 스타일은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나머지 둘 중 하나인가?”

       

       맹렬한 추리 끝에 어느덧 후보는 둘로 좁혀졌다.

       

       창천의 파스모와, 상천의 에테르.

       

       “…상천은.”

       “상천은 사천 중 최약체예요. 그만한 지진파를 낼 수 있을 리 없죠.”

       “그렇다면 창천이라는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합리적이었다.

       

       “창천의 실력이 사천 중 으뜸이긴 하지!”

       “설마 호롱에 의한 것인가?”

       “모르겠어요. 괴이란 괴이는 다 몰고 다니는 남자이다 보니까….”

       

       어쨌든 방향성은 하나로 좁혀졌다.

       

       이번에 세계수는 공격받을 확률이 높다. 그전에 사대정령이 서로 협력하여 방화(放火)를 막아야 한다. 여신도 그것을 위해 네 정령의 회합을 명한 것이다.

       

       “보이는 마수가 있다면 사양 말고 주륙하라고 하셨지.”

       [끄덕끄덕.]

       

       카우렐리아는 정령계로 통하는 입구.

       

       정령계는 곧 여신의 영역과도 밀접하다. 그러니 반드시 사수해야 한다. 예전과 같은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단순히 삿된 기운만 느껴져도 찾아내서 갈가리 찢어놓도록 합세.”

       “자, 잠깐만요.”

       “으음… 뭔가?”

       

       회의 내내 가만히만 있던 앨리스가 손을 들었다.

       

       “저, 이렇게 된 거. 사대 영군(靈君)들께 고백할 일이 있습니다.”

       

    다음화 보기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