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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58

       라고 생각했던 것도, 벌써 몇 년 전.

        

       “…….”

        

       “…….”

        

       덜컹거리며 움직이는 기차 안에서 앨리스가 마주 보고 앉아있는 상대는 앨리스가 기억하던 그 상대가 아니었다.

        

       어깨 정도까지 기른 푸른 머리카락이 몽환적이다. 앨리스의 기억과는 다르게 풀어헤친 머리카락의 끝은 굽이굽이 물결치고 있어서, 평소에 그녀가 보이는 모습만 아니었다면 어딘가의 귀한 집 자식이라고 생각할 만했다.

        

       아니지, 어딘가의 귀한 집 자식이라는 점에서는 틀림이 없었다.

        

       아주 어렸던 시절에는 길가에서 자랐고, 이후에 사람을 물건처럼 파는 고아원에 잠깐 있다가 원장을 살해하고 도망 나오긴 했지만, 그녀의 몸 안에는 황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심지어 적통인 앨리스보다도 더.

        

       “너, 원래도 이런 짓을 했었던 거야?”

        

       “이런 짓이라니?”

        

       뜬금없이 클레어가 입을 열어서, 앨리스는 힐끔거리던 눈을 아예 클레어 쪽으로 고정하고 대답했다.

        

       클레어는 상당히 짜증 난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황제가 직접 명령한 일에 하나하나 끼어들어서 너도 하겠다고 억지 부리는 거.”

        

       “…….”

        

       원래도 했던 짓이긴 했다.

        

       한창 실비아에게 질투심과 열등감을 느끼던 때는, 정말로 실비아가 하는 일 하나하나를 다 따라 하려고 했었다. 그때마다 실비아는 앨리스는 미처 따라 하지 못할 정도로 더 완벽하게 일을 해냈고, 당연히 앨리스는 그때마다 더 큰 열등감을 느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실비아와 길게 대화를 나눈 것은 이 기차 안이 처음이었다. 애초에 앨리스는 실비아 근처에 계속 있는 것을 껄끄러워했었으니까. 하지만 기차 안에는 그 실비아보다도 더 껄끄러운 두 존재가 있었고, 앨리스는 어쩔 수 없이 실비아 앞을 택했다.

        

       그리고 그 기차 안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앨리스에게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했나 보구나.”

        

       클레어는 괜히 콧방귀를 뀌고 창밖을 보았다.

        

       “사이가 좋아 보여서 어렸을 때부터 엄청 친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클레어의 그 말에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어. 나는 여기서 샤를로트를 처음 만났으니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하아, 하고 클레어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나는 분명히 언니랑 같이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

        

       “아, 나도 알고 있어. 지금 상황에서는 무조건 조심하라는 거지? 이런 말도 웬만하면 꺼내지 말고.”

        

       다행히 루카스와 제이든은 자기들만의 대결에 빠져있었기에 이쪽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클레어도, 앨리스도, 클레어의 혈통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번에 ‘루카스’가 고른 대상은 팬그리폰의 피가 섞이지 않은 실비아가 아니라, 진짜로 황제의 피가 섞인 클레어라는 점에서 더 위험했다. 자칫 잘못하면 ‘황제의 계획’대로 세상이 굴러갈지 모른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언니도 말했잖아. ‘그렇게 굴러갈 리는 없다’라고.”

        

       이쪽으로 오고 나서 앨리스는 실비아를 딱 두 번 만날 수 있었다.

        

       ‘실비아 팬그리폰’이 아니라 ‘실비아 그레이스’가 된 실비아는, 황궁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엄청나게 열심히 참가하고 있었다.

        

       클레어가 ‘검술 실력’으로 ‘그레이스’가 되었다면, 실비아는 그 특유의 지식으로 눈에 들었다는 모양이다. 그렇기에 어린 시절 검술에 매진했던 클레어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클레어가 그레이스류 검술을 계승 받은 이 중 하나였다면, ‘실비아 그레이스’는 그야말로 양갓집 규수 같은 모습이었다.

        

       이전을 기억하고 있는 앨리스, 클레어, 실비아와는 다르게, 약혼자가 없는 실비아의 파트너로 참석한 레오는 두 사람의 기억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는 건 지보나 여신의 계획과 관련이 없는 이들은 세상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게 아닐지도 모르죠.”

        

       그레이스 가에 가서도 말투를 고친 실비아는 그렇게 말했었다. 무도회 안이었으니 당연하긴 했다. 남작가의 영애가 아무리 황녀와 친하다고 하더라도 반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하지만 클레어는 그런 실비아를 보고 영 개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이야기의 도입부가 달랐으니까. 제가 마차에서 얻어맞았던 과거는, 사실 있을 수 없는 과거입니다. 애초에 시간을 돌려 그 이전에 탈출해버렸기에, 사실 저는 그 남자와 얼굴조차 마주치지 않은 것이 돼야 했었어요.”

        

       말투가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은데. 군인 같은 말투를 쓰던 이전 모습과는 다르게, 열심히 설명하는 실비아의 모습은 문자 그대로 남작가 영애다웠다. 어떤 의미에서는 클레어보다 더.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길러서 등 뒤로 내린 채 짙은 남색의 드레스를 입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있으니, 솔직히 같은 사람인가 싶기도 했다.

        

       ……그런 중요한 이야기 도중에 그런 사실을 굳이 지적할 만큼 앨리스가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웃음을 참으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그러니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과거는 ‘과거’가 아닐지도 모르죠. 어쨌거나 여신은 제가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거고, 하필이면 그때 우리가 들고 있던 그 지보가 완성품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제가 가지고 있던 권능의 일부가 클레어에게 넘어가면서 어떻게 변해버렸는지도 아직은 잘 모르고.”

        

       “우리가 환상 속에 있다는 거야?”

        

       “단순한 환상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동시에 여신이 바라는 바가 있겠죠. 시간을 돌린 것이 아니라 상황을 물리고 다시 재생시켰던 거라면, ‘그런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도 여신의 권능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앞으로 언니가 더 위험해질 수 있다는 거야?”

        

       클레어는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잠깐 집중하지 못하고 있던 앨리스도 그 말에는 정신을 차렸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소리죠. 그러니 우리도 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앨리스가 물었다.

        

       “글쎄요.”

        

       실비아는 잠깐 고민하더니 말했다.

        

       “지보를 미리 찾는 것이 가장 좋겠죠.”

        

       “이 안이 환상일지도 모른다면서?”

        

       클레어의 말에, 실비아는 미간을 살짝 좁히고 생각을 정리하듯 천천히 말했다.

        

       “환상이라고 하더라도, 이렇듯 현실과 똑같이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면 ‘그저 환상’이라고 하고 넘어갈 만한 곳은 아닙니다. 분명 우리가 살던 세상과 크게 다를 것이 없을 거예요.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내기에 여신의 힘은 부족하니까. 분명 우리가 살던 세상을 바탕으로 이 공간도 창조해냈거나, 아니면 임시로 변형시켰거나.”

        

       실비아는 손에 쥐고 있는 음료 잔을 살짝 움직여 보였다. 안에 있는 음료는 찰랑거리며 반짝였다. 그 모습은 그저 상상만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어차피 여신은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고쳐나갈 생각이었습니다. 그 불순물을 제거하는 과정이니 잠깐 세상이 망가져도 상관없겠죠.”

        

       “…….”

        

       “게다가, 솔직히…….”

        

       실비아는 미간을 잠깐 찡그리고 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건 아직 확실하지 않으니, 확실해지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거기까지가, 실비아와의 두 번째 만남에 있었던 일이다.

        

       여신의 의도대로 재창조되었으니, 당연히 황제의 의도대로도 굴러가지 않을 거라는 게 실비아의 의견이었다.

        

       “그렇다고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고 있으면 안 되겠지.”

        

       “……그렇지. 언니도 나름대로 열심히 움직이고 있으니까.”

        

       앨리스의 말에 클레어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

        

       내가 이렇게 돌아온 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아니, ‘정말로’ 빠르게 흘렀다.

        

       이건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다. 마치 중간중간 기억이 사라진 것처럼, 장면의 프레임이 부자연스럽게 뚝뚝 끊어진 것처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야기가 마구 진행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내 의지 자체는 반영되고 있다. 어떤 계획을 하고 나면 그 계획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집중하지 않는 순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순간, 멍때리고 있는 순간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지나갔다.

        

       누군가 엄청나게 서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서두르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알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을 보고 난 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러 아카데미에 입학할 때가 되었다. 적어도 ‘몇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는 감각은 없었다.

        

       클레어와 앨리스도 이 사실을 깨달았을까?

        

       “언—”

        

       사람들이 잔뜩 있는 복도에서, 저 멀리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전과는 다르게 클레어는 이미 내가 자기 ‘언니’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클레어가 나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다가오기도 전에, 역시 마찬가지로 나에게 반갑게 달려오는 존재가 있었다.

        

       “누님!”

        

       “엑.”

        

       레오의 목소리에 클레어가 그런 소리를 숨기지도 못하고 내뱉었다.

        

       “레오.”

        

       그런 레오에게 얌전히 대답하자, 클레어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버렸다.

        

       음, 뭔가 소름이 끼치는 걸 본 것 같은 표정이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원감사는 최대한 빨리 추가하도록 하겠습니다!

    =

    Ilham Senjaya 님, 후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익명으로 후원해주셨기에 독자닉네임 기능으로 인사드립니다.

    이렇게 큰 돈을 후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후원과 칭찬은 모두 작가인 제게 큰 도움이 됩니다. 무언가를 써서 어딘가에 올린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가 읽어주기를 바란다는 것이고,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대부분의 작가에겐 나름대로 관심을 바라는 마음이 있다는 뜻이겠죠. 저도 그렇습니다. 저의 글을 읽어주시는 분이 많을 수록, 댓글을 써주시고 추천을 해주시는 분들이 많을 수록 글을 쓰는 보람을 느낍니다. 그래서 다음화가 나올 수 있는 거고, 다음 작품도 나올 수 있는 거고요.

    처음 써서 올렸을 때는 아무도 읽어주지 않으면 어쩌나, 수익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조회수와 선작수가 오르지 않으면 어쩌나,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어느새 제가 쓴 그 어떤 소설보다 많은 분들께서 읽어주셨습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작년부터 올해까지, 제가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작가라는 직업을 가지게 되어서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기왕이면 그 행복이 계속 지속될 수 있도록 꾸준히 글을 쓰는 존재가 되겠습니다.

    다시 한 번 후원 감사드립니다. 마지막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

    프라시아 님, 후원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만화나 라이트노벨에서 캐릭터들이 종종 외치는 캐치프라이즈같은 대사를 참 좋아합니다. 아니면 특촬물에서 나오는 변신장면이라던가요. 수십년씩 이어진 시리즈물을 관통하는 중요한 명대사나, 어떤 캐릭터를 상징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대사도 참 좋아합니다. 다시! 라는 대사는 사실 처음에는 노린 대사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주인공이 시간을 돌릴때마다 딱 구분할 수 있는 연출을 넣는게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이었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너무 길면 반복될때마다 지나치게 지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짧게 ‘다시!’하고 외치는 장면을 넣은거죠.

    그런데 그 대사가 실비아를 상징하는 대사가 되어서 참 좋습니다. 다른 작가분들은 어떠실지 모르지만, 저는 사실 대사를 쓸 때 깊게 생각하고 ‘이러면 멋있겠지’하고 넣는다기보다는 그냥 그 캐릭터라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싶은 대사를 써내려가는 편입니다. 그런 대사들이 독자 여러분에 마음에 들어서 회자되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요.

    저의 소설을 좋아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독자 여러분들께서 좋아해주실만한 글을 쓰는 작가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

    에센스영한사전 님, 후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글을 꾸준히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도전만 하고 남들에게는 보여줄 용기도 없었는데, 한 번 충동적으로 올리기 시작한 글을 읽어주시고 재미있다고 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처음 연중성녀를 연재하던 시절에도 이미 작가라는 꿈을 이룬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었는데, 지금은 문자 그대로 그 꿈을 이루었네요. 제 소설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분 덕분에 이룰 수 있었던 소중한 꿈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포기하지 않은 것은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그 꿈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성실하게 글을 쓰는 작가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이 작품이 완결나더라도 언젠가 또 다른 작품에서 만나뵐 수 있도록, 매일 정진하는 작가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후원 감사드립니다! 마지막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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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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