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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59

       약속을 강제하려면, 증인은 많을수록 좋다.

        

       레반이 약속을 어기고 발뺌하는 그런 사람이라 생각하지는 않지만……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사실 생각해보면, 암흑 진화를 할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고.

        

       기정사실화해둘 필요가 있겠더라.

        

       그래도, 응.

        

       드물게 상쾌한 기분이어서. 레반이 코스프레를 할 예정이다- 라고 확정짓지는 않았다. 혹시, 혹시 곧 죽어도 싫다는 입장이면……취소할 여지는 있어야 하니까.

        

       아무렴……아직은, 그날 대체 무슨 얘기를 했는지 모르는 입장 아닌가. 오죽 싫다고 버텨댔으면 내가, 아무리 술김에라고 해도, 나도 하겠다고 했을까- 하고 생각해보면……차마 무리하게 추진하기는 조금 그렇더라.

        

       ……그래도, 팬들이 좋아할 텐데. 그냥 확정지을까.

        

       제법 웅성거리는 관객석을 잠시 훑듯이 살펴봤다. 수용 인원이 몇 백명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막상 모아놓고 보면 이렇게 많구나.

        

       방송을 켜면 찾아와주곤 했던 만 명, 2만 명 하는 숫자가 정말이지 얼마나 비현실적인 수치인지. 그 많은 사람들이 나 보겠다고 왔고, 또 오고 있는 건가하고 생각하면- 조금, 벅찰 정도더라.

        

       ……지금 방송 켜면 몇 명이 와주려나.

        

       이런 저런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 시끌벅적한 울림을 잠시 듣고 있자니, 스멀스멀, 새로운 욕심이 생겨나는 것 같아서. 잠시 고민하는 사이-

        

       “아……하, 하. 은퇴라니요! 나오나 실력만큼이나 유머감각도 갖춘 우리 아따먹 선수입니다. 자, 그러면 다음으로- 오늘의 우승으로, 한국 서버를 대표해서 진출하게 되셨는데요. 응원하시는 팬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인터뷰를 담당한 해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아, 팬. 팬이라.

        

       “네……지켜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뭐라도 해드리고 싶은데, 항상 어렵네요. 그리고-”

        

       대회에 대해서 무어라 말하고 싶었으나- 망설임이 혀끝을 붙잡았다. 어디까지 말해도 괜찮을지 알 수가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은 넘치도록 많았음에도.

        

       의무감이 옅어진 탓이다.

        

       어느 날 이곳에 왔듯이, 어느 날 갑자기 두둥실 떠나갈지 모르겠다는 두려움에- 이런 저런 의무와 목표로, 연결고리가 되어줄 만한 걸 다급하게도 찾아서 몸을 칭칭 감았더랬다. 무언가가 흐려지면 다음 고리를 연결하고- 또, 무언가를 찾아가며.

        

       하지만-

        

       “아따먹! 아따먹! 아따먹!”

       “사랑해요!”

       “누나아아!”

       “여기 한번만 봐주세요!”

       “캠 갖다 버려라!”

        

       이제는, 그런 게 없어도- 땅에 발을 딛고 서있어도, 떠오르지 않고……머무를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아, 우리 아따먹 선수가 응원해주신 팬 여러분을 생각하니 울컥하는 것 같네요. 전장을 휘젓는 전사이지만, 팬들 앞에서는 여린 영웅입니다. 자, 다들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대회, 팬들을 위해 뭐라도 하자- 라는 생각으로 출전했는데.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낸 적은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그저 즐기고 있을 뿐이었으니. 누가 누굴 위한다고.

        

       시선은 다시 한번 관중석을 훑었다. 소리를 지르고 있는 사람들과, 맨 앞자리에서 어딘가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레반. 옆사람이 불편해할 정도로 소리를 지르고 있는 아리는……조금, 자제해야 할 것 같은데.

        

       지니는……응. 뭐라고 입모양으로 말하는 것 같은데……멀어서 안 보여. ‘자제해’처럼 보이는데, 그럴 리는 없고.

        

       천천히, 맨 뒤에서부터 관중들 하나하나를 빠르게 살피듯이 훑었다. 얼굴을 기억하는 건 무리겠지만, 그래도 한 명 한 명 눈에 담아두고 싶어서.

        

       그러던 중, 절반쯤 왔을까. 익숙한 실루엣에 시선이 덜컥 멈췄다. 피켓으로 얼굴을 대부분 가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확신할 수 있는.

        

       이예리……. 

       

       아니.

        

       언니다.

        

       피켓에 적은 문구가, 음. 초등학교 시절에 고정된 걸까. ‘우윳빛깔’……저거, 진짜 20년 전에나 쓰던 멘트 같은데. 최소한 나는 근 10년간 들어본 적이 없다. 아니, 아리가 시위에서 썼던가.

        

       어느 쪽이든, 초등학생 이후로는 이런 데 놀러 다니는 일 없이 성실하게 살았단 거겠지.

        

       그럼에도, 왠지- 그게 더 좋았다. 따로 이야기해주지도 않고, 연락하지도 않고 왔음에도 오히려 더 좋듯이. 이 많은 사람들이 내 별칭을 연호해주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서-

       

       어째서일까.

        

       후련했다.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대회의 열기 때문일까. 오랜만에 느낀 강렬한 아드레날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

        

       아니, 이유는 중요치 않겠지.

        

       “아. 아까, 방송 홍보 말씀 주셨었는데……잠시, 괜찮을까요.”

        

       “그럼요! 얼마든지 부탁드립니다!”

        

       “내일 저녁에 중대……까진 아니어도, 발표를 할 예정이에요. 시간은 따로 공지드릴 테니, 궁금하신 분들은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우리 아따먹 선수의 중대 발표! 팬 분들께선 절대 놓칠 수 없겠네요. 시청자 여러분, 아따먹 선수의 개인방송도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아, 너무나 환한 미소입니다! 자, 그러면 이어서-”

        

       덜컥 가벼워진 마음 속으로, 욕심을 조금 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며들고 있었으니.

        

       나를 위해서도.

        

       팬들을 위해서도.

        

       친구들을 위해서도.

        

       * * * *

        

       -짠!

       

       뒤풀이 자리에 울려퍼지는 건배 소리.

       

       “이제 자리도 잡았으니까, 다시 한번! 우승 축하해! 진짜, 진짜! 너무 떨려서 구경하기도 힘들더라. 진짜 진짜 축하해! 와, 어떻게 그렇게 잘해? 갑자기 각성한 거야?”

        

       주인공인 예나의 맞은편에 앉은 진희가,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축하의 말을 건넸다. 

        

       평소에 비해 호들갑이 많이 섞인 건, 찬미가라도 읊듯이 쉼 없이 찬양을 해대는 아리에게 묘한 경쟁심이 생긴 탓이었다. 

       

       어쩐지 조금 부끄러운 기색을 내비치는 예나를 구경할 수 있는 건, 덤이었고.

        

       “……한 끗 차이였어요. 한 세트 내주기도 했고. 결국 경험 차이 덕분에 이긴 거라……다음에 다시 붙으면, 또 모르겠네요.”

        

       “3대0이었……아, 4강전 얘기구나. 근데 근데, 왜 나한테만 말 안 놔줘? 시훈 오빠한테도 말 놓던데 이제? 나 서운해서 울 것 같아. 둘은 언제 말 놓은 거야?”

        

       “……놓을게요. 자. 울지 말고, 여기 멜론 먹어. 맛있네.”

        

       조금은 다급하게 과일을 그녀의 입에 넣는 예나는, 무언가 숨기는 게 있어 보였지만-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쓴 웃음을 짓고 있는 시훈의 표정으로 미루어보건데, 딱히 무언가 달콤한 이벤트가 있었던 건 아닌 것 같았으니.

        

       “그건 그렇고. 내일 예정된 중대 발표가 뭔지, 미리 좀 듣고 싶은데.”

        

       “……중대까진 아닌데.”

        

       “그건 내가 판단할 테니까, 말하라고. 지금 카페에 댁 팬들이 몰려와서 쓴 게시글이 몇 개인지 알아?”

        

       진희는 흘긋, 시훈을 잠시 쳐다보았다. 화난 척을 하긴 하는데……연기를 못하는 사람이다.

        

       진심으로 화난 게 아니라는 건, 예나 역시 느낀 걸까.

        

       “……북적북적거리고 좋지 않나. 자, 16님도 멜론 먹어요. 다 당이 부족해서 매사가 짜증나는 거야.”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포크로 찍은 멜론을 내밀고 있었다. 직접 먹여주지는 않는구나. 진희는 움찔거리며 올라가려 드는 입꼬리를 애써 진정시키면서도- 저 거리감의 차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조금은 헷갈리더랬다.

        

       그래도, 당장 누릴 수 있는 건 누릴 일인 고로.

        

       포도알 하나를 집어서 예나의 입으로 내밀자, 잠시 망설이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내리까는 것이- 부끄러운 걸까.

        

       진희는 다시 한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끌어내리며 덤덤한 표정을 가장했다. 티를 내면 안 되겠지. 귀엽다고 생각한 걸 들키면, 분명 다시는 안 받아먹을 테니. 애초에 조금 전 받아먹은 것도, 본인도 방금 과일을 먹여놓고 거절하기는 곤란했을 뿐일 거고. 

        

       그리하여, 그녀가 과일을 두고 치열한 전략적 사고를 하는 사이.

        

       “참고로, 시훈 오빠 세무조사 해달라는 국민청원도 올라왔어요. 여기. 와, 동의 인원 올라가는 속도 봐요. 좌표 찍었나봐. 저도 동의해도 돼요?”

        

       싱긋 웃으며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는 아리는……그저 해맑아 보였다.

        

       “……차라리 사형 청원이면 농담이려니 하겠는데. 댁 팬들 진짜……아무튼, 이따가 공지 쓸 때 코스프레 합방 내기한 거라고 할 거니까. 제발 불 더 지르지 마.”

        

       “그건 약속 못하겠는데.”

        

       “내가 진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도 코스프레 시킨다.”

        

       “자. 진정하고 멜론 좀 더-”

        

       몇 차례나 잔이 채워지고 또 비워지며, 왁자지껄한 술자리가 진행되는 사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다시 한번 포도를 예나의 입에 넣는데 성공한 진희는, 처음으로 둘이 함께 했던 술자리를 떠올리고 있었다.

        

       너무나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으로,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꿈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그대로 가라앉아서 사라져버릴 것만 같던- 그 예나의 모습은, 그녀의 뇌리에 강렬하게 박혀있었던 고로.

        

       그러나, 어째서일까.

        

       자꾸만 입에 들어오는 포도를 조금 힘겨운 표정으로 오물거리는 예나는, 그때와 달리 어딘가 단단해보였다. 바람만 불어도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아서, 꼬옥 붙잡고 있어야만 할 것 같았던 것이……불과 얼마 전이었는데.

       

       아니, 생각해보면 어느 날 문득 생긴 변화는 아니었다. 조금씩.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지.

       

       그리 달라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음에도, 어떤 연유로 찾아온 변화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예나를 이해할 수 있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었으니.

       

       그저, 좋은 변화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 저 배불러요.”

       

       “반말.”

       

       “……눈이 무서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SnowOne 님, 20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er p 님, 76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익명의 독자님, 10+5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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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s Not That Kind of Malicious Broadcast

It’s Not That Kind of Malicious Broadcast

그런 악질 방송 안ㅣ에요
Score 3.7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 am a healthy skill-based broadcaster.

I don’t hate priests.

It’s not that kind of broadcast.

What?

Clarify the controversy that’s been posted on the community?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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