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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6

        

         쿵… 쿵….

         

         기업 연구소를 떠올리게 하는 고요한 순백의 복도에 나를 포함한 네 명의 발소리만 울려 퍼진다. 사실 나머지 셋이 내는 소음을 다 합쳐도 오멘 한 명도 못 이겼지만… 어쨌거나.

         

         같이 들어온 제압팀은 갈림길을 맞닥뜨릴 때마다 인원을 나누다 나누다가… 결국 우리만 남겨두고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녹턴과 오멘, 둘 만하더라도 이미 충분히 든든해서 딱히 불만은 생기지 않았으나 내부 적들의 꼴을 보니 긴장을 늦추긴 힘들었다.

         

         챙—!!

         

         “!! 어딜……!”

         

         소음기를 달은 듯, 조용히 발사된 총알을 최전방의 오멘이 가볍게 튕겨냈다.

         그 듬직한 방패를 앞세운 도미노는 팔과 옆구리 사이 틈새로 권총만 슬쩍 집어넣어서 똑같이 되갚아주었다.

         

         푸슉…!

         

         그의 권총으로부터 발사된 탄환이, 총을 붙잡고 있던 적의 손목을 거의 절단해버렸다. 그러나 정작 고통에 몸부림쳐야 할 적은 그저 실실 웃으면서 나머지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총을 주우려고 했다.

         

         “히… 히힉!!”

         

         “…씨발, 또야?”

         

         맛이 간 웃음소리를 흘리는 조직원을 본 도미노는 미련없이 이마에도 구멍을 내버렸다.

         붙잡아서 보스의 위치를 토해내게 하고 싶어도 상태가 저래서야 고문 같은 게 통할리가 없었다.

         

         “흡!!”

         

         우드득—! 쾅!!

         

         이번에는 코너에서 사시미 비슷한 칼 한자루를 쥐고 튀어나온 놈을, 우리의 방패가 직접 움직여서 쳐냈다. 단순히 팔을 밑에서 위로 휘둘렀다고 하기엔 무지막지한 물리력이 작용했으니… 싸우는 편을 잘못 고른 댓가로 그 몸은 순식간에 천장에 처박혔다.

         

         심하게 표현하면 피떡갈비가 됐다고도 할 수 있는 형체인데, 칼을 쥔 팔은 천장에서도 여전히 꼼지락거렸다.

         

         “……페인킬러네 마약이 그동안 엄청 발전했나 본데…?”

         

         “이건…….”

         

         호레이쇼가 휘파람을 불며 감탄했지만 내 정신은 여태까지 본 광경들과 남자 시절의 기억의 서고를 반추하느라 바빴다.

         

         …이제야 감이 좀 온다.

         마비된 이성, 미련없이 건물밖으로 뛰어내리는 판단력, 고통을 못 느끼는 전투원들.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도 덤벼드나 했더니 참 조직명과 잘 어울리는 마약을 개발해서 쓰는 새끼들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안심했다.

         

         네오 헤이븐에 있던 소모품 중에는 PK-452, 유저들은 편하게 스팀팩이라고 부르던 도핑 아이템이 있다.

         

         뒷골목 마약상이나 파라다이스 사의 상점에서 살 수 있는 그 푸른 액체가 가득 담긴 주사기는 부상으로 인한 이동속도 감소 패널티를 제거해줬기에 안 쓰는 사람이 없었다.

        이름 앞에 붙은 PK에 대해서는 사람의 생활과 관계된 모든 사업에 문어발식 확장을 하는 파라다이스 사인만큼. 당연히 파라다이스(Paradise) 어쩌구… 라는 추측이 많았는데… 설마 페인킬러(Painkiller)에서 뺏은 김에 기념해서 박아 둔 건가…? ……존나 악질적이다.

         

         그래도 덕분에, 이 작전이 나 없이도 성공했던 역사가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렇다는 건 나만 실수하지 않으면 일이 무사히 끝난다고 보증된 것이다…!

         

         

         한층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간헐적으로 달려드는 적들이 정리되는 걸 구경하면서 전진한다. 그렇게 얼마나 깊숙이 들어왔을까, 밍밍한 복도에 색다른 구조물이 나타났다.

         

         “오? 드디어 제대로 된 방이…? 아이보리 누님, 부탁해!”

         

         “…아이보리가 아니라, 내 이름은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 발렌타인이야! 그만 놀려…!!”

         

         “!!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 아샤? 아샤 누님!! 눈이랑 마음만큼이나 이름도 예쁘셔!!”

         

         “……임무 도중에는 닉네임으로 부르자고 하지 않았나…!”

         

         호들갑 떠는 호레이쇼를 오멘이 타박했다. 그렇지만… 이름 자체가 닉네임인 용병이 그런 말을 해도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일단 굳게 닫힌 슬라이딩 도어 옆의 키패드에 손을 대고 신호를 흘려 넣는다.

         시설 겉모습과 비슷한 수준의 보안 시스템이나 방화벽을 예상하고 조심스럽게 심상 세계를 불러온다. 노트북에 있던 조잡한 바이러스가 벌레로 구현되었던 것처럼, 사이버 공간의 침입자를 막기 위한 방어기재들은 별의별 해괴한 형상으로 나타날 수 있었다.

         

         그러니 침착하게 대비하고 기다리면……. 이거… 뭔가 이상한데…?

         

         “잠금이 이미 다 풀려 있어. 조심해.”

         

         “…….”

         

         뻔한 함정이라는 생각을 한 건 나만이 아니었다.

         약의 효과가 떨어진 도미노가 다시 각성제를 듬뿍 흡입하는 걸 확인한 후, 호레이쇼와 오멘이 시선을 교환하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쾅—!!

         

         진입은 아주 빠르고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건틀릿에 직격 당한 문이 반대편 벽까지 날아간다. 여태 뒷짐지고 놀던 호레이쇼가 한줄기 섬광이 되어 돌입하고 그 뒤를 양손에 권총을 장비한 도미노가 뒤따른다.

         

         “후우….”

         

         구석에서 숨을 죽인 채로 승전보만 기다려야하는 내 처지가 우습다. 어떻게 지원사격을 해주고 싶어도 저런 속도로 움직이는 전투를 따라잡기엔… 나는 아직 많이 모자라다.

         

         “이야…!! 결국 우리가 일등이야? 더스크 아재! 씨발, 존나 오랜만이야? 응?? 사업도 잘 나가는 것 같고!”

         “……니 밑에서 약 심부름하던 꼬마들에게 죽을 소감 좀 꼭 듣고 싶은데.”

         

         …더스크? 그 임무 목표?

         방 출입구를 틀어막은 오멘의 몸 틈새로 슬쩍 안쪽을 들여다봤다.

         

         거기엔… 푸른빛을 내는 주사기가 가득 들어찬 상자더미, 각양 각종의 시험관들, 그리고… 호화롭고 악취미적인 붉은 소파에 앉은 뚱뚱한 흑인 남자와 사족보행형 경호 드로이드들이 있었다.

         

         용병들이 코앞까지 들이닥쳤음에도, 수많은 희생을 치렀음에도 자기가 뭐라도 되는 것 마냥 거들먹거리는 건 오히려 더스크 쪽. 보스와 마주한 두 명은 과거의 악연에 종지부를 찍을 생각에 잔뜩 흥분한 게 보였다.

         

         “…패배한 개새끼 삼총사군.”

         

         “뭐…?”

         

         그가 보란듯이 꺼내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이고는 연기와 함께 열변을 토해낸다.

         

         “…넘치는 인력, 충분한 크레딧, 무엇보다 모든 고통을 잊게 해주는 꿈의 마약…!! 왜 이렇게 이 동네 출신 쓰레기들은 향상심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 이런 기반이 있다면 차세대 메가 코프로의 성장도 헛된 꿈이 아닐진대, 너희들이 모조리… 모조리 망쳤다!!”

         

         ““…….””

         

         더러운 침이 마구 튀기고, 살찐 손이 의자 팔걸이와 약상자를 탕탕 내려쳤다. 게다가 청중들이 침묵을 지키는 게 설득돼서 그러는 줄 아는건지, 저열한 우월감에 찌든 논리가 이어진다.

         

         “옐로우나 그린 등급의 인간들은 어차피 내버려둬봐야 일평생을 기업에게 착취당할 뿐이지! 밑 쪽에 널린 탄약공장… 식량공장…. 그렇다면 그 가혹한 고통을 잠시나마 덜어주는 대가로 요구하는 게 충성과 약간의 크레딧뿐이라면 완벽하지 않나?! 그러니… 다시 나를 위해 일하면 용병업으로 벌어먹는 푼돈보다 더한 크레딧을 안겨주지! ……거기 문 밖의 여자도 내 옆자리에 두면 딱 이겠어.”

         

         …씹새끼가 따로 없네.

         그냥 씹새끼도 아니고 정말…… 장황하고 허황되고 너저분한 꿈을 꾸는 머저리다.

         

         이런 새끼 때문에 무차별 학살이 일어날 뻔 했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기업 직속부대는커녕 가성비 따져서 움직인 대리인도 못 넘어선 피라미가 주제도 모르고?

         

         아, 그래. 천 번 양보해서 부하들을 사석으로 내던진 작전이나 사고방식은 기업에 가까웠다. 사람을 사람으로 안 봤으니까. 하지만… 이 돼지에게는 근본적인 힘이, 만인은 따르게 할 카리스마가, 드높은 현실의 벽을 파악할 안목이 부족했다.

         

         …결정적으로 분위기도 못 읽었고.

         

         “””좆 까. 이 병신아.”””

         

         “……유감이군.”

         

         위이잉…!

         

         미동도 않던 경호 드로이드가 작동하고 통로 멀리서 급하게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제압팀들은 어디서 뭘 하고 있나 궁금했는데 아직도 약에 찌든 부하들이 여기저기 잔뜩 남아있는 모양이다.

         

         “아이보리, 밖은 내가 맡을 테니 방 안으로 들어가라.”

         

         “……그냥 네 뒤에 숨어있으면 안 돼?”

         

         방이 꽤 넓긴 해도, 살인 드로이드 두 대가 작동 개시하는 곳보다는 저거노트 등뒤가 더 안전하지 않겠니…?

         

         증원을 경계하는 오멘의 충고에 나름 논리적인 대답을 내놨는데… 내 말은 들은 그의 눈이 재밌는 걸 들었다는 듯이 샐쭉해졌다.

         

         “호레이쇼는… 진심으로 싸울 때는 믿어도 된다. 괜찮을 거다.”

         

         ……저 변태 양배추 인간을? 진짜로?

         내 몸을 살며시 떠미는 오멘을 불신을 가득 담아 한 번 강하게 노려보는 와중에, 고개를 강제로 돌리게 만드는 녹색 빛줄기가 뒤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내가… 아샤 누님한테 점수 딸 겸, 폼 좀 잡아볼까… 했는데. 더스크, 너라는 쓰레기는 일분일초도 더 살아있으면 안되겠다…. 개무시 하던 그 하층민한테 죽어봐라—!!”

         

         경박한 말투는 여전했지만 그 얼굴은 사나운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몸 곳곳에 있던 문신은 그 전부가 다 육체강화형 임플란트였는지 눈이 아플 정도로 빛났고, 머리 쪽에 있던 피어싱은 물론이요 웃기다고 생각했던 모히칸 스타일 머리에까지 전기가 파지직거리며 흘렀다.

         

         호텔에서 머리통을 두들기려 할 때야 왜 구태여 머리카락을 금속으로 심었을까… 그저 황당하게 여기고 피해서 때렸는데, 설마 그 하나하나가 다 외부 회로였다고…? 이러니까 전기 공격이 줄줄 새서 잘 안 통했지!!

         

         – 외부 위협 즉응 시스템 가동. 원인을 제거합니다. –

         

         메마른 기계음과 함께 금속 팔과 거기에 부착된 총구가 겨눠졌다.

         그러나 어느새 뽑힌 도미노의 권총이 드로이드의 총구 내부로 탄환을 틀어박았다.

         

         탕!! 까드드득!!

         

         정확하게 총열을 역주행해서 침입한 대구경 탄환에 드로이드 팔 한 짝이 풍선처럼 터져 나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순간적인 가속과 동시에 예리한 날이 세워진 팔이 무방비한 건맨을 향해 휘둘러졌으나… 예열을 끝마친 건 경호 드로이드만이 아니었다.

         

         휘둘러진 팔이 와지직!! 하고 녹색 번개에 붙잡혀 잡아 뽑힌다. 손실을 인지하고 황급히 뒤로 물러나는 거미 다리를 발로 차버리자, 무거운 드로이드의 몸체를 지탱하던 축 하나가 충격이 가해진 방향 그대로 으스러진다.

         

         번개의 이름은 데어데블(Daredevil), 악마마저 두려워하는 자.

         부족한 신체능력은 돈 벌어서 임플란트로 메꾸면 된다는 내 게임 공략을. 현실에서 따라한 광인이 존재했다.

         

         – ……위협 레벨 최대치로 상향조정. 섬멸 모드 작동. 경호대상은 외부로 대피해주시기 바랍니다. –

         

         

         돼지의 안색이 중독된 것처럼 해쓱해지고 쓰고 있던 선글라스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꼴 봐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효도왕여포 님의 쿨한 50코인 후원!
    아우쿠소 님의 빨리 힐 받으라는 의미로 50코인 후원 해주셨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가라! 할 때는 하는 남자! 양배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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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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