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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6

       울름 남작저.

        ​

        때아닌 불청객들의 침입으로 난장판이 벌어진 저택에서 마리아는 싸늘한 눈빛으로 서류를 훑고 있었다.

        ​

        “아주 다양하게 해 먹고 있었네요.”

        ​

        그녀가 빌헬름과 함께 작업을 친 라인은 하나였지만, 막상 와서 확인해보니 그들은 일부에 불과했다. 그러한 형태의 조직이 울름 남작 밑에만 네 개가 더 있었던 것이다.

        ​

        그걸 다 합치면, 남작을 통해 오간 비리와 거래, 뇌물이 여간 많은 것이 아니었다.

        ​

        물론 마리아가 뇌물 자체에 신경을 쓰진 않았다. 이건 울름 남작이 없더라도 존재했을 뇌물이었다. 그 금액이 좀 줄어들 순 있어도, 제국이 행정을 돌리는 이상 뇌물은 사라질 일 없었다.

        ​

        단지 앞으로도 이렇게 들통날 경우 처벌하는 게 전부겠지.

        ​

        “흠, 일단 남작을 쳐내기에는 충분하겠네요.”

        ​

        이를 뒤집어 말하면, 적어도 남작만큼은 확실하게 잘라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

        “후계자 문제, 사업 선정, 밀무역, 탈세, 도로 건설. 하, 정말 별걸 다 손대셨네요.”

        ​

        “…….”

        ​

        남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여기서는 아무 말도 해선 안 됐다. 단순히 황녀가 그를 겁박하는 게 아니라, 황실 감찰단을 대동하고 밀고 들어와 그의 저택을 들쑤셔 찾아낸 것들이었다.

        ​

        감찰단은 엄연히 황제 직속의 단체이니만큼, 제아무리 황후 파벌에 소속된 그라 하더라도 감히 거스를 수 없었다.

        ​

        특히나 이렇게 명명백백하게 죄가 드러난 경우라면 더더욱.

        ​

        마리아는, 그런 남작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

        “…당신은 저지른 죄에 합당한 처벌을 받게 될 거예요. 이 정도로 당당하게 뇌물을 받고 다녔다면, 앞으로 팔츠에서 다시 얼굴 볼 일은 없겠네요.”

        ​

        “…….”

        ​

        여전히 침묵하는 남작에게 순간 욱했지만, 마리아는 화를 꾹꾹 눌러 담았다.

        ​

        “안녕히 가시길. 이건, 저택을 몰수당하고 영지로 돌아갈 당신을 위한 경비에요.”

        ​

        그의 면전에 노잣돈 던져주듯 금화 한 푼을 던져준 마리아는 등을 돌려 남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

        벌컥.

        ​

        “전하, 품위를 지키셔야죠.”

        ​

        “…다음부턴 조심할게.”

        ​

        안에서 기다리던 마틸다의 훈계에, 마리아는 마지못해 수긍했다. 어린 시절 여읜 어머니 대신 그녀를 길러준 유모의 친구이니만큼, 마리아도 마틸다의 말은 곧잘 듣는 편이었다.

        ​

        하지만 그런 마리아도 지금은 성질을 주체할 수 없었다.

        ​

        —

        ​

        “건진 게 없나 보네.”

        ​

        “네. 끝까지 입을 다물었어요.”

        ​

        소파에 앉아 다른 서류들을 살피다 혀를 찼다.

        ​

        분명 명분을 잡아 남작의 집을 터는 것까지는 좋았다. 남작을 쳐낼 증거도 확보했고, 일시적으로라도 수도 안의 비리를 줄일(혹은 통제할) 좋은 방법도 찾아냈다.

        ​

        문제는, 마리아와 나 두 사람은 이 정도로는 만족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

        “마지막까지, 황후와 어떤 식으로 연결고리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했어요.”

        ​

        “…이러면 아쉬운데.”

        ​

        우리의 목적은 황후의 손발을 쳐내는 것이었다. 남작은 분명 황후의 파벌에 속한 행동대장 중 하나였으니, 이걸로도 나름 황후의 파벌에 피해를 줄 순 있었다.

        ​

        하지만 이건 손발이 아니라 손가락 하나를 쳐내는 정도에 불과했다. 애초에 울름 남작 자체가 중앙에서 그렇게 비중 있는 귀족은 아니었다.

        ​

        남작 본인이 수도 정계 진출에 의지가 강해 이번 대에 좀 과하게 수도에 머무르긴 했지만, 수도에서 쫓겨난다 하더라도 울름 남작가가 몰락할 일은 없었다. 기껏해야 남작이 살아있는 동안 울름 남작가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 정도였다.

        ​

        애초에, 중세에 비리는 별 대수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명예라는 게 있으니 걸리면 처벌하긴 하지만, 너무 과하게 해먹지만 않으면 어지간한 비리는 좋게 좋게 넘어가 주는 것이 중세의 인심이었다.

        ​

        너무 과하게 해 먹지만 않으면.

        ​

        이게 중요했다.

        ​

        “남작의 저택에서 나온 서류를 아무리 뒤져봐도, 제일 중요한 제후 간의 거래나 제국의 핵심 이권 사업에 관한 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어. 이건 애초에 남작은 적당히 쓰고 버릴 패로 썼다고 봐야겠지?”

        ​

        마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

        “아무래도, 물러날 여지를 남겨두고 있는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일을 맡기기에는 불안했겠죠.”

        ​

        남작은, 이번 대에 들어 수도 정계 진출에 공을 들이긴 했어도 근본이 영주였다. 지방에 튼튼한 기반을 이미 갖춰두고 있었기에, 설령 그는 중앙 진출에 실패하더라도 입맛 한 번 다시고 영지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

        그가 이런 일을 맡은 것도 그런 배경이었을 거다. 어지간히 심각한 경우가 아니면, 그가 죽는 일까지는 당하지 않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번에 황제가 정말 억지를 부려가면서까지 엄벌을 준다 해도, 혼인으로 얻어낸 영지 몇 개를 회수하는 게 전부지 그의 본래 영지까지 빼앗을 수는 없었다.

        ​

        그건 정말 대역죄를 저지른 경우에나 일어날 법한 일이었다.

        ​

        이 나라 귀족들의 권리는, 제아무리 황제라 하더라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애초에 그러지 않았다면 선제후라는 제도가 이어질 리도 없었다.

        ​

        “이러면, 황후에게까지 타격을 줄 건수를 잡긴 어렵겠는데.”

        ​

        “중간에 남작과 황후를 이어줄 연결고리를 찾아냈어야 했는데, 이래서야 방비할 시간만 줄 뿐이네요.”

        ​

        이러면, 결국 꼬리 자르기로 남작만 수도에서 쫓겨나고 사건이 종결되는 꼴이었다. 그리고 이번 사건을 계기로 황후 파벌은 덜미를 붙잡힐만한 사업들을 전부 정리하겠지.

        ​

        “…정말, 수도만큼은 제대로 장악한 모양이네.”

        ​

        “아바마마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에 한해서, 지만요.”

        ​

        황제는 본심이야 어쨌든 겉으로는 일방적으로 우리의 편을 들어줄 수 없었기에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없었다. 그게 가능했으면 이미 본인의 의사에 따라 황후를 덜어냈을 테니까.

        ​

        그렇다고 없는 혐의를 꾸며낼 수도 없었다. 이미 감찰단을 불러와 그들과 함께 움직였다. 그들도 나름대로 정보를 취합하고 서류를 확인하고 갔으니, 이제 와서 일방적으로 증거를 조작할 순 없었다.

        ​

        수월한 진입과 수색을 위해 불러들인 아군이 오히려 족쇄가 됐다.

        ​

        물론, 정말 가능했다 하더라도 하진 않았을 거다. 일단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황후를 몰아붙일 증거를 만들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고, 그게 가능한 마리아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

        “어떻게 할 거야?”

        ​

        나로서는 도저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마리아에게 공을 돌렸다.

        ​

        “이렇게 끝내기는 아쉬운데, 뭔가 좋은 생각 없어?”

        ​

        마리아는 이미 이에 대해 고민을 시작했는지, 별다른 대답 없이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녀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침묵했다.

        ​

        그녀는 그저 생각만 하는 것으로는 부족했는지, 몇 번이고 서류를 다시 확인했다. 그녀가 찾는 서류를 찾아서 건네주며 시간이 흘렀다.

        ​

        “남은 시간이, 얼마나 있죠?”

        ​

        “감찰단이 내부 검토를 끝내고 폐하께서 결과를 공표할 때까지겠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네.”

        ​

        “이런 일은, 보통 1주에서 2주 정도가 걸려요. 최악을 가정하는 편이 좋으니, 길면 7일 정도겠네요….”

        ​

        타닥, 타닥.

        ​

        펜으로 연신 탁자를 두드리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곧장 마법으로 펜의 잉크를 뽑아내 그대로 인쇄하듯 흰 종이에 찍어눌렀다. 서류의 내용이 그대로 복사되어 찍혀 있었다.

        ​

        이 무슨, 마법사는 서류 작업의 구세주인가…?

        ​

        “원본은, 아쉽게도 감찰단에서 가져가야 하니 저희가 챙길 수는 없어요. 복사본이라도 챙겨가도록 하죠.”

        ​

        “방법이 있는 거야?”

        ​

        내 질문에, 마리아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조금 귀찮긴 방법이긴 하지만, 네, 있어요.”

        ​

        그게 무어냐는 질문은 필요 없었다. 마리아가 방법을 고안해내면, 내가 실행한다.

        ​

        그게 과거 그녀의 호위로 있을 때부터 이어진, 우리가 난관을 헤쳐 나가는 방식이었다.

        ​

        ――

        ​

        그리고, 가끔은 나도 조금 생각이라는 걸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

        “황녀님.”

        ​

        “…네.”

        ​

        “이거 맞아?”

        ​

        “……네.”

        ​

        “이런 젠장.”

        ​

        우리는, 오물 가득한 하수도 구석의 어둠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물론 마리아가 마법으로 우리가 숨을 곳을 화염 마법까지 동원해 깔끔하게 소독하긴 했지만, 이것도 너무 흔적이 많이 남으면 안 되는지라 정말 딱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공간이 한계였다.

        ​

        마법사와 마력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워낙 많이 사는 동네라 하수도에는 약간이나마 마력이 담긴 생활 하수를 비롯, 여러 쓰레기와 오물들이 수백 년간 흐르며 자연스레 미약한 마력의 맥이 생겼다.

        ​

        그 덕에 아예 마법을 못 쓰는 상황보다는 나았지만, 문제는 너무 맥이 미약한 탓에 겨우 이것만으로도 들키지 않을까 노심초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

        물론 나 혼자 오는 것이었다면 별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마리아도 함께하는 일이었다.

        ​

        어쩔 수 없었다. 명확한 증거 확보를 위해서는 마력으로 작동하는 수정구가 반드시 필요했는데, 문제는 소문이 퍼질 염려 없이 마음껏 부릴 마법사가 우리에게는 마리아 하나뿐이었다.

        ​

        “…꼭 이 자세로 있어야만 하는 거야?”

        ​

        “하지만, 이 좁은 공간에 두 사람이 숨으려면 어쩔 수 없잖아요.”

        ​

        작게, 아주 작게 서로의 귓가에 속삭였다. 숨소리도 들킬까 고민해야 하는 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바깥이라면 마음껏 사일런스 마법을 썼겠지만, 마력 사용을 최대한 자제해야 하는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마법구야 쓰는 데 드는 마력이 워낙 적으니 괜찮다지만, 사일런스는 아니었다.

        ​

        “그렇다고 내 품 안에 이렇게 들어가 있는 건 좀….”

        ​

        “쉿.”

        ​

        이 비좁은 공간에서 오물에 닿지 않게 어떻게든 두 사람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서로 몸을 겹쳐야만 했다. 나는 처음에는 마리아를 업고 움직이고자 했지만, 마리아는 그랬다간 움직임에 제동이 걸린다며 반대했다.

        ​

        내가 기사인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 반박하려 했지만, 마리아는 그럴 틈도 주지 않고 내 품 안으로 들어왔다.

        ​

        그러니까, 내가 안 그래도 이 깜깜한 어둠 속에 몸을 숨기려고 이 좁은 공간에서 몸을 움츠리고 있는데, 마리아는 마치 내가 제 둥지라도 된다는 듯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물론 마리아도 몸을 숙이고 있어야 했지만, 그래서 더 위험했다.

        ​

        ‘이거, 자세가 완전….’

        ​

        그, 엄한 영상에서 볼 법한 그런….

        ​

        아무튼!

        ​

        이미 그녀가 파고든 이상, 나는 그녀를 떨쳐낼 방법이 없었다. 허리를 폈다간 아주 미약하긴 해도 아직 사물의 윤곽이 구분되는 영역에 노출되게 되고, 말로 타박하기엔 그녀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힘을 썼다간 소음이 들릴 수도 있고.

        ​

        현장을 덮치기 위해 잠복 중인 상태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

        결국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쉴 뿐이었다.

        ​

        “하여튼, 여기로 오는 건 확실한 거지?”

        ​

        “네, 확실해요.”

        ​

        그래서,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가 하면, 그 질문은 간단했다.

        ​

        “서류나 일기 곳곳에 공백이 있어서, 그게 뭔지 확인하기 위해 시종과 경비들을 모두 들쑤셔서 알아낸 거니까요.”

        ​

        이곳이, 남작이 아마도 그의 윗사람들과, 혹은 그와 비슷한 역할을 맡은 이들과 만나지 않았을까 싶은 곳이었다.

        ​

        혹시라도 이곳을 이용하는 다른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싶어 우리는 함께 현장을 포착하기 위해 나선 것이고.

        ​

        “경비들은 입을 열지 않았지만, 다행히 시종들은 그렇게까지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아닌 모양이더군요.”

        ​

        “뭐, 적당히 수도 사람들을 고용한 걸 테니까.”

        ​

        저 지방 영지라면 모를까, 이곳 수도에는 귀족이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이들의 저택마다 들어가는 시종을 귀족으로 채우려면, 온 제국의 자작이나 남작급 가문의 일가족을 다 끌어와야 할 거다.

        ​

        황궁 정도를 제외하면, 아마 다들 전문적으로 일을 배운 평민 출신 시종들을 부리고 있겠지.

        ​

        물론,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

        “그런데, 이미 남작이 들켰을 텐데 여길 쓰는 사람이 있을까?”

        ​

        내 질문에, 마리아는 나를 보며 말했다.

        ​

        “빌.”

        ​

        “응?”

        ​

        “이것만 기억해두세요. 이 세상에 비밀은 딱 두 가지뿐이에요.”

        ​

        워낙 깜깜한 곳에 숨어 우리끼리는 서로 동작을 볼 수 없었기에, 마리아는 손가락으로 내 허벅지를 한 번씩 찔렀다.

        ​

        “나만 아는 비밀, 그리고 다들 아는 비밀.”

        ​

        너와 나, 두 사람만 아는 비밀은 없다는 건가. 대충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진 이해할 수 있었다.

        ​

        하지만, 그게 지금 일과 무슨 상관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마리아도 짐작했는지, 설명을 덧붙였다.

        ​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알고 있는 비밀을 공유하고 싶어 해요. 특히, 그게 세상으로부터 안전한 비밀장소라고 생각되는 곳이라면, 더더욱.”

        ​

        또각.

        ​

        그리고 정말로, 그녀의 작은 속삭임이 끝나기 무섭게, 저 멀리서 구두굽 소리가 들려왔다.

        ​

        마리아가 남작가의 사람들을 들쑤시기 시작한지 사흘, 이곳에서 기다리기 시작한지 만 하루가 다 되어가는 때의 일이었다.

       


           


I Wished for Romance, but it Turned Out to be a Romance Fantasy

I Wished for Romance, but it Turned Out to be a Romance Fantasy

낭만 판타지를 꿈꿨는데 로맨스 판타지였다
Score 7.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dreamed of a life filled with romance¹ and romanticism, but I didn’t dream of a romance fantasy… —- ¹ The “Romance” here means a feeling or atmosphere of something new, special and exciting, e.g., a hero’s adven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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