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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6

       

       

       

       

       

       

       

       [아카데미 동급생]

       

       자신을 그리 소개한 르미앙이 아리엘의 숙소 응접실의 창가에 선 채, 바깥을 보고 있었다.

       신분 확인을 위해 후드는 벗어둔 상태였다.

       설산과 같은 백발과 바다와 같은 청안이 여실히 드러났다.

       어차피 며칠 후면 대면식을 통해 가면을 벗게 될 예정이었고, 혼약대전이 끝나면 우승자의 손을 잡고 도시로 나아가 북부인들의 성대한 축하를 받을 예정이다.

       적발의 에린시아 벨로크가 아닌, 백발의 르미앙 윈터펠로서 세상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경비병의 수색에 불응할 필요도, 무언갈 숨길 이유도 없었다.

       어차피 아직까진, 어느 변방 영지의 비루한 남작가 영애 에린시아니까.

       

       ‘…보좌관께선 잘 전달하셨겠지?’

       

       내일이면 대면식 전 마지막 평가전이 열린다.

       그 전에, 엘든의 참전 의지를 위해 회심의 독려책과 회유책을 꺼내들었다.

       독려책은 겔우드가 맡아 엘든에게 향했고, 회유책은 자신이 맡아 아리엘에게 향했던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유혹으로써 독려를, 이어 그것에 바람을 불어넣을 회유책을 펼치는 것.

       게다가 회심의 카드로 뽑은 독려책은 이제껏 보여주었던 은연 중의 편애가 아니었다.

       

       [첫눈에 반했다]

       

       확실한 편애였고, 한 명의 여자로써 해낸 고백이었다.

       기권 소식에 화가 나 설전을 벌였던 것도, 그 끝에 반려를 표명한 것도, 다른 후보들에겐 눈길을 주지 않은 것도 모두 ‘사랑’ 때문이었다고 말이다.

       물론 마음에도 없는, 거짓된 고백이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물과 기름조차 섞을 강력한 힘을 기권자에게 전해 주었고, 내일 있을 평가전의 정보까지 전달해 주었으니 거부하기 힘들 것이다.

       

       쇠퇴한 가문을 일으킬 절호의 기회, 위대한 대공가문의 사람이 되어 전능한 힘을 거머쥘 기회를 직접 손에 거머쥐어주었는데 어느 누가 그것을 놓으려 하겠는가.

       자격이 부족해 떠난다는 이에게 전적인 지지와 사랑으로써 독려했으니, 분명 기권의 의지가 흔들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아리엘 엘론드 영애와 진한 사랑에 빠진 것만 아니라면 말이다.

       이성적 분별력마저 흐리게 만든다는, 지성적 고찰마저 뭉개버린다는, 그리고 출신의 고저조차 막론하게 만든다는 그 강력한 힘에 매료된 것만 아니라면 말이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새로이 정립한 가설의 신빙성을 확보하고자 걸음을 했던 르미앙이었다.

       

       만약.

       

       아리엘과 밀애를 하고 있었던 것이 맞다면, 그것만으로도 엘든이란 악인에게 참회의 선도를 진행할 수 있을 터다.

       혼약대전 규율의 위반은 대공가문을 업신여긴 것이고, 북부령을 기만한 것과 다름없으니까.

       아리엘과의 밀애가 기권의 이유가 아니라면 회심의 카드가 유효타로 작용할 것이며.

       기권의 이유가 맞다면, 그것을 빌미로 참전을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혼약대전의 신성한 규율을 어긴 것에 대한 죗값을 받는 것보다,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고 참회하는 것이 훨씬 저렴할 테니 말이다.

       

       그래.

       

       [사랑]

       

       이 가설의 신빙성만 확인된다면, 틀어진 모든 것들이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게 될 거야.

       해본 적은 없지만, 사랑하는 이들은 서로 닮는다고 했어.

       엘든이란 망나니가 그토록 경멸하던 책을 가까이하고 있는 이유도 분명 그것 때문일 거야.

       사랑하는 이와 닮으려는 노력, 사랑하는 이에게 환심을 사기 위한 노력.

       그것이 아니라면 엘든이 생전 하지 않던 짓을, 책 읽는 이를 한심스레 여기던 그가 그 한심스런 짓을 따라할 리가 없을 테니까.

       

       아니.

       사랑이여야만 돼.

       그래야만 이 최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난제를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 생각하며 아리엘을 기다리던 르미앙.

       

       잠시간의 기다림 끝에, 그녀의 귀로 들려온.

       

       “엘든?”

       

       아리엘 엘론드 백작영애의 목소리는 최악의 난제를 해결할 유력한 가설, [사랑]에 큰 힘을 실어주게 된다.

       

       “호호. 오랜만에 뵙네요? 아리엘 영애님.”

       

       환한 미소를 띄며, 아리엘에게 인사를 건네는 변방 영지의 비루한 남작가 영애 에린시아 벨로크였다.

       

       

       **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 반가워. 에린시아.”

       “호호. 저도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답니다. 잘 지내셨나요?”

       “나야 잘 지냈지. 넌?”

       “저도 잘 지냈답니다.”

       

       형식적인 인사들이 몇 번 오고갔다.

       그것이 끝이었다.

       이렇게 마주앉아있는 것조차 처음일 상대와, 재회하리라곤 눈곱만큼도 예상치 못 했던 상대와 나눌 수 있는 인삿거리는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근황을 묻기엔 애당초 아는 것이 없었다.

       살가운 대화를 이어가기엔 너무도 어색한 사이였다.

       몇 마디 인사 후, 극도의 정적이 공간을 지배하는 건 당연한 순서인 것이다.

       다행히 아리엘이 질문 하나를 어렵사리 캐냈다.

       

       “근데 머리색은 어떻게 된 거야? 분명 붉은색이었던 거 같은데.”

       “아, 사실 마나염료를 통해 색을 바꿨었어요. 북부인은 야만적이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잖아요?”

       “그렇긴 하지. 그럼 여기 북부령이 고향이었구나? 근데 하얀색이 더 잘 어울려. 어어엄청 예쁘다. 에린시아.”

       “호호. 아리엘 영애님도 어어어엄청 고우셔요.”

       

       다시금 주고 받는 형식적인 인사들.

       서로에 대한 칭찬은 진심이었다.

       백발의 푸른 눈동자 르미앙도, 금발의 적갈색 눈동자 아리엘도 미모로만 놓고 보자면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아리따운 이들이었다.

       다만 자꾸만 범람하는 어색한 공기를 걷어내기엔 역부족이었고, 친하지도 않은, 교류가 일절 없었던 이와 영양가 없는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영양가 풍부한 야독 시간을 택하기로 한 아리엘이 본론을 꺼내들었다.

       

       “…근데 어쩐 일이야?”

       

       르미앙 역시 길게 끌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단지 새로이 정립한 가설의 신빙성을 확보하기 위해 행차했을 따름이니까.

       [사랑]

       그 부질없는 허상의 감정이 자신의 계획을 헝클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만약 그러하다면, 그에 맞춰 새로운 계획을 수립해야 할 터.

       해답이 없는 난제는 없으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대륙 끝까지 쫓아갈 집념의 탐구가가 르미앙이었다.

       

       또한.

       

       그 집념으로써 이제껏 입증하지 못 한, 해결하지 못 한 난제가 없는 르미앙이었다.

       

       홀짝.

       

       북부령의 특산품인 겨울꽃차를 한모금 마신 르미앙이 운을 띄웠다.

       

       “사실, 전해드릴 말씀이 있어 왔어요.”

       “응? 말씀?”

       “네. 답을 얻어 오라 하셔서.”

       “누구… 말씀…?”

       

       야심한 시각.

       어둠이 도처에 깔린 밤.

       온몸을 휘감는 스산한 한기.

       어둠과 한기를 가르며 찾아온 밤손님.

       그 밤손님이 전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말씀.

       모든 것들이 묘연한 불길함을 풍기고 있었고, 아리엘이 살짝 주눅든 채 답을 기다린다.

       그리고 그 말씀의 주체가 들려왔을 때, 아리엘의 적갈색 눈동자가 크게 확장되어야 했다.

       

       “제 3 북부대공녀님의 말씀이에요.”

       “……!”

       

       놀란 입이 크게 벌어졌다.

       이 낯설고 머나먼 땅에서 재회하리라 눈곱만큼도 예상치 못 했던 아카데미 동급생.

       그 동급생의 입술이 담아내리라 상상조차 하지 못 했던 ‘누군가’의 이름.

       

       “…제, 제 3 북부대공녀님?”

       

       그 이름을 들은 귀가 쫑긋해지고, 그 이름을 담아낸 입술을 본 눈이 커지고, 그 이름을 들은 것에 대한 답을 토해야 할 입이 벌어진 채 굳어버린 것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대—박-!”

       

       

       모든 불길함을 삽시간에 걷어낸 채 환희로 어둠을 밝히는 것은, 베일에 싸인 [제 3 북부대공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비밀 설원의 여인]을 눈물 콧물 범벅으로 읽었던 애독자의 당연한 반응이었다.

       

       “…네?”

       “그, 그럼 너, 제 3 북부대공녀님 밑에서 일하는 거야?”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 아리엘이 두 손으로 탁자를 짚으며 상체를 가까이한다.

       밤하늘의 별빛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그에 맞춰, 르미앙은 상체를 뒤로 당겨야 했다.

       

       “네…, 그런 셈입니다만…?”

       “그럼 대공녀님에 대해 잘 알겠네!?”

       “뭐… 그런 셈이긴 하죠.”

       

       평생을 책을 옆에 끼고 살았지만, 그 옆구리엔 늘 탐구서와 지식서 뿐이었고, 자신을 모티브로 한 소설의 존재에 대해서 알 리 없는 르미앙이었다.

       하물며 그 소설은 시녀 마리엔이 즐겨 읽는 로맨스가 아닌, 비밀을 파헤치며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아 모험을 떠나는 순수 문학이었다.

       

       그렇기에.

       

       순수 탐구파 르미앙이 순수 문학파 독서광 아리엘 엘론드의 반짝거리는 눈빛을 이해할 수 없는 건 당연한 노릇이었고, [비밀 설원의 여인]이란 소설이 너무도 감명 깊어 5번이나 정독했던 아리엘이 질문 공세를 쏟아내는 것 또한 당연한 노릇이었다.

       

       “대공녀님은 어떤 분이셔?”

       

       “…?”

       

       “정말 저주 같은 거 때문에 베일에 싸여 계신 거야?”

       

       “….”

       

       “꺄- 나도 얼른 뵙고 싶어-!”

       

       “….”

       

       “소문으로는 공주님도 능가하는 절대적인 미모 탓에 대공께서 숨기시는 거라던데! 진짜야?”

       

       “아니….”

       

       “책에선 백전노장도 쓰러뜨릴 압도적인 무예 실력을 갖추고 계시다던데, 진짜야?”

       

       “말 좀….”

       

       “꺄— 금방 돌아가야 돼? 아니면 대공녀님에 대해 이야기 좀 해줄 수 있어?”

       

       “….”

       

       자색의 여기사에 이어 또 다른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을 듣게 된 독서광의 흥분.

       그것이 누그러드는 데엔 많은 시간이 필요했었다.

       

       

       

       “히… 미, 미안. 제 3 북부대공녀님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너무 너무 감명 깊게 읽었었거든.”

       “……네? 그런… 소설이 있다고요?”

       “응!”

       

       

       

       엉터리 자서전 소식에 어지러워진 르미앙.

       그녀가 정신을 차리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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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후피집물의 후회캐가 되었습니다
Score 10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was curious about what a female-oriented tragic romantic fantasy was like, so I skimmed through only the free chapters. And then… “…Ha.” I found myself transmigrated into one of the main male characters, destined for tears of regret, exhaustion, and obsession. So, the first thing that had to be done was… “I, Elden Raphelion, hereby declare my withdrawal from the competition for the betrothal of the Third Northern Duchess.” To escape this trage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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