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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6

       던전. 

       

       미치광이 마법사가 만들어낸 위협적인 공간, 또는 과거의 위대한 존재가 제작한 고대 건축물을 의미하는 말이다. 우리가 탐사할 던전은 그중에서도 후자. 

       

       선발대에 의해서 공략이 끝난 후, 지금은 실전 연습용으로 사용되고 있는 던전이다. 제국에 의해서 관리되고 있으며, 적법한 서류 절차를 밟으면 누구라도 이용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밝기도 밝고 깔끔하기는 엄청나게 깔끔했다. 과장 좀 보태면 자색 마탑의 연구실보다도 깨끗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시설이 깔끔해서 아카데미 학생들도 종종 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편하게 경험을 쌓는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용병으로 커리어를 시작하면⋯⋯.”

       

       얼굴흉터 선배와 눈물점 가이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앞서 걸어갔다. 따뜻한 온실에서 자라나는 아카데미생은 독기가 모자라다느니, 저번에 아카데미생 한 명을 고용했는데 고블린을 보고 도망갔다느니.

       

       시간이 갈수록 자기네 인생살이가 더 힘들었다는 이야기로 흘러가길래 걷는 속도를 살짝 늦춰서 뒤로 빠졌다. 어젯밤에 같은 이야기를 두 사이클이나 들었기 때문이다.

       

       수인 도적도 같은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어제의 환상 마법과 함께하는 사죄의 불꽃 그랜절, 그리고 모닥불 옆에서 2시간 동안 늘어놓은 삼국지 낭독회가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옆으로 따라붙어서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느냐고 수신호로 묻는 걸 보면.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것도 있는 법. 나는 공정한 거래를 위해서 수인 도적에게 물었다.

       

       “말은 왜 안 하는 거예요?”

       

       어제 맛있는 음식(환상임)을 먹고 나서 고향의 맛이라며 감탄을 터트리지 않았나. 그때 들어보니 목소리도 멀쩡했고, 말을 모르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대부분의 일상 회화를 수신호로 퉁치고 있으니 궁금할 수밖에.

       

       수인 도적은 잠깐 우물거리다가, 혓바닥을 베에 내밀었다.

       

       

       

       

       혓바닥에는 무언가로 지진 듯한 선명한 낙인이 남아있었다. 처음 보는 문양이었다. 

       

       수인 도적은 혓바닥을 집어넣고 말했다.

       

       “이걸 보여주기 싫었거든.”

       

       

       마탑에서 범용적으로 사용되는 문양은 암기해 뒀다. 그러니 내가 모르는 문양이라는 건⋯⋯ 비밀스럽거나 은밀하게 사용되는 문양이라는 것. 숨기려는 걸 보면 좋은 의미는 아닌 것 같았다.

       

       낙인의 모양만 보고 대충 찍어봤다.

       

       “뱀파이어나, 박쥐나, 흡혈?”

       

       “아니야. 이건 가시 돋친 그릇의 형상. 산제물, 공양의 낙인.”

       

       “흑마법사들이 쓰는 거예요?”

       

       “응. 간신히 탈출했어. 로윌렌 덕분에.”

       

       수인 도적이 묘한 눈길로 눈물점 가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호의나 감사, 애정 따위가 잡다하게 섞인 눈빛으로 보였다.

       

       머릿속에서 백 스토리가 뚝딱 만들어졌다. 사악한 흑마법사들이 실험을 위해 수인 부락을 습격, 저항하는 자들은 죽이고 실험체를 포박해서 끌고 간다. 어둡고 우울한 나날들. 다가오는 죽음. 

       

       그렇게 의식에 바쳐지기 직전, 햇살과 함께 등장한 눈물점 가이가 롱소드와 방패를 꺼내 들고 돌격해서⋯⋯.

       

       음. 대충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런데, 저한테 보여줘도 되는 거예요?”

       

       혹시라도 드러날까 봐 입을 꾹 다물고 수신호를 쓸 정도로 싫은 거라면, 만난 지 며칠 안 된 나에게 보여줄 이유가 없을 텐데. 

       

       조심조심 목걸이를 부여잡았다. 마탑주가 걸어주려고 한 49종의 아티팩트 중 하나다. 본색을 드러낸 수인 도적이 ‘이 표식을 본 이상 네놈은 살아 돌아갈 수 없다──!’고 할까 봐 내심 긴장했기 때문이다.

       

       수인 도적은 검지 손가락을 세워서 나를 가리켰다.

       

       “비슷한 냄새가 나서.”

       

       “⋯⋯비슷하다고요?”

       

       “응.”

       

       

       대화의 흐름을 그대로 해석하면, 이건 나더러 노예의 냄새가 난다는 의미가 아닌가? 아닌데, 매일 클린 마법으로 세탁하는데⋯⋯.

       

       어쩌면 이건, 고도의 대학원생 멸시인가⋯⋯?

       

       자색 마탑의 사내 복지가 참 좋다는 해명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수인 도적은 쫄래쫄래 앞장서서 가버렸다. 묘하게 찝찝한 기분이었다.

       

       혹시 내가 뭘 놓치고 있나 싶어서.

       

       ===============================================================

       

       “끼야아아아아악-!!”

       

       나는 화들짝 놀라서 내 입을 막았다. 이 멤버 중에서 이미지상 끼야아악 하고 비명을 지를 만한 사람이 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 입을 막아도 비명은 들려왔다.

       

       다른 사람이 지른 거다. 누구지? 

       

       눈물점 가이를 다시 눈물점게이라고 바꿔 부를 때가 온 건가?

       아니면 수인 도적이나, 엘프 궁수가 의외의 갭모에를 보여준 건가?

       

       아니, 아니었다. 이 쭉쭉 올라가는 고음의 비명은 얼굴흉터 선배의 것이었다. 눈물점 가이도 당황한 표정으로 선배를 바라봤다.

       

       선배는 바퀴벌레가 득시글거리는 욕조라도 본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사악한 흑마법사가 인간지네라도 만들어서 출현시켰나 싶어, 선배의 시선을 따라갔는데.

       

       “⋯⋯골렘?”

       

       “골렘이군요, 돌 골렘.”

       

       골렘이었다. 

       

       심지어 조그마한 청소용 골렘이었다. 신장이 1미터는 될까 말까 싶고, 공격용 팔이 달려있지도 않았다. 먼지털이개 하나가 무성의하게 달려 있을 뿐.

       

       나는 오들오들 떠는 얼굴흉터 선배의 어깨를 토닥이며 골렘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내가 경지가 낮아서 파악하지 못한 뭔가가 있나? 아니면 골렘에게 『무제한 혐오』 같은 환상 마법이 내장되어 있었나?

       

       내가 보기에는 그냥 골렘이었다. 따로 마법이 탑재되지는 않은.

       눈물점 가이가 내가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을 대신 질문해 줬다.

       

       “왜 그렇게 두려워, 아니, 징그러워하시는 겁니까⋯⋯? 고작 골렘인데요.”

       

       얼굴흉터 선배는 잠시 숨을 추스르더니 중얼거렸다.

       

       “환상 마법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하는 단 한 가지를 꼽으라면, 저는 골렘을 고를 거예요 후배님.”

       

       “개인적인 경험을 일반적인 범주로 확대 해석하시는 건 좋은 태도가⋯⋯.”

       

       “가서, 싸워서 이겨보세요 후배님. ‘저것’과 싸워서 이기면, 사람 모델링 30개 깎아 줄 테니까.”

       

       “딱 기다리고 있으십쇼.”

       

       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무조건 이기는 장사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저 청소용 돌 골렘 하나를 잡으면 모델링 30개, 거의 모델링 복사 마법이다. 

       

       아무리 내가 TRPG 해 먹으려고 시뮬레이션 구성에 모든 삶을 쏟아부었다고 한들, 내가 누구냐. 무려 그 자색 마탑주의 직전제자 비슷한 것이다. 돌멩이 하나를 이기지 못할 리가 없었다.

       

       옆에서 알짱거리는 나비가 격하게 반대하듯이 시야를 가려댔지만, 고작 곤충 따위는 모델링 30개를 향한 내 열정을 막아낼 수 없다.

       

       나는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

       

       “『태초의 악몽 부여』! 『심해아귀의 좌절』!”

       

       통하지 않는다.

       

       “『일렌야르의 표적 재설정』, 『공간 좌표 대혼란』!”

       

       통하지, 않는다⋯⋯!

       

       골렘의 눈에서 붉은빛이 번뜩였다. 위이이이잉. 그것은 불쾌한 소음을 내며, 나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내 모든 마법을 정면으로 받아내면서!

       

       “나, 나와라 『하트』-!”

       

       비장의 수단까지 사용해서, 보조 없이 단신으로 불러낼 수 있는 최대치의 홀로그램── 10명이나 되는 물리력 있는 환상을 돌격시켰다!

       

       하트와 집사 군단, 그리고 뉴페이스로 합류한 풀 플레이트 아머 기사들까지! (혹시 트러블이 있을까 봐 하트에게는 가면을 씌워 뒀다)

       

       일제히 돌격해 골렘을 두드렸지만── 부족했다. 물리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골렘은 믿음을 가지지 않으니, 홀로그램이 발휘할 수 있는 힘도 어린이 솜주먹 수준이었다. 청소 골렘은 쏟아지는 집중포화에도 꿋꿋하게 전진했다. 덜컥거리면서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도, 말도 안 돼⋯⋯ 간지럽지도 않다는 거냐-!!”

       

       -삐빅. 삐리릭.

       

       “끄, 끄아아아아악!!”

       

       팍! 팍!

       

       골렘의 먼지털이개가 휘둘러졌다. 던전 모퉁이 구석까지 몰린 나는, 몸을 웅크리고 골렘의 타격을 견뎌낼 수밖에 없었다. 먼지털이개가 내 몸 구석구석을 때리며 먼지를 털어갔다⋯⋯.

       

       눈물마저 찔끔 날 정도로 서러웠다.

       

       기지를 짜 내야 했다. 역전의 수가 있을 것이다. 져서는 안 된다. 고작 청소용 골렘이 아닌가! 나는⋯⋯!

       

       “지고, 지고 싶지⋯⋯ 않아⋯⋯!!”

       

       골렘은 영혼도 없고, 교란시킬 정도로 고등한 감각기관을 갖추고 있지도 않다. 환상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 차라리 최첨단으로 사고할 수 있는 골렘이었더라면 이토록 무력하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필사적으로 마법을 짜냈다. 골렘에게 생각이 없어서 환상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면, 골렘에게 생각을 불어넣고 때리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 마법은 없다. 없으면 만들면 된다!

       

       “거꾸로 걸어 매달립니다, 당신은 하늘을 걷고 땅으로 낙하하는 자, 한 바퀴 돌아 천상으로 내려오소서── 『강제 인격 부⋯⋯』크아아아악!”

       

       내 주둥이에 먼지털이개가 쑤셔 박혔다. 80%쯤 진행된 내 마법은 산산이 조각나버렸다. 나는, 모든 의욕을 잃고 바닥에 늘어졌다⋯⋯.

       

       청소 골렘은 승리 선언이라도 하듯, 내 얼굴에 먼지털이개를 세 번 챱챱챱 하더니 던전 깊은 곳으로 떠나갔다. 이제야 얼굴흉터 선배의 비명에 담긴 의미를 알았다. 그건 깊은 한탄이었다⋯⋯.

       

       완전한 역상성.

       

       내 모든 저항은 분쇄 당했다. 

       

       ===============================================================

       

       모험은⋯⋯ 성공적이었다. 눈물점 가이와 다른 모험가들의 전투 데이터도 얻었고, 오우거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알았다. 첫 발자국은 의미가 컸다. AI에게 데이터를 입력하고, 가속되는 시간 속에서 무한하게 뺑뺑이를 돌리면── 알겠는가?

       

       오리지널 검술, 무술이 나올 거다.

       

       무한한 시간과 무한한 원숭이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써낸다지 않은가. 기초 데이터를 포함했으니 그것보다는 확률이 높을 것이다. 데이터를 추가할수록 그럴듯한 녀석을 뽑아낼 확률도 높아질 것이고.

       

       무협⋯⋯ 할 수 있다!

       

       골렘에게서 겪은 처참한 패배를 기점으로, 내 전투력 상승에도 관심이 생겼다. 지나가다가 누가 푹 찌르면 윽 하고 죽어줄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앞서 설명한 전투 데이터와 연계해서, 홀로그램에게 무공이라도 쥐여주면 정말로 유사 소환술 느낌으로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초 물리력에도 강화가 필요하다. 예산과 노력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이 모든 수확을 이용하여, 1황녀에게 대접할 세션을 만든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패배의 쓰라린 상처를 안고 조용히 잠들고 싶었다⋯⋯.

       그날 밤에는 골렘에게 쫓기는 꿈을 꿨다.

       

       ===============================================================

       

       모험가들이 돌아간 던전의 어느 방. 수면 상태로 대기 중이던 청소용 골렘이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사유했습니다. 어째서 자신은 생각할 수 있는가. 자신은 누구이고, 부여받은 이 지식은 무엇인가.

       

       그리고 공백을 깨달았습니다. 약 20%가량의 텅 빈 공간. 미싱 링크를 이어 나가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고민하며, 주워 모은 퍼즐 조각으로 내놓은 첫 번째 답변은.

       

       Q. 자신은 누구인가?

       

       A. 미스캐토닉 대학교 교수 아브라함.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연참이랍니다!
    오늘은 연참으로 드시는 편이 좋을 것 같더라구요⋯⋯.
    어떤가요, 입맛에는 맞으셨나요?

    그림은 어디까지나 참고용으로 생각해주세요! 텍스트로 적으면 헷갈릴까봐서 넣어보았답니다!
    날이 춥네요, 눈도 내리구요. 그래서인지 노벨피아도 감기에 걸렸나봐요.
    건강하고, 행복한 하루 되세요 마이 프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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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herworld TRPG Game Master

Otherworld TRPG Game Master

Another World TRPG Game Master, 이세계 TRPG 게임마스터
Score 8.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a wizard of the Illusion Magic School and decided to create a virtual reality with illusion magic to play a tabletop role-playing game (TRPG). It was great to create a virtual reality, but I was in trouble because there were no suitable players. During that time, I received an offer to be the professor from the Royal Academy. The offer was to use illusion magic to fill the students’ lack of practical experience safely. And so, I became a professor at the academy. “Send me back, send me back to that world right now-!” “Outer god, someday an outer god will be our doom, we’ll all die!!” “I am not the bastard of the Redburn Ducal Family. I am the foremost disciple of the Great Namgung Clan, Namgung Qinghui!” But it seems there is a bit of a misunderstanding. This isn’t a spell for dimensional travel, kids. It’s 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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