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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6

       조직을 점거한 용병 카딘은 프레스턴과 마주 앉았다.

         

       “바지사장, 너희 보스는 도대체 언제 오는 거지?”

         

       프레스턴이 난감해했다.

         

       “그렇게 재촉해도 늦게 올 사람은 늦게 와. 애초에 언제 올지는 우리도 모른다고.”

       “제대로 된 바지사장이군.”

       “아니, 내 조직인데.”

         

       프레스턴이 굉장히 억울해했다.

         

       “바지사장은 다 그렇게 얘기하지. 너무 억울해할 필요 없어. 사실이니까.”

       “아니…….”

         

       프레스턴이 더 억울해했다.

         

       방 밖에 기척이 느껴졌다.

         

       카딘은 눈빛이 변했다.

         

       왔나.

         

       검을 챙겨 방을 나섰다.

         

       피 묻은 공간이 드러났다. 시체들은 치웠지만 시체 흔적은 지워지지 않은 채 붉은 자국을 남겼다.

         

       분홍톤의 소녀가 굳은 얼굴로 시체 자국을 바라봤다. 그리고 전투 잔흔을 되짚듯이 보다가 카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냉랭한 눈동자가 노려봤다.

         

       “무례한 분이군요.”

         

       차가운 목소리였다.

         

       서른 명을 학살한 소녀인가. 그 위명에 걸맞은 기세군. 제대로 찾아왔어.

         

       카딘의 미소가 짙어졌다. 가슴팍에 손을 대고 가볍게 고개 숙였다.

         

       “카딘이라 한다. 부족한 실력이나마 경험을 쌓고자 용병 일을 하고 있지. 아가씨의 성함이 궁금하네만.”

       “무뢰한에게 알려드릴 이름은 없네요.”

       “아쉽게 됐군.”

         

       카딘이 한손검을 쥐었다.

         

       파스텔은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사람을 죽여놓고 이 평화로운 태도는 뭐냔 말인가.

         

       당신이 죽인 사람은 내게 친절하던 누군가다. 찾아온 소녀에게 납치 대신 수고를 들인 사람들이란 말이다.

         

       열기가 감돌고 흥분이 몸을 감쌌다. 호흡이 흐트러졌다.

         

       『감정에 휩쓸리지 마라. 좁은 시야는 불필요한 빈틈을 만든다. 거친 호흡은 전투 흐름까지 방해해.』

         

       알고 있어요.

         

       열기가 냉정하게 억눌러졌다.

         

       상대를 직시했다.

         

       『레이피어 수준은 아니지만 얇고 긴 장검이군. 스몰소드 검술인가. 크로스가드에 일부 손가락을 걸쳐서 검을 잡았어. 찌르기를 상정한 그립이다. 기습 찌르기를 주의해라.』

         

       카딘이 한손검을 앞으로 길게 내밀어 경계했다. 마검보다 긴 검에 팔까지 곧게 내밀자 창처럼 날카롭게 뻗어졌다.

         

       『접근을 중시하며 근접 검술을 쓰는 너와 다르게 거리의 간격을 중시하는 수비 전략을 선보이지. 네가 먼저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다.』

         

       숨을 가다듬었다.

         

       『준기사급은 아닐지라도 검술이 가볍고 빠를 테지. 조심해라.』

         

       파스텔은 자세를 잡고 검을 겨눴다.

         

       카딘이 들어오라는 듯이 검 끝을 까딱였다. 수비용 검술로 당당히 수비를 하겠다는 태도다.

         

       파스텔은 입술이 삐뚜름해졌다.

         

       “상대가 오길 마냥 기다리는 건 겁쟁이 같지 않아요?”

         

       완전 겁쟁이.

         

       카딘이 픽 웃었다.

         

       “아가씨는 도발을 잘 못하는군. 평소에 순하게 살았나? 그래서야 검을 잘 쓸지 모르겠어. 보스 실력이 이래서야 망자들이 안타까워.”

         

       검 끝이 시체 자국을 가리켰다.

         

       파스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무뢰한을 없앨 실력은 충분하네요!”

         

       지면을 박찼다. 강한 각력이 지면을 때렸다. 소음이 났다. 거리가 폭발적으로 줄어들었다.

         

       마검을 휘둘렀다.

         

       카딘이 뒤로 물러났다.

         

       그러며 장검을 가볍게 움직였다. 유려한 경로를 그린 장검이 마검의 검로를 건드렸다. 충격이 일었다. 경로가 비틀리며 검격이 빗나갔다.

         

       깔끔한 패링.

         

       공격이 실패한 소녀에게 빈틈이 드러났다.

         

       이 순간 공세는 뒤바뀌었다. 수비 검술의 이치에 따라 반격이 이어지고 소녀는 쓰러지리라.

         

       하지만 정작 결과를 만든 카딘은 공격하지 못했다. 검격이 무겁다. 충격의 순간 장검이 감당치 못하고 흔들렸다. 충격이 그대로 타고 들어와 몸을 강타했다.

         

       무슨 근력이……!

         

       분명 쳐낸 건 롱소드 건만 대검을 무리하게 쳐낸 듯한 후폭풍이었다. 반격은커녕 자세를 가다듬어야 했다.

         

       연약한 소녀의 몸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이 아니다. 외견과는 천지 차이인 위력이었다.

         

       뒤이은 검격이 날아왔다.

         

       카딘은 당혹감을 지우며 움직였다. 세련된 스텝으로 거리를 벌리고 장검을 검로에 댔다. 장검이 내려치는 검날 끝을 신중히 노렸다.

         

       지렛대 원리에 따라 검 끝으로 갈수록 검격의 위력은 대폭 감소한다. 강한 검격은 날 끝을 쳐내면 손쉽게 파훼할 수 있었다. 거리를 중시하는 스몰소드 검술은 이런 세련된 파훼와 반격에 강했다.

         

       카딘은 숙련된 솜씨로 패링을 시도했다. 장검이 날 끝과 부딪혔다. 충격이 일었다.

         

       몸을 휩쓰는 충격.

         

       카딘은 숨을 들이켰다. 자세가 흐트러졌다. 반격은커녕 충격을 회복해야 했다.

         

       인정해야겠다. 상대는 롱소드를 휘두르는 게 아니다. 대검 같은 중장비를 휘두르고 있었다.

         

       힘의 우위를 깨달은 소녀가 눈을 빛냈다. 검날이 번뜩였다. 양손검 특유의 연쇄 검격이 몰아쳤다. 검로가 시야를 뒤덮었다.

         

       쳐낼 게 못 된다.

         

       그렇다면 흘리면 될 일.

         

       이 정도 열세는 무수히 겪어봤다.

         

       카딘은 물러나며 사선 스탭을 밟았다. 검로에 검을 댔다.

         

       부딪히지 않고 밀어내듯이.

         

       확연히 적은 충격이 일었다. 불씨가 튀었다. 검로가 조금 뒤틀리고 작은 차이로 카딘을 스쳤다.

         

       카딘의 장검이 빠르게 움직였다. 작은 충격이 연달아 일었다. 소음이 울리고 불씨가 튀었다.

         

       몰아치는 검격이 하나씩 조정됐다.

         

       3번, 7번, 14번, 23번.

         

       모든 검로가 비틀리고 대기를 갈랐다.

         

       놀란 소녀의 눈이 커졌다.

         

       이걸 가지고 놀라다니, 경험 부족이군.

         

       카딘은 감정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수비 자세를 기습적으로 바꿨다. 검날이 번뜩였다. 빠른 찌르기가 소녀를 노렸다.

         

       소녀가 황급히 몸을 비틀었다. 검날이 어깨를 옅게 그었다. 핏방울이 튀었다. 소녀의 멍한 눈길이 날아가는 핏방울을 바라봤다.

         

       이겼다.

         

       꺾인 공세와 이어진 반격.

         

       소녀에겐 전세 변환을 침착하게 극복할 경험이 부족하다. 죽음의 공포가 정신을 지배하리라.

         

       의식이 무너지고 무의식이 올라온 시점에 검사가 겪을 일은 패배뿐이었다.

         

       카딘은 검을 재차 찔렀다.

         

       순간 분홍 눈동자가 몽롱해졌다. 찔러가는 검날을 보다가 카딘과 눈을 마주쳤다.

         

       거친 살기가 몰아쳤다. 간담이 서늘해지고 피부가 찌릿했다.

         

       확연한 변화.

         

       카딘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설마 여태 살의를 안 품은…….

         

       소녀가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마검이 손에서 놓였다. 검날이 찔러가고 소녀의 양팔이 들렸다.

         

       검날을 노리듯 양팔이 힘껏 교차됐다. 충격이 일었다. 얇은 검날이 뒤틀리고 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은색 파편이 흩날렸다.

         

       카딘은 날아가는 파편들을 멍하게 바라봤다.

         

       이게, 이게 무슨…….

         

       소녀의 손이 뻗어졌다. 목덜미가 잡아채지고 다리가 걷어차였다. 몸이 붕 떴다.

         

       카딘이 일순간 지면에 내리꽂혔다. 충격이 일었다. 입에서 피가 뿜어졌다.

         

       쓰러진 상대를 향해 파스텔은 달려들었다. 위에 올라타 주먹을 휘둘렀다. 타격음이 연달아 울렸다.

         

       막아선 팔이 뒤틀리는 소리가 났다. 얼굴이 열리고 주먹이 때려 박혔다. 비명과 함께 핏물이 튀었다.

         

       어디선가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해도 된다.』

         

       파스텔은 멈칫했다. 날리던 주먹을 마저 날려 얼굴을 때리고 머리를 흔들었다.

         

       잠에서 깨는 듯한 감각이 찾아왔다.

         

       『네가 이겼다.』

       “네? 네?”

         

       멍한 정신으로 상대를 내려봤다. 카딘이 입술 터진 얼굴로 올려봤다. 양팔은 주먹질을 막느라 뒤틀리고 입에선 피가 흘러나왔다.

         

       호르몬에 취한 머리로 감상을 떠올렸다.

         

       어라아.

         

       살아 있네.

         

       파스텔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땅바닥에서 마검을 주웠다. 역수로 잡고 들어 올렸다.

         

       『무리하게 안 죽여도 된다.』

       “네에? 왜요?”

         

       파스텔은 몽롱한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며 칼날을 내리꽂았다.

         

       “으헉!”

         

       카딘이 황급히 구르고 지면에 꽂혔다.

         

       오잉.

         

       빗나갔엉.

         

       『살의가 없었다. 이자의 목적은 생사결이 아니라 대결 같군. 네가 졌어도 봐줬을 거다. 물론 힘 조절 못 하고 애 어깨를 벤 건 선을 넘긴 했지.』

         

       악마가 멈칫했다. 파스텔의 잘린 옷자락과 살짝 베인 어깨를 살피는 듯했다.

         

       『흠, 그렇군. 그냥 죽여라. 죽일 놈이다.』

         

       아하.

         

       파스텔은 지면에서 칼을 뽑았다. 카딘을 밟고 검을 들었다. 공포 섞인 눈동자가 올려봤다.

         

       안녀엉.

         

       제대로 내리꽂으려 했다.

         

       정면으로 프레스턴이 보였다. 총을 챙겨 달려오던 프레스턴이 멍하게 바라봤다.

         

       잠시 눈을 마주쳤다. 프레스턴이 천천히 시선을 피했다.

         

       “하, 하시던 일 하시죠.”

         

       떨리는 목소리였다.

         

       파스텔은 숨을 들이켰다.

         

       와아, 보스다.

         

       진짜 보스야.

         

       만세 했다.

         

       “보스! 보스! 저 왔어요! 밀무역품을 가져 왔어요! 수수료 없는 거 맞죠?”

         

       오예, 수수료 0%다.

         

       파스텔은 앞으로 부자야.

         

       부자아.

         

         

         

       #

         

         

         

       얼마 뒤 어깨의 옅은 자상을 치료한 파스텔은 어이가 날아갔다.

         

       “대결을 원했을 뿐이라고요?”

         

       얼굴이 퉁퉁 붓고 양팔에 붕대를 감은 카딘이 변명을 시작했다.

         

       입술이 죄다 터진 바람에 발음이 뭉개져 듣기 난감했지만 무슨 얘기인진 알 수 있었다.

         

       적대 약소조직이 무리하게 돈과 인맥을 끌어와 카딘을 고용했다. 거절할 사안이지만 카딘은 서른 명을 학살한 소녀의 얘기를 듣고 승낙했다.

         

       무리한 고용은 맞기 때문에 어떻게 할지 말지는 카딘 마음대로였다.

         

       그래서 그냥 마음대로 프레스턴 조직을 평화롭게 방문한 다음 마음대로 파스텔을 기다렸다.

         

       “실력이 궁금했다. 어린 재능을 죽일 생각까진 없었어. 다만 전력을 보고 싶어 도발하긴 했지.”

         

       아니.

         

       파스텔은 어이가 다시 날아갔다.

         

       “평화로운 방문이요? 사람이 죽었는데 뭐가 평화로워요?”

         

       카딘이 움찔하더니 말을 멈췄다.

         

       정적이 흘렀다.

         

       조용히 듣던 프레스턴이 난감해했다.

         

       “그 정도면 평화롭지 않나……?”

       “네에?”

       “무력행사를 하며 조직원을 좀 죽이긴 했어도 불필요한 살생은 안 했어. 물론 너와 붙은 이후에 태도가 돌변할 가능성이 높아서 매우 위험했지만 일단 평화로웠지.”

         

       이게 무슨 소리야아?

         

       완전 공감 안 됨.

         

       “그 무력행사가 불필요한 일 아니에요? 사람이 죽었잖아요! 대결을 원하면 정중히 부탁하면 되죠! 정중히 몰라요?! 정중히 평화롭게!”

         

       당연한 말에 순진한 소녀를 보는 눈빛들이 돌아왔다.

         

       아니.

         

       『어린 크래프트, 생각해 봐라. 이곳이 어디지?』

         

       수수료 0% 거래처?

         

       『범죄조직이다. 더러운 범죄조직. 범죄조직을 어떻게 평화롭게 방문해.』

         

       하지만 여기 사람들 완전 착한데.

         

       『범죄조직 방문에 무력행사는 거의 필수적이다. 안 그러면 웃으며 총을 쏠 테니까. 감히 그러지 못하게 미리 리스크를 경험하게 해줘야 안전해.』

         

       으아?

         

       냉정한 현실?

         

       프레스턴이 카딘에게 태연히 말을 걸었다.

         

       “어차피 진 거 우리한테 넘어오지 그래? 계약은 당신이 요양하고 있을 동안 우리가 알아서 무마시켜 줄게.”

         

       카딘도 태연히 대화를 주고받았다.

         

       “돈은 필요 없어. 다만 당신네 보스의 미래를 지켜보고 싶긴 하군.”

       “아니, 내 조직이라니까.”

       “바지사장은 항상 그렇게 말하지.”

       “아니.”

         

       만담이나 주고받는 꼴을 보니 파스텔은 완전 어이가 없어졌다.

         

       나만 이상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선이 쏠렸다.

         

       “됐어요! 전 죽은 분들의 조문이나 갈래요! 지난번에 인사도 나눈 사람들이 죽었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죠!”

         

       그렇게 말하고 파스텔은 양팔을 바둥거렸다.

         

       “이 냉혈한들! 차가운 피의 소유자! 차가워! 차가워! 아이 차가워!”

         

       프레스턴이 태연히 정정했다.

         

       “아, 신참이 죽은 거라 아가씨는 다 모르는 애들이야. 유가족 입장을 생각하면 아가씨는 안 찾아가는 게 나을걸.”

         

       파스텔은 말문이 막혔다. 조문을 갈지 말지 갈팡질팡하다가 감정을 못 참고 소리쳤다.

         

       “어쨌든요!”

         

       방을 뛰쳐나왔다.

         

       완전 이상한 세상이야.

         

       나만 토끼 굴에 떨어진 앨리스지.

         

       여긴 이상한 나라고.

         

       『조문하러 갈 건가?』

         

       파스텔은 잠시 고민했다.

         

       “아뇨. 보스 말대로 유가족에게 민폐 같으니 안 가는 게 맞죠. 개인적으로 명복을 빌래요.”

       『잘 생각했다.』

         

       악마가 옅게 웃었다.

         

       『너무 저들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라. 거친 세상에 적응했을 뿐이야. 죽음 하나하나에 크게 괴로워하기엔 고달픈 삶을 살았어.』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공감이 어렵다면 역지사지를 해봐라. 너도 살기 위해 밀무역을 하지? 밀무역이 선량하고 정의롭다는 둥 이상한 말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 것과 비슷하다.』

       “네에?”

         

       파스텔은 눈이 동그랗게 됐다.

         

       “악마님! 악마님! 밀무역은 선량한 일이 맞잖아요! 절실한 사람에게 필요한 물건을 보내는 일인데요?”

         

       악마님 정마알.

         

       “이상하다니요! 절실한 사람에게 필요한 물건을 보내는 일이 뭐가 어때서요! 이건 악마님이 틀렸어요! 교수님이 오시면 다시 얘기를 나눠볼래요! 누가 맞는지 두고 보세요!”

         

       혓바닥을 내밀었다.

         

       베에.

         

       악마의 말문이 막혔다.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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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It’s Mental Immunity

No, It’s Mental Immunity

Status: Ongoing Author:
The guardian demonic sword is troubled and in distress, believing it has been ruined because of me. Does striving for advancement through consuming demonic energy seem too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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