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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6

     

    아셀라의 디버프에 대해 언급하니 명백히 경계하는 표정이다.

     

    남에게 들키기 싫었던 걸까.

     

    하지만 주치의로서 모른척 할 수는 없으니 질문을 이어갔다.

     

    “황녀님, 혹시 평소에 속이 아프거나 울렁거리는 증상은 없으십니까?”

     

    “없어.”

     

    거 참 단호하시네.

     

    이미 아픈 곳이 없다고 대답했던 아셀라니 그럴 줄 알았다.

     

    허세를 부리고 있는 건지, 통증이 하도 길어서 익숙해졌는지는 모르겠다.

     

    “가끔 심해지실 때도 없으신가요?”

     

    “…글쎄?”

     

    모르는 척하는 걸 보니 허세 같은데.

     

    말하기 싫어하는 걸 굳이 건드려서 기분 상하게 할 필요는 없겠지.

     

    “혹시 그럴 땐 이걸 드시기 바랍니다.”

     

    나는 아셀라에게 무통약 병을 넘겼다.

    본래 작은 마석 조각을 담는 용도인 손가락만 한 유리병에 넣어놨다. 꽤 튼튼하다.

     

    “이게 뭔데?”

     

    “무통약이라고 합니다. 통증이 심하실 때 드시면 상당히 완화될 겁니다.”

     

    “그게 사실이야?”

     

    아셀라가 미심쩍다는 표정을 짓자 루시 시녀장이 끼어들었다.

     

    “황녀전하, 외람되오나 한 마디 올려도 괜찮을까요.”

     

    “해봐.”

     

    “주치의 시험에서 선생님이 큰 부상을 입은 기사님에게 그 약을 먹이자 통증이 사라졌다고 대답하셨습니다.”

     

    “…흐음”

     

    아셀라가 손끝으로 유리병을 슬그머니 기울이니 무통약이 안에서 달그락거렸다.

     

    “공자, 혹시 멋대로 기묘한 추측을 하고 있다면 틀렸으니 그만해.”

     

    “황녀님.”

     

    나는 조금 진지한 표정으로 아셀라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주치의인 제게 거짓말은 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황녀님의 용태를 정확히 파악하는 게 제 의무입니다.”

     

    아무리 돌팔이라도 의사 나부랭이로서 조금 고집을 부려봤다.

     

    아셀라는 내 말을 곱씹는지 무표정을 잠시 고수하고는 약병을 챙겼다.

     

    “우선 이건 보관해 둘게. 하지만 공자.”

     

    “예.”

     

    “본녀에 관한 근거 없는 이야기가 황실에서 돌아다니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야.”

     

    조금은 진지함이 담긴 명령.

    자신의 병세를 비밀로 하라는 뜻이었다.

     

    진심으로 차기 황제의 자리를 노리는 아셀라에게 병마는 치명적인 약점이다.

     

    그게 아셀라가 허세를 부리는 이유라면 납득할 수 있었다.

     

    “물론입니다. 담당 환자의 정보는 설령 목에 칼이 들어와도 무겁게 입을 지키는 것이 의사의 의무니까요.”

     

    아셀라는 내 대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전 진찰은 이걸로 끝내겠습니다. 혈압에 문제가 없다면 마력계도 이상이 없다고 볼 수 있지요. 활동하셔도 좋습니다.”

     

    아셀라의 남은 혈액은 미리 준비한 수은과 섞어 폐기했다.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아셀라가 나를 불렀다.

     

    “공자, 그대가 내게 거짓말을 하는 일은 없겠지.”

     

    “어느 안전이라고요. 물론이지요.”

     

    “재능을 얻어서 알 수 있었니?”

     

    날카로운 황금빛 눈이 나를 꿰뚫어 본다.

     

    나도 재능에 대한 대가로 병마를 얻었기에 아셀라의 통증에 대해 유추할 수 있었냐는 질문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그 약제는 연금술로 조제하긴 했습니다만.”

     

    침묵 속에서 아셀라의 시선이 이어진다.

     

    “들어가.”

     

    나는 예도를 갖춘 인사를 보낸 후 몸을 돌려 아셀라의 방을 나섰다.

     

    “후.”

     

    황녀님과의 눈치싸움에 쓰려오는 위장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지금 거짓말은 의사가 아니라 아셀라의 혼약자 라스 고트베르크로서 했다.

     

    그정도는 괜찮겠지.

     

     

     

    ***

     

     

     

    주치의 일을 시작한 지도 며칠이 지났다.

     

    “교대하여 호위 들어가겠습니다.”

     

    업무에 능숙해진 타냐가 내의원 사무실에서 보고했다.

     

    “선생님, 청소가 필요하십니까?”

     

    “뭐가 어디 있는지는 다 알아.”

     

    사무실은 벌써 상당히 제작해놓은 의학 도구들로 어질러졌다.

     

    타냐는 기습 상황에서 발 디딜 곳이 적어진 바닥이 못마땅한 듯했다.

     

    주간에는 타냐가 나를 호위한다. 브루노는 야간. 주기적으로 둘이 주야를 바꾸겠다고 했다.

     

    2교대면 주말도 없고 근무시간도 기니, 궁내에 있을 땐 쉬라고 했는데도 참 말을 안 듣는다.

     

    타냐는 자신의 의무라며 한사코 내 곁을 지키기를 희망했다.

     

    “오늘도 아셀라는 특이점 없음.”

     

    시트를 만들어서 기록을 이어나간다.

     

    혈압이나 건강 상태는 계속 괜찮은 편이다.

     

    식단을 체크해 봤는데, 영양 밸런스가 치우쳐있어서 메뉴를 제안할까 생각중이다.

     

    다만 이건 황실 주방과 상담해봐야 하기에 시간은 조금 더 필요하다.

     

    무엇보다 아셀라는 워낙 소식가다.

     

    저렇게 깨작깨작 먹어대는 태도로 10년 후에 용케도 그렇게 성장했다.

     

    엘프도 아니고, 마나를 먹고 자라는 것도 아닐 텐데.

     

    “속이 아파서 그러겠지.”

     

    허세 부리기는.

     

    어울린다면 어울리지만 담당 환자가 되어버렸으니 신경이 쓰여버린다.

     

     

     

    무심코 조금 상상을 했다.

     

    황실에서 태어난 어린 황녀.

     

    네 살, 아니면 세 살. 갓난아기 때부터일 수도 있고.

     

    마법의 재능을 개방하며 병마를 얻었다.

     

    그것도 상당한 고통을 수반하는.

     

    품격과 예도를 지켜야 하는 환경 속에서는 조금 아픈 정도로 약한 티를 내선 안 된다.

     

    황가 구성원이 얕보이는 행동을 했다가는 황실 전체의 격이 추락하기 마련이다.

     

    더욱이 가장 약한 파벌이라고는 해도 엄연한 승계권자다.

     

    실제로 아셀라는 차기 황제가 될 인물이니 내게는 약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아셀라의 친모인 카밀라 황비는 권력욕이 강하기도 하고.

     

    그런 상황이니 아셀라는 아픈 티를 내지 않는 걸 당연히 여겨야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 통증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였거나.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서 뭐 어쨌다고.”

     

    그렇다고 아셀라가 저질렀던 악행들이 정당화되진 않는다.

     

    그녀의 행동의 최대 피해자가 나라고까지는 안 하겠지만.

     

    “지금은 주치의로서 의무를 할 뿐이야.”

     

    모처럼 의사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감정에 휘둘려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아셀라가 밉다거나, 조금은 불쌍하게 느껴진다거나, 그런 사소한 감정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통증이 재능의 대가라고 해 보자.”

     

    이건 내 디버프처럼 불치병일 확률도 있다.

     

    하지만 만약 아니라면.

    내가 고칠 수 있는 병, 또는 증상이라면.

     

    의학을 이용해 디버프인 통증을 없애면 전에 생각했던 대로 마법의 재능도 같이 사라질 터다.

     

    황금의 마녀가 탄생하지 않도록 완전히 망가뜨려 버릴 수 있다.

     

    “불경죄 정도가 아니구만.”

     

    아셀라의 병명은 뭘까.

     

    진단이 안 먹혀서 정확한 것은 아직 알 수 없으니, 아셀라를 더 관찰해야 한다.

     

    그래서 당분간 아셀라의 일과 시간에는 곁에서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중이다.

     

    주치의로서 필요한 일이라고 하니 아셀라도 납득했다.

     

    “일단은 내 담당 환자니까.”

     

    환자를 편하게 해주는 건 주치의의 의무고.

     

    “혹시 진단보다 강력한 스킬이 나오면 모르겠는데.”

     

    상태창을 확인해본다.

     

     

    ―――――――――――

     

    ○ 의학 D

    현대의학 지식을 기반으로 대상을 치료하는 스킬입니다.

     

    · 진단 C

    환자의 상태를 일부 파악합니다.

     

    · 처방 C

    진료한 환자의 상태가 조금 더 좋아집니다.

     

    · 응급처치 마스터리 D

    응급처치를 약간 신속하게 할 수 있습니다.

     

    · 혈액검사 D

    환자의 혈액 상세 정보를 확인합니다.

     

    ―――――――――――

     

     

    진단과 처방은 랭크가 C까지 올랐다.

     

    슬슬 새 스킬이 개방할 때가 됐다.

     

    “이제는 스킬트리를 선택해야 해.”

     

    상세정보를 터치하니 스킬맵이 열린다.

     

    가장 먼저 주어졌던 기본스킬은 세 개.

     

    [진단], [처방], [응급처치]다.

     

    이 세 개에서 나뭇가지가 뻗듯 유사한 계열의 스킬이 개방을 기다리고 있다.

     

    [혈액검사]는 [진단]에서 가지가 뻗은 루트의 스킬이다.

     

    다음 스킬이 개방될 땐 [진단] 루트와 응급처치 루트 두 가지 중 고를 수 있다.

     

    그곳에서 미개방인 두 칸이 반짝이고 있으니 알기 쉽다.

     

    “[처방]은 약사 쪽 계열 스킬 같고, [응급처치] 쪽은 손재주가 좋아지려나.”

     

    처방 쪽은 연금술이 있으니 우선순위를 낮게 책정하려고 한다.

     

    “역시 지금은 [진단] 쪽 트리부터 개방하는 게 맞겠어.”

     

    아셀라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대책을 세울 수 있으니까.

     

    “혈액검사는 CBC였지. 현대의료기기가 필요한 스킬이었어.”

     

    가장 범용적인 검사 기술이라면.

     

    “역시 엑스레이 촬영인데.”

     

    내 눈에서 레이저라도 나가게 되려나?

     

    거대괴수가 따로 없네.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뭐, X선은 자외선보다 파장이 짧아서 눈에 안 보이기는 하지만.

     

    “선생님, 슬슬 일과 시간입니다.”

     

    타냐의 말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황궁은 고급 인력이 참 쓸모없이 낭비되는 곳이다.

     

    아셀라 한 명이 발걸음을 옮기면 철그덕철그덕 소리와 함께 수십 명이 우르르 몰려다닌다.

     

    나도 호위기사처럼 아셀라의 옆에 붙어있는데, 아셀라도 호위기사가 있고 타냐도 내 호위기사로 붙어있으니 묘한 그림이다.

     

    생각해보니 아주 쓸모없진 않았다. 일자리 창출은 중요하지.

     

    “아셀라, 어깨를 더 펴거라. 눈에 힘은 최대한 주고! 집중력이 흐트러졌어.”

     

    그런데 아셀라의 일상생활이라는 것이 하품을 참기 힘들게 지루했다.

     

    아침 식사 후엔 카밀라 황비가 아셀라를 교육한다.

     

    점심 식사 후에도 교육이 이어진다.

     

    저녁 후엔? 물론 교육이다.

     

    제왕학, 정치학, 예도, 무용, 승마 등.

     

    대체 어디에 쓰려는지 모르겠는데 교육열이 강남 아주머니들 저리 가라다.

     

    강남, 강북이었나?

    오래되어서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상당히 스파르타식이라 쉴 틈도 없다.

     

     

    저녁 시간 교육을 마친 교사가 오늘 아셀라가 푼 시험지의 답안을 황비에게 보여줬다.

     

    황비는 눈썹을 꿈틀거리고는 일과를 마친 아셀라에게 다가가 말했다.

     

    “오늘 성취도가 엉망이구나. 후작가에서 휴가가 너무 길었던 모양이지.”

     

    얼마나 엉망이길래?

     

    아셀라가 푼 시험지를 슬쩍 보니 서른 문제 중 두 문제를 틀렸다.

     

    …엄청 잘 한 거 아닌가?

     

    황비 앞에 꼿꼿이 선 아셀라는 무표정을 유지했지만 순간 목이 움찔한 걸로 보아 침을 꿀꺽 삼킨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안하무인인 아셀라가 유일하게 힘을 제대로 못 쓰는 상대가 바로 카밀라 황비였다.

     

    10년 후에서도, 지금도 아셀라가 저자세로 나가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황비 앞에서는 유독 늘 긴장하는 것 같다.

     

    그녀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보는 나로서는 신선하기는 하다.

     

    “전부 나가거라. 아셀라는 공방으로 데려가겠어.”

     

    카밀라의 말에 시종들과 기사들이 즉시 몸을 틀어 방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나와 타냐만이 멀뚱멀뚱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No. 058 : 마법 고문 48% → 62%]

    [변동중]

     

     

    배드엔딩 하나의 확률이 증가하고 있었다.

     

    “너구나.”

     

    이제는 어째 숫자가 반갑게 느껴진다.

     

    그래, 안 나와서 섭섭할 뻔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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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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