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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60

        

         ………음, 안녕하세요.

         이렇게 조금 부끄럽지만 3일만에 다시 인사드립니다.

         

         안일하게 여타 다른 부차적인 문제들에 신경을 쓰다가 통 안에 넣어둔 물고기를 놓친 생초보 낚시꾼, 아나스타샤 발렌타인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다들 평안한 일상을 보내고 계셨는지 모르겠네요. 예.

         

         본격적인 근황 토크로 들어가기 전에 앞서 잠시 구차하지만 변명의 시간을 좀 가져보고자 합니다.

         

         아무튼 여러분은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는 오래된 격언이 있다는 것, 혹시 아십니까?

         

         족히 몇백 년은 묵은 말로 아는데 ‘당신이 정말로 더 나아지고 싶고, 발전하고 싶다면. 하루하루를… 그리고 매일매일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처럼 노력해야 한다.’는 뜻으로 일단 나는 기억한다.

         

         좌우명으로 삼기엔 이만큼 멋진 말도 드물지 않을까? 그야 실천하는 건 전혀 다른 얘기가 되겠지만.

         

         우선 명확한 동기 부여… 그러니까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귀찮음과 피곤함을 이겨내고 행동할 수 있게 해주는. 등을 밀어줄 사라지지 않는 영구적인 원동력이 있어야 하고.

         그런 패턴을 유지할 향상심과 의지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오히려 타인을 위해 노력하는 게 더 쉬울 정도로 사람은 자기자신에게는 관대한 법이니까.

         

         또한 개인의 보상 심리를 만족하도록 내부 생활상이나 외부 환경으로부터 꾸준한 결과물까지 주어져야 하니, 굉장히 속물적인 자기 계발을 장려하면서도 동시에 고명한 수도승이나 가능한 삶의 태도를 장려하는 느낌?

         

         그야말로 이 호화스러운 주거지에 입주하는데 성공한 어느 가짜 해커처럼 특수한 사연과 조건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면, 뭔가에 쫓기듯 행동하는 트라우마가 있거나.

         

         지극히 냉철한 현실주의로 어떤 계단을 밟아 올라가는 게 미래에 도움이 될지 판단할 수 있는 지식과 근거가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나조차도 다양한 시나리오를 대비해 준비를 공고히 할 수 있는 유예 기한이 몇 달밖에 안 남은 지금, 기반이 좀 마련되었다고 해이해진 감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아, 그래서 이 자식은 그렇게 깔끔하게 움직일 수 있던 건가? 더 절박해서?

         

         계속 그 새끼니 이 자식이니 지칭 명사로 부르기도 뭐한 한국인 친구에게 별명을 지어주자면 뭐가 좋을까. 돈 먹고 튀셨으니 미스터 길동 홍 정도면 되려나?

         

         비록 내가 찌질하다 놀리긴 했지만, 선물 받은 물건을 냅다 팔아 치울 생각은 없었는지 우리 도둑 씨는 PDA를 몸에 지닌 채로 꽤 착실하게 행동하셨다.

         

         서투르게 선불 카드에 들은 크레딧을 다른 곳으로 옮겨서 쓰려는 시도도 안 했고, 미행 같은 걸 뿌리치려는 흉내조차 내지 않은 채 얌전히 굴었으니… 뭐 그의 행적은 어디 카메라를 들여다보기는커녕 영수증 내역만 쓱 훑어도 다 나온다.

         

         해킹? 귀찮게 그럴 것도 없이 선불 카드를 충전해주면서 읽어낸 고유 번호로 조회만 돌리면 끝.

         

         첫 날은 얌전히 옷가게에서 말끔한 기성복과 새 마스크-어지간히 메트로폴리스 공기가 폐에 안 받긴 했나 보다.-를 구입한 후, 식사를 두 차례나 하고 별도의 신분 검사가 없는 싸구려 모텔에서 수면.

         

         둘째 날에는 아주 능숙하게 뒷골목 브로커와 접선하는데 성공했는지 세부 내역이 불분명한 출금 기록이 계속되다가… 몇 시간 후부터는 임플란트 샵과 칩 샵에서 어마어마한 대량 결제가 이루어졌다.

         

         1억 크레딧이라.

         내 소비 경험으로 비교하자면. 각종 추가 옵션은 포함하지 않더라도, 필수적인 기본 바탕은 전부 챙긴 휴머노이드 케어봇의 정식 매장 판매가에 달하는 거금.

         

         그걸 거의 몽땅 사이버웨어를 비롯한 신체 강화형 임플란트 쇼핑에 퍼부었으니 얼마나 재밌었을까.

         

         아마 못해도 길거리 양아치나 어중이떠중이 용병, 웬만한 초반 캐릭터는 쉽게 뛰어넘는 스펙이 완성되었을 게 분명하니 어디 가서 객사할 염려는 확 줄었겠지. 그건 좋다. 나도 기쁘다 이건데.

         

         갑자기 초인이 된 몸에 따로 적응하는 기간도 필요 없었던 걸까? 실전에서 갈고 닦는 타입?

         대망의 셋째 날의 아침이 밝자 마자, 저어어어기 구석진 곳에 있는 블랙 마켓의 유류품 떨이점에 들른 그는 총에… 방탄복에… 유탄 보호형 내복에… 응급 키트와 약물 등등 풀 세트를 사더니.

         

         그대로 대부분의 전파와 공용 네트워크가 일절 서비스하지 않는, 기업의 시스템이 보장하는 것 하나 없는 드넓은 네오 헤이븐 할렘가의 어딘가로 도망가셨다는 이야기가 되시겠다.

         

         ………이런 씨발!!

         

         [ 미스 아나스타샤? NHPD 쪽에서 이러쿵저러쿵 참견한 게 욕을 하실만큼 마음에 드시지 않는다면 제가 개인적으로 사건 담당자를 확인해서 전근을 보내던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다른 기업에서 특별히 신경 쓰는 경찰 간부가 아니라면 저희 쪽에서도 그 정도는 손 써드릴 수 있…. ]

         

         “아니, 아니에요. 미스터 라구스. 그냥 좀 다른 안 좋은 일이 생각나서 혼잣말이 튀어나온 거고. 네. 바쁘실 텐데 이렇게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괜히 내 중얼거림을 들은. 전화 통화가 연결되어 있던 파라다이스 지부장께서 엉뚱한 공직자의 목을 날려버리려 하시길래 다급하게 아무 일도 아니라며 주의를 돌렸다.

         

         그게 뜬금없이 주제에서 탈선한 건 아니고.

         

         백주 대낮에 내가 공공기물 파손과 재산 침해, 거기에 각종 재물 손괴죄로 온갖 곳에다 벌금과 배상금을 쫙 돌렸다는 소식을 어떻게 또 건너 건너 들은 그가 법무팀의 지원이 필요하냐며 연락해온 터라. 하.

         

         진짜 이 시대는 사생활이라는 게 개념부터 존재하질 않나…? 아니면 내가 이쪽 파라다이스 지부에 대체 어떤 식으로 등록되어 있는지 날 잡아서 제대로 확인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 별문제가 없으시다면 제가 주제넘게 나서지는 않겠습니다만. 그럼 공식적이던 비공식적이던 부담 없이 이 개인 회선으로 연락주시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아무튼 전화 주셔서 고마워요. 네, 네에~”

         

         뚝. 어찌저찌 마무리한 연락이 끊어진다.

         

         – …차가운 음료수라도 가져다 드리면 도움이 되겠습니까? –

         

         “그래…… 얼음 잔뜩 넣은 사이다로 한 잔만.”

         

         사양하는 것 외에는 대처할 도리가 없는 호의가 끝나자마자 끼어든 제로의 배려를 난 구태여 거절하지 않았다.

         

         버릇 나쁘게 침대 위에 엎드려서. 목구멍으로 벌컥벌컥 탄산을 흘려 넣어도 뭐라 할 사람이 없는 자유는 편했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는 곧 모든 행동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기에 가능한 법.

         

         그러니까 이게 다 벌금이니, 세금이니 하는 더럽게 골치 아프고 현실적인 ‘어른’의 문제에 내가 골머리를 앓느라 감시에 소홀했던 탓에 발생한 일이란 뜻이다.

         

         솔직히 홍길동 씨가 양심이 있으면 빠른 시일 내로 알아서 접촉을 해오던, 만났던 장소에 다시 나타나던 할 줄 알고 한동안 서킷 리파이너리 근처로 외출해서 빈둥거릴까 고민까지 했는데, 외출할 원인이 통째로 증발한 건 다행이라고 봐야 하나?

         

         하여간 우습게도 공식적으로는 선량한 시민 아나스타샤가 최초로 저지른 경범죄인만큼 업무 대행을 제로가 자처했지만.

         

         정작 여기 발붙이고 산다는 년인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문외한이면 얘기가 안 되니까 이번 기회에 나름 열심히 공부하는 시간을 좀 가졌다고.

         

         주인공은 그냥 꼴리는 대로 때려부수고 잠수 타면 땡이었던 잡다한 환경 파괴에 대한 제재가 확실하게 존재함을 재차 확인하고… 피로도 풀 겸 쉴 때는 잠깐 관심을 돌려 그가 고른 임플란트 라인업을 살피며 점수를 매긴다든가.

         

         시민증에 남는 개별 벌점 시스템을 보고는 슬쩍 조작해서 지울 여지가 있나 살펴보다가도.

         짜식이… 뭐가 손에 익을지도 모르고, 초기 장비에 너무 과투자할 까닭도 없으니까 싸게 유류품으로 장비를 해결한 잔머리에 나라도 저리 했을 거라며 감탄한다든가.

         

         그러니 흐뭇하게 자라나는 내 일방적 후임자, 네오 헤이븐 용병 업계의 파릇파릇한 동양인 새싹을 바라보다가 수확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건 과한 믿음에 대한 정당한 응징이었던 셈이다.

         

         “…야,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세계로 납치된 사람이. 떠돌던 곳에서 겨우 말도 통하고~ 배려심도 있는 누군가를 마주친 순간에, 일부러 인연을 맺길 거부할 이유가 있다면 당최 뭐라고 생각해?”

         

         – ……. –

         

         그 날 귀가하자마자 풀어낸 내 사연을 바탕으로, 다소 복잡하고 다각도로 분석하는 게 많은 인공지능의 특성상 상당히 비효율적인 질문을 뭉쳐서 던졌음에도.

         

         메모리가 어마어마하게 확장된 제로는 스캐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빈 컵을 치우며 금세 대답을 내놓았다.

         

         – 의심, 신뢰의 부재, 공동 전선의 비효율성, 영속성 없는 옅은 관계에 대한 거부감. 종에 대한 폄훼가 된다면 실례하오나, 인간은 집단을 이뤘을 때 강하지만 전체를 묶는 동일한 목표가 없다면… 아무래도 개개인은 스스로의 욕망을 위한 선택을 우선시하겠지요. –

         

         “어… 아주 살짝만 간단하게 말해서?”

         

         – 아샤님의 눈길이 닿는 곳을 떠나는 게 그 자신에게 명백한 이득을 가져다주었던가. 그게 아니라면 모든 시스템의 혜택을 포기하면서까지 접촉을 거부할 근거가 따로 있었으리라 봅니다. –

         

         뒤를 이어 ‘혹은 귀인의 눈에 들어서 1억 크레딧이란 거금을 얻은 것만으로 평생 쓸 운을 다 썼다 여기고 아예 근방을 떠났을 가능성’도 있다며 전혀 다른 추측을 늘어놨지만….

         

         대부분의 돈을 쥔 채 기차에 훌쩍 탑승한 것도 아니기에 그쪽 방면으로 상상하는 건 그만.

         대신 구구절절한 결제 내역서를 시야에 다시금 펼쳐 놓은 채 그의 선택을 하나하나 음미했다.

         

         남자는 대부분의 크레딧을 단순 소비한 게 아니라 미래에 투자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식으로든 싸워 나가기 위해서. 그것도 아주 적극적인 방식으로.

         

         당장 주요 근육과 장기에다 박은 임플란트 라인업(Line-up) 좀 봐라.

         

         급속 증혈제 투여기, 인공제어 근육 수축기, 신경 화학 물질 필터.

         당장 현장에서 즉사하지 않고 어떻게든 야전 병원이나 정규 의료 센터까지만 가면 살아날 길이 있는 시대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모양새다. 죽다 살아난 경험도 없을 것 같은 주제에.

         

         할렘가로 들어간 것도… 그래 어찌 보면 영리한 판단이다.

         하베스트 플래닛의 하층부와는 결이 다르다. 거긴 그래도 구시대의 기반 건물들을 응용해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면 여긴 그야말로 불법 증축의 역사가 쌓이고 쌓인 달동네.

         

         나야 무력한 소녀의 몸으로, 그것도 다수의 인물에게서 미인상이라 인정받은 얼굴을 가지고 그런 무법지대에 함부로 머물렀다간 자칫 피바다를 만들어도 모자랄 거란 피곤한 예감이 있었기에 얼씬도 안 했지만 남자는 사정이 다른 법.

         

         극초반을 생각하면 미리 그 동네 인근에서 안면도 트고, 지리감도 익혀 두는 건 괜찮은 선택이다.

         

         그렇지만 그런 길을 걷게 된 연유에 나를 피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면. 이 현상을 어떤 식으로 해석해야 할까.

         

         “………내가 싫었다? 아니, 거북했다??”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켜 양반 다리로 자세를 제대로 고쳐 잡고, 정리된 이불을 끌어당겨 무릎 근처에서 만지작거리며 안정감 있게 상념을 지속했다.

         

         내가 그를 보고 알 수 없는 기시감과 오한에 굳었던 것처럼.

         그는 나를 대하는데 있어서 연원 모를 부담감을 느끼는 감이 분명 느껴졌었다. 더 정확히는, 이쪽만 몰라서 고민이었고 그는 뭔가를 알면서도 엮이는 걸 거부했지.

         

         반갑지 않을 수 있다. 외려 반대로 밉거나 짜증나는 존재로 여길 수도 있으리라.

         

         꼭 돌아가는 것도 바라지 않고 현상에 만족하며, 일반적인 해피 엔딩에도 별로 흥미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저 그런 악역이나 빌런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수준의 위험으로 성장할 수도 있고.

         

         

         먼저 도착해서 자리를 잡고 있던 선발대에게 신입이라며 주목 당하는 상황? 그야 존나 무섭다.

         엇비슷하게 이 세상에 대해 잘 알면서도 그 속내나 인간성을 전혀 알 수 없는 같은 게이머? 어우, 조금 끔찍할 수도.

         더군다나 무력 차이까지 극심해서, 만약의 사태가 일어났을 경우 반항할 수 있는 여지도 거의 없다면 당장 안전 거리를 두려는 마음도 들법하다. 음.

         

         

         ……그러니 똑같이 이 세상에 흘러 들어온 이물 주제에, ‘아나스타샤 발렌타인’이라는 이름까지 얻고 헬레나의 가까운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날 보고 많이 못마땅하게 생각할 인간도 있겠네?

         

         “쓰읍….”

         

         손을 꼼지락거려 심장이 꾸욱 눌리는 감각을 풀어냈다.

         

         너무 나간 생각이라고? 그럴지도.

         하지만 반쯤 포기했던 ‘다른 유저’도 이제 와서 나타났으니, 얼마나 더 많은 걸 고려해야 할지 난 이제 잘 모르겠다.

         

         중요한 인물 옆에서 일방적으로 기생하며 단물을 빨아먹고 있는 인간을 봤다면 화를 내는 것도 이해가 가고. 자기가 손해보는 것 같은 상황에 무임 승차자를 미워하는 건 어디까지나 감정적인 문제니까.

         

         – 여지껏 그 성씨 덕을 보거나, 딱히 부당한 이득을 취하신 적도 없지 않습니까? –

         

         “넌 헬레나 팬덤이 얼마나 극성인지 모르…… 아니다. 이것까지 일일이 설명하기엔 너무 머리가 복잡하네.”

         

         퉁명스러운 말이 나가려던 걸 멈추고 한 손으로 머리칼을 헝클어트렸다.

         차라리 편하게 누우라며 그새 베개를 대령하는 제로의 인도에 따라 몸은 아예 침대에 널브러졌고.

         

         항상 짓눌러오는 환경에 발버둥친 기억밖에 없는 것 같은데,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 어느샌가 나는 여러모로 질투를 받을 수 있는 특권층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왠지 입맛이 씁쓸해졌지만 동시에 개운하게 눈도 뜨였다.

         

         결국은 위치의 문제라는 거다.

         자신이 있을 자리는 스스로 노력해서 만들 수밖에 없는 노릇인데, 아직 그걸 이룩하지 못한 입장에서는 나는 꽤나 이상한 존재일 테니까.

         

         발렌타인 가문의 어르신이자 조부인 하인리히 할아버지도 원작에서는 일언반구도 없었으니, 그녀에게 여동생이 있는 것도 완전 터무니없는 헛소리는 아닐 수 있겠지만.

         

         일단 나는 지금만 뒤에서 사리지 막상 적절한 시기가 오면 스토리에 마구 관여할 예정이기에… 쯧.

         

         “아… 몰라!!”

         

         일어난 건 일어난 거고, 저지른 건 저지른 거다. 이번 실수를 주워담으려면 할렘가로 기계 수색대를 파견해야 할 마당인데 기업에서도 손 놓은 그 광범위한 영역을 내가 들쑤시긴 뒤지게 부담된다.

         

         그러니 미워할 테면 어디 실컷 미워하라지. 나는 잘 대해주려고 정말 노력했다!? 같은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내 앞가림이나 잘 하고자 시시한 결론을 내렸을 때, 또 삐릭! 하고 사이버웨어로 온 연락이 난 당연히 라구스라고 생각했다.

         

         제로를 거치지 않는, 내 개인 회선으로 통하는 번호를 알면서도 먼저 선뜻 기별을 할 사람이 뭐 있어봐야 얼마나 있겠나?

         

         할아버님은 그렇게 극성인 타입이 아니시고. 전체적으로 쿨한 기조의 슈나이더 씨 일가도 그렇고… 아, 메리는 요즘 사이버웨어 가지고 노는 걸 금지당했다 했었네.

         

         헬레나는 사이버웨어도 완전히 재설치한 데다가, 신분 세탁이 잘 되었다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서로 연락을 자중하기로 해서 아마 내 번호 자체가 날아갔을 터.

         아론은 저번에 깐족거리다 한 번 제대로 역풍을 맞고 조용하니 보나마나라며 소거법을 통해 내린 결론이었는데.

         

         어머나, 이게 웬 걸? 어쩔 수 없이 명함 교환하는 감각으로 연락처를 건네주고는 여태 까먹고 있던 상대가 있긴 있었구나?

         

         [ 안녕하십니까? 연구와 격무에 수고가 많으신 와중 무례를 무릎 쓰고, 메모리얼 타임즈의 보도국장 피트 모건이 인사드립니다. 다름이 아니옵고 단발성 광고 촬영 건에 대해 저희 쪽 밑사람이 긍정적인 답을 약속 받았다 하였는데 답변이 없으시기에 부득이……. ]

         

         “…뭐시여 이게.”

         

         이 아저씨는 내가 에나마에서 퇴사한지가 언젠데 아직도 이런 말씀을.

         

         게다가 업무 협조 메일? 아니, 메시지??

         사실 그렇게 딱딱하게 요청하는 것도 아니고 저쪽이 일방적으로 매달리는 뉘앙스가 강한 청탁성 연락에 가까웠는데, 요악하자면 대강 그거였다.

         

         ‘아이고, 에다마츠 이사의 애인(절대 아님) 분 맞으시죠!? 저희 쪽에서 광고 하나 찍자고 했던 걸 진짜 좀 촬영하고 싶은데 시간 좀 괜찮으실까요! 만약 이것 때문에 귀찮으셨다면 사죄의 의미로 명함을 준 부하 직원 놈을 반드시 조져버리겠습니다!’

         

         이게 시벌 무슨 미친 소리일까. 왜 시작부터 담당자들의 목이 단두대에 걸려있는 듯한 어조일까.

         아, 혹시 자기까지 나서서 추진하는 기획이니 실패하면 아래 애들이 무조건 책임을 져야 한다?

         

         다시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 에나마 파티장에서 번호 자체는 모건에게 줬지만 광고 제의를 담은 종이 쪼가리는 그 뒤에 온 다른 이에게서 받았던 것 같다.

         

         내다 버린지 한참 지난 지금은 그 이름이나 직급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요런 귀찮은 건수는 무시하는 게 맞다. 무시하려고 했다.

         이번에 날려 먹어서 아른거리는 저금과 사라진 방독면남을 빼고도 자꾸 내 뒤를 캐고 다니는 마르티나 같은 애들이 없었다면요.

         

         “…….”

         

         지나치게 즉흥적인 아이디어가 아닌가 싶었지만, 그 이상으로 그간의 내 선택과 행적을 불특정 다수에게 부정적으로 매도당한 것 같아서 상한 기분은 이걸 나쁘지 않은 계기라며 마음을 조금씩 충동질해왔다.

         

         매번 자랑스럽게, 스스로에게 너는 정당한 존재라며 되뇌듯 소개하던 이름이 문제가 아닌가.

         

         허면 여차했을 때 내밀 수 있도록 공적인 신분 쪽에 탄탄한 배경을 부여해두는 것도 그렇게 막 허황된 조치는 아니지 않나?

         

         그러니까 이번에 쓸데없는 지출도 컸겠다. 마카로비치 명의로 용돈벌이도 하고, 일종의 증명 사진처럼 네오 헤이븐에 공적인 발자취를 하나 남기는 것도… 가장 먼저 넘어온 내가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닐까?

         

         독립형 네트워크라 외부에서 접근하기 어렵던 방송국에도 한 가닥 백도어를 심을 겸 말이다.

         

         “제로? 지금부터 어느 유명하신 보도국장이랑 통화를 좀 할 거니까. 내가 말실수를 하나 저쪽이 말장난을 하나 좀 녹음하면서 들어 줄래?”

         

         

         

         ………아, 그리고 이건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여담이지만 몇 일 뒤에.

         헤멧으로부터 내가 그야말로 억만장자가 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나는 한순간의 감성에 젖어서 이 광대 놀음을 수락하게 된 걸 존나게 후회했다.

         

         …거 진짜 인생, 재수도 없고 타이밍도 나쁘지. 아!!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히로인의 악질 팬덤을 절반이나 이어받은 누군가)

    사전적 의미로 보면 ‘백주 대낮’은 ‘역전 앞’처럼 겹말 오류라 생각되는데, 흔히 사용하는 표현이기에 일단 채용해봤습니다.

    어떻게, 다소 마무리가 미흡했던 첫 번째 조우 에피소드가 끝났습니다.
    제가 좀 무리해서 빨리 정해놨던 부분까지 쓰느라 정작 중요한 13-2, 13-3의 연재분의 일부 묘사가 많이 미흡했던 탓에 또 실망감을 안겨드린 것 같습니다.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보완하고 수정토록 하겠습니다.

    결국 영락없이 방독면 군이 자신과 같은 세계에서 온 줄 아는 아나스타샤와, 그녀를 히로인으로 보는 그의 시각 탓에 당장은 둘이 엇갈리는 걸 쓰고 싶었는데 여러모로 전달력이 많이 부족했네요. 죄송합니다.

    차기 에피소드는 좀 더 재밌고, 저의 이런 사담 없이도 편히 읽으실 수 있도록 또 조금 쉬면서 준비해오도록 하겠습니다. 환절기 호흡기 질환 모두 조심하시길 바라며 저는 일단 수면을 취하러 가보겠습니다. 예입….

    흫츷흫 님의 관대한 500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에피소드 막바지에 부족한 면모를 보여드려서 죄송스러운 와중에 코인으로 때려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감사함다….
    시왕 님의 무시무시한 1000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날이 갑자기 추워지는 시기에 제가 감히 난방비를 덜컥 받아버린 건 아닌가 걱정되네요. 여름에 진짜 정상 연재도 힘들 정도로 비실거린 대신 겨울은 좀 시원해서 편하다는 게 아이러니하네요.
    Leo717 님의 기습적인 10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가급적 깜짝 휴재는 지양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마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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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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