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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61

    루크는 식재료들이 담긴 묵직한 봉투의 무게를 느끼며 걸어가다 한숨을 푹 쉬었다.

     

    분명 만족스러운 거래이기는 했으나, 루크가 밖으로 나온 것은 장을 보기 위함이 아니었다.

     

    ‘나는 시간을 끌어야 하는데…….’

     

    그것이 마냥 머릿속의 계획처럼 쉽지 않다.

     

    일부러 천천히 고르고 있노라면, 다들 다가와서 무엇을 찾고 있는지를 먼저 물어보는 바람에 제대로 된 시간 끌기가 되질 않는다.

    혼자서 고르겠다고 사람을 물리려 해도 소용이 없다.

     

    그 뿐 아니라, 흥정을 해보려 해도 두번 이상의 말이 오가지 않을 정도로 순순히 응해온다.

    정말 말도 안되는 가격으로 부르지 않는 이상, 아주 흔쾌하게 봉투에 물건들을 담아주곤 하는 것이다.

     

    덕분에 유례없는 속도와 가격으로 알뜰하게 장을 본 루크는 생각했다.

     

    ‘다들 하나같이 너무 친절해…….’

     

    이것이 정녕 ‘앞치마’만의 위력이란 말인가?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아이가 앞치마를 두른 채 쇼핑을 오는 일이 흔한 일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조금 지나치게 친절하지 않나.

    물론 이 몸은 무려 여신을 가두었던 몸이라는 것을 고려해보면, 여신의 창조물인 인간들에게 호감을 이끌어내기 쉬울 수 밖에 없다는 건 어느정도 알고 있다.

    여신은 이제 인간들의 머릿속과 기록에서 잊혀져, 진심으로 여신의 존재를 믿는 신도 역시 단 한명도 남지 않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던 중 루크는 생각했다.

     

    ‘이건 나중에라도 써먹을 수 있을까…….’

     

    혹, 나중에 또 앞치마를 두른 채 장을 보러 나오게 된다면 오늘 같은 호의를 또 이용할 수 있을까?

    만약 이 호의가 항상 자신을 향해준다면, 식재료 값을 획기적으로 절약할 수 있을 텐데…….

     

    ‘아니, 일단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루크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떨쳐낸 뒤에 턱을 문질렀다.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에 이런 정보를 알게 되다니, 타이밍이 좋지 않다.

     

    장을 본다는 핑계로 나온 것인데 이래서야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은가!

     

    일단 파이가 자신에게 청소가 완료되었음을 알려주러 오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집에 들어가서는 안된다.

    하지만 벌써 밖을 돌아다닐 핑계가 끝나버리고 말다니.

    원래 생각했던 시간에 절반밖에 끌지 못했다.

     

     

    ‘장을 순식간에 다 봐 버렸는데, 다음은 어떻게 시간을 끈다…….’

     

     

    루크가 대체 이번엔 어떤 핑계로 시간을 끌어야 할까를 곰곰히 고민하던 와중, 그런 루크를 뒤에서 따라가던 예르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좋은 식재료를 싸게 살 수 있었기 때문일까?

    루크의 꼬리는 마치 깃털처럼 바람을 타고 기분좋게 살랑이고 있었다.

     

    그 꼬리를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던 예르나는 문득 루크의 얼굴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기분이랑은 달리, 표정은 그닥 밝은 것 같지 않다.

    동시에, 귀는 연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쫑긋쫑긋거리고 있다.

    한 손으로 입가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을 보면, 루크는 뭔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

     

    루크는 대체 뭘 그리 열심히 고민하고 있는 걸까?

     

    ‘아!’

     

    잠깐 생각을 해본 예르나는 금방 그 이유를 떠올릴 수 있었다.

     

    예르나는 루크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루크, 집에 들어가기 싫지?”

     

    루크는 그 말에 허를 찔렸다는 듯이 놀라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홱 돌렸다.

     

    “ㄴ, 네? 그, 그걸 어떻게……?”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한 듯이 경악한 표정을 짓는 루크.

     

    ‘설마, 예르나는 내가 시간을 끌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건가?’

     

    설마, 자신이 시간을 끌고 있는 그 이유도 알아차린 것은 아니겠지?

    당연히 그럴 것이라 단정짓기엔 이르지만, 충분히 유추할 수도 있는 경우다.

    집주인을 집 안에 들이면 안 되는 경우가 대체 얼마나 다양하겠는가?

    조금만 추리력을 발휘하면 진실에 근접할 수 있으리라.

     

    루크가 예르나의 말을 기다리며 긴장한 순간.

    예르나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야, 보면 알지.”

    “보, 보았다니……!”

     

    설마, 어둠 속을 뚫고 그 어질러진 현장을 보았단 말인가!

    맙소사. 만약 그랬다면 처음부터 자신은 뻔히 보이는 연극을 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루크는 눈을 질끈 감고 예르나의 손을 붙잡은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귀도 완전히 축 처진 상태였다.

     

    “미안해요, 언니. 제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냥, 언니랑 같이 있는 게 좋아서…….”

    “왜 그렇게 떨어? 언니가 혼낼까봐 그래?”

    “…….”

     

    루크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 집안의 상태를 보면, 그냥 좀 혼나는 정도가 아닐 텐데.

    만약 자신의 집에서 감히 혈육도 아닌 아이가 그런 사단을 내었다고 하면 곧장 내쳤을 것이다.

    실제로, 노예 출신의 아이가 귀족의 장식물 하나에 손상을 가했다는 이유로 버려지는 경우는 흔했다.

     

    물론 현대사회의 도덕관을 지닌 예르나가 그렇게 매정하게 아이를 버리지는 않겠지만, 처음 고려한 대로 ‘시설’로 가게 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루크도 고아원을 가는 것이 그닥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으나, 알고 싶은 것과 연구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아진 지금에 있어서는 끔찍한 곳이다.

     

    루크는 육신의 양식보다 마음의 양식이 중요한 존재인 마법사다.

     

    마법사는 밥은 굶더라도 지식만은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것.

    더 이상 일반적인 지식으로는 지식욕을 충족할 수 없어진 지금의 루크에게, 시설은 감옥이나 다름없다.

     

    그런 루크의 모습을 내려다보던 예르나는 루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내가 혼낼 거라고 생각했어? 괜찮아!”

    “……네? 정말요? 절 안 혼내실 건가요?”

     

    이렇게 쉽게 용서받을 줄이야?

    루크는 눈에 띄게 밝아진 표정으로 예르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표정에 간질간질해진 손가락을 주체할 수 없던 예르나는 루크의 양 볼을 잡아 당기며 말했다.

    “언니랑 산책을 더 하고 싶었던 거잖아? 그치? 외출 금지라서 눈치가 보였던 거고. 뭐 그런 걸 신경쓰고 그러니. 그냥 시원하게 말해버리면 되지! 언니도 루크랑 하는 산책은 언제나 환영인걸.”

    “으아, 에……! 그언……가어?”

     

    알아차렸던 게 아니었나.

    루크는 맥이 빠지는 걸 느꼈다.

    차라리 일찍 말하고 빠르게 용서를 비는 것이 나았을지도.

    이미 이 계획을 실행해버린 시점에서 늦은 것 같지만. 

    예르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실없이 웃고 있는 루크의 볼에서 손을 놓고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럼, 근처에 놀이터에나 가서 좀 놀까? 아까부터 저 쪽을 보고 있던 것 같던데.”

    “아, 네? 놀이터요?”

    루크는 조금 당혹스런 시선을 예르나에게 보냈다.

    딱히 시선을 보내려고 보낸 게 아니라, 무심코 시야에 닿고 있는 밝은 색상에 눈이 갔을 뿐이다.

    놀이터에서 놀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은 전혀…….

    “혹시,  싫니? 그냥 돌아가는 게 좋아?”

    마치, ‘네 마음 정도는 읽고 있어.’라는 듯이 바라보는 저 시선과 자신을 놀리는 듯 한 예르나의 목소리.

    ‘정말로 그녀는 나의 잘못을 모르는 게 맞을까……? 아니면 사실은 다 알고서……?’

    조금 가슴이 찔린 루크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내며 호응했다.

    “아, 아뇨……! 가요, 놀이터!”

    지금 당장은 어쩔 수 없다.

    ——–

     

    그렇게 루크가 밖에서 시간을 끌고 있는 무렵, 파이는 마력을 모아 리브를 깨우기 위해 숲으로 날아갔다.

    파이는 루크의 명령을 떠올렸다.

     

    ‘루크 숲은 지금 숲지기들이 아주 많으니까, 저번처럼 리엔느 숲에서 챙기도록 하거라. 챙길 때는 최대한 넓게 돌면서 조금씩 챙겨야 GPS에 감지되지 않을 게다. 잘 할 수 있겠지?’

    ‘할 수 있어!’

     

    -리엔느 숲 전체에서 마력결정 두개 만큼!

     

    파이는 그 말을 잊지 않기 위해 중얼거리며 계속 나아갔다.

    그렇게 리엔느 숲에 도착한 파이.

    리엔느 숲은 역시 루크의 말대로 사람이 별로 없었다.

    -정말이네! 이걸 알다니, 언니는 역시 대단해!

    딱히 대단할 것도 없는 유추였지만, 파이에겐 그 정도조차 예언이나 마찬가지.

    정말 초보적인 수준의 인과밖에 파악하지 못하는 파이로써는 굉장히 대단해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파이가 숲 전체를 한바퀴 돌며 조금씩 조금씩 마력을 모으고 있던 때였다.

     

    바스락, 바스락.

     

    풀잎을 스치는 소리.

    그런 소리 쯤이야 숲에서는 일상적인 소음에 불과하지만, 파이는 그것이 참 이상한 소리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소리를 내는 개체는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스락, 바스락.

    빠직.

    철벅, 철벅.

     

    풀이 스치고, 떨어진 나뭇가지가 밟혀 부러지고, 질척한 바닥을 지나는 소리.

    소리들은 곧 커다란 웅성거림이 되어 숲을 채워나갔다.

    그렇게 소리는 군체가 되어 어디인지 모를 한 방향을 향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으음.

     

    파이는 문득 그 소리의 행렬이 무엇일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숲에서 대체 무엇을 하길래?

    언니한테 이 숲에는 사람이 별로 없을 거라고 들었는데.

     

    -한번 가 볼까?

     

    그 소리의 방향을 향해 조금 다가가던 파이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으니까.

     

    -일단 언니가 한 말부터 들어야해!

     

    당장은 궁금증보다 혼나는 것을 걱정해야 할 때니까.

     

     

     

     

    그렇게, 파이는 제멋대로의 형태를 지닌 발소리들로부터 멀어졌다.

    루크의 말 대로, 마력결정 두개 정도의 마력만을 챙긴 채.

     

     

     

     

    그렇게 파이가 등을 돌려 사라진 리엔느 숲의 어둠 속.

    이제는 소리도 멎고, 발자국만이 남은 곳에서 한 인물이 걸어나왔다.

     

    “……정말로 정령들이 돌아오기 시작한건가.”

     

    그는 매우 흥미롭다는 듯 웃으며 중얼거렸다.

    “예정된 계획을 조금 더 앞당겨도 되겠어.”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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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다시 대마법사를 꿈꾼다 대마법사였던것은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5000 Years in the future, the Archmage Luke Irushi opened her eyes again. The world has changes so much.

Horseless carriages, an entertainment box with audio and video, food and spices she has never seen before…

And, a changed magical system!

It wasn’t just the world that chan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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