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261

        

         방안을 어슴푸레하게 비추는 모니터 빛을 반찬 삼아.

         살짝, 손을 눈가로 올려 이번에 공기 청정용 제독 마스크(Cybernetic Breather)와 함께 구입한 패션용 안경을 똑바로 고쳐 썼다.

         

         첫인상을 자체는 외모로 평가하되. 어차피 사이버웨어나 임플란트가 보편화되어 상대가 진짜 그 얼굴로 알려진 누군가인지 확신을 가지려면 그 안에 들어있는 부품까지 조회해야 하는 세상에서.

         

         특히나 나처럼 여기저기 감시망에 저장된 촬영 데이터나 자료들에 비교적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경우엔 굳이 불편하게 활동하거나 괜히 유난 떨다가 이목을 끌어 모을 것 없다고 여겨 여태 자연체로 야외 활동을 했지만.

         

         얼마 전에 본 일부 사람들의 -구체적으론 인상에 색다른 포인트를 줄 겸 쓰던 마르티나와, 죽어라 얼굴을 감추려던 우리 한국인 친구 양쪽 모두의- 노력에 본받을 점이 있다고 생각하여… 미루던 쇼핑을 드디어 한 셈이다.

         

         그리고 그걸 갑자기 지금 왜 뒤집어썼냐 하면 이유는 간단하다. 일단 명목상으론 헤멧 씨가 ‘회장님께 보내는 직통 판매 리포트’라는 비공개 문건을 보내주었으니, 그에 맞춰서 분위기나 좀 내보려고.

         

         ………음, 겨우 이거 좀 뒤집어쓴다고 방구석 해커가 정신 무장까지 커리어 우먼이 될 수 있었으면. 세상 누가 공부에 시간을 쏟고, 머리에 데이터 칩을 처박는 고생을 해.

         

         “먼저 열람해서 특유의 쓸데없는 미사여구 있으면 다 쳐내고, 간략한 대화문처럼 정리……가 아니지. 그냥 나 같은 문외한도 알아보기 쉽게 중요한 문장만 남겨 줘. 꼭 봐야 하는 숫자가 있으면 그것도 포함해서.”

         

         – 확인했습니다. 데이터 재구축 공정 돌입(Cell data rebuilding process initiated), 금방 보기 편하시도록 정리하겠습니다. –

         

         그래봐야, 식당에 앉을 때조차 탁 트인 중앙 테이블보다도 코너를 선호하던 불쌍한 내게 주어진 사적인 공간이라곤, 뇌내 상상과 개인 사이버웨어 외에는 일절 남기지 않을 요량인지 야금야금 그 마수를 뻗어온 제로는 이 독방 컴퓨터에도 들어있어서 나는 분위기만 잡으면 사실 땡.

         

         나머진 선물 상자를 까는 마음으로 그의 보조를 기다리면 끝이기에 형식상의 변장 연습… 비슷한 흉내나 내면서 기다린 것이다.

         

         그러니까 이때까지만 해도 집 떠나 멀리 드넓은 세상으로 너무 일찍 가출한 우리 불가사리 바이러스가 얼마나 줄어들었냐를 따지기 보단.

         공개적으로 점수를 매겨지는 건 처음이었으니 그저 네오 헤이븐 시장이 어떤 식으로 반응했는지를 자세히 적은 일종의 서면 편지 겸 평가서 정도를 기대했다는 말이 되겠고.

         

         다짜고짜 이런 정신나간 수익률이 처박힌 영수증 뭉치를 포함 연말 보고서가 아니라!

         

         [ 3,486,120,000 C ]

         

         ……참으로 이상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내 도움을 받은 자기는 무슨 하위 단말기조차 슈퍼 컴퓨터로 도배한 엘리시움 중추 인공지능과 가상 전쟁을 벌여도 거뜬하다 자부한 녀석이 이런 사소한 실수나 하고 말이야.

         

         이래서야 2차 검수 담당자도 없는데 함부로 믿고 계속 비서 일 같은 걸 시켜도 될지 모를 노릇이다. 게다가 괜히 혹사하다가 심각하게 고장이라도 나면 어떡해.

         

         “음…, 혹시 확장자 형식 치환하면서 자릿수를 잘못 옮겼어? 0이 한 개나 두 개 정도가 오류 난 것 같은데.”

         

         – 파일을 통째로 변환한 게 아닌, 가속 상태에서 모든 내용을 100회 이상 검수하며 새로이 만든 자료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별도로 액수가 적은 것에 대해 미스터 헤멧의 능력 부족을 책망하시겠다면 당장 콜사인 드워프로 긴급 연락을…. –

         

         “적은 게 아니라 반대로 0이 몇 개는 더 붙은 것 같다는 말이었…! 잠깐, 일단 세부 내역부터 좀 열어 봐.”

         

         얘가 자꾸 수상한 냄새 풀풀 풍기는 닉네임을 뒤에서 전화 번호마다 붙이며 놀고 있는 건 나중에 따로 추궁하도록 하자.

         

         지금은 먼저 대규모 인플레이션이 발생한 게 아니라면, 누군가의 범죄 자금 은닉에 도용 당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저 계좌의 건전성부터 체크해야 하니까.

         

         촤라락!

         

         전자 문서를 더 넓게 펼치는데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날 리는 없지만, 왠지 기분상 들린 것 같은 환청을 뒤로 하고. 보나마나 묵직묵직한 익명의 입금 내역이 줄지어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곳엔 건축 토대를 쌓는 것처럼 차곡차곡 진행된 계약과 영업의 흔적들이 날 반겨주었다.

         

         [ 스튜디오 네뷸라의 ‘부분적 시범 도입’ 계약 건에 대한 선입금, 240,000 C ]

         [ 로우엔드(Low-end; 저가) 버전의 민간 판매로 인한 매출 종합, 78,000 C ]

         외에도 기타 등등….

         

         “…용케도 관심 보인 기업을 찾긴 찾았네?”

         

         인맥 장사인지, 헤멧이 영업을 잘한 건지는 몰라도. 첫날부터 무려 기업 상대로 올린 성과에 그 밑으로도 이어진 자잘한 매상들이 존재한다는 건 상당히 고무적.

         

         매출이 몇 만 단위에서 놀고 있는 걸 보면… 약간 시험 삼아? 아니면 작정하고 신규 프로그램을 뜯어서 분석하려고 전문 리버스 엔지니어링 업체에서 사갔나?

         

         민간 판매로 잡힌 건, 이런 분야에 관심이 많은 얼리어답터 친구들이 냅다 구매해서 생겼나 본데.

         

         사실 나야 별생각이 없고 광고도 따로 안 했지만, 수십 수백 명이 달려들어서 야심차게 개발한 소프트웨어의 출시 당일 첫날 실적이 저런 수준이라면 조금 절망적일 수 있다. 내 초기 투자금과 시간은 거의 없는 수준이라 망정이지.

         

         허나 시장 경제가 부리는 마법은 바로 그 다음날, 아무래도 이틀차부터 일어나게 설계된 모양이었으니.

         

         [ 스튜디오 네뷸라와의 정식 계약 체결 및 전량 프리미엄 구독 서비스 신청 결제액, 9,600,000 C ]

         

         [ 주식회사 오라클 엔지니어링 납품 수주. 비공식적으로 경쟁사에게 납품하지 않는 독소 조항을 삽입하는 조건으로 단가 협상 진행 중. 별도의 검토 담당자가 없다 통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성의의 표시’로 30,000,000 C를 전달받은 상태. ]

         

         [ 위키드 앤솔로지 프로덕션에서 원천 기술 이전, 혹은 개발 분야에서의 심도 깊은 협력 프로젝트 문의. 언론에 흘리는 건 잠시 자제해달라는 입막음 비용으로 고가의 미술품이 선물 들어옴. 회장님의 재가가 있을 때까지 현금화를 보류하겠음. ]

         

         하청에서 원청으로, 자회사에서 모회사로. 혹은 보고가 아닌 명령 하달을 통해 반대 방향으로 연결 고리를 더듬듯 날짜가 흐를수록 추가 영업이 부드럽게 이루어진다.

         

         그렇게 때로는 평행하게 계열사로 흘러 들어가거나, 입소문이라도 탔는지 전혀 뜬금없는 회사와 계약하기도 하며 양지와 음지 두 방면에서 기하급수적으로 매출이 증대한 내 ‘그라운드 제로’는.

         

         헤멧 씨가 남긴 메모에 따르면 아직 실제로 입금되지 않은 크레딧이 잔뜩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게 바이러스인지 안티바이러스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무슨 알고리즘이라도 탄 것 마냥 쭉쭉 뻗어 현물 제외 거의 35억에 달하는 순이익을 창출하셨다는 얘기가 되시겠다.

         

         ……정작 맡긴 내가 할 말은 아닐 수도 있는데, 이 아저씨가 돈에 미친 망자인 줄은 알았어도 원래 이렇게 유능했나?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얼떨떨하네 좀.

         

         – 그만큼 훌륭한 상품을 영업원에게 주신 결과이니, 기쁘게 받아들이셔도 괜찮으리라 생각됩니다만. 애당초 시장이 이리 극적으로 반응할 경우도 고려해 대리인을 내세우신 것 아니셨습니까? –

         

         “그것도 분명 맞긴 한데….”

         

         알고 있던 퀘스트나 돈벌이 수단은 많았지만 함부로 미리 막 써도 되는 수단이 어떤 건지 판단하기 마땅치 않아서 여태 고생한 게 하찮을 정도로 이렇게 연달아 대박 홈런을 쳐도 괜찮나?

         

         아니, 적어도 아론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거나 추잡하게 복권 조작(…) 같은 짓에 손대는 것보다야.

         개인적으로 조금 더… 부끄러울지언정 ‘프로 포커 플레이어’라던가, ‘슈퍼 루키 자영업 개발자’의 길을 걷는 게 양심적인 측면에서도 훨씬 덜 아프긴 하다.

         

         하지만 이건 지나치게 잘 나가는 모양새라 되려 무서울 지경이다.

         

         만든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팔아볼 생각은 없냐며 아이디어를 제시한 마리나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아니면 그냥 헤어지자마자 쫄래쫄래 파라다이스에 내 근황을 팔러 간 그녀의 죄를 좀 깎아주던가.

         

         “…하아, 돈은 많을수록 좋은 거지.”

         

         한 손으론 벅벅 머리를 긁고, 다른 손은 허공에 휘적거리며 내젓자 제로가 순식간에 해당 파일들을 밀봉해 어딘가로 치워버렸다.

         

         이만한 고정 수입이 -사실 이게 고정인지 아닌지는 아직 모를 노릇이지만- 생기는 건 어마어마한 이득.

         

         당장 먹여 살릴 식구가 늘어나는 것 마냥 옷을 갈아 입혀야 할 기계류 자산 겸 병력이 실시간으로 늘어나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무장 선택 폭이 굉장히 넓어진다.

         

         단지, 이럼 들어온 일감을 마다하지 않겠답시고.

         거듭 착실하게 푼돈이라도 모으겠다며 무슨 망할 미용 광고 같은 걸 찍는데 동의한 내 꼴이 약간 우스워지겠지만…. 그래, 뭐. 꼭 돈 때문에 수락한 것도 아니니까. 음, 괜찮다.

         

         – 고가 골동품 처분에 관한 답변은 어떻게, 보류해 둘까요? –

         

         “가지고 싶은 거 있으면 알아서 인센티브 삼아 가지고, 나머진 싹 팔아서 계좌에 넣어두라 해. 그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하려면 한 번 더 세탁…해서 우리 통장으로 가져와야 하니까.”

         

         적법하게 번 수입이지만 이런 구린 어감을 가진 단어와 과정을 거쳐야만 안전한 현실에 한차례 입술을 삐죽, 투덜거리곤 방에서 훌쩍 빠져나왔다.

         

         내가 진짜 ‘회장님’ 같은 존재도 아니니 굳이 딱딱 스케줄에 맞춰서 움직일 필요성은 없어도, 이제 늘어날 기미가 안 보이는 근력 운동 좀 하고… 또 능력 제어 연습도 하다가 푹 잠드는 게 이제는 꽤나 익숙해졌다.

         

         그러니 남은 하루도 힘내서 노력하자.

         한동안 겪은 온갖 억까와 고생에 대한 보상으로 세상이 밀어줄 때 더 잘해야 하지 않겠나?

         

         

         “우선은, 이놈의 분홍색 아령 신세에서. 좀! 벗어나고 싶은데…!”

         

         – ……현재 아샤님의 근성장 기대치로는 아마 몇 년이 지나더라도 그 방면으론 기대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차라리 능력을 통한 체질 개선을 노려보시는 게. –

         

         “야! 사람 운동하는데 그런 식으로 힘 빠지게 하지 마!!”

         

         볼 때마다 사람 무시하는 듯한 열 받는 색깔의 운동 기구를 양손에 쥔 채로 나는 거실에서 서글픈 기합을 내질렀다.

         

         방송국에 나가봐야 하는 날까지 앞으로 며칠.

         두둑해진 잔고와는 별개로 그다지 좋은 꿈을 꿀 것 같은 나날은 아니었다고만 간단히 말해 두겠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끄아앙.

    많이 늦었습니다!
    원래 그 에피소드 종료 후에 3~5일 정도 쉬던 것만 쉬고 오려고 했는데요.
    이번 주말에 지난 번 장례 건 관련으로 해외에 계시던 친척분들이 입국하시게 되었다는 얘기가 막판에 들려와서, 그… 괘씸하지만 몇 일 더 업로드를 미루면서 세이브 원고를 좀 쌓았습니다.

    인천, 대전 이틀 동안 못해도 10시간은 와리가리 할 예정이라 안 그랬으면 무조건 펑크였어요. 흑흑, 죄송합니다.
    그리고 혹시 제 잡설이 너무 길어서 작가의 말을 꺼놓으신 분들이 많은 걸까요; 에피소드 정비 휴재도 다음부턴 공지에 꼭 적도록 하겠습니다. 면목 없습니다.

    익명을 희망하시는 독자님의 50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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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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