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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61

    옅은 푸른색을 머금은 안개 속에서 흐릿한 실루엣이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오빠.]

    “어… 어떻게?”

    남자는 홀린 것처럼 여동생의 실루엣이 보이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실루엣이 있는 방향으로 쭈욱 뻗어있는 남자의 발자국.

    그리고 남자는 그 발자국을 따라서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분명 함정일 거야.’

    남자는 여동생의 최후를 목격했기에, 머리로는 매우 수상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동생은 이미 죽었어, 분명 함정일 거야.

    하지만 아무리 머릿속으로 그렇게 되뇌어도, 남자의 직감은 다른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흐릿한 실루엣이나 정말 똑같은 목소리와는 상관없이, 저건 분명 여동생이 분명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도저히 발을 멈출 수 없었다.

    찰박찰박.

    질척질척한 진흙 위를 걷는 소리.

    남자는 천천히 걸어가며, 진흙 위에 이미 찍혀있던 발자국을 되짚었다.

    그리고 남자가 땅에 발을 디딜 때마다, 발자국은 사라지고 마치 아무도 발을 디딘 적 없는 진흙땅처럼 매끈한 대지가 드러나고 있었다.

    그렇게 점점 여동생을 향해 다가갈수록, 세계가 조금씩 변이되어 가고 있었다.

    여전히 나비가 번데기가 되고, 발자국이 반대로 찍히는 뒤집힌 세계였지만, 그 내용물이 확실히 바뀌고 있었다.

    청량하고 은은하게 나던 안개의 물 냄새는 녹이 슨 금속의 거슬리는 냄새가 되었다.

    아름다운 푸른 빛을 흘리던 나비는 붉게 녹슨 금속판을 깎아서 만든 장신구처럼 변했다.

    바닥을 가득 채운 고운 진흙은 썩어버린 쇳가루가 뒤섞인 진창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안개를 나아가서 마주하게 된 여동생도 그랬다.

    흐릿한 여동생의 모습이건만,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인형처럼 녹이 슨 금속이 드러나 있었다.

    게다가 거칠고 헐겁게 꼬아서 만든 녹슨 철사가 그녀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결국 여기까지 와버렸구나.]

    [오빠는 분명 내가 왔던 이곳에 도착할 것 같았어.]

    [오질 않길 빌었지만.]

    남자는 여동생에게 정말 여동생이 맞냐고 몇 번이고 물었지만, 여동생은 마치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쓸쓸한 미소를 머금고 자기가 할 말만을 이어 나갔다.

    [지금 이탈리아는 어때? 며칠이 지났을까? 아니면 몇 년? 이곳은 시간이 이상해서 잘 모르겠네.]

    그렇게 아련한 것처럼 하늘을 보면서 말하는 여동생의 눈에서는 붉은 녹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여동생은 애써 웃으며 눈물을 닦아내고,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오빠는 분명히 이렇게 물었겠지.]

    [도대체 이곳에 왜 왔냐고.]

    [시간이 없으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별의 축복을 끝내고 싶어서 그 방법을 찾다 보니, 이곳에 도달해 버린 거야.]

    그리고 여동생은 남자를 밀쳐내려는 것처럼 양손을 뻗었다.

    [그러니까,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아줘.]

    하지만 그 손은 남자에게 닿지 못했고, 그저 반대편으로 통과해 버릴 뿐이었다.

    씁쓸한 표정으로 자기 손을 내려다보던 여동생은 남자를 향해 말했다.

    [빨리 도망가.]

    [태양이 지기 전에.]

    그러면서 여동생은 깊은 안개 속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의 빛은 신기하게도 이 짙은 안개를 무시하고 지면에 내리꽂히고 있었다.

    ***

    애착 인간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햇빛을 올려다보기 시작했을 때, 보라 사신은 오히려 지면을 바라보며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붉게 녹이 슨 쇳가루가 잔뜩 섞인 질척질척한 지면 밑에 무시무시한 존재감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으니까.

    안개 속에 들어오기 전만 해도 푸른 빛의 거인과도 나름대로 싸울 자신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강해!

    애착 인간을 지키면서 제대로 싸울 자신이 없을 정도로 강해 보였다.

    ‘엄마!’

    ‘엄마!!’

    보라 사신은 더듬이를 바짝 세우고, 엄마를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안개 때문인지 보라 사신의 의지는 회색 사신에게 도무지 닿지 않고 있었다.

    ‘엄마!!!’

    점점 가까워지기만 하는 거인의 기척에 보라 사신은 온몸에서 보라색 빛을 뿜어내며 신호를 보냈지만, 그것에 반응한 것은 회색 사신이 아니라 푸른 거인이었다.

    쿠구궁.

    바닥에서 올라오는 수많은 철사.

    그리고 철사에 엮인 수많은 존재가 녹이 슨 진창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벌써? 어째서?]

    애착 인간의 여동생은 철사에 끌려가며, 굉장히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를 향해 어서 도망치라며 소리쳤다.

    저 괴물은 신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고.

    지구상의 어떤 무기도, 어떤 오브젝트도, 결코 상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외쳤다.

    ‘!’

    하지만 남자는 여동생이 외치기 전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한 상태였다.

    그리고 지면으로 끌려가는 여동생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언젠가 다시 만나기를 빌었다.

    그렇게 남자가 자세를 잡기 무섭게, 하늘에 닿을 것처럼 커다란 거인이 지면에서 솟아올랐다.

    푸른색으로 빛나는 거인.

    보라 사신 정도의 격을 지닌 존재에게만 보였던 거인의 모습은 이제 남자의 눈에도 보이고 있었다.

    그저 시선을 주는 것만으로도 주변 공간이 일그러졌고, 그 왜곡으로 인해서 공간이 밀려나, 안개 내부에서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총 한 자루로는 도무지 피해를 줄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시선을 주는 것만으로도 공간을 찌그러트리는 괴물.

    격을 느낄 수 없는 평범한 인간인 남자의 입장에서도 도저히 이길 수 없어 보이는 괴물이었다.

    “이게, 도대체?”

    게다가 남자의 한쪽 눈에 박힌 의안은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는 힘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었다.

    거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힘의 흐름은 ‘선택자’의 것과 동일해 보였지만, 그 규모가 차원이 달랐다. 

    그 범위는 무려 이탈리아 남부 전역!

    하지만 그런 대단한 괴물도 완전해 보이진 않았다.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태양 빛.

    거인의 몸을 이룬 푸른 빛은 태양 빛에 닿기 무섭게 흩어지고, 그 밑의 녹슨 피부를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태양에 닿으면 녹아버리는 뱀파이어처럼.

    태양 빛이 내리쬐는 만큼 금속이 녹슬고, 쇳가루가 돼서 흩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거인의 크기가 너무나도 어마어마해서, 그 부스러지는 속도에 비해서 위협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안개 속 세계를 진동시킨 거인은 마침내 지면에서 몸을 완전히 꺼내 천천히 일어섰다.

    그 모습은 하늘에 닿을 것처럼 거대했고, 주변 모든 것의 원근감을 망가트릴 정도였다.

    그리고 그 거인은 보라 사신을 내려다보더니, 길가의 돌멩이를 걷어차는 것처럼 거대한 발을 휘둘렀다.

    ‘!’

    보라 사신은 이제까지 모아왔던 에너지를 모두 모아서 그림자의 장막을 펼쳤지만, 거인의 발차기는 순식간에 장막을 부스러트렸다.

    그리고 거인의 발은 애착 인간과 보라 사신을 골프공처럼 날려버렸다.

    “크윽.”

    남자는 나지막한 신음을 흘리며 일어났다.

    고속 열차에 치인 것처럼 날아가 버렸는데, 남자의 상태는 생각보다 멀쩡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보라 사신은 살짝 웃었다.

    ‘지켰어!’

    하지만 그렇게 웃기가 무섭게, 보라 사신의 입에서는 붉게 물든 쇳가루가 쏟아져 나왔다.

    마치 피를 토하는 것처럼.

    몸통 중앙에 자리 잡은 황금색 장작은 당장에라도 꺼질 것처럼 흔들렸고, 보라색 피부는 붉게 녹슨 쇠처럼 변해가기 시작했다.

    ‘충격 흡수가 안 되네….’

    그리고 굉장히 아쉬운 표정으로 애착 인간의 얼굴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계속 지켜주고 싶었는데.’

    ‘계속 함께 있고 싶었는데.’

    보라 사신은 애착 인간이 결코 듣지 못할 의지를 흘리며, 흐릿해지는 시야로 계속해서 애착 인간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

    점심시간이 지난 늦은 오후의 세희 연구소.

    뭔가 불안해 보이는 아귀 사신을 데리고 뒤뜰로 나오자, 내가 준비하라고 시켰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초거대 구름 고래!

    주황 사신들이 다루는 구름 고기들을 전부 그러모아서 만든 초거대 합체 구름 고래였다.

    대량의 미니 사신과 오브젝트를 수송하기 위한 구름 고래였다.

    내가 고래 앞에 서서 내려다보자, 쌀알처럼 잔뜩 모여있는 미니 사신들이 보였다.

    애착 인간을 찾으러 간 미니 사신이나, 세희 연구소 경비를 서는 미니 사신을 제외한 모든 미니 사신이었다.

    미니 사신들은 이렇게 잔뜩 같이 모여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운지, 서로 끌어안고 구르는 등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그런 미니 사신들을 향해 의지를 내뿜었다.

    ‘해로운 오브젝트를 죽이러 가자!’

    그러자 미니 사신들도 잔뜩 들떠서, ‘가자!’라고 의지를 뿜어냈다.

    왠지 가족 모두가 모여서 가는 소풍 같은 분위기였다.

    신나고 들뜨는 분위기.

    집채만 한 하얀 아귀 본체는 물론, 병원을 짊어진 젤리 돼지마저 모여있어서 그런지, 미니 사신들은 기대감에 광란 상태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아귀 사신은 ‘또 뭔 이상한 짓이지?’ 하는 표정을 짓고 있길래, 추가적인 설명을 해주었다.

    ‘얼마 전에 어떤 미니 사신의 감각에 색채 우주의 기운과 비슷한 것이 느껴졌었어.’

    끄덕.

    아귀 사신은 내 쉬운 설명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 색채 우주에서 온 오브젝트를 죽이기로 한 거지.’

    끄덕. 끄덕.

    역시 아귀 사신은 내 명쾌한 설명을 쉽게 이해했다.

    ‘그러니까 그걸 죽이면, 그 애착 오브젝트가 부활할 거야.’

    ‘?’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튼 그러니까 따라오라고 명령해서 고래 위에 태워버렸다.

    아귀 사신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명령을 어기진 못하고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래 등에 올라탔다.

    그리고 모든 준비를 마친 나는 뚜방뚜방 걸어가서 예린이의 품 안에 폭 안겼다.

    일하다가 끌려 나온 예린이는 땡땡이를 친다는 생각에 그저 행복해 보였다.

    ‘그럼, 출발!’

    내 의지가 퍼지는 것과 동시에 거대한 고래가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데려온 아이들 숫자 확인을 시작했다.

    ‘구름 고래 위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미니 사신들, 확인.’

    ‘구름 고래의 배 속에 담겨 있는 하얀 아귀와 젤리 돼지 그리고 야광 티라노, 확인.’

    ‘고래 머리 위에 앉아, 살짝 울적한 표정의 아귀 사신, 확인.’

    ‘그리고 미니 사신 정원에서 풀려난 설탕 플라밍고와 햄스터 그리고 기타 오브젝트들, 확인.’

    ‘내 손 위에 올려진 3가지 종류의 헤일로, 확인.’

    ‘그리고 고래 뒤를 천천히 따라오는 불변구, 확인.’

    그리고 고개를 돌려 나를 껴안고 있는 예린이의 볼을 콕콕 찔렀다.

    예린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내가 슬쩍 웃자, 예린이도 마주 보고 웃어주었다.

    ‘가장 중요한 예린이도 확인.’

    완벽해.

    색채 우주의 존재들은 만만치 않으니까, 완벽한 준비를 할 필요가 있었다.

    미니 사신 정원을 펼치지 못하더라도, 공간이동을 못하더라도, 헤일로를 부르지 못하더라도 괜찮도록!

    그야말로 고래 위에 미니 사신 정원 전체를 뜯어온 셈이었다.

    이 아이들과 함께라면 그 어떤 적이라도 두렵지 않았다.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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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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