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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62

     

     

    긴 세월 끝에 도달한 그 감각은, 정말이지 아늑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 행복이 조금 더 이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으려나.

    5000년이라는 긴 세월을 덮기에, 단 하루는 너무나 짧았다.

     

    옛 주인과 동일한 서클의 마력패턴, 그것에서 느낀 아늑한 감각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어쩌면, 정말로 꿈이었던 것이 아닐까.

    자신의 마모된 마력코어에서 흘러나온, 일종의 환상 같은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럼에도 행복했다.

    한 순간이라도 행복했다면, 그걸로 되었으리라.

     

    조금 더, 그 아이와 함께 웃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하지만 꿈은 꿈이다.

    결국은 깨어나야 한다. 

    그 때, 캄캄했던 시야에 마치 자신을 부르는 듯 한 빛이 보였다.

    사후세계일까?

    영혼조차 없는 자신은 가동을 중지하게 되면 과연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에 대한 것은 항상 이어져오던 그의 의문 중에 하나였다.

    이제는 그 답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일까.

     

    ——-

     

     

    마력이 차오름에 따라, 서서히 리브의 의식이 돌아오고 있었다.

     

    의식이 돌아온 리브는 고개를 돌려 현재 자신의 상태, 위치와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

     

    어질러진 실내.

    실밥 터진 인형 몸.

    그리고 에메랄드빛 청록색의 눈동자.

    그것이 말해주는 것은 바로 이곳은 죽음 뒤의 공간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설마, 그 모든 것이 정말로 현실이었나.’ 

    리브는 감각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정말 일어났어!”

    “…….”

     

    리브는 잠시 그 소녀의 모습을 훑었다.

    자신의 옛 주인과 동일한 마력을 품은 소녀와 똑같이 생긴 푸른 빛 머리칼의 소녀는, 화사한 웃음으로 리브를 맞이했다.

     

    “…….”

     

    무슨 상황인지 이 소녀라면 설명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담아 인형의 눈을 그 아이와 맞추었다.

     

    그러자, 그 소녀의 표정은 금방 뾰루퉁하게 변했다.

    처음처럼 적대할 의사는 없어 보인다만, 이유는 알 수 없다.

     

    참 감정변화가 빠른 유형의 개체다.

     

    “흥! 언니가 말하는데, 네가 청소를 할 수 있댔어. 그래서 깨운 거지, 내가 널 좋아하게 된 건 아니거든.”

    “…….”

     

    과연, 그것이 명령인가.

     

    ‘청소’라.

    물론 기초적인 정리정돈이나, 유지보수 작업 정도는 가능하다.

    그 정도 기능을 하지 못했다면, 그 오랜 세월동안 아린세이아에서 기동하는 것도 불가능했으리라.

     

    “…….”

     

    리브는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부서지고 널부러진 것이 많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아린세이아에 비하면 굉장히 손쉬운 편이다.

     

    리브는 곧장 주변을 둘러보다가 자신의 손에 꼭 맞는 빗자루를 들고 깨진 접시나 병 같은 것들부터 치우기 시작했다.

     

    “와! 정말 청소를 할 줄 아는구나! 너, 생각보다 대단하네!”

     

    파이리스는 그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칫솔은 저렇게도 쓸 수 있는 거구나!’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

     

    “…….”

     

    놀이터에 도착한 루크는 막상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이들이 술래잡기를 하며 장난을 치는 것을 바라보며 벤치에 그대로 앉아만 있었다.

     

    “왜 놀지 않아? 딱히 놀고 싶지 않니?”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차라리 저 아이들 틈새에 끼어드는 것이 좋다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루크는 예르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은, 저는 저기서 노는 것 보다는 그냥 언니랑 이렇게 앉아 있는 게 더 좋아요.”

     

    딱히 놀이기구를 타고 싶은 것도 아니고, 놀이터에 놀러온 아이들의 넘치는 에너지를 감당하고 싶지도 않다.

    루크가 저 나이대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10분 언저리다.

    그 이상은 지쳐버리고 만다.

    육체적으로는 전혀 힘들지 않더라도, 그건 심리적으로 굉장히 피곤한 일이니까.

    게다가, 요즘 아이들은 어떻게 놀아줘야 하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고.

     

    하지만, 그런 사정은 예르나에게는 딱히 상관이 없다.

    예르나는 루크의 대답에 기분이 좋아져 화상이 없는 왼쪽 손의 장갑을 벗고 루크의 볼을 잡아 꾹꾹 눌렀다.

     

    “어머ㅡ! 얘도 참! 오늘 왜 이렇게 예쁜 말을 할까?”

    “우읍……?”

     

    피부로 느껴지는 루크의 볼살은 정말로 말랑했다.

    그러고보니, 탈피는 며칠 전에 했던가?

    그 덕분에 오늘 루크의 볼은 이토록 말랑한 것이리라.

     

    “이, 이제 그만…….”

    “아, 미안.”

     

    그 감촉은 루크가 그만 해 달라고 할 때 까지 예르나의 손에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반대로 루크의 볼에도 예르나의 거친 손의 감촉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예르나는 역시 손이 거칠구나…….’

     

    숲지기이니 손이 거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 감촉이 그리 썩 유쾌하진 않다.

    그렇다고 루크가 겉으로 불만을 표하진 않지만.

     

    ‘대체 파이는 언제 오는 겐가…….’

     

    청소가 다 끝나면 부르러 오라고 했건만, 아직도 파이는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 보아도, 주변에 보이는 파란 색이라고는 저기 화단에 꽃 밖에는 없다.

    맥이 빠지는 것 같다.

     

    그렇게 예르나의 손에서 놓아진 루크가 볼을 문지르고 있을 때, 예르나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해왔다.

     

    “있지. 언니는, 루가 그렇게까지 알뜰하게 쇼핑을 하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어.”

     

    평소 예르나가 식재료를 살 때는 저런 식으로 흥정을 하기는커녕, 그냥 그날그날 맨 위에 놓여있는 상품을 대충 집어서 가져오는 수준이었다.

    어차피 할 줄 아는 요리도 없고, 음식이 영양소만 섭취할 수 있으면 되었지 맛에 별로 연연하지도 않는 성격이었던 예르나에겐 방금 전의 루크처럼 ‘더 좋은 재료를 더 싸게’사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참 낯선 광경이었다.

     

    “아, 하하……. 뭐, 안 하는 때도 많아요.”

     

    사실은 루크도 그렇게 적극적으로 흥정을 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원래 ‘효율’이란 무엇을 우선에 두느냐에 따라 각자 다르다.

    평소의 루크에겐 어떤 물질적 가치보다는 ‘시간’이라는 자원의 가치가 훨씬 소중하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경우나 흥정이 잘 통하는 상대가 아니라면 굳이 오늘처럼 끈질기게 흥정을 시도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이 말도 딱히 거짓말은 아니…….

     

    “하아.”

     

    루크는 하던 생각을 멈추고 한숨을 쉬었다.

     

    문득 이 모든 게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짓말은 결국 또 다른 거짓말을 낳는다는 말이 있다.

    한번 거짓말을 시작한 순간부터 그 연쇄는 시작된 것이다.

     

    루크는 이제와서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아무리 최악의 경우엔 시설에 맡겨질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다곤 하지만 정말 이러는 것이 맞는가 하고 생각이 드는 것이다.

     

    비록 거짓말을 한 적은 없지만, 그것도 결국 핑계에 불과하다.

    이미 신조차 속여보인 전적이 있던 루크였으나, 누군가를 속이는 것은 역시 피로한 일이다.

     

    본래, 이상적인 마법은 사기를 치는 것이 아니라 흥정을 하는 것이다.

    마법사는 속이는 자가 아니라 의지를 관철하는 자이니까.

     

    때문에 차라리 사실대로 말하고 용서를 비는 것이 이치적으로 더 올바른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헌데, 고작 처벌이 두려워 죄에서부터 도망치려 하는 꼴이라니!

     

    부끄럽다.

     

    이것이 정말 대마법사의 의식과 의지에서 나올 수 있는 결론이란 말인가?

    대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단 말인가?

     

    루크는 자신의 무릎 위로 끌어올린 자신의 꼬리를 공연히 손으로 정돈하며 생각했다.

     

    어쩌면, 너무 오래 이 몸에 갇혀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 몸은 여신을 담은 그릇이자, 레비의 육신이며, 파르바티의 심장이다.

    비록 지금은 가장 강력한 의지를 지닌 대마법사의 서클에서 형성된 인격인 ‘루크 이루시’가 겉의 주도권을 쥐고 있지만, 자신이 알아차릴 수 없는 껍데기 내부의 사정은 모르는 일.

     

    과거엔 그저 그날 기분에 따라 다른 것이리라 넘겨버릴 사소한 변화 정도였지만…….

     

    자신에겐 알게 모르게 조금씩 침식이 가해지고 있었던 것일지도.

     

    필멸의 존재에서 비롯된 자신이, 불멸성을 정말 아무런 변화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리 없다.

    게다가, 그 위대한 대마법사의 의지에서 파생되었을 뿐인 자신은 더더욱.

     

    실제로 몸에 새겨진 본능의 영향으로 현재 사고방식과 행동은 고양이와 조금 비슷하게 형성되고 있고, 3서클을 조금 성급하게 새기며 실수를 하는 바람에 의식을 잃었던 순간은 아예 용의 모습으로 변하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정말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불멸의 영향이 고작 이런 거라니.’

     

    하긴.

    원래 불멸의 존재는 본래 물질계의 지성체에 비하면 어느정도 유치한 부분도 있다.

    그들은 변화하지 않기에 ‘성장’이라는 것도 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을 깨닫기 전에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있었지만, 의식하고 보니 자신의 행동은 그야말로 애들이나 할 법한 유치한 짓이었다.

     

    ‘좋아, 말하자.’

     

    차라리 말하고 편해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설마 정말로 자신을 내치려고 한다면, 어떻게든 협상해보는 수 밖에.

     

    그렇게 다짐한 루크는 예르나에게 시선을 보내며 운을 떼었다.

     

    “예르나, 사실은 내가 잘못한 일이 있다.”

    “응? 뭔데?”

    “그러니까…….”

     

    예르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뭘 잘못했다고 저러는 것일까?

     

    “사실, 그대의 집은 지금 꽤나 어질러진 상태라. 도저히 알릴 수 없어서 그걸 숨기기 위해 그대를 속였다. 사과파이는 사실 그대가 오기 직전에 생각한 핑계에 불과해.”

     

    루크의 고백을 들은 예르나는 조금 놀란 듯이 물었다.

     

    “뭐? 대체 왜 그런 짓을 했니?”

    “그게……. 잘못하면 이번 일로 시설에 맡겨지게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루크의 말에 예르나는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시설? 설마! 내가 그럴리가 없잖아! 내가 왜 그런 곳에 널 보내겠어?”

    시설이라니, 말도 안된다.

    보낼 거였다면 진작에 가족으로 받아들일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루크는 그 말이 굉장히 인상깊었는지, 놀란 눈으로 예르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 정말 보내지 않는 건가?”

    “당연하지! 언니가 겨우 집 좀 어지른 것 가지고 그럴 것 같아? 네가 후에 무슨 잘못을 해도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우리는 이제 진짜 가족이니까.”

    “가족…….”

     

    루크는 새삼 그 말이 참 대단하다고 느꼈다.

    고작 두 음절의 단어를 들었다고 이토록 불안감이 사라지다니.

    그야말로 마법이나 다름이 없다.

     

    “그런데, 대체 얼마나 난장판이길래 그러니?”

     

    루크는 예르나에게 구체적인 피해상황을 말하기 시작했다.

     

    “침대보, 베개, 소파 등의 가구손상, 그대가 아끼던 찻잔을 포함한 식기 7종과, 벽지와 바닥지 손상. 베개에서 나온 깃털과 밀가루 계란 등, 이물질 상당수…….”

     

    줄줄히 읊어지는 루크의 말에 예르나의 표정은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잠깐, 내 생각보다 너무 심각한데……?’

     

    하지만 루크의 말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상이 거실의 피해상황이다. 이어서 안방의 상황도 이야기하자면…….”

    “……잠깐만, 뭐라고?”

     

    안방도??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로봇청소기 성능이 보기보다 별로네요.
    R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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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다시 대마법사를 꿈꾼다 대마법사였던것은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5000 Years in the future, the Archmage Luke Irushi opened her eyes again. The world has changes so much.

Horseless carriages, an entertainment box with audio and video, food and spices she has never seen before…

And, a changed magical system!

It wasn’t just the world that chan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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