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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63

    커다란 젤리 돼지가 하늘을 달리고, 거대 검은 사신과 거대 푸른 사신 골렘이 해로운 오브젝트를 박살 내는 전장의 구석.

    ‘괜찮아?’

    보라 사신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녹슨 보라 사신의 뺨을 콕콕 찌르고 있었다.

    매끈한 보라색 피부 위에 마치 녹이 슨 것처럼 굳어버린 흉터.

    그 부분을 보면서 아프지 않냐고 묻고 있었다.

    하지만 녹슨 보라 사신은 작게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오히려 애착 인간을 지키다 얻은 상처니까, 훈장과도 같은 상처라고 했다.

    녹슨 보라 사신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애착 인간을 올려다보았다.

    반짝이는 시선을 받은 남자는 작게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녹슨 보라 사신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러자 녹슨 보라 사신은 행복한 것처럼 헤실헤실 웃으며, 그 손가락에 자기 뺨을 문질렀다.

    그 모습을 본 보라 사신들은 굉장히 부러운 표정이 되었다.

    ‘나도 애착 인간 갖고 싶다.’

    보라 사신들은 애착 인간을 찾는 여정 도중, 엄마의 부름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사태가 끝나면 다시 애착 인간을 찾으러 갈 거라고 의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작은 주먹을 꼭 쥐고 의지를 불태우던 도중, 불길한 푸른 빛이 보라 사신들을 향해 번지기 시작했다.

    ‘!’

    보라 사신들은 그 해로운 빛에 깜짝 놀라서 그림자 장막을 주변에 둘렀다.

    부스스.

    미약하지만 확실하게 그림자를 녹슬게 만드는 불길한 빛.

    보라 사신들은 많이 쇠약해진 녹슨 보라 사신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아무리 약해져도 격이 높은 미니 사신인 만큼 별 영향이 없었다.

    하지만 환상을 엮어서 억지로 만든 어떤 오브젝트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순식간에 녹이 슬어 가루로 흩어지는 야광 공룡.

    ‘안 돼!! 내 야광 티라노가!’

    그와 함께 정말 원통해 보이는 엄마의 의지가 퍼져나갔다.

    ***

    <모두를 지켜주세요!>

    불길한 별빛이 퍼져나가자, 푸른 사신은 최대한의 힘을 담아 문자열을 허공에 수놓았다.

    그러자 인간들을 지키기 위한 돔 경기장처럼 커다란 물방울이 생겨났다.

    닿는 모든 물질을 녹슨 금속으로 바꿔버리는 치명적인 빛으로부터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물방울이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는지, 물방울은 당장이라도 깨질 것처럼 흔들렸다.

    ‘힘내!’

    황금 사신들은 도와줄 방법이 없어서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그 순간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그림자들이 격자 형태로 물방울 위를 뒤덮기 시작했다.

    망토를 휘날리며 물방울 속에 들어선 보라 사신들의 힘이었다.

    ‘강한 동생!’

    ‘동생!’

    황금 사신은 그 모습을 보면서 환호했다.

    다행인 점은 이 불길한 푸른 빛은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미니 사신들과 싸우고 있던 해로운 오브젝트들은 야광 티라노처럼 모두 가루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미니 사신들은 더 이상 싸우지 않고, 엄마가 싸우는 것을 구경할 수 있었다.

    미니 사신들은 각자 마음에 드는 인간 근처에 자리 잡고 앉아서, 엄마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엄마, 힘내!’

    ***

    검은 시체 안으로 의식을 옮기자,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차올랐다.

    회색 사신의 몸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크기와 힘.

    당장이라도 휩쓸려 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시체도 자주 다루다 보니 나름대로 익숙해진 기분이 들었다.

    주변에 깔린, 푸르게 빛나는 안개. 

    이것은 일종의 미니 사신 정원과 비슷한 공간을 만드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푸른 안개 속에서는 마치 공간 자체가 내 움직임을 방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평소였다면 미니 사신 정원을 펼쳐서 방어했겠지만, 이 시체에게는 그런 전용 공간이 없었다.

    그리고 사실 이 시체에게는 그런 공간 따위 필요가 없었다.

    내가 천천히 푸른 거인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하자, 푸른 거인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안개 속에서 수많은 녹슨 철사가 나타나, 내 몸을 칭칭 휘감았다.

    하지만 무시하고 움직이자, 모두 끊어져 버렸다.

    푸른 거인이 나를 빤히 쳐다보자, 공간이 갈기갈기 찢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간이 부서져도, 이 몸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었다.

    공간이 이리저리 접히더니, 나를 절대로 나갈 수 없는 공간의 틈에 가둬버렸다.

    마치 거울로 만들어진 방처럼 거울 상이 끝없이 펼쳐진 공간.

    거울과 다른 점은 공간 자체가 이리저리 꼬여서 만들어졌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몸에게는 거울과 별로 다른 것이 없었다.

    공간에 억지로 손을 박아 넣고 찢어버리자, 공간의 틈은 하얀 불꽃으로 변해 사라져 버렸다.

    모든 것을 녹슬게 만드는 창이 내 몸을 꿰뚫었지만, 소용없었다.

    안개 속에서 푸른 빛이 더욱 강해지자, 인과가 뒤집히고 물질과 정보가 분리되기 시작했다.

    빛에 닿은 인간이나 오브젝트는 기억을 잃어버렸고, 책에서는 활자가 물처럼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지만 이 몸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쿵. 쿵.

    시체가 가진 길쭉한 팔로 땅을 강하게 내리찍어 가며, 천천히 다가갔다.

    공포감을 주려는 것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푸른 거인은 온갖 권능을 휘두르며 나를 막아 세우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푸른 거인의 모든 공격은 튼튼한 시체의 몸을 상하게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내 손이 푸른 거인에게 닿을 만큼 가까워지자, 거인은 자기 몸을 다시 별로 바꾸어서 도망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어.

    내 작고 소중한 티라노가 죽은 순간부터 이미 끝난 거야.

    ‘어딜 도망가?’

    나는 길쭉한 팔을 뻗어 푸른 거인을 찢어버릴 기세로 강하게 움켜쥐었다.

    끼이이익!

    그러자 공간이 찢어지는 것 같은 끔찍한 소리가 울리면서, 내 날카로운 손톱이 천천히 거인의 몸통에 박혀 들어가기 시작했다.

    ‘와.’

    나는 그 말도 안 되는 현상에 신기함을 느꼈다.

    힘이 세니까, 물리 면역도 그냥 힘으로 찢어버릴 수가 있구나.

    그렇게 나는 거인을 천천히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

    거인의 힘이 약해져서 주변을 녹슬게 만드는 빛이 잠잠해지자, 미니 사신들이 미어캣처럼 주변 높은 곳에 모여서 나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검은 사신은 아예 내 주변에 모여서, ‘강한 엄마!’라고 외치면서 폴짝폴짝 뛰고 있었다.

    푸른 거인은 미니 사신을 쉽게 다치게 할 수 있으니, 아주 위험한데도 자꾸 다가오네.

    ‘위험하니까 좀 떨어져!’

    그래서 좀 물러서라고 했지만, 검은 사신들은 더욱 좋아하며 달라붙어 왔다.

    ‘걱정하는 강한 엄마!’

    ‘상냥한 엄마!’

    나는 결국 검은 사신들을 쫓아내는 걸 포기하고, 푸른 거인을 죽이는 방법을 고심하기 시작했다.

    ‘도무지 죽을 생각을 안 하네.’

    사지를 모두 찢어버려도.

    빔으로 가루도 안 남기고 분해해 버려도.

    잘게 다져서 티라노 모양 너겟을 만들어도.

    거인은 죽지 않고 스멀스멀 재생하고 있었다.

    ‘아! 왜 그걸 까먹고 있었지?’

    그 순간, 내 뇌리에 잊고 있던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

    ‘파괴 조건!’

    파괴 조건을 확인하는 걸 까먹어 버리다니.

    검은 시체를 이용해서 육체파로 싸우다 보니, 뇌까지 멍청해져 버린 것 같았다.

    파괴 조건을 확인하기 위해 눈을 사용하자, 굉장히 복잡한 파괴 조건이 떠올랐다.

    <외신의 별이 닿지 않는 완전히 격리된 공간 속에서, 푸른 거인 스스로 감정의 불꽃을 피우고 파괴의 염원을 빌도록 만든다.>

    이거 가능한 거 맞나?

    말도 안 되게 죽이기 힘들어 보이는데?

    아무래도 마왕을 봉인하는 것처럼 최대한 약하게 만든 뒤, 미니 사신 정원에 보관해야 하나? 

    아니면 주기적으로 시체를 조종해서 갈기갈기 찢어야 할까?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 파괴 조건에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순간.

    내 심장의 장작에서 조용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두근두근.

    그리고 그 박동에 맞춰,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어둠이 온 세상을 집어삼키며, 모든 색채가 암흑 속으로 잠겨 들었다.

    미니 사신들의 응원이 멈추고, 바람마저도 더 이상 불지 않았다.

    검게 물든 세계는 그렇게 침묵에 잠겼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굳어버린 세계에서 하얀색 불길이 어둠을 가르며 피어올랐다.

    마치 심장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듯, 하얀 불길은 공간을 타고 흘러 검은 세계를 맥동하게 했다.

    그리고 그 맥동 속에서 푸른 거인의 파괴 조건이 변질되었다.

    <<먹는다.>>

    그 파괴 조건을 확인하는 순간, 내 의식은 시체 속으로 깊숙이 침잠하기 시작했다.

    ***

    무의식 깊숙한 곳으로 파고든 의식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으적으적.

    조그맣게 들리는 소리.

    굉장히 먼 곳에서 들리는 것처럼 작은 소리였지만, 이상하게도 바로 앞에서 들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으적으적.

    소리가 들릴수록, 푸른 거인의 존재감이 줄어들고 있었다.

    마치 격 자체가 마구잡이로 깎여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적이 약해지다니, 좋은 일이야.

    으적으적.

    소리가 들릴수록, 색채 우주의 기척도 멀어져만 갔다.

    색채 우주의 외신들이 멀어지다니, 좋은 일이야.

    그렇게 계속 침잠하는 의식 속에서 작은 의지가 들려왔다.

    ‘엄마!!’

    작지만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의지였다.

    아이들이 나를 부르고 있어!

    그 순간, 내 의식은 완전히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제서야, 주변 상황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 입에 물린 채, 튀어나온 푸른 거인의 팔 하나.

    난장판이 되어버린 주변 환경.

    내 입에 물린 팔을 제외하면 흔적도 남아있지 않은 푸른 거인.

    그리고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검은 사신들.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난장판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이 시체가 저절로 움직인 건가?

    아니면 내가 이 시체에 휩쓸린 건가?

    나는 푸른 거인의 남은 팔을 꿀꺽 삼켜버리고, 검은 시체를 불변구 속으로 돌려보냈다.

    그렇게 예린이 품속에서 눈을 뜬 나는, 심각한 눈으로 불변구를 올려다보았다.

    ***

    미니 사신이 모두 떠나간 정원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설원은 고요 속에 잠겨 있었다.

    정원의 하늘에서 내려오는 은은한 빛이 하얀 빙수에 반사되며 아름다운 빛의 향연을 펼쳤지만, 그 광경을 감상할 미니 사신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평소라면 설탕 코팅 과일을 먹기 위해 미니 사신들이 길게 줄을 섰겠지만, 오늘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설탕 코팅 과일을 뺏기지 않기 위한 햄스터의 슬픈 몸부림도 없었고, 그 과일을 뺏기 위해 괴롭히던 플라밍고와 황금 사신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야말로 고요한 설원.

    그 조용한 설원을 배경으로 새로운 오브젝트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미니 사신 정원 하늘 위에 떠오른 완벽한 구체.

    불변구와 닮았지만, 불변구와 달리 별을 머금은 것 같은 푸른 빛을 발하는 신비로운 구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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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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