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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65

       [알림 : 양장본의 등급이 상향 조정됩니다.]

       

       [◆ 중급 → 상급]

       

       [개체 ‘앨리스’의 축복이 적용됩니다. 계약 대상의 비호로 인해 종족에 상관없이 정령의 진언을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머리 위로 노란 빛줄기가 쏟아지더니, 그 사이로 목련처럼 하얀 머리카락을 지닌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에는 양장본을, 다른 손에는 금빛 갈고리를 든 여인.

       

       […어디, 계속해 보세요.]

       

       그런 그녀가 사제와 마도사들을 역으로 쏘아붙였다.

       

       “…….”

       [계속하지 않으실 건가요?]

       

       여인이 염화를 그만두고는 입을 슬쩍 벌렸다. 후우, 하는 깊은 한숨이 앵두 같은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저는 전계를 다스리는 정령들의 임시 대행자이자.”

       

       스르륵.

       

       “이 아이의 보호자이죠.”

       

       여인은 날카로운 눈매를 한 채로 내 머리 바로 위까지 내려왔다.

       

       “제가 여신의 명을 받들고 있는데, 당신들은 앞뒤 사정을 물어보지도 않고 이 아이를 죽이라는 말부터 하더군요.”

       

       참 나, 내가 어이가 없어서. 여인은 입매를 비틀었다.

       

       이 화법, 어디서 많이 들어본 화법인데.

       

       나는 고개를 들어올려 여인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했다.

       

       그리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 언니…?”

       

       여인의 얼굴이, 지구에서 나와 함께 살았던 친언니를 꼭 빼닮았기 때문이다.

       

       아니다, 누나인가?

       

       모르겠다. 지금은 상황이 급박하니 언니라고 생각해야겠다.

       

       언니는 날 바라보더니 씩 웃었다.

       

       “주인, 내 말이 들리나요?”

       “드, 들립니다….”

       

       주인이라니. 내가?

       

       “좋아요, 주인님. 제가 누구인지는 알겠고요?”

       

       여인은 왼손에 든 양장본을 흔들거리며 능글맞은 미소를 이어나갔다.

       

       설마.

       

       “그땐 변호해 주지 못해서 미안했어요, 주인… 아니. 이젠 동생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틸레트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모양이다.

       

       “저는 아직 약해요. 세계수 근처가 아니면 모습을 직접 드러낼 힘이 없어요.”

       

       그래, 이제야 알겠다.

       

       자신을 여신이 만든 책이라고 소개했던 양장본. 그 녀석이 바로 이 여인이었다.

       

       그랬기에 양장본을 사용하여 마법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력초를 물지 않고도 말이다.

       

       모든 게 딱딱 맞아떨어졌다. 머릿속이 명쾌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내 시선이 로테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말 그대로 싸늘하게 얼어있었다. 출혈는 멈추었지만, 그녀의 시간도 멈추었다.

       

       언니는 물의 정령왕과 눈을 맞추었다. 그녀가 흘끔거리자 시큐엘이 입을 열었다.

       

       “아퀴에르, 퀼로톤. 저 붉은 머리 소녀를 데리고 정령계로 가 있으세요. 여기 있으면 오래는 못 버틸 겁니다.”

       

       수계정령 두 마리가 내 곁으로 슬슬 다가왔다. 둘 다 나를 두려워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로테를 땅바닥에 살짝 내려놓고는 몸을 빼주었다. 그제야 정령들은 로테를 데리고 사라졌다.

       

       “노움, 이프리트. 둘은 바깥으로 나가 적의 추가적인 습격에 대비해 주세요. 이곳은 제가 맡을 테니.”

       

       그 말에 두 정령왕은 군말 없이 나갔다. 이제 이곳에 남은 건 물의 정령왕과 언니뿐이었다.

       

       “당신.”

       

       시큐엘이 나를 콕 가리켰다.

       

       “지금부터 묻는 말에 대답하길 바라요.”

       

       나는 옷소매로 눈물을 전부 찍어냈다. 로테가 걱정되어 울고 싶었지만, 참아야 한다.

       

       “당신이 하는 말에 따라 방금 실려 간 아이의 생사가 결정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았다.

       

       “묻겠습니다.”

       

       시큐엘이 눈을 가늘게 뜨며 질문했다.

       

       “당신은 인간인가요, 아니면 마수인가요?”

       

       갑작스러운 물음이었지만, 나는 지체하지 않고 즉답했다.

       

       “마수입니다.”

       

       내 왼쪽 팔뚝에서 검은 기름이 흐르고 있지 않나. 이것이 내가 마수라는 증거였다. 인간이라고 구라를 치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래요. 마수라….”

       

       시큐엘의 눈빛이 아련하게 변했다. 실망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내 대답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말을 이었다.

       

       “인간이 되길 원합니다.”

       

       그 말에 시큐엘은 어두워지려던 기색을 거두었다. 그녀는 무표정으로 돌아와, 내 몸 구석구석을 스캔하듯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죠?”

       “말 그대로, 철의 육신이나 마음만은 사람을 닮길 바랍니다.”

       

       시큐엘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모르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의뭉을 떠는 것인지.

       

       아마도 나를 시험하는 쪽이 아닐까.

       

       “정령왕이시여.”

       

       뒤에서 나를 째려보는 사제들을 뒤로하고 탄원을 올렸다.

       

       “로테를 살려주실 수만 있다면, 제 목숨을 거두어 가셔도 좋습니다.”

       

       어차피 전부 내던진 삶이었다.

       

       내가 죽느냐, 세상을 멸망시키느냐. 둘 중 하나만 고르기로 했던 자신이었다. 있는 그대로 나를 믿어준 친구가 소생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이 빌어먹을 대륙에서 사라져주리라.

       

       “물의 정령왕이시여, 저 괴물이 하는 말은 궤변입니다. 속아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저 마수가 바라는 대로 신벌을 내리십시오!”

       

       사제들이 뒤통수에 대고 깨작거린다. 신기하게도 그들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로테만, 로테만 살릴 수 있으면 그만이다.

       

       날 위해 목숨까지 내던진 그녀를 위해서라면, 저런 욕이야 얼마든지 먹어도 상관없다.

       

       “정령왕이시여!”

       “자애로운 분이시여!”

       “수군(水君)이시여!”

       

       보다 못한 시큐엘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당신들은 가만히 있으세요.”

       

       시큐엘은 사제들을 일갈하며 주위에 한기를 퍼뜨렸다. 촉촉하게 젖어 있던 땅바닥에서 서릿발이 올라왔다.

       

       “…당신, 저와 앨리스의 목소리가 들리나 보군요.”

       “앨리스…?”

       “당신을 비호하는 정령 말이에요.”

       “…….”

       

       내 언니 이름이 앨리스라. 처음 들어본다.

       

       “정말 마수라면 정령의 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저와 의사소통이 되니, 마수이되 마수가 아닌 것이겠죠.”

       

       거기까지 말한 시큐엘은 내 언니… 그러니까 앨리스와 눈을 맞추었다. 눈빛을 주고받은 것이 무언가 언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좋아요. 당신, 여긴 왜 온 거죠?”

       

       시큐엘은 나를 심문하기 시작했다.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람의 로드스톤을 노리러 온 게 아니었나요?”

       “노릴 계획이었으나, 지금은 때가 아니었습니다.”

       “누가 당신을 여기에 들여보냈죠?”

       “일리야드 마도 아카데미 총장의 권유로 학생들 견학을 인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뒤에서 입을 다물고 있던 사제들이 일제히 노성을 터뜨렸다.

       

       저거 거짓말을 한다. 이젠 하다 하다 르네이 총장을 모함하려 한다. 봐라, 역시 괴물은 괴물이다.

       

       그들의 입방정을 본 시큐엘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때였다.

       

       콰르릉!

       

       꽉 닫힌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내리쳤다.

       

       “으악!”

       

       바닥에 섬전이 튀었다. 사제와 마도사들은 자지러지게 놀라며 뒤로 미끄러졌다.

       

       “조용히 좀 있을 것이지.”

       

       앨리스가 금빛 눈동자를 번뜩이며 손가락을 후후 불었다. 그녀의 손끝에선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말이 끊겼군요. 계속할게요.”

       

       그 뒤로 나는 시큐엘과 온갖 문답을 주고받았다. 나는 한 치의 거짓 없이 있는 그대로를 털어놓았다.

       

       왜 이런 문답을 하는지 처음에는 잘 몰랐다. 그러나 포로 심문이라고 생각하자 그럭저럭 이해가 갔다.

       

       “결국 저 괴물과 해룡은 당신이 부른 게 아니라는 말이군요. 혹시 다른 마수는 데리고 왔나요?”

       “……있습니다.”

       

       나는 저 구석에서 숨죽이고 있던 아카샤를 불렀다.

       

       “…….”

       “…….”

       

       아카샤는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설마 제 언니가 자기 정체까지 술술 불어버릴 줄은 몰랐던 모양이지.

       

       그녀는 나와는 달리 마왕군에 소속감이 남아있었으니 골때려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카샤는 나와 오랜 세월을 붙어 지낸 존재. 마왕군과 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당연 나를 선택할 아이였다. 애초에 우리가 종군한 이유도 서로를 지키기 위함이었으니.

       

       아카샤는 마지못해 정령왕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저는, 언니를 따라 학생으로 잠입해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리 자매의 자백 대잔치가 벌어졌다.

       

       “저희 언니를 살려만 주신다면, 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나는 로테를 살리기 위해서, 아카샤는 나를 살리기 위해서.

       

       절멸급 마수 둘이 부복하는 모습에, 모두가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특히 내가 담임으로 있던 학생들이 그러했다. 레니냐와 유피엘을 포함한 학생들은 나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을 주었던 모양인지, 그 자리에서 주저앉거나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수군(水君)이시여. 이 아이들은 이제 갈 곳도 없고, 잃을 것도 없습니다. ”

       

       앨리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덧붙인다.

       

       “비록 마왕을 따랐다고는 하나, 그것은 당시 금안이 차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희 전계는 세력이 약했고, 아이들을 미처 돌볼 여력이 되지 않았습니다. 다 저희가 그르친 일입니다. 수군께선 벌하시려면 부디 저를 벌하시고, 이 아이들에겐 자비를 베푸시길 바랍니다.”

       

       시큐엘은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상천. 당신은 사천의 한 축을 담당하는 군의 거물인데, 왜 동료에게 버림받았죠?”

       “제 발명품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발명품이라. 혹시 흑주(黑晝)라고 부르는 마도 말인가요?”

       “그건 아직 완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시큐엘이 처음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좋습니다. 일단 여기까지.”

       

       더 대화를 이을 수 있었지만, 시큐엘은 그만두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주위를 샅샅이 훑는다. 무언가 기척을 감지한 모양이었다.

       

       “죽은 줄 알았는데, 명줄 하나는 기네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변이 벌어졌다.

       

       [꾸득, 꾸득.]

       

       불의 정령왕이 박살을 내놓은 호롱들이 다시 조립되더니, 아까보다 더 거대한 형체를 이루었다.

       

       깜빡, 깜빡.

       

       호롱불들이 일제히 점멸하며 예리한 빛줄기를 만들어낸다.

       

       학생들은 척수반사로 두려움에 떨었다. 레니냐도, 유피엘도, 프레이도. 모두 겁을 집어먹고는 뒷걸음질을 쳤다.

       

       [절멸급 마수 ─ 엑토플라즘(분열 단계)]

       

       수십 개의 폐와 눈알로 이루어진 스파게티가 꾸득거리며 기어 나왔다.

       

       아직 파스모의 뒤통수는 끝나지 않았다.

       

       “예상이 틀어졌지만, 나쁘진 않아요.”

       

       시큐엘이 고개를 까딱였다.

       

       로테를 살리고 싶으면, 그리고 나와 아카샤도 살고 싶으면.

       

       우선 저 새끼부터 족쳐서 순수를 증명하라는 소리였다.

       

       나는 스태프를 들고 일어섰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으리라는 다짐으로, 마법을 전개했다.

       

       [팔정도(八正道) 제7식(式) ─ 피션(Nuclear Fi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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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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