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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66

       아, 그렇다고 내가 진짜로 약혼까지 할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다.

        

       빠져나갈 구멍이라면 당연히 만들어 둬야지. 그 크로우필드 백작이 상대인데.

        

       “시도 자체는 여러 번 할 기회가 있으니, 여러분도 저에게 도움을 주셨으면 하는데요.”

        

       미아가 올라오기 전 나는 두 사람에게 얼른 그렇게 말했다.

        

       “우선, 내일 오전에 그 안경 낀 남자를 찾아주세요. 이번에도 이 영지에 있을 가능성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있다면 지난번의 그 장소겠죠.”

        

       “기억하고 있어.”

        

       앨리스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어는 당시에 우리 옆에 있지 않아서 장소를 알지는 못했지만, 앨리스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 남자한테 죽을 뻔한 것을 클레어도 봤으니까.

        

       ……어쩌면 그래도 상당히 자제했던 나와는 다르게 그 남자는 진짜로 지옥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뭐 그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지옥에 빠지더라도 이 세상은 반드시 리셋시킬 생각이니까.

        

       기껏 동료들이 성장했는데 그 성장점을 깎아 먹는 짓을 할 수는 없잖아.

        

       “그 장소에 두 사람이 함께 가 주세요. 반드시 둘이 붙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위급할 때 클레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우리는 우리만 온 것이 아니다. 내 호위는 아니었지만, 클레어와 앨리스의 호위도 있었으니까.

        

       “영지 안을 둘러보다가, ‘우연히’ 불법 창관을 만나 ‘우연히’ 말려들어서 ‘우연히’ 도움을 주게 되었다는 식이 가장 좋겠죠.”

        

       “……그렇게 행동하면 상대도 알아차리지 않을까?”

        

       “알아차려도 상관없어요. 그 사이에 제가 크로우필드 백작을 설득해볼 테니까.”

        

       “괜찮을까?”

        

       앨리스에게 대답하고 있으려니, 클레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여신은 언니가 죽기 좋은 시점으로 시간을 옮기고 있다면서?”

        

       설마 크로우필드 백작이 나를 죽이려고 들겠어.

        

       황제파와 귀족파의 잣대로 보자면 서로 대치되는 인물이지만, 내가 알고 있는 크로우필드 백작은 철저하게 자기 욕망에 충실한 인간이다. 마약과 그 퇴폐적인 취미만 아니었어도 영지를 견실하게 이끌어갈 재능 자체는 있는 인간이었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약에 찌들어 살던 인간의 머리가 멀쩡할 리는 없다.

        

       바꿔말하자면, 황제파니 귀족파니 하는 대의는 이미 진즉에 잃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소리다.

        

       이쪽 세계에서의 황제가 크로우필드 백작을 굳이 제거하지 않은 이유는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불안함에 몸을 사리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러니까 더욱 조심해야 할지도 모르지. 백작이 성욕을 이기지 못하고 나를 덮치려는데 넘어지다가 어디 머리 잘못 부딪혀 황천으로 갈지 모르는 일이잖아.

        

       그래서, 나는 하나 챙겨온 것이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총을 하나 꺼냈다.

        

       작은 총이었다. 총열이 손가락보다도 짧아서 제대로 조준하고 쏘더라도 총이 어디 맞을지 모를 정도로 작은 총. 그런 주제에 들어가는 총알은 455구경이었지만.

        

       여성용 호신 권총이었다. 중절식으로 권총탄이 두 발 들어가는 사양이다. 이 시대 특유의 펑퍼짐한 드레스라면 어디든 숨기기 좋은 무기.

        

       이쪽 세상에 금속탐지기가 아직 없어서 다행이라니까. 드레스 안쪽 허벅지에 꽂아 넣었더니 몸수색하던 인간들도 제대로 찾아내지 못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이 저택에 있는 하인은 전원 남성이다. 귀족 여성의 몸수색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인원이 이 저택 안에는 없다.

        

       “제가 필요하다면 이 총 두 발로 10미터 떨어진 거리의 인간도 맞출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죠?”

        

       총알이 가서 닿기만 한다면, 나는 얼마든 사람을 맞출 수 있다. 시간을 무한정 되돌리면 되니까.

        

       이쪽 세상에서는 사격 연습을 거의 하지 않았다. 나는 철저하게 ‘지략 캐릭터’여야만 했다. 육체적으로는 한없이 나약해서 얼마든지 꺾어버릴 수 있는 존재여야 했다.

        

       그래야 황제가 속을 테니까.

        

       나에게 ‘지능’ 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황제가 명확하게 인식하도록.

        

       하지만 그렇다고 이전에 열심히 키워둔 재능을 완전히 썩힐 수는 없지.

        

       “……알았어. 네 생각이 그렇다면.”

        

       앨리스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우리는 그 일을—”

        

       “내일 아침으로 하죠.”

        

       나는 얼른 그렇게 말해서 앨리스의 목소리를 중간에 끊었다.

        

       문 바깥에서 사람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미아가 오는 소리겠지.

        

       아직은 미아에게 알릴 수 없는 이야기였다. 자기 아버지에 대해서 실망하더라도 미아는 그 두 사람의 딸이니까.

        

       ……게다가, 만약 내가 크로우필드 백작과 약혼이라도 하게 되면 나는 미아의 어머니가 되는 거잖아. 생각만 해도 어질어질하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도록 하자.

        

       “여, 여러분?”

        

       찰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미아가 팔꿈치로 문을 밀면서 들어왔다.

        

       예상대로 미아의 손에는 쟁반이 들려있었다. 찻주전자와 찻잔, 그리고 약간의 다과도.

        

       아까 아래에서 마셨던 차를 떠올려보면 저것들도 꽤 고급품이리라.

        

       마약을 팔아 돈을 버는 영지다. 돈이 마를 일이 없겠지. 게다가 명목상으로는 모르핀 원료라고 파는 거고.

        

       “차와 다과를 가지고 왔어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미아의 얼굴이 너무 순수하게 보여서, 나는 마음 한구석이 격하게 찔렸다.

        

       *

        

       마약을 파는 사람이고, 설령 본인이 마약에 중독된 사람이라고 해도, 보통 자기가 사는 집은 잘 꾸미는 법이다. 돈이 그렇게 많은데 집을 못 꾸미고 살 이유가 없지.

        

       아니, 그건 아닌가? 하긴 생각해보면 드라마나 영화에서, 혹은 뉴스에서 마약 중독자들의 집이 못 볼 꼴로 나오는 일은 흔했다.

        

       이곳이 이렇게 잘 가꾸어지고 있는 건 그저 정원을 관리하는 사람의 실력이 그만큼 좋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저를 여기로 부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레이스 영애?”

        

       중후한 바리톤 목소리가 내 등 뒤를 훑었다.

        

       사람의 손이 나를 직접 만졌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저 그 목소리가 나의 몸을 훑었다는 거지. 그리고 눈빛도.

        

       뒤를 돌아보니, 나를 그윽하게 쳐다보는 크로우필드 백작이 있었다.

        

       ……내가 정말로 취향이긴 했던 모양이다.

        

       ‘실비아 블랙’의 외모는 솔직히 내가 보아도 아름답다고 할만하긴 했다. 이게 ‘내’ 몸이 아니었다면 나도 충분히 호감을 느꼈을 거다. 실제로 그렇게 호감을 느낀 이가 있으니 흑백합이라는 말도 안 되는 별명이 붙은 거겠지.

        

       크로우필드 백작을 여기까지 불러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크로우필드 백작 본인‘을’ 불러오는 것은 간단했다. 여자를 밝히는 것이 정말인지, 내가 단둘이 이야기하자고 하는 것으로 당연하다는 듯 나를 쫄래쫄래 따라왔으니까.

        

       문제는 크로우필드 백작 부인이었다.

        

       ‘여자’와 자기 남편이 대화하는 것을 눈에 쌍심지를 켠 채 바라보고, 무엇보다 내가 같이 대화라도 하자고 하면 어떻게든 자기가 끼어들었다.

        

       두 황녀의 최측근이니 대놓고 모욕하지는 못하더라도, 하다못해 감시라도 하겠다는 모양이다.

        

       자기 딸 나이인 소녀한테 질투심이라도 느끼는 걸까. 뭐, 원래 내가 살던 세계에서도 없을 일은 아니니까.

        

       그래서 나는 시간을 몇 번이나 돌리면서 크로우필드 백작을 자세히 관찰했다. 오전 시간을 통째로 네 번 정도 돌리고 나서야 백작에게 넌지시 ‘30분 뒤에 정원에서 뵐 수 있을까요?’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

        

       “긴히 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시선을 돌려 정원에 심어진 꽃을 가만히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그래도 정원에 양귀비를 심어두지는 않았네.

        

       “둘이서 할 이야기라면……?”

        

       백작의 목소리에 은근한 기대가 깔렸다.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다. 애초에 나는 백작에게 단둘이 나눌 이야기가 있다고 했을 뿐이지, 어떤 호감이나 사랑의 말을 속삭인 것도 아니니까.

        

       그렇다고 백작이 대단한 꽃미남인 것도 아니고. 어렸을 때는 그랬을 수도 있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미아의 외모가 그렇게 준수한 것은 자기 부모로부터 외모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부인도 조금 날카로운 면이 있긴 했지만, 꽤 미녀였으니, 적어도 백작의 젊은 시절의 외모가 ‘부인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조건’ 중 하나라는 생각은 해볼 수 있겠다.

        

       어쩌면 백작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그 시절에만 빠져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세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호오, 정세라.”

        

       수줍은 많은 아가씨가 남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어색하게나마 남자의 주제를 꺼낸다고 생각했을까? 백작의 두터운 수염 속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이 내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빳빳한 수염이 움직이는 것이 징그러워서, 나는 곧장 다음 말을 건넸다.

        

       “곧 전쟁이 있을 겁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크로우필드는 전쟁의 최전선에 설 것이고, 당연히 백작님께서 세워둔 온갖 위업도 전부 무너지겠죠.”

        

       내 쪽으로 다가오던 백작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크로우필드 상공으로 제국의 드레드노트급 전함이 지나갈 겁니다. 하늘을 가르는 전투기들도.”

        

       “……예?”

        

       “마침 저는 그 드레드노트급 전함의 취약점을 알고 있습니다. 혹시 필요하다면 알려드릴 수 있는데, 어떠신가요?”

        

       백작의 표정에서 한순간에 감정이 빠져나갔다.

        

       자기 표정을 숨기려고 일부러 감정을 없앤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얼이 빠져버린’ 것이다.

        

       그래, 내가 이렇게 보여도 이전 시간대에서 어마어마하게 사고를 치고 다녔거든.

        

       전함 내부의 어디를 터뜨려야 제대로 떨어뜨릴 수 있을지 정도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굳이 그걸 ‘내가’ 직접 할 필요는 없잖아?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다시 한 번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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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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