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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66

       첨예하게 대립하던 두 사람의 움직임이 어느 순간 눈에 띄게 느려졌다. 관중들은 드디어 그들이 지쳤다고 생각했다. 무려 20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정신없이 공방을 주고받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곧 그들 사이에 흐르는 어떤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이전처럼 부산스럽게 움직이진 않았지만, 서로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아까보다 더 날카롭게 반응했다.

       그제야 사람들은 깨달았다. 둘은 지친 것이 아니라, 뭔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는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이 경기장에서 시간에 따른 변수는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분수 폭발이었다.

         

       두 사람은 상대가 자신과 같은 전략으로 전환한 것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설마 내 수가 읽혔나? 뭘 노리는 거지? 작전을 바꿔야 하나? 아니면, 그걸 역으로 노리고?

       머리가 복잡해지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폭발과 폭발 사이의 간격은 고작 5분. 서로를 탐색하며 수 싸움을 하는 동안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빠앙.

       승부를 가를 마지막 뱃고동이 울렸고, 잠시 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물기둥이 치솟았다.

         

       엘라가 배치해 둔 공들이 이리저리 부딪치다가 시간차를 두고 레이나를 향해 날아갔다. 그 간격은 실로 절묘해서 함부로 피하려고 했다가 다음 날아오는 공에 얻어맞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레이나는 물보라가 가라앉는 것을 기다렸다가 공들의 움직임이 모두 파악한 후에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폭발이 일어나자마자 바로 정면으로 몸을 날렸다. 그녀는 물기둥의 중심부를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져 나갔다. 공이 어디서 날아오는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이 경로로 날아오는 공이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녀가 엘라에게 의문을 가진 건 폭발 공격에서 두 번째로 빠져나왔을 때였다. 그녀는 공의 궤도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십여 개의 공을 동시에 날려 보낼 수 있다면, 그냥 자신이 서 있는 지점 전체를 덮는 방식으로 보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굳이 여러 방향에서 다양한 궤도를 통해 날려댔다.

         

       엘라가 화려한 퍼포먼스를 좋아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승부에서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것에 대해 고찰하던 레이나는 곧 엘라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걸 깨닫게 됐다. 공들을 날려 보내는 건 어디까지나 수영장 밑바닥에서 쏘아져 나오는 분수였다. 그렇기에 공들은 폭발의 바깥 방향으로 퍼졌고, 그래서 정면에서 오는 공들은 전부 외곽에서 사선으로 날아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레이나는 주먹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즉, 폭발이 일어남과 동시에 분수의 중심부를 향해 달린다면, 엘라의 공격을 모두 피하는 건 물론이고, 그 너머에 있는 그녀에게 불의의 일격을 먹일 수 있었다.

         

       “레이나 선수, 과감하게 앞으로 나서서……분수의 중심부를 통과했습니다!”

         

       사회자의 해설은 몇 초 늦게 따라왔다.

       그가 입을 열기 시작했을 때, 레이나는 이미 목표했던 지점에 도달해 있었다. 그녀는 엘라를 찾았다. 분명 자신의 등장에 당황해 있을 그녀의 빨간색 체육복과 까만색 머리를 찾았다.

       하지만……

         

       ‘어디 있지?’

         

       아무리 둘러봐도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근처에 있는 빨간색 공들을 빠르게 훑어봤지만 그녀는 없었다.

         

       커다란 파도가 출렁거렸다. 폭발의 여파였다.

       레이나는 균형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뒤를 돌아봤다. 자신이 출발했던 지점에도 역시 엘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

         

       그때, 그녀는 관중들의 환호성을 들었다. 그들의 시야가 자신의 뒤로 쏠리는 것을 확인했다.

         

       설마 위?

       레이나는 폭발과 함께 위로 솟는 엘라의 모습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높이에서 떨어지면 낙하 에너지는 엄청났다. 그건 스윙바이로 해결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무조건 물에 빠질 것이다.

         

       그녀의 저의가 궁금했지만, 깊게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위에서의 공격을 대비하며 재빨리 그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러나 공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가해졌다.

       어디선가 날아온 커다란 공이 그녀의 옆을 강타했다. 시야의 절반이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빨간색 공이었다.

         

       “윽!”

         

       그녀는 균형을 잃고 공에서 미끄러졌다. 본능적으로 눈을 감고 숨을 참았다. 차가운 물이 그녀의 몸을 감쌌다.

         

       아.

       그녀는 속으로 탄식을 삼켰다. 물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는 서둘러 헤엄쳐서 수면으로 올라왔다. 혹시나 아주 살짝 몸이 잠긴 것은 아닐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와아아아!”

         

       흥분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돔 안을 가득 채웠다. 그 열광적인 함성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레이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흔들리는 파도 속에서 입으로 들어오는 물을 연신 토하며 진행요원들이 노란색 깃발을 위로 치켜드는 것을 보았다.

         

       “황금 카니발, 레이나 마기어 탈락!”

         

       그녀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졌다.

       손톱이 살을 파고 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지고 말았다.

         

       “둘 다 잘했다!”

       “그래! 둘 다 멋졌어!”

       “엘라! 엘라! 엘라!”

       “레이나! 레이나! 레이나!”

         

       사람들은 승패를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한 두 사람의 이름을 모두 연호했다.

         

       그러나 레이나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그녀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어떻게 졌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을 날려버린 빨간색 공은 위에서 날아온 게 아니었다. 바로 뒤에서 날아온 것이었다. 분명 아무도 없다고 확인했던 그 방향에서 말이다.

         

       심지어…….

       그녀는 방금 공에 얻어맞은 부위를 문질렀다.

       자신이 착각한 것이 아니라면……이 공은 아래 방향에서 날아왔다.

       물속에서.

         

       그때, 그녀의 귀로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규칙상 문제없습니다! 문제없어요! 탈락 조건은 물에 ‘일정 깊이’ 이상 빠질 때입니다. 이 선수의 경우 선을 넘지 않았으니 괜찮아요. 하지만 대단한 판단력과 배짱이군요, 엘라 선수.”

         

       레이나는 그의 말을 곱씹어 보고 잠시 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엘라가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건지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 바로 옆에 있었었다. 그 빨간색 공 아래에.

       그녀는 놀랍게도 잠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영장 벽면에는 탈락으로 처리되는 수심이 검은색 선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 깊이는 대략 공이 물에 잠겼을 때를 기준으로 발목에서 무릎 사이 정도였다. 사실상 물에 빠지면 탈락이라고 봐야 했다.

         

       하지만 수면이 치솟는 순간이 있었다. 바로 폭발로 인해 큰 파도가 칠 때였다. 물에 잠수해 있더라도 파고가 높았기에 탈락 기준선보다 높은 곳에 있는 것이 된 것이다.

         

       “내가 이겼지?”

         

       레이나는 팔짱을 끼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엘라를 바라봤다. 그녀는 행여나 파도가 아래로 꺼질 때, 기준선 이하로 내려가지 않도록 마루와 골 사이를 미끄러지듯 헤엄치며 높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엘라는 물기둥이 치솟기 직전에 레이나가 취한 자세를 보고 그녀가 정면으로 달려들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채고는 폭발에 맞춰 물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그녀는 선수는 당연히 물 위에 서 있어야 한다는 선입견을 역이용했다. 그녀는 숨을 참은 채 빨간색 공 아래에 달라붙어 레이나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거칠게 치솟는 파도 아래에서 때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그녀가 어리둥절해 있는 순간을 포착하고 공을 위로 내던지며 튀어나온 것이다.

         

       원래 엘라는 레이나를 향해 튀어가는 공들 중 하나를 택해 밑에 숨어 있다가 기습공격을 하려 했었다. 그러나 그녀 쪽에서 먼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보고 이곳에 함정을 파두는 것으로 바꿨다.

         

       그녀는 레이나에게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폭발의 여파가 이제 잦아들고 있었다. 수면의 높이가 원상태로 회복되기 전에 공 위로 올라가야 했다.

         

       그녀는 파도 아래에 떠다니는 빨간색 공 하나를 보고 그것을 향해 점프하며 팔을 뻗었다. 충분히 손이 닿는 거리였다.

       그러나 뻗은 팔이 공에 닿는 순간 미끄러지는 것을 보고 그녀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왼손. 그곳에 있는 손가락 2개가 손등에 닿을 정도로 완전히 뒤로 꺾여 있는 것을.

         

       아.

       언제부터였을까.

       기억을 돌이켜본 엘라는 공을 레이나에게 날려 보낼 때, 받침대로 왼손을 썼던 것을 떠올렸다. 수중에는 체중을 실을 바닥이 없었기 때문에 공을 쳐 내기 위해서 한 손으로 공을 받치고 있어야 했다. 공을 쳐 내는 순간, 받침대로 썼던 그것이 부러져버린 게 분명했다.

         

       자신의 수가 먹혔다는 것에 흥분해서, 승리한 것이 기뻐서 왼손에서 올라오는 통증을 여태껏 자각하지 못했다.

         

       “에구구.”

         

       그녀의 몸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 깊이는 분명 기준선 아래였다. 수면 아래에 넘실거리는 검은색의 환상 불꽃이 엘라의 몸을 집어삼켰다.

         

       뜻밖의 상황에 사회자뿐만 아니라 진행 요원들도 멍청히 그 광경을 지켜봤다. 이윽고 심판이 호각을 불었고, 요원들은 붉은색 깃발을 위로 치켜들었다.

         

       “괴물 서커스의 엘라 탈락!”

         

         

       ******

         

         

       “핫핫, 마지막에 아쉽게 됐군요. 무승부라니.”

       “쳇, 나는 뼈가 부러졌다고.”

       “저도 탈골은 자주 겪죠.”

       “당신이랑 같아?”

         

       엘라는 탈락자 구역에 올라 옷을 갈아입었다. 경기용 체육복은 추가 지급이 되지 않았지만, 스벤이 자신의 체육복을 벗어준 덕분에 그녀는 뽀송한 새 체육복을 입을 수 있었다. 물론 두 사람의 키 차이는 상당했기에, 끝부분을 잘라내야 했다.

         

       그녀는 잘라낸 체육복 조각으로 고정대를 만들어서 부러진 손가락을 맞췄다. 뼈가 완전히 끊어져서 모양을 갖춰 봤자 더는 쓸 수 없었지만, 원활한 치료를 위해 응급조치는 해둬야 했다.

         

       “부활은 누구로 했어?”

         

       엘라는 승부에 임하기 전에 클라라에게 동전을 써서 한 명을 부활시켜 두라고 말했다. 자신은 레이나에게 반드시 이길 생각이었지만, 팀을 위해서는 만약의 상황도 염두에 둬야 했기 때문이다.

         

       “클라라 양이 마야 양을 골랐다고 하더군요.”

       “응? 가스통 영감님이 낫지 않아? 발이나 걸려 넘어지는 애보다는…….”

       “그게 말이죠…….”

         

       스벤이 막 그녀에게 그에 대해 설명하려는데, 레이나가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엘라는 그녀를 발견하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물 되게 차갑다, 안 그래?”

         

       엘라의 목소리는 잔뜩 들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개운해 보였다. 상대에 대한 적개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천성이 곡예사였다. 불안감이나 질투심 같은 불쾌한 감정은 관객들의 찬사 앞에서 여름날 얼음처럼 녹아버렸다.

         

       그러나 레이나의 심정은 엘라와 같지 못했다. 그녀는 애초에 서커스를 좋아하지 않았다. 곡예로 땀 좀 흘렸다고 마음이 치유되는 일 따위는 없었다.

       그녀는 가슴을 짓누르는 싸늘한 패배감을 느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졌어.”

         

       그녀의 말을 들은 엘라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야.”

       “너희 서커스단에 들어가는 건 포기할게. 네 말대로 나는 아버지랑…….”

       “야야!”

         

       엘라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녀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레이나를 바라봤다.

         

       큰 키와 성숙한 몸매, 도발적인 표정과 말투 때문에 늘 놓쳐버리는 사실이었지만, 그녀는 보기보다 미숙한 친구였다. 아버지의 속박에 괴로워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안타까운 친구이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모질게 자라지 않아 기특한 친구이기도 했다.

         

       엘라는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가면 너머 눈동자는 물방울이 맺혀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이 어디서 흐른 것인지 엘라는 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무승부였잖아, 안 그래?”

       “하, 하지만 수 싸움은 내가 졌어. 네 손가락은…….”

       “현관에서 너 때문에 부러진 거잖아. 그러니까 네 공적이지.”

       “그, 그렇지만…….”

         

       엘라는 가면의 흉악한 표정과 어울리지 않게 당황해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 콧수염한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단장과 얘기를 나눠보도록 해.”

       “다, 단장님이랑?”

       “그래. 혼자 끙끙 앓다가 이상한 결론을 내리지 말고. 물론 그건 지몬 그 인간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유도한 거겠지만.”

         

       엘라가 이렇게까지 말했지만 레이나는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 하지만 나는 황금 카니발의 곡예사인데……괴물 서커스를 이겨야, 널 꺾어야……그래야 아버지가 나를…….”

         

       지몬의 암시는 강력했다. 그것은 아무리 그녀가 지몬이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고 해도 너무나 오랫동안 누적된 것이라 쉽게 떨쳐 버리기 힘든 것이었다.

       어떤 생각을 하려 해도 ‘하지만 아버지가 말한 대로라면…….’이라는 식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보다 못한 엘라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소리쳤다.

         

       “아, 말귀를 왜 이렇게 못 알아들어? 네 아빠한테 연락해! 황금 카니발을 나가서 괴물 서커스로 가게 됐다고”

         

       아빠한테?

       엘라의 결정적인 한 마디에 레이나의 사고를 억압하고 있던 저주가 깨졌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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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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