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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67

       그렇다. 이쪽 세계의 황제는 굳이 다른 선택지를 고를 필요가 없다.

        

       클레어는 유능하긴 했지만 미래를 전부 알고 있다는 듯 행동하지 않았고, 앨리스를 무조건 차기 황제로 밀지도 않았다. 물론 나처럼 적극적으로 밀지 않았을 뿐이지 그게 기정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그저 생각만 하는 것과 행동까지 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의 황제 옆에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감시 중인 하늘에서 내려온 화신’ 같은 존재는 없다는 뜻이다.

        

       내가 황제의 인생에 갑자기 끼어들긴 했지. 알아서 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고, 실제로 나로서는 몰라야 할 사실들을 많이 알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 황제가 나를 극도로 경계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면녀가 없는 이 세상에서 나는 시간을 돌리는 정신 나간 능력을 갖춘 인간은 아니었으니까.

        

       그저 수상할 정도로 정보를 많이 가진, 경계해야 할 인물이 하나 나타났다고만 생각하겠지. 그것만으로 자신이 수년간 준비하던 전쟁을 완전히 포기할 사람은 아니다.

        

       원래의 세상에서보다 훨씬 조심스럽긴 했지만, 전쟁 자체는 준비 중이다. 많은 군사가 내가 알던 이전 시간대보다 훨씬 국경 가까이에 배치되었고, 함선도 열심히 건조 중이다.

        

       그러니, 이 세계에서는 전쟁은 반드시 터진다.

        

       그리고 벨부르와 제국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피해를 볼 곳은 크로우필드 영지였고.

        

       “전쟁이 터진다면 이곳이 가장 위험한 곳이기는 하겠지요.”

        

       아무리 내가 그럴싸한 말을 늘어놓더라도 상대 또한 평생을 귀족으로 살아온 인간이다.

        

       백작쯤 되면 나름대로 파벌도 있고, 아래에 사람도 많겠지. 이쪽도 나름대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을 거다. 황제 아래에서의 불온한 움직임도 미리 봤을지도 모르고.

        

       마약과 향락에 찌들어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판단력을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니다. 정말로 그랬다가는 이 영지 자체를 잃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게 제가 적국의 편을 들어야 할 이유가 되겠습니까? 평소에 아무리 정치적인 신념이 다르더라도 적 앞에서도 조국의 분열을 유도할 만큼 저급한 인간이 되지는 않을 생각입니다만.”

        

       글쎄, 그런 식의 애국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황제는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는데 말이지. 자기한테 반대하는 인간이라고 제거해버릴 생각을 했을 정도니까.

        

       비단 이 백작뿐만이 아니라, 이미 이전부터 황족을 숙청하고 공작들의 이름을 살생부에 올려두던 황제다. 공작 가문이 열 두 개씩이나 되니 조금 줄여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만약 황제가 정말로 무력만으로 세상을 지배할 생각이면 그래서는 안 된다. 만에 하나 세상을 무력으로 통일했다고 하더라도 자기 가족을 잃은 원한을 사람들은 기억할 거고, 점령지에서도 꾸준히 반란이 일어날 테니까.

        

       하지만 황제의 최종 목표는 여신의 힘을 찬탈하는 것.

        

       그리고 그 힘으로 신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 그러면 그 이전에 펼쳐둔 개판은 한 번에 전부 정리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사실을 이 사람한테 말해주기는 조금 그렇지.

        

       “전쟁은 제국과 전 세계에 큰 상처를 남길 겁니다. 이 백작령이 전쟁에 휘말릴 테니 백작님에게도 타격이 있겠죠.”

        

       “…….”

        

       백작은 듣고 있다는 듯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황제의 군세에 맞서라는 것이 아닙니다. 해외의 군사력을 일방적으로 찍어누를 수 있는 군세와 정면으로 맞붙는 것은 멍청한 짓이죠. 하지만…….”

        

       나는 일부러 조금 뜸을 들인 다음 말했다.

        

       “제국이 다른 국가와의 전쟁을 끝낸 후에도, 황제의 손에 드레드노트급 전함이 있다면 어떨까요?”

        

       그 전함이 무시무시한 이유는 전함 자체에 아무런 약점이 없어서가 아니다. 내가 조사한 바로는 내부에 취약점이 매우 많았다. 심지어 탑재된 컴퓨터는 철저한 기계식 컴퓨터라 부품 일부가 망가지는 것으로 무력화될 수도 있고.

        

       하지만, 그렇다고 외부에서 그 전함을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전함이 무서웠던 이유는 전함을 상대할 병기가 전함뿐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후에 항공 기술이 발전하고 항공기를 잔뜩 실을 수 있는 항공모함이 등장하면서 전함의 이름도 바다 아래로 가라앉긴 했지만, 적어도 그 ‘항공기’를 온갖 나라에서 전부 뽑아낼 수 있을 때까지 전함을 상대하는 방법은 이쪽도 동급의 전함을 만드는 것뿐이었다. 다른 방법도 있었긴 하겠지만 전함은 전함이 상대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었다.

        

       당시 전함의 위치는 현대의 대륙간 탄도탄과 거의 비슷했다. 실제로 그 전함이 마구 뽑혀 나오는 걸 방지하기 위한 조약까지 있었고, 일부 국가는 그 조약을 우회하기 위해 온갖 편법과 똥꼬쇼를 벌이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그 항공기를 만들 수 있는 나라가 제국뿐이다. 해외에 수출하고 있긴 하지만 그 수는 극소수. 게다가 전쟁이 터지면 당연히 그런 수출은 죄다 중지될 것이 뻔하다.

        

       함포를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난이도를 요구한다. 드레드노트는 하늘을 날기 위해서 방어력은 어느 정도 포기했지만, 적어도 이 세계에 있는 대공포 중에서는 드레드노트를 쏴서 떨어뜨릴 수 있는 대공포가 없다. 사거리도, 위력도, 전부 모자란다.

        

       한마디로, 전쟁 직후엔 제국군도 상당한 피해를 보겠지만, 그 존재 자체로 ‘억지력’이 될 수 있을 전함이 그대로 황제의 손에 남게 된다면.

        

       “절대 황권이 무너지면, 전쟁 후에도 백작님의 위치가 훨씬 유리하게 흘러갈 수 있겠죠. 완전히 배신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저…… 이후의 균형을 맞추라는 뜻입니다.”

        

       벨부르는 패배할 것이다. 크로우필드 영지는 타격을 입긴 하겠지만 제국의 영토이므로 전쟁 내내 제국군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회복하는 과정에서 황제의 피해가 예상만큼 크지 않다면, 전쟁 이후에도 절대황권은 유지된다.

        

       “그리고, 취약점을 알고 있다는 건, 다른 의미로 전함의 구조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죠.”

        

       대놓고 설계를 전부 기억한다는 말은 안 했다. 당연히 나는 그 복잡한 설계도를 전부 외울 머리가 없다.

        

       하지만 그 정도의 암시만으로도, 백작은 나에 대한 시선을 바꿨다.

        

       “제 정보를 받아들일 만한 이유로 불충분한가요?”

        

       믿지 않아도 큰 상관은 없다. 그러면 다음으로는 샤를로트에게 정보를 흘릴 뿐이다. 다만 전함 자체는 내부에서 폭파해야 하므로, 실제로 사람을 몰래 심을 수 있을지 모르는 크로우필드 백작이 움직이는 것보다는 성공 확률이 많이 떨어지겠지만.

        

       “그레이스 가의 사람이 어째서 이런 정보를 제게 흘리려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크로우필드 백작이 나에게 그렇게 물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여기서 백작을 유혹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백작이 나에게 흠뻑 빠질까? 백작 정도 되는 이라면 이런 여성들은 흔하게 만나봤을 텐데. 고급 정보가 아니더라도 자기 몸으로 백작을 유혹해 조금 더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여인들.

        

       그러니, 그런 이유보다는 조금 다른 이유를 대는 것이 좋겠지.

        

       뭐라고 말할까?

        

       “제 별명을 알고 계실 정도라면, 제가 어린 시절부터 많은 분과 친분을 쌓아왔다는 이야기도 알고 계시겠죠.”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그저, 조금 더 가능성이 있는 분과 친분을 쌓고…… 오랫동안 알고 지내고 싶을 뿐입니다.”

        

       굉장히 모호한 말이었지만, 그렇기에 귀족다운 말이기도 했다.

        

       “호오.”

        

       그리고 그 말은 크로우필드 백작에게 잘 먹혀들어 간 모양— 응?

        

       마치 나를 경계하듯 조금 거리를 두고 있던 크로우필드 백작이 내 쪽으로 몇 걸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렇군요.”

        

       아니, 잠깐.

        

       내 말을 좀 이상하게 알아듣기라도 한 걸까?

        

       “당신을 가질만한 인물을 찾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

        

       아니, 그런 뜻으로 한 말 아닌데.

        

       내가 유혹하지 않아도 이 인간은 내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혹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가치가 높은 것을 가지기 위해서는 경쟁이 필요한 법이죠. 잘 알았습니다.”

        

       아니,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보다, 실비아라는 인물의 몸과 얼굴이 예쁘기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목숨 걸고 가져야 할 수준인 것도 아니고.

        

       ……아닌가?

        

       아니면……. 이 사람은 그만큼 결정력에 문제가 생기기라도 한 건가?

        

       “……지금쯤 두 황녀가 이 영지의 ‘범법자’를 찾아갔을 겁니다.”

        

       “그래서 함께 오셨습니까? 그 이야기도 해주기 위해서?”

        

       말을 돌리려고 했는데 백작은 그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다행히 백작이 나에게 손을 대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총에 맞거나, 아니면 내가 시간을 돌리거나 했을 텐데.

        

       “알겠습니다. 경쟁자가 있다면 상품은 더럽히지 않는 쪽이 낫겠죠. 꽃잎이 떨어지지 않은 꽃이어야 가졌을 때 그 향기가 온전한 법이니.”

        

       “…….”

        

       어, 음.

        

       모르겠다. 그냥 그런 걸로 해 두자.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음 화는 오늘도 늦습니다… 요즘들어 자꾸 이런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 요즘들어 오전이 너무 바쁘네요… 최대한 빨리 정상화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다음화 보기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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