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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67

        

       

       

       

         

       아이작과 에이첼. 두 사람이 언제, 어떻게, 무슨 관계가 됐는지는 조금도 알 수 없었다.

         

       떠올린다. 아이작은 최연소 대마법사이자 얼음의 원왕이 된 자이며, 아카데미에선 난봉꾼이라고도 불리던 성욕의 화신이 아니던가.

         

         

       ‘소문은 과장되는 경향이 있다고 해도, 아이작한테 괜히 그런 소문이 붙은 건 아닐 테고…!’

         

         

       가문 차원에서 아이작을 위해 해야 할 것이 생겼고, 그걸 에이첼이 차기 가주로서 감당하게 된 것이라면?

       

       그게, 그렇고 그런 행위라면…?

         

       합리적인 가설이었다. 요즘은 수많은 귀족이 빙제에게 잘 보이려는 추세니까.

       

       

       ‘에이첼 언니가 희생된 거야?’

       

         

       이미 에이첼은 권모와 술수가 난무하는 귀족 사회에서 화이트클락 가문의 권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지금의 상황이 외부에 알려지면 필시 가문의 위신이 추락하고 말 터. 그럴 만한 일까지 하다니. 에이첼은 정말로 많은 것을 희생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마치 외설적인 소설에 나오는 비극의 여주인공 같잖아…!’

       

       

       몰래 읽어왔던 외설 서적의 내용이 상상 속에서 재연되었다. 잘생긴 남자 캐릭터에게 강제로 이런저런 행위를 당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 버린 여주인공.

         

       연이어 집무실 안에서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 머릿속에서 자연스레 상상되었다. 그만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갛게 상기되고 마는 건 케리드나의 의지와는 무관했다.

         

       케리드나는 저도 모르게 수치심과 황홀감에 빠져들었다.

         

         

       ‘아니, 뭘 좋아하고 있어?’

         

         

       이성을 되찾고 고개를 세차게 가로젓는 케리드나.

         

       아이작은 힘 있고 잘생긴 남자다. 비록 부담스러워서 절대 연애하고 싶은 상대는 아니더라도, 성욕이 물씬 들고 마는 건 아직 청춘의 한때인 케리드나에겐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케리드나는 그런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 읏, 빙제님….

         

         

       “으으….”

         

         

       더는 견디기 어려웠다. 심장이 폭발할 지경이다.

       

       대뜸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모서리 쪽, 누군가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메이드 같았다.

       

       케리드나는 휙 일어나더니 고개를 숙이곤 잰걸음으로 뽈뽈 달아났다.

       

       에이첼을 향한 연민과 부러움 따위를 느끼면서.

       

       

       케리드나가 떠났음을 알아챈 에이첼은 목소리를 줄였다.

       

       조금 전에 만들어낸 케리드나의 오해는 나중에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을 것이었다.

       

       

       

       * * *

       

       

       

       에이첼 화이트클락의 어깨에 맹약의 증표가 온전히 새겨졌다. 이것으로 맹약은 확실히 체결되었다.

         

         

       “…….”

       “왜 그러시나요, 빙제님?”

       “원래 아프면 그러십니까?”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 흐읏, 하는 소리 말인가요? 만약 신경 쓰이셨다면 미안해요. 고질적인 거라.”

         

         

       에이첼은 상의 단추를 잠그던 중 태평하게 웃었다.

       

       방금 전에 야릇한 소리를 냈던 사람 치곤 굉장히 청순해 보이는 인상이라 영 머릿속에서 두 모습이 맞물리지 않았다.

         

         

       ‘사람 낯 뜨겁게 하네….’

         

         

       애초에 고질적인 것도 아니고 일부러 그런 거잖아.

       

       옷 매무새를 다듬은 에이첼은 한 번 더 집무실에 방음 결계를 쳤다. 만일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며.

         

       이후, 에이첼은 벽면에 있는 화이트클락 가문의 상징에 다가갔다.

         

       거기서 백룡의 눈, 앞발, 날개, 다시 눈 순서로 꾹꾹 누르자 갑자기 덜컥, 거리며 가문의 상징 마크가 문처럼 열렸다.

         

         

       “가시죠. 이쪽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참고로 다른 루트도 있고요. …왜 그러시죠?”

        “아니, 그냥. 아무것도 아닙니다.”

         

         

       요즘 비밀 통로 같은 걸 자주 보는 기분이야.

         

       우리는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통로는 지하실로 이어져 있었다.

         

       벽면에 은은한 불빛을 발하는 램프가 나열되어 있어서 내부는 어둡진 않았다.

         

         

       “여기입니다.”

         

         

       비밀 지하실 입구.

         

       에이첼이 문을 열자 호화로운 원탁 회의실이 내 눈에 들어왔다. 어스름한 내부. 오히려 그 탓에 각 자리에 앉아있는 4가지의 형상이 더욱 또렷하게 보였다.

         

       모두 각 원소로 이루어진 형상이었다. 불과 물, 바람, 번개. 4명의 원왕이 자기 분신을 이곳에 보낸 것이었다. 그럴 수 있는 기반이 이 회의실에 마련되어 있을 터.

         

       저마다 원소 분신이라 상태창은 뜨지 않았다.

         

         

       ‘…응?’

         

         

       어째선지 기둥 뒤에서 상태창이 떴다.

         

       풍제 에린 캠벨.

         

       쟤 왜 기둥 뒤에 숨어 있지? 레벨은 왜 1이라 뜨고?

         

         

       “지고하신 원왕님들을 뵙습니다.”

         

         

       에이첼은 풍제가 기둥 뒤에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어서 오세요, 에이첼. 그리고… 드디어 조용한 곳에서 뵙네요, 빙제님. 그땐 느긋하게 대화할 분위기가 아니었으니까요.]

         

         

       쉴 새 없이 흐르는 수류가 여인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도제 세이렌 실리비안이었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는 고아했으며,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나는 눈치껏 비어 있는 자리 중 한 곳에 앉았다.

         

       건너편에는 연녹빛 바람이 이루어낸 꼬마애의 형상이 보였다. 풍제 에린 캠벨의 것이었다. 본체는 기둥 뒤에 있었지만, 모습을 숨긴 이유가 있을 테니 일부러 말을 꺼내진 않았다.

         

         

       “지금도 느긋한 건 아니야. 왜 불렀어?”

       [빙제여, 맹약은 맺었는가?]

       

       

       이글거리는 화염이 수염 난 마법사의 형상을 이루었다. 노년의 남성, 염제 안데르센 베르산도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염제는 내 뒤에 있는 에이첼과 시선을 교환했다. 대충 에이첼에게서 내 말이 맞다는 사인을 받았겠지.

       

       염제 안데르센은 기다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하는 듯했다. 그 수염조차 화염이었기에 불씨가 약하게 튀기며 공기 중에 사라지길 반복했다.

       

        

       [와줘서 고맙군. 자네를 부른 건 세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네.]

         

       

       염제 안데르센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첫째, 이곳에 관한 이야기일세. 이 나라 제르베르가 대륙을 평정하고 황국으로 불리게 되는 데 많은 피가 흘렀지. 어느 날, 황국을 위해 싸워왔던 대마법사들은 피와 시체로 일으킨 국가의 부흥에 회의감을 느끼고 말았네. 전쟁은 많은 생각을 들게 만드니 말일세.]

         

         

       알고 있는 역사 이야기였다.

         

         

       [끝내 그들은 황국을 떠나 세력을 구축하고, 각자의 나라를 건국했지. 그들이 태초의 원왕이란 건 알고 있을걸세.]

         

         

       제르베르가 황국이 되었던 게 우선이고, 태초의 원왕들이 나라를 세운 건 그 이후의 이야기였다.

         

         

       [황국은 불만스러워했고 갈등도 비일비재했지만, 독자적인 뜻을 갖고 자기만의 길을 걷게 된 태초의 원왕들을 통제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네. 더는 불필요한 피를 원치 않았던 선대 원왕들은 황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로 했지. 황국 또한 원왕의 존재를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그 제안을 수락했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지.]

         

         

       이후론 내가 몰랐던 이야기가 나왔다.

         

         

       [원왕들이 뿔뿔이 흩어지다 보니, 세계를 위협하는 문제가 발생했을 땐 서로가 어찌할지 고민이 든 것이지. 결국, 선대 원왕들은 그들끼리 암암리에 모여 회의를 진행하기로 했네. 우리가 정기적으로 한 자리에 모인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이 세계에 큰 파장이 있을 테니 말일세.]

       “그게 이 자리가 생긴 이유란 거지?”

       

       

       염제 안데르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차례의 시행착오를 겪긴 했지만, 지금은 보다시피 정착된 상태이네.]

         

         

       원왕들끼리 작당 모의하는 게 처음부터 있었던 일이었나.

         

       이제까지 겪어온 시행착오는 죄다 살벌했겠지. 무려 각 원소 속성의 정점들이 뭉치게 된 거니까.

         

         

       [우리는 특이사항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3년마다 정기적으로 회의를 열고 있네. 때때로 세계의 섭리를 위협하는 것들을 막아 내고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서지.]

         

         

       마치 자유방임주의 경제 체제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수정자본주의를 도입했다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강한 힘을 가졌어도 자연이 흘러가는 대로 놔두는 편이 장기적으론 합리적인 판단이다. 그러나 섭리를 거슬러 세계를 위협하는 것들은 예외다. 그런 문제가 발생하면 원왕들은 간섭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한 것.

         

       원왕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합리적인 판단을 하고 힘을 합치는 게 원왕 회의의 취지인 것 같았다.

         

         

       [그래서 차기 빙제인 그대를 이 자리에 초청한걸세.]

         

         

       반강제적이네.

         

       원왕 회의는 좋은 뜻으로만 해석할 수 없다.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원왕은 결국 다른 원왕들의 경계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말 터.

         

       각 원소 속성의 정점인 원왕은 염제 안데르센의 말처럼 통제하기 어려운 존재이니. 원왕 회의는 서로가 서로의 횡포를 견제하기에 좋은 구조였다.

         

         

       “멤버가 되라는 말이구나.”

         

         

       나는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이들을 신뢰할 순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악신에 대항해 좋은 전력을 가능한 한 포섭해야 하는 처지. 원왕을 전력으로 삼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터.

         

       원왕 회의는 이용 가치가 굉장히 높았다.

         

         

       “…나도 그 뜻엔 동의해.”

       [어쩜, 상식적인 사람이라 다행이네요!]

         

         

       도제 세이렌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어째선지 두 뺨을 가리고 날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숨소리가 끈적했다.

         

         

       [하아, 볼 수록 반반하기까지….]

       “……?”

       [‘우리’ 빙제님은 혹시 연상에 관심이 있으실까요?]

         

         

       이 맥락 없는 작업 걸기는 뭐냐?

       

       

       [쓸데없는 잡담은 삼가라, 도제.]

         

         

       자색 번개 마력이 치지직, 소리를 내며 성인 남성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그가 도제 세이렌을 다그쳤다.

         

       등받이에 기대고 팔짱을 낀 모습. 두말할 것 없이 번개의 형상은 뇌제 자울 드래고니악의 분신이었다.

         

         

       [자울 씨, 저도 아직 순수한 사랑에 갈증을 느끼고 마는 시기랍니다? 빙제님처럼 곱고 선하신 분께 마음이 가고 마는 건 불가항력이지요.]

       [언제 폐경했는지 기억도 안 나면서. 변태 성욕은 슬슬 거두는 편이 좋아.]

       [그 입 다무시죠, 캠벨?]

         

         

       풍제 에린 캠벨의 담담하고도 날카로운 지적에 도제 세이렌의 목소리에 날이 서렸다.

         

       풍제의 본체는 기둥 뒤에 있었지만, 말하는 주체는 자리에 앉아 있는 연녹빛 바람 분신이었다.

         

         

       [나잇값 좀 했으면 좋겠네, 소아 성애자.]

       [어머, 지금 사람 놀리나요?]

         

         

       풍제의 분신을 웃으면서 노려보는 도제. 물의 형상임에도 이마에 십자 핏줄이 돋아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반면에 풍제의 분신은 별 관심 없다는 태도였다.

         

         

       ‘얘네, 뭔가 되게 인간적이네.’

       

        

       무작정 엄숙한 건 아니구나. 도제 세이렌 덕분이겠지. 긴장을 풀어주니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그나저나, 풍제 덕분에 이 자리에 있는 원왕 모두 나이가 장난 아니게 많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풍제의 말을 해석하자면, 도제는 손주 뻘보다 더한 나이 차이가 나는 내게 자기 성욕을 들이민 꼴이었다.

       

       

       “…….”

       

         

       …뭐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상당히 불건전하게 느껴지는데?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1. 곧 2학년 2학기 파트입니다

    2. 내일 예비군..!

    3. 아스칼론 님 5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막판에 빡세게 적고 왔습니다 좀 더 적었으면 좋았을 텐데 능력이 못 미쳐서 오히려 죄송할 따름입니다..!
    Coastral 님 매일 신경써서 꾸준한 후원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유일하게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이브는 이번 주 내로 다시 나온다는 것 정도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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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cademy’s Weakest Became A Demon-Limited Hunter

The Academy’s Weakest Became A Demon-Limited Hunter

AWBDLH, 아카데미 최약체는 마족 한정 먼치킨이 되었다
Score 8.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I possessed the weakest character in my favorite game’s Hell Mode. I want to survive, but the way the main character is being controlled is atrocious. It can’t be helped. I have to stop the bad ending my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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