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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67

        

         에린 스컬리, 화사한 백금발과는 대비되게 고혹적이게 짙은 붉은 계통을 띤 눈과 입가의 화장이 인상적인 여인이자.

         

         간판 아나운서라 말하면 듣기 좋지만, 달리 현실적으로 표현하자면 여기 메모리얼 타임즈의 대표 나팔수인 셈이다.

         

         때로는 ‘고위 관계자들은 스스로의 죄를 외면하지 말라!’ 같은 위험한 대사를 외치고, 또 바로 다음 속보에서는 ‘기업의 사회적 헌신을 너무 저평가하는 몰상식한 대중이 많다.’며 한탄을 금치 못하는… 네오 헤이븐의 아침을 여는 미녀 아나운서.

         

         살짝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고, 가끔은 누구나 안에 담고 있던 울분을 대신 토해내 주며, 내려온 대본을 마치 자신의 사견인 것처럼 감정을 실어서 설파할 줄 아는.

         빠와 까를 모두 미치게 만드는 그녀는 당장 현실 뉴스는 당연하고, 원래 게임에서도 자주 구경할 수 있던 캐릭터였다.

         

         …물론 티비와 라디오 매체에서 등장하는 만큼 직접 상호작용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하여간 꽤 익숙하나 -내 눈에는 대부분의 원작 인물들이 다 그렇지만- 동시에 배경처럼 여기저기서 항상 보이던 게 에린과 그녀의 나레이션이라 여태 화면에 비춰지는 모습 외에는 정말 잘 모르는 상대였기에.

         

         뭐하러 자리를 비우냐느니, 자기는 잠깐 여기 대기실에 있는 장비만 빌려 쓰고 갈 거니까 그냥 말동무나 하자고 할 때는 조금 걱정했는데….

         

         

         “그래서, 미용 모델로 섭외 받아서 촬영하러 온 거라고? 그거 가볍게 들리는 거에 비해 거물이 엮였다고 알고 있는데 수완이 좋네. …칫, 역시 젊음의 매력이라는 걸 이길 방법이 없나?”

         “모델 아가씨! 잠깐 손 좀 잡아봐도 될까요? 피부도 너무 고우시고… 그 중에서도 볼 터치가 얼마나 완벽하게 되셨는지 거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어서…!”

         

         “만지는 거야 상관은 없지만…… 왜 그헌 쪼그로 애기가 티는지 모흐겠는데여!?”

         

         고압적이고 도도한 이미지를 그린 건 과한 선입견이었나?

         아무래도 화면 너머에서는 독살스럽고 기 센 여자처럼 보였던지라 함부로 자극하고 싶지 않았던 건데, 막상 말을 섞어보니 꽤나 능글맞고 유들유들한 성격이라는 게 확 느껴졌다.

         

         이쪽 또한 담당자한테 안내받아 일하러 온 사람이라는 걸 알자마자 급격하게 줄어든 거리감과 허물없는 태도가 영 적응하기 힘든데요.

         

         일단 비서인 베서니 양께서는 손을 좀 잡아 보겠다고 해서 허락했더니 다짜고짜 볼을 만지작거리는 건 참아주었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뭐하는 건데 진짜.

         전문가는 한 번 필요하다 생각한 스킨십을 망설이지 않는다 뭐 그런 건가?

         

         “꺄아악! 에린 언니! 아나스타샤 모델님 볼이 너무 탱탱하고 말랑말랑해요!! 대체 피부도 아닌 것 같은데 대박, 어떡해! 그리고 몸에서 엄청 달콤한 향기가 나는데… 우리 아나운서님도 이 향수로 바꿔드려야 할지도!”

         

         “흐응…? …어머나, 확실히. 꼬마 아가씨, 향수랑 블러셔(Blusher; 피부 색조 화장품) 어디 걸로 쓰는지 좀 알려 줄래? 너무 편해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로 곤란하지만, 나도 평상시엔 이런 은은한 걸로 톤을 낮추고 다닐까 봐.”

         

         “…아흐허또 안 흐는데여.”

         

         한창 작동 중인 미용 기계에 머리가 붙잡힌 상태라 차마 얼굴을 들이밀지 못한 에린은 대신 내 손목을 잡아채 입가로 가져가 숨을 들이쉬었다.

         

         맛을 음미하듯 스르륵 감겨졌다 떠지는 그녀의 눈동자나 피부에 얽혀드는 부드러운 손가락의 감촉이 굉장히 농염하고 오싹해서 잠깐 정신이 가출했다가 돌아왔고.

         

         거기에 비서 씨는 남의 볼따구를 무슨 떡 주무르듯이 자꾸 만져서 발음이 질질 샌다.

         아니, 터치한 강도만 설명하자면 숫제 스트레스 볼 가지고 놀듯이 찔러댔다는 게 맞겠다. 떡도 그렇게 뭉개시면 못 버티고 터져요 쓰읍.

         

         하여간 별로 앉고 싶지 않았던 거울 앞 연예인석에, 통성명한 그녀들에게 붙잡힌 채로 이끌려서 반강제로 착석 당한 이후 계속 이 상태가 되시겠다.

         

         그간 겪어볼 기회가 없던 걸즈 토크? 아니면 업무 중 숨돌리기를 위한 알맞은 제물로 바쳐졌다고 해야 맞나?

         

         헤어 스타일링 기계가 있는 대기실이 여기 이외에는 모두 사용 중이었다며 쳐들어온 입장에서, 나와의 조우는 생방송 들어가기 전에 잠깐 심심풀이 삼아 어울리기엔 딱 좋은 우연이었을지도.

         

         “뭐어? 아예 화장을 안 하고 왔다고?? 뭐니 얘는! 안 되겠다. 베서니, 이 아가씨 아이 라인이라도 좀 따주던가 하렴. 홀로그램 촬영이라고 멋부리지 말라는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아무리 데이터 정리하는 사람이 보정해준다 쳐도 최소한의 준비는 알아서 해 가야지!”

         

         “어… 더기 씨는 괜찮다고 하셨는데. 일단은 그게 업계 예의일까요…?”

         

         “암묵적 협의! 유명인사라면… 특히나 모델이라면 더더욱 언제 어디서나 항상 촬영당할 것에 대비해서 빛나고 있는 게 기본 아니겠어? 공중파 방송을 탈 정도면 당연히 각오해야 하는 부분이란다.”

         

         ……그게 완전 처음이라서 물어본 건데요 저는.

         일하면서 겪어보지 않았냐거나, 매니저한테 들은 게 없냐 물으셔도 오늘이 데뷔 겸 은퇴일이라 별생각이 없습니다. 예.

         

         털털하고 실용적인 취미만 있던 헬레나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기세로 다가오고, 또 수다를 떠는 게 익숙한 것과 별개로.

         다방면으로 이루어지는 사생활 침해에 나름대로 이골이 났는지, 그녀는 말도 안 되는 프로 정신을 강조해왔지만 다행이도(?) 나는 큰 감흥이 없었다.

         

         댁은 그래도 쫓아다니는 게 팬이나 파파라치 아니야. 난 그냥 얘기 나눈 사람을 멱살 잡아서 어둠속으로 끌고 사라지는 전문 스토커가 딱 붙어 있다니까?

         

         …지금은 정확한 위치를 모르겠지만. 그게 더 불안하지만!

         

         게다가 내 매니저는… 바보 깡통이고.

         제로, 너 임마! 가만있지 말고, 여자들의 호의를 무례하지 않게 거절하는 법 같은 것 좀 검색해봐! 아무 때나 무력을 행사하지 말랬다고 그냥 내가 반죽 당하는 걸 구경하면 어떡해!

         

         – …전염성이 강하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지병이 있으시니 이만 뒤로 물러나달라고 요청할까요? –

         

         “…….”

         

         야, 그렇다고 누굴 격리해야 할 중환자로 포장하랬냐. 전염병 보유자면 진작 입구 메디컬 체크에서 컷 당했겠지 어떻게 안에 있어. 어휴….

         

         “자자, 아나스타샤 모델님! 잠시만 정면 거울 쪽으로 향해주세요. 눈은 그렇게 살짝 우수에 젖은 듯이 감아 주시면 되고….”

         “그 표현이 아까부터 좀…! 으, ……예이.”

         

         영락없이 ‘겨우 공중파 광고에 진출했으면서 보호자도 없이 경호 드로이드만 잔뜩 끌고 온 이상하고 얼빠진 신입 모델 겸 업계 후배’ 취급을 받는 건 이제 포기했다.

         

         애당초 에린과 베서니가 온 이유가 녹화 들어가기 전에 흐트러진 헤어 스타일을 고치기 위함이었으니, 아마 저 고문 기계처럼 생긴 게 아나운서 특유의 그 올린 가르마 머리를 똑바로 세팅해주면 곧장 떠나겠지 뭐.

         

         그때까지만 참자. 인내하면 되는 거다.

         도와주는 사람의 성의가 무색하게 견딘다는 표현을 쓰면 더럽게 실례인 건 알지만 아무튼.

         

         “그래~ 그래♪ 젊다고 함부로 과신할 게 아니라, 이 언니처럼 철저하게 생활 패턴부터 관리해야 한단다? 노화 유전자도 미리미리 검사해서 파악해 뒀다가 억제해야 좋고, 매니지먼트 회사가 너무 무심한 것 같으면 다른 곳도 알아보고.”

         

         꼼짝없이 잡혀서 관리 ‘당하는’ 내 모습이 그제야 만족스러운지, 빙그레 웃어 보인 에린 아나운서는 다시금 자기 손톱 관리하는데 집중하셨다.

         

         덧붙여서 잡티가 전혀 없으니까 그냥 다른 부분부터 ‘좋을 대로’ 손대겠다는 매니저 씨의 말에는 무심히 마음을 비운 채 고개를 끄덕였고. 부탁인데 뭐던 그냥 안 아프게만 해주십쇼. 네.

         

         눈꼬리 부근을 더 진하게 칠해서 성숙한 매력을 더하느니…

         입술은 약간 있는듯 없는듯, 옅게 립스틱이 묻어나는 느낌이 들게 발라 주느니….

         

         사락, 사라락…. 톡, 톡.

         

         핸드백에서 무슨 손 떨림을 보정해주는 전자동 장갑까지 꺼내서 장착한 그녀가 본격적으로 남의 얼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걸 감내하며 시선을 슬쩍 돌렸다.

         

         방향은 당연히 에린 스컬리 쪽으로.

         

         왜냐고? 그건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되려나.

         

         방송에서는 열정적이고 고압적인 면모가 강한 아나운서가.

         네오 헤이븐 뉴스 속보! 라 하면 자동으로 따라 연상되는 얼굴 마담인 그녀가.

         

         실제론 묘하게 덤벙대는 매니저와도 알콩달콩 잘 지내고, 관련 없는 신참 모델한테도 관심을 줄 정도로 둥근 성격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생겼다 할까.

         

         내가 아까 에린 스컬리라는 여성은 메모리얼 타임즈 방송국의 대표 나팔수라 하지 않았나?

         

         어떻게 보는 시각을 달리하면, 단순한 아나운서라기 보단 일종의 여론 호도糊塗를 위한 배우로서. 자신이 아닌 모습을 세상 만천하에 연기하는 에린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뭔가… 귀엽게 봐주는 것 같긴 해도 냅다 면전에 던질만한 주제는 아니네, 이건.’

         

         파라다이스의 아론도, 엘리시움 스카우터 마르티나도, 그리고 의중을 알 수 없던 우리 한국인 친구도.

         각자 내게서 다른 면모를 보고 다른 결론을 내렸다는 건 안다.

         

         누가 글렀거나 잘못되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단지… 나는 주어진 범위 내에서 그냥 최선을 다해 행동한 것뿐인데.

         

         끊임없이 타인의 평가나 시선에 너무 극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게 거슬리고, 또 한편으로 조금 무서워서. 엇비슷한 고충을 겪는 이는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했다는 이야기다.

         

         아는 사람에게 자꾸만 계획적으로 접근하게 되는 게 양심에 켕긴다던가, 여기서 살아가는 이상 어쩔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나, 벌려 놓는 교우 관계가 점점 갈수록 넓어져서 일일이 조심하기도 힘들다던가.

         

         최근 계속 떠오르는 나름의 고민에 대해.

         엄청난 수의 대중에게 스크립트 된 이미지를 판매하는 게 생업인 그녀라면, 전문가로서 어떤 확고한 의견이나 신념을 가지고 종사하고 있다 믿어볼만 하지 않겠나.

         

         그녀가 시시콜콜한 마인드셋까지 공유해줄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번 물어보는 것쯤은 얼마든지 가능하리라.

         

         ……상황에 어색하지 않게 약간은 포장을 거쳐서.

         

         “저기, 에린 씨…? 아닌가, 아나운서 선배님??”

         “응? 이제 와서 낯간지럽게 선배는 무슨. 왜 그래? 모델 꼬마 아가씨.”

         

         손톱을 후~ 불어서 모양새를 한 번, 조명 아래에 비추는 걸로 매니큐어도 잘 붙어있는지 두 번 체크한 그녀가 나한테 주의를 돌리자마자 바로 질문을 던졌다.

         

         어디까지나 갑자기 떠올라서, 별다른 의미없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라는 듯이 자연스럽게.

         

         “방송에서 보던 것보다 그 훨씬… “실제론 맥아리가 없다?” …그렇게 대놓고 미리 말해 버리시면 제가 너무 무안하긴 한데! 아무튼지간에, 다른 데서 사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오해를 많이 할 것 같은데 피곤하진 않나요? 자꾸 오해받는 게 귀찮다거나.”

         

         이런. 적당한 단어를 골라서 미처 순화하기도 전에 선수를 채였다.

         

         역시 만나는 사람마다 비슷한 질문을 많이 받아봤나? 막 나가는 스타일의 연예인에게 평소엔 그래도 괜찮으신 편이네요~ 같은 소리를 하려 했으니 약간 욕처럼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한 박자 늦게나마.

         추가로 번지르르한 문장들을 붙이기도 전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초연하게 대답했으니.

         

         “멍청한 썅년이라 욕먹고, 광대라 놀림 좀 받아도 뭐 어때? 어차피 이게 내 일인데.”

         

         “…네?”

         

         그게 그렇게 쉽게 말할거리였나? 정말로?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 : 아무도 그렇게까진 말 안했는데!?

    원래는 담화를 끝내고 촬영하러 움직이는 부분까지 계획되어 있었는데, 지각하고도 전혀 근처조차 못 갔네요. 죄송합니다.
    쓰고 싶은 내용이 많으면 좀 템포를 끌어올려야 하는데 지금 정말 컨디션이 추가 휴재를 피하는 것만으로도 한계 같습니다.

    정신없는 와중에 지리멸렬한 문장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최대한 집중하며 쓰겠습니다.
    항상 재밌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Glacia샤샤 님의 365 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잠깐, 이거밖에 못 썼는데 1주년이 됐나요? 진짜네?? 으어어억? (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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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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