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267

     약 반 년 정도의 시간.

     

     나는 바르셀로나 총독으로서 일했고, 아스타시아는 오로솔 아카데미 3학년 학생으로 시간을 보냈다.

     아예 만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공식적으로는 거의 한 달, 혹은 두 달에 한 번 정도 만난 것으로 알려져있지만, 우리는 주에 한 번은 꼬박꼬박 만났다.

     

     비공식적, 그러니까 남들 모르게.

     

     이유?

     당연히, 암살 위협으로부터 아스타시아를 지키기 위해서 그랬다.

     오로솔 아카데미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장소였으나, 내가 공식적으로 오로솔 아카데미를 방문할 때는 나를 노린 테러가 종종 일어났다.

     신입생 중에도 암살자가 있었고, 비룡을 끌고 날아온 때와 같이 자폭테러를 일으키려고 한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 서로 떨어지기로 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비룡을 타고 날아가면 편도 1시간이면 충분히 닿을 거리라, 그다지 장거리라는 느낌은 없었다.

     “항상 마도구로 이야기를 나누고 그랬는데, 이렇게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하니까 또 감회가 새롭네요. 어때요?”

     “아름답습니다, 아스타시아.”

     “…드레스를 물어본 건 아닌데. 고마워요.”

     

     아스타시아가 가슴에 손을 올리며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고, 나는 바로 내 웃옷을 벗었다.

     “어?”

     “드레스는 직접 고른 겁니까?”

     “어, 네. 어머니께서 이걸 입으면 그레이가 좋아할 거라고 해서.”

     “좋기는 합니다만, 한편으로는 좀 그렇군요.”

     나는 아스타시아의 어깨에 내 외투를 걸친 다음, 피부가 드러나지 않게 잘 여몄다.

     “다른 이들이 아스타시아를 너무 뚫어지게 바라보면 어쩌나해서.”

     “그건 저도 마찬가지인데요? 왕국에 있는 영애들이 자꾸 총독을 노리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를 노리는 건 암살자들 말고는 없습니다만.”

     “암살 말고는 빌미를 주지 않아서 그런 거죠. 신입생이나 재학생, 심지어 교수들 중에도 그레이의 첩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제게도 문의를 하고 그런답니다?”

     “그런 미친 인간이 있습니까?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있으니까 하는 이야기죠.”

     아스타시아가 내 옷을 두 손으로 당겼다.

     소매를 당겨 잠시 얼굴을 묻고는, 키득거리며 창가를 향해 느긋하게 다가갔다.

     “그레이가 지브롤터기는 해도 제국으로 넘어가려는 모습을 보이니, 지브롤터의 성을 버리려고 하는 게 아니냐. 만일 그레이 바르셀로나 테르시안이 된다면, 어쩌면 첩을 들일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아주 그냥 자기들끼리 연극 시나리오를 만들어나가고 있군요.”

     “그런 셈이죠. 정작 저도 그렇지만, 당사자는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아스타시아가 창가에 놓여있던 마도구에 손을 올린다.

     딸칵, 하는 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마도구 위에 넓게 펼쳐진 동그란 판이 돌아가기 시작하고, 나팔처럼 뻗어나온 축음기에서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한 곡, 추실래요?”

     “연회를 위한 연습입니까?”

     “연회에서 춤을 추지는 않을 거예요. 약혼식은 연회랑은 조금 다르게 진행될 거니까.”

     나는 아스타시아의 손을 잡으며 그녀의 허리를 안았고, 아스타시아와 합을 맞춰 가볍게 스탭을 밟았다.

     “장소가 아카데미가 되든 황궁이 되든, 본격적으로 춤을 추는 건 진짜 약혼식이 열리는 날이니까.”

     “섭섭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섭섭하다뇨?”

     “약혼, 좀 더 일찍 할 수도 있었는데.”

     “흐음, 뭐, 얼마나 미루려고 하셨을까?”

     꾸욱.

     아스타시아가 구두로 가볍게 내 신발 앞을 눌렀다.

     아프지는 않지만, 나를 향해 싱긋 웃는 아스타시아의 표정에서 나는 그녀의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미루려고 한 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빨리 진행된 거라고요?”

     “어머나. 또 미루려고 하셨구나?”

     “그러니까, 미루려고 한 게….”

     “크림슨 후작님 말씀이 틀린 게 하나도 없네요. 그레이 지브롤터는 여자의 마음을 좀 모르는 편이라고.”

     “…….”

     아버지가 했던 말을 아스타시아에게도 전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설마 그걸 아스타시아가 걸고 넘어질 줄이야.

     “아스타시아. 설마 제가 약혼을 미뤘던 게 약혼이 싫다거나, 두렵다거나, 결혼을 늦게 해야 한다거나 하는 그런 것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우리, 이미 어느정도 다 알고 있잖아요. 그냥 심술이에요, 심술.”

     “…….”

     “약혼을 하면 결혼을 해야 하고, 결혼을 하면 바로…다음 단계로 이어지게 되죠.”

     아스타시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이.”

     출산.

     “합스베르크 폰 테르시안 황제께서는 저와 당신의 아이를 바라세요.”

     “알고 있습니다.”

     “그거 아시나요? 제국에서 최근에 법 하나가 통과되었는데, 17세 이상의 미성년자 남녀도 법적 보호자의 동의가 있다면 결혼과 출산을 할 수 있다는 법이 통과된 거.”

     “이제와서 새삼, 이라는 느낌이군요.”

     “지금이라도 빨리 하라는 거죠.”

     아스타시아가 쓰게 웃으며 내 품에 안긴다.

     “그레이는 어때요?”

     “아스타시아만 괜찮다면, 저도 빨리 낳고 싶습니다.”

     “그런가요. 하지만, 실제로는?”

     “…아스타시아의 의향에 따라.”

     “그렇다면.”

     아스타시아가 걸음을 멈춘다.

     음악이 뚝 멈추고, 아스타시아는 나와 손을 잡은 채 표정없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다.

     “그레이는 만일 저와 낳은 아이를 합스베르크 폰 테르시안이 원한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죽일 겁니다.”

     “누구를?”

     “합스베르크 폰 테르시안을.”

     나는 아스타시아에게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얼굴을 맞대었다.

     “언제나 저는 당신에게는 진심입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죠.”

     “그레이….”

     “아이가, 합스베르크의 ‘먹이’가 될까 두려운 거죠?”

     “…….”

     아스타시아는 말하지 않는다.

     차마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것조차 역겹고 불쾌하다는듯 눈이 감기고 파르르 떨리지만,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하지 않는다.

     “합스베르크 황제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죠. 자신이 강해지기 위해서는 제 핏줄도 먹어치울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레이.”

     “먹어치운다. 이게 그냥 단순히 그가 가진 재산, 힘, 마력 등을 먹어치운다는 걸로 끝나지 않죠. 테르시안 제국의 기원이 흡혈귀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합스베르크 폰 테르시안은 인간의 몸이지만 흡혈귀의 방식으로 그 힘을 키워왔습니다.”

     형제자매가 죽고 난 뒤, 그 시신은 어디로 갔을까. 

     수많은 자식들 중에서 죽어버린 아이들은 전부 어디로 갔을까.

     “아이들은….”

     “그레이.”

     아스타시아가 내 팔을 잡는다.

     옷이 구겨질정도로 강하게.

     “합스베르크 폰 테르시안은…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잔인하고 위험한 사람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그레이. 농담하는 게 아니라….”

     “아마도 아스타시아, 당신이 어렸을 때부터 봐온 합스베르크라는 인간보다도, 제가 어느정도 더 잘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니, 무조건이죠.”

     나는 아스타시아를 품에 안고 그 등을 토닥였다.

     “당신이 알고 있는 건 제가 다 알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황제가 제 자식의 피를 마시는 걸로 자신의 힘을 늘려왔다는 것. 마수라고 불리는 것들의 장기도 마다하지 않고 힘이 된다 싶은 건 전부 다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것.”

     크라켄을 씹어먹든, 아니면 엘프를 죽여 그 피로 목욕을 하든.

     혹은 폐기된 번호와 그림자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죽은 아이들로부터 피를 뽑아내고 그 장기를 이용하든.

     “그런 존재인 걸 알면서도 합스베르크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건, 전부 다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잔학한 폭군이라고 하더라도, 그 행동 원리를 이해하고 분석하여 이쪽에서 이용할 수 있으면 나는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다.

     “아스타시아, 당신을 지킬 수만 있다면 저는 악마와도 거래를 할 겁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렇기에…저는 황손녀에서 황녀로서, 합스베르크 황제를 ‘아버지’로서 대해왔죠. 당신의 짝이 되어야, 합스베르크 황제가 노스트럼을, 지브롤터를, 당신을 죽이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할테니까.”

     우리는 공범이다.

     합스베르크의 잔학함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 합스베르크를 이용하여 지금까지 살아왔다.

     “환멸하셨나요?”

     “아니요. 오히려 반갑습니다.”

     “반갑다고요?”

     “이렇게 당신이 오랫동안 앓고 있던 고통을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저는 제가 당신에게 신뢰와 확신을 준다는 믿음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나는 아스타시아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저와 당신의 아이는 죽지 않을 것입니다.”

     결코, 죽게 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먹이가 되지도 않을 것이며.”

     아이가 모종의 사유로 죽었을 때, 죽은 이의 피를 뽑아내어 누군가의 마나로 쓰이게 하지 않을 것이다.

     “쓸모가 없다고 폐기되도록 하지도 않을 것이며.”

     어떤 특출난 재능을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강제로 흡혈귀가 된 다음 살해당하여 그 뼛가루만 남아 약물로 승화되지 않게 할 것이다.

     “완벽한 1등이 아니라고 버려지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며.”

     재능은 있으나 그 재능이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으뜸이 아닌 평범한 수재 정도일 때, 몸에 새겨진 번호가 지워지고 그저 한낱 장기말 정도로 쓰이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리고.

     “…….”

     아스타시아에게 말하는 것이 옳을지 모르겠지만, 아스타시아가 생각해내지 못한 또 하나의 가능성.

     “그저 합스베르크 가문이 원하는 ‘후대’가 나올 때까지, 무수히 많은 아이를 낳게 하는 그런 ‘공장’으로서의 삶을 살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

     “결코.”

     우리의 자식이 합스베르크의 눈에 차지 않더라도, 그 자식을 강제로 ‘교배’시켜서 또다른 재능있는 아이가 나오도록 만들지 않을 것이다.

     설령.

     그게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하는 교배가 아니라, ‘검증된 천재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 사이의 교배’라고 한다고 해도.

     그레이와, 아스타시아의 딸.

     그레이의 아들과, 아스타시아.

     황제의 사고는, 평범한 이들의 생각을 훌쩍 뛰어넘는다.

     “아스타시아.”

     “네.”

     “당신은, 저와 몇 명의 아이를 낳고 싶습니까?”

     “…솔직하게 이야기해도 되나요?”

     아스타시아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린다.

     “……낳고 싶지 않아요.”

     아스타시아가 아랫입술을 깨문다.

     “아이는 바라지만, 황제의 손자나 손녀로서 태어나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건, 수많은 ‘화이트’들과 같이 될까봐 그런 거죠?”

     “네.”

     도태되면 죽음.

     평범하면 첩자.

     수재라면 그림자.

     천재라면 화이트.

     그리고 천재 중에 가장 으뜸이라면, 아스타시아.

     “저는 저와 그레이의 자식이 태어난다면, 그저 평범하게 자라서 저희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귀족이 아니라도 좋으니까.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자유롭게. 태어나는 순간부터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도태된 자라고 살해당하고, 재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죽음을 짊어지고 살아가지 않게.”

     아스타시아는 그저, 자식이 자신과 같은 어둠을 겪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주실 수 있어요?”

     “물론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 하신 거 맞아요?”

     “약혼을 하고, 결혼을 하고, 부부가 되겠지만.”

     나는 아스타시아의 손을 잡은 다음,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맞췄다.

     “아이는 낳지 않을 겁니다. 당신의 뜻대로.”

     “…….”

     “남자에게 가혹한 처사라는 걸 당신도 알고 있겠죠. 피임이라는 건 쉬운 게 아니니까. 하지만 가능합니다. 저라면. 저 또한.”

     회귀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식이 도구로 태어나 인형으로 죽게 할 거라면,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게 할 겁니다.”

     피임약을 구매하거나 처방이라도 받는 순간, 황제가 바로 눈치채고 임신을 강요할 테니.

     “당신이 참아내는 것 이상으로, 저 또한 많이 참아내고 인내할 거니까요.”

     “…그레이.”

     “하지만 만약.”

     나는 아스타시아의 귀를 향해 얼굴을 묻었다.

     “황제가 죽으면, 그 때는 아이를 몇 명이나 낳고 싶습니까?”

     “……!”

     “제가 황제를 죽인다면, 그 때는 아이를 몇 명이나 낳아줄 건가요?”

     “그….”

     아스타시아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그렸다.

     8.

     “여덞 명?”

     “아뇨….”

     손가락이, 점차 옆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될 수 있는대로….”

     “……약속하죠. 그 날을 위해, 반드시 할 겁니다.”

     나는 아스타시아와 마주보며, 그녀의 턱을 손으로 가볍게 들었다.

     “황제를 죽이고, 당신이 걱정없이 아이를 낳게 하겠습니다. 우리의 아이를.”

     “……약속은, 여기에.”

     아스타시아가 까치발을 들며 내 목을 휘감았다.

     “약속, 하신 거예요?”

     “물론입니다, 나의…공주님. 그 약속은.”

     공주는 말했다.

     그레이 지브롤터 다음의 황제는 누가 좋을까.

     황제는 그 다음을 찾지 못한다면, 아들이나 딸을 제 부모와 엮어 새로운 황제감을 낳게 하겠다고.

     그렇기에, 나는 공주와 아이를 낳지 않았다.

     아이가 생기지 않는 척, 7년을 버티고 또 버텼다.

     황제가 나의 아버지를 처형하려고 하고, 나를 체포하여 공주에게 나의 아이를 임신할 것을 강요할 때까지.

     내가 온전히, 공주의 것이 되어 아이를 낳게 하기 위하여.

     공주는 자식이 어떻게 되든 나를 살리려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태어난 자식과 공주의 미래를 알았기에 결코 타협할 수 없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미 지키기로 하였기에.”

     그 어떤 어미도 자식의 죽음 앞에서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으며, 아스타시아는 아이를 잃게 된다면 무조건 자결할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아스타시아의 행복과 사랑을 위해서라면, 이 세상에서 단 한 명이 사라지면 된다.

     “그 약속, 반드시 지킬 것입니다.”

     황제를 죽인다.

     “설령 이 몸이, 스러진다고 하더라도.”

     처음부터, 그 생각 뿐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267화만에 밝혀진 충격적인 진☆실

    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이전부터 어느정도 눈치채신 분들도 계셨죠

    합스베르크 제국의 초대황제 합스베르크 폰 테르시안

    합스입니다.

    다음화 보기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