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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67

    원래도 비싼 크루즈였지만, 오브젝트가 점점 늘어나면서 더욱 비싸진 크루즈 스위트 룸.

    그 스위트 룸 발코니에 놓인 테이블과 의자에서 남자는 상쾌한 뱃바람을 맞으며 여유롭게 커피를 즐기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번진 미소에는 한때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이 어렴풋이 스쳐 지나갔다.

    ‘그저 여동생을 위한 고통스러운 여정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게 이렇게 풀릴 줄이야.’

    여동생의 흔적을 쫓기 위해 자기 몸을 혹사하듯이 지내왔던 ‘선택자’의 삶.

    그것이 이제는 많은 돈으로 돌아와서, 여동생과의 여행이라는 결실을 보고 있었다.

    지금 남자는 여동생의 소원처럼 세계를 전부 돌아보기 위한 여행의 시작점에 있었다.

    혼자서 쓸쓸하게 돌아다닐 줄 알았던 여행은 여동생의 부활과 함께 소란스럽고 행복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크루즈 스위트 룸에 마련된 폭신한 양탄자.

    아늑한 소파와 커다란 평면 TV.

    티크 원목으로 제작된 고급스러운 가구들.

    그 위를 비추는 은은한 조명.

    아마 보라 사신이 여동생을 살려내지 않았다면, 이런 것들을 전부 제대로 즐길 수 없었겠지.

    고개를 돌려서 선실 내부를 바라보면, 여동생과 보라 사신이 식탁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주 오래전의 기억 속에 있었던 그 모습 그대로의 여동생.

    시간을 뛰어넘은 그 모습은 너무나도 예전 모습 그대로라서, 지금도 눈을 감았다 뜨면 이 모든 것이 꿈일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여동생의 앞에는 안대를 쓴 보라 사신이 있었다.

    남자를 지키기 위해서 온몸이 녹슬었던 보라 사신은 어느새 상당히 회복한 상태였다.

    남은 상처는 딱 하나.

    한쪽 눈이 약간 녹슨 것처럼 붉은빛이 감도는 정도였다.

    그것을 확인한 보라 사신은 싱글벙글한 얼굴로 안대를 만들어서 한쪽 눈에 쓰고 다니는 중이었다.

    여동생은 보라 사신의 말랑한 볼을 콕콕 찌르면서 장난을 치고 있었다.

    원래부터 오브젝트를 신기하다고 좋아했던 여동생은 보라 사신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다.

    그래서 그런지, 여동생은 보라 사신을 자주 골려주곤 했다.

    볼을 콕콕 찌르던 여동생은 에스프레소 커피잔을 보라 사신에게 내밀었다.

    “자자, 이것도 마셔봐야지. 오빠랑 똑같은 커피야.”

    아니나 다를까, 여동생은 또 보라 사신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에스프레소가 담긴 작은 잔, 물론 보라 사신에게는 꽤 커다란 잔.

    보라 사신은 여동생이 안겨준 에스프레소 잔을 들고, 굉장히 고민하고 있었다.

    남자가 하는 행동을 따라 하려고 하는 보라 사신.

    그리고 달콤한 것을 좋아하고 쓴 것을 싫어하는 보라 사신.

    그 두 종류의 보라 사신이 저 작은 머리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것이 느껴졌다.

    보라 사신은 조그마한 혓바닥을 내밀어서 뜨거운 에스프레소를 할짝할짝.

    그리고 너무 써서 그런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혓바닥을 ‘베-‘하고 내밀었다.

    남자는 그 모습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별로 좋아하지 않는 각설탕을 하나 집어서 아작아작 씹어먹었다.

    그리고 보라 사신에게도 먹으라며 내밀어 주었다.

    그러자, 보라 사신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각설탕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런 보라 사신을 조용히 바라보던 남자는 여동생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면서 말했다.

    “너무 괴롭히지 마라.”

    그러자, 약간 불퉁한 목소리로 ‘네에’라고 말한 여동생은 TV 켜고 그 앞에 앉았다.

    [세상에는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난 곳들이 존재합니다. 바로 이곳, 자유도시 연합이 그 예입니다. 연합을 이루는 세 도시는 각각의 지배 가문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죠.]

    [하지만 그 자유로움의 이면에는 높은 범죄율과 취약한 치안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경찰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 법의 테두리 밖의 세상. 과연 이곳에서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TV에서는 다큐멘터리로 보이는 나레이션과 함께 중국에서 꽤 유명한 자유도시 연합을 비춰주고 있었다.

    번화한 길에서 조금만 넘어가도 보이는 어두운 골목길.

    그 어둠 속을 활보하는 사람들.

    마치 밤이 없는 것처럼 밝고 역동적인 밤거리.

    미국만큼이나 오브젝트 기술이 발전했다는 도시 연합이니만큼, 독특한 도시의 전경이었다.

    “자유도시 연합?”

    여동생은 TV를 보면서 중얼거리더니, 눈을 빛내며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오빠! 다음 목적지로는 중국 어때?”

    그러자 남자는 주먹으로 여동생의 머리를 콩하고 살짝 내리치며 말했다.

    “절대로 안 돼.”

    ***

    미니 사신 정원, 마시멜로 평야.

    뚜방뚜방.

    아무런 생각 없이 마시멜로 위를 걸어 다니니, 4족 보행 황금 사신들이 굉장히 많이 보였다.

    요즘 인기인 건가?

    황금 사신의 센스는 가끔 이해하기가 힘들 때가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런 걸 좋아하는 거지?’ 하는 감상이 절로 나오는 것들이랑 비교하면 4족 보행 정도는 괜찮은 편이긴 했다.

    세희 연구소에 비치된 모든 세탁기마다 황금 사신이 우글우글 들어가 있던 경우도 있었을 때가 제일 웃겼었는데.

    연구소 관리 인원들이 그 모습을 보고 엄청나게 당황하는 꼴이 조금 재미있었다.

    4족 보행 놀이라….

    황금 사신의 또 다른 기행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려는 순간, 갑자기 수상하게 느껴졌다.

    지식이 가득하면서 지혜로운 나의 뇌에서 보내오는 신호였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4족 보행 놀이는 이상한데?’

    그런 궁금증이 마구 샘솟아서 4족 보행 황금 사신들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하자, 몇몇 황금 사신들이 4발로 황급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저 뛰는 것만으로도 ‘으악, 도망쳐!’라고 외치는 기분이 드는 다급한 도주였다.

    도망가는 4족 보행 황금 사신이 대략 70% 정도, 내가 보는 것도 눈치 못 채고 어슬렁거리는 녀석이 대략 30% 정도였다.

    나는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4족 보행 황금 사신을 하나 들어 올려서 살펴보기 시작했다.

    통통한 뱃살을 가진 햇살을 닮은 황금색의 살찐 황금 사신.

    그렇게 계속 쳐다보니, 강력하게 씌워져 있던 환각이 걷히고 원래 모습이 드러났다.

    촉감이나 보이는 모습은 그대로였지만, 눈이 단추가 되어버렸다.

    ‘!’

    또 노란 사신이 만든 인형 옷이네.

    다들 4족 보행이 너무 능숙하다 싶었는데, 이런 비밀이 있었군.

    나는 내 손아귀에서 버둥거리는 4족 보행 황금 사신의 지퍼를 천천히 열었다. 

    ‘….’

    그러자 그 속에서 나온 것은 ‘앗! 들켰다!’라는 표정으로 헤실헤실 웃고 있는 황금 사신이었다.

    뭐야, 황금 사신이었네.

    하얀 아귀가 들어있을 줄 알았는데, 진짜로 황금 사신들이 4족 보행 놀이를 하는 거였다니.

    조금 아쉬웠다.

    아쉬운 마음에 4족 보행 놀이를 하던 황금 사신이랑 놀아주고 있었더니, 다른 미니 사신들도 귀찮을 정도로 달라붙기 시작했다.

    얘네는 왜 애착 인간을 안 만들고 귀찮게 구는 거야.

    사실 심심할 때마다 미니 사신들을 관찰하다가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미니 사신 중 약 30% 정도는 애착 인간이 없었다.

    신기한 점은 미니 사신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도 저 비율은 매번 비슷한 수준을 유지한다는 점이었다.

    왠지 개미 중의 일부는 일을 전혀 하지 않고 노는 개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떠오르는 현상이었다.

    ‘이런 개미 같은 녀석들!’

    내가 그렇게 의지를 내뿜으며, 황금 사신의 뱃살을 마구 주물러주었다.

    황금 사신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스킨쉽이 좋아서 그저 헤실헤실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가장 신기한 점은 ‘주황 사신’ 중에서 애착 인간을 가진 녀석이 없다는 점이었다.

    걔들은 머리도 좋고 착한데, 애착 인간은 왜 안 만드는 걸까? 

    이상하게 궁금증이 깊어지는 날이었다.

    ***

    세희 연구소 인근, 조그마한 원룸.

    포잉포잉.

    푸딩 사신은 그 조그마한 원룸의 식탁 위에서 통통 튀어 다니고 있었다.

    그때처럼 다시 이상한 목소리가 들릴까 봐 조금 무섭기는 했지만, 아직 그런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물론 하늘 저편을 향해 귀를 기울이면 조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오긴 했다.

    ‘엄마다!’

    ‘맛있는 푸딩!’

    ‘전설의 푸딩은 어딨는 걸까?’

    하지만 붉은 별의 목소리와는 달리, 통일되지 않고 왠지 포근한 느낌의 소리였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애착 인간이 다시 돌아오는 걸 기다리는 도중, 천천히 창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드르륵.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불길하게 울리며 천천히 창문 너머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복슬복슬한 털 뭉치.

    주황색 얼굴.

    장난기 가득한 표정.

    분명 ‘미니 사신 정원’ 소속의 주황 사신이라서 아군일 텐데.

    이상하게 불안한 기분이 들어서 푸딩 사신은 뒤로 천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커다란 양동이를 들고 있는 주황 사신은 푸딩 사신에게 다가오더니, 양동이를 쿵 하고 내려놓았다.

    그리고 주황 사신은 푸딩을 달라는 것처럼 푸딩 사신을 콕콕 찌르기 시작했다.

    푸딩을 조금 떼어내서 양동이 속에 철퍼덕.

    하지만 주황 사신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빤히 내려다보며,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그 잔혹한 착취는 양동이가 가득 찰 때까지 계속되었다.

    힝힝.

    이상하게 거부하면 하얀 아귀처럼 심한 짓을 당할 것 같은 느낌에, 푸딩 사신은 순순히 자신의 푸딩을 나눠줄 수밖에 없었다.

    ‘아귀 사신한테는 비밀이야.’

    그리고 그런 의지만을 남긴 채, 주황 사신은 떠나가 버렸다.

    ***

    주황 사신은 슬픈 얼굴로 구름 고기들에게 둘러싸인 채,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황금 사신들에게 치던 사기 행위가 발각되었기 때문이었다.

    푸딩 사신에게서 뜯어온 푸딩을 ‘전설의 푸딩’이라고 속이고 칭송받는 사기였다.

    아귀 사신이 애지중지하는 푸딩 사신의 푸딩이니만큼 그 푸딩을 먹어본 황금 사신은 없었으니, 성공 가능성이 높은 장난이었다.

    ‘예언자 동생!’

    ‘선지자 동생!’

    ‘전설의 푸딩!’

    주황 사신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칭송.

    그리고 몇몇 황금 사신들은 조각상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일명, 선지자 주황 사신 얼음 조각상!

    그리고 황금 사신들이 만든 ‘전설을 찾아낸 모험가를 위한 얼음 궁전’도 주황 사신의 것이 되었다.

    하지만 거짓말로 만들어 낸 칭송이라서 그랬던 걸까.

    설원의 왕을 노리던 주황 사신의 야망은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원인은 하나.

    어깨 위에 푸딩 사신을 얹은 무서운 표정의 아귀 사신이었다.

    푸딩 사신이 비밀을 누설해 버린 것이다!

    거짓말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거대한 조각상은 부서져 내렸고, 웅장한 궁전에서는 쫓겨났다.

    ‘푸딩으로써 맺은 원한, 푸딩으로써 풀어야 하리라.’

    약속을 어긴 푸딩 사신에게 복수를 다짐하며 도망친 주황 사신은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분간 연구소에 들어가기 힘들 테니, 주황 사신은 여행을 떠날 생각이었다.

    여행을 떠나는 수많은 미니 사신처럼 애착 인간을 찾을 생각은 없었지만, 이번 기회에 세희 연구소에서 멀리 떠나보고자 했다.

    목적지는 사람으로 북적이고, 드넓은 서쪽 대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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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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