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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68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

     “회의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는 왕좌가 있는 황금의 홀로 돌아왔고, 돌아오자마자 홀에 홀로 뒷짐을 진 채 선 합스베르크 황제와 만났다.

     “아스타시아는?”

     “방에서 쉬고 있습니다.”

     당신의 입에서 아스타시아를 언급할 수 있느냐, 라는 말은 하기 어렵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합스베르크 폰 테르시안은 자신으로부터 태어난 아이들을 잡아먹은 괴물일지언정, 아스타시아를 상대로는 그런 해코지를 하지 않았다.

     에르윈 황후의 핏줄이라서?

     아이페리아 인더스트리를 이용하기 위해서?

     미모나 능력이 다른 이들보다 월등히 출중해서?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그러다가 13살에 그레이 지브롤터라는 사람을 낚았기 때문일 터.

     처음에는 지브롤터의 핏줄이라는 것에 혹했을 것이며.

     내가 보여주는 ‘친제국주의적 행동’을 보며 또 혹했을 것이며.

     이전의 황제가 나에게서 본 면모를 지금의 황제도 보며, 그는 나를 통일제국 합스베르크의 차기 황제로 삼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 다음은?

     

     합스베르크 황제는 욕심이 많다.

     그렇기에 자신이 눈을 감기 전, 최소한 손자든 손녀든 ‘나 다음의 황제’에 대해서 황세자든 뭐든 확실하게 못을 박아두고 싶어할 터.

     “약혼식이 어디에서 치루어지든, 약혼 이후에 성인이 되고 나면 바로 결혼하겠군.”

     그렇기에, 합스베르크 황제는 아스타시아에게 출산을 강요했다.

     “결혼하면, 아이는 바로 가질 계획인가?”

     

     바로 지금처럼.

     “흠, 글쎄요.”

     거짓은.

     “급합니까?”

     통하지 않는다.

     “급하냐고? 그건 자네를 말하는 건가, 아니면 나를 말하는 건가?”

     “그야 황제 폐하겠죠. 그렇게 손자 손녀를 보고 싶으신 겁니까?”

     “그냥 손자 손녀가 아니라, 그레이와 아스타시아 사이에서 태어나는 손자 손녀를 말하는 거지.”

     “여자아이라면 예쁠 겁니다. 남자아이라면 잘생겼을 거고.”

     “음.”

     그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바로 낳을 건 아닙니다.”

     “왜?”

     “임신을 하면 몸조리를 해야 하고 어디 멀리 다니지 못할 테니, 임신하기 전에 최대한 왕국과 제국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여행을 하려고요.”

     “으음….”

     황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듯, 노골적으로 턱수염을 만지작거렸다.

     “그대의 부모는 아카데미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지브롤터에서 아이를 가진 것으로 알고 있네만.”

     “굳이 제가 태어난 과거까지는 알고 싶지 않습니다. 부모님께서 말씀해주신 적이 없기에.”

     “그런가?”

     “그리고 저는 아버지와는 다릅니다. 아버지는 지브롤터에 계속 묶여있어야 하는 처지였지만, 저는 아버지와 달리 전국을 떠돌아다닐 수 있는 위치 아니겠습니까? 마침 좋은 것도 생겼고.”

     “하하, 비행선을 타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려고?”

     “임신하기 전에는 괜찮겠죠. 임신하고 난 뒤에는 덜컹거리는 건 타고 다녔다가 위험할 수 있으니.”

     “극성이군.”

     “극성이죠.”

     아스타시아의 몸을 위해서라면, 황제를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장소는 정해졌네. 자네가 이전에 계획한대로, 오로솔 아카데미에서 12월 24일에 약혼식을 하는 걸로 합의를 봤지. 나리아 지오 노스트럼이 학생회장으로서 연회를 준비하며, 그 연회의 중심에서 두 사람이 약혼을 하게 될 것이야.”

     “지금 나리아 여왕은 다른 이들과 그 준비를 하고 있는 겁니까?”

     “합의서의 초안을 작성하는 중이네. 내가 양보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겠지. 자네를 황궁으로 데려와 약혼식을 한다면, 약혼이기는 하지만 모두에게 천명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니.”

     “지브롤터가 제국의 품에 들어왔다.”

     “정확해.”

     약혼 장소가 어디인가.

     당연히 정치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지브롤터가 노스트럼쪽이냐, 제국쪽이냐 가를 수 있으니까.

     “아 참. 하나, 부탁을 하고 싶은데.”

     “뭡니까?”

     “로마나 자작, 혹시 계속 쓸 생각인가? 따로 쓸 생각 없으면 내가 좀 쓰고 싶은데.”

     “애도를 표하죠. 헥스 자작, 그리고 황제께. 죄송하지만 헥스 자작을 놓아줄 생각은 없습니다. 제 정치적 숙부라서, 제가 쓸 겁니다.”

     “쯧.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럼 최소한 쓸만한 친구들이라도 줘야지?”

     “오로솔 아카데미에 있는 협곡 유학생들 데려다 쓰십시오. 최소한 학점으로 증명된 이들이니, 장학금이랑 이것저것 준다고 하면 제법 효과적일 겁니다.”

     “당장 총독부 하나를 관리할 즉시전력감이 필요했는데, 아쉽군.”

     총독부?

     지금 총독부라고 할 법한 곳은 오직 바르셀로나 뿐.

     “…저를 어디 다른 곳에 보낼 생각입니까?”

     “비행선 말이야, 선물일세.”

     “예?”

     “황금의 비행선은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을 위해 만든다고 했으니,자네를 위한 비행선도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나.”

     “…….”

     “아마 기감으로 눈치를 챘겠지만, 내가 타고 온 비행선에는 어떠한 첩보장치도 없다네. 오직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이른바 하늘을 날아다니는 별장인 셈이지.”

     “아주 그냥 아스타시아와 저보고 선을 넘으라고 하시는 군요.”

     “성인까지 앞으로 얼마 남지도 않았으니 말이야. 하하.”

     합스베르크 황제가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기대되는군. 남자아이가 태어날지, 아니면 여자아이가 태어날지.”

     “아직 아이만들기는 한 적도 없는데 벌써 손자인지 손녀인지 나누는 겁니까?”

     “그래. 이왕이면 차기 황제에 적합한지 아닌지 정도는 보고 눈을 감고 싶거든. 나의 뒤는 그레이 지브롤터가 이을 것이라고 안심하고 떠날 수 있지만, 그레이 지브롤터의 뒤는 누가 이을지 알고 가야 편하게 저승을 유람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외람된 말씀이지만, 이미 제 아이의 짝은 정해져있습니다.”

     “…나리아 여왕의 자녀를 말하는 거라면, 생각을 달리 해보라고 말하고 싶기는 한데.”

     황제는 영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아직 시간은 많지. 천천히 생각해보자고.”

     “예.”

     시간.

     황제가 말하길, 아버지를 뛰어넘을 것 같다고 예상한 시간이 고작 1년.

     변수가 생긴다면 그보다도 더 빨라지면 빨라졌지, 느려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걸 내가 먼저 따라잡으려고 한다면.

     ‘어떻게든 해야지.’

     

     방법은 있다.

     시도하지 않은 방법이기는 하지만, 차마 인간적으로 하기에는 조금 껄끄러웠던 방법이.

     지브롤터의 역사를 통째로 들이붓는 방법이 있기는 한데, 그건 정말이지 최후의 최후까지 가야만 할 수 있겠다 싶은 방법이라서.

     ‘설령 그렇게 한다고 해도, 황제를 넘어설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세 발 자국을 나아간다면, 황제는 다섯 여섯 발자국을 성큼성큼 나아가는 사람이다.

     설령 내가 편법으로 더 빠르게 강해졌다고 하더라도, 황제는 앞뒤를 살피며 그 쫓아오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앞으로 치고나갈 사람이다.

     물론.

     ‘그래도 아버지보다는 아직 약하지만.’

     아버지가 지금까지 서 있었던 게 사실이지만, 아버지도 마냥 계속 서있을 리는 없다.

     황제가 이번에 왕국에 와서 아버지를 본 만큼, 아버지도 분명 강해질-

     “…그러고보니.”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폐하. 크림슨 후작, 아버지는 어디로 갔는지 아십니까?”

     “……?”

     황제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대가 알고 있던 게 아니고?”

     “……? 회의장에 있던 게, 아니었습니까?”

     “골치아픈 건 모르가니아에서 알아서 하라면서, 장소가 정해지자마자 나갔었는데?”

     “……지브롤터로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텐데.”

     바깥.

     지브롤터의 깃발을 건 마도자동선은 왕성 광장에 그대로 있었다.

     어머니가 동생들과 함께 지브롤터 캐롤라인 성에 있으니 당장 보러가려고 했다면 마도자동선을 이끌고 갔을 것이며, 누아르를 보기 위해서 오로솔 아카데미로 갔을 리는 없으니-

     기척까지 지워가면서 가야할 곳이 있다면-

     “…….”

     어머니는 지브롤터에 있다.

     어머니가 없는 왕성.

     설마.

     * * *

     아무도 없는 복도.

     “…….”

     왕실의 수호기사 제복을 입은 크림슨 후작이 소리없이 복도를 걸으며, 어느 한 조용한 방의 문을 열었다.

     끼이익.

     문은 오랫동안 열리지 않은 것처럼, 낡은 경첩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소름이 돋았겠지만, 크림슨 후작은 아무렇지 않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왜냐하면, 그 문에는 마법적 봉인이 걸려있었으니까.

     본래라면 문이 열리지 않도록 결계가 펼쳐져 있었지만, 크림슨 후작은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마나를 흘리는 걸로 결계를 깨뜨렸다.

     

     왕궁에 있는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

     

     크림슨 후작은 문을 닫은 뒤, 방의 정중앙으로 들어왔다.

     방은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은 것처럼 을씨년스러웠으나, 어질러진 흔적이 일부 남아있었다.

     

     흐트러진 이불.

     넝마가 되고 벗겨진 걸로도 모자라 찢겨진 드레스.

     그리고 잘 보이지는 않지만, 바닥에 떨어진 금색의 기다란 머리카락.

     크림슨 후작이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서 은은하게 떠오른 마나는 방 전체로 퍼졌다.

     “지브롤터의 이름으로.”

     크림슨 후작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금으로 된 로켓이었고, 로켓의 위에는 단추가 여러 개 달려있었다.

     “[기억]을, 재현하라.”

     딸칵, 딸칵.

     크림슨 후작이 로켓을 누르자, 곧 크림슨 후작으로부터 흘러나온 붉은 마나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나는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냈고, 곧 그 형상은 인간이 인지할 수 없는 속도로 이동했다.

     노스트럼 왕국에서 마법사들이 범죄의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그 공간에 남아있는 마나의 ‘기억’을 읽어내는 마법.

     크림슨 후작의 마나에 의해 펼쳐지는 마법은 마치 시간을 가속하는 것처럼 방 안에 수십 명, 수백 명의 인원이 교차하듯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크림슨 후작의 마나가 가진 색깔 때문일까.

     아니면 마나의 기억으로 재현되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색정적이기 때문일까.

     방 안은 온통 붉은 색의 향연이었다.

     크림슨 후작은 그걸 전부 눈으로 훑으며, 어느 순간 손을 옆으로 뻗었다.

     덜커덩.

     방의 문이 열리는 듯한 소리.

     쓰러진 것 같은 한 명을 부축하듯 데려와, 강제로 침대에 던지는 듯한 붉은 인영.

     죽은 사람인지 아니면 저항할 수도 없는 건지 알 수 없는 이를 향해, 붉은 인영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얼굴을 향해 무언가를 뿌리는 듯한 시늉을 했다.

     마치 가루를 뿌리듯.

     “……하.”

     크림슨 후작이 옅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나도 속물은 속물이군.”

     사락.

     크림슨 후작이 손을 옆으로 크게 휘두르자, 곧 방 안에 가득했던 붉은 흔적이 전부 사그라들었다.

     방 안에 남은 것은 오직 고요함 뿐.

     그러나 문 너머에서 다급하게 들려오는 발걸음에 크림슨 후작은 천천히 창문을 향해 다가갔다.

     덜커덩!

     문이 열렸다.

     

     “헉, 허억, 허억…?”

     “황제가 왔는데도 눈 하나 비추지 않더니, 은밀한 놀이터가 열리자마자 달려오는군.”

     문 앞.

     “마법으로 달려온 건가? 어디 다른 곳에서 재미 좀 보다가?”

     붉은 눈동자가 흔들리는,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이 있었다.

     “너, 너…!”

     “드래곤의 영묘에서 기다리고 있었겠지만, 그런 건 딱히 관심없어서. 아. 설마 내가 이곳에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건가?”

     “크윽…!”

     크림슨 후작이 손을 옆으로 뻗은 순간.

     파ㅡㅡ앗!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의 몸이 금빛으로 물들더니, 곧 ‘팟’하며 사라졌다.

     “……쯧.”

     손 끝에서 퍼져나가는 붉은 오러를 거두며, 크림슨 후작은 가볍게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간만에, 운동 좀 하겠군.”

     들어올 때보다 훨씬 가벼운 발걸음으로, 크림슨 후작은 나지막한 미소를 지으며 오러를 검처럼 뽑았다.

     “먼저 가볼까.”

     구구구구.

     “왔나, 왕궁을 지키는 황금의 수호자들.”

     복도의 아래에서, 황금색의 액체가 슬라임처럼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슬라임은 곧 한 명의 사람과도 같은 모습을 갖췄고, 그 모습은 마치 노스트럼의 전설 속에 나오는 영웅 중 한 명과도 같은-

     서걱.

     붉은 궤적과 함께, 크림슨 후작은 황금의 슬라임을 스쳐지나갔다.

     촤르륵.

     황금으로 된 액체가 복도를 흥건히 적시며, 크림슨 후작은 창 밖을 바라봤다.

     “가히, 역사에 부끄럽기 짝이 없는 날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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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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