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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69

        

         “아이고오~ 이거 죄송합니다. 저희 개념 없는 직원이 어마어마한 실례를…! 게다가 일부러 신경까지 써 주시고… 그냥 눕혀 놓기만 해도 되니, 일부러 간병인을 남길 필요도 없었는데 말이죠. 더글라스 너 인마! 네가 재깍재깍 결재를 안 올리니까, 이런 교통사고가 나는 거 아냐!”

         

         “이번 게 막판에 파토 날지도 모르니 최대한 미루라 한 건…… “까드득.” …당연히 저입죠! 네에!! 죄송합니다 아나스타샤 모델님!! 아하하하—!!”

         

         “아뇨 아뇨, 저는 오히려 착하고 재밌으신 분들이었다 생각하는데요. 덕분에 이것저것 많이 배우기도 했고.”

         

         자리를 옮겨, 장소는 홀로그래픽 촬영실로 향하는 복도.

         

         실상 체격이나 보폭만 따진다면 성큼성큼 앞서 나간 그와의 거리가 벌어져야 하건만.

         정신없이 수다를 떠는 와중에도, 총총거리는 게 한계인 내 걸음걸이에 맞춰 움직인다는 고난이도 접대 스킬을 아무렇지 않게 구사하는 모건 국장에게 어색한 미소를 돌려주었다.

         

         아, 대기실에선 꼼짝없이 지루하게 기다리는 시간을 보낼 줄 알았는데. 에린 씨와 매니저 언니 덕분에 생각 외로 꽤 재밌었다.

         

         완전 방송국과 게임 네오 헤이븐의 비하인드 더 씬을 동시에 관람하는 기분이랄까, 매일 뉴스 데스크에서 발작하듯이 ‘하! 기업 새끼들은 각성하라!!’를 외치던 아나운서 선동꾼이 사석에서는 유쾌하고 사려 깊게 후배 챙기는 선배님일 줄 누가 알았겠나?

         

         덤으로 내가 멘탈적으로 조금 더 성숙해지고… 안정된다는 뜻밖의 소득도 얻었고.

         

         세상 그 어디보다도, 막말로 길에서 런치 박스 하나를 산다 쳐도 원산지부터 시작해서 재료까지 복잡하게 따져볼 게 많은 동네인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댁이 뭐 나 먹고 사는데 보태 준 거 있어!’ 같은 당찬 태도를 고집하다니.

         

         ……역시 장난이 아니구나. 업계 탑 급 프로라는 건.

         

         양지에서 일하는 정치용 선전 도구나 언론 나팔수가 제대로 된 인격자일 리가 없다는, 무심코 가지고 있던 선입견을 반성하게 되는 경험이었다.

         

         거 너무 못돼먹은 편견을 가지고 만났던 거 아니냐고? 내가 괜히 마주치자마자 대기실 밖에서 기다리려고 했겠어? 진짜 긍정적으로 엮이는 모습 자체가 상상이 안 가는 인물이었다니까 그러네.

         

         게임 플레이 내내 어디든 뉴스 틀어져 있는 장소라면 가리지 않고 배경 음악처럼 깔리던 에린 스컬리의 히스테릭한 목소리 때문에, CV(Character Dialogue; 인물 대화) 볼륨을 다른 항목보다 15는 낮춰서 설정했었다 하면 부연 설명이 좀 되겠나?

         

         ‘어라…? 혹시 그렇게 따지면, 그녀가 신나게 씹어대던 몰상식한 극성 안티 팬덤에 유저층 대부분이 포함될지도?’

         

         잠깐 고민하다가…… 붕붕!

         돌연의 기행에 모건 국장과 더글라스 MD가 이상하게 쳐다보거나 말거나, 고개를 마구 휘젓는 걸로 약간 불편한 진실에 도달하려던 의식을 현실에 되돌렸다.

         

         하여간 일정에 쫓긴 에린 씨는 궁금한 게 꽤 많아 보였지만 떠밀리듯 시청률 견인을 위해 뉴스 녹화장으로.

         

         제철 꽃게 마냥 입에서 하얀 거품을 부글거리며 -솔직히 이건 무조건 큰일이다 싶어서 순간 기겁했다!- 눈을 까뒤집고 장렬하게 기절한 베서니 매니저 언니는 1-A 대기실 소파에 제로 1호기와 같이 남겨둔 채로.

         

         얼른 촬영에 임하자며 마중 나온 이 두 남자와 함께 방송국 내부 통로를 가로지르고 있는 게 지금 현주소인데.  

         

         ……흠, 화사한 꽃밭에 있다가 순식간에 시커먼 남정네들에게 둘러싸이니 역체감이 심해서 별로 기분이 내키지 않는다 하면 너무 듣는 사람 골 때리는 언사일까?

         

         아니, 과한 스킨십이나 일일이 꺄악꺄악거리는 리액션은 분명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막상 환경이 이렇게 달라지니까 공기가 실제로 조금 텁텁해진 것 같단 말이지.

         

         “어디 속이 편찮으십니까? 에나마 전속의에 비할 바는 절대 아니겠지만 저희 쪽 메디컬 팀이라도 불러드릴까요?”

         

         “저는 전혀 괜찮으니 신경 안 써 주셔도……. 아.”

         

         아잇, 무심코 모건 국장의 과한 배려에 사양하려던 문장을 중간에 뚝 끊었다.

         

         또또또…! 이 아저씨는 방금 기어이 부하 직원 하나가 혼절하는 꼴을 똑똑히 봐 놓고도 자꾸 그러시네?

         

         짓궂은 농담도 처음 한두 번이나 웃어넘기지 도를 지나쳐서 선을 넘으면… 그냥 거슬리고 불쾌한 법이다. 신종 괴롭힘을 시도하는 게 아닌 이상 슬슬 적당히 하라고 확실히 못박아 두던가 해야지 원.

         

         “그… 말끝마다 에나마 에나마 붙이시는 것 좀 제발 그만해 주시면 안 될까요…? 처음에 모델 건에 관해서 얘기하실 때만 해도 제대로 퇴사자 취급해 주시더니 왜 오늘은, 보도국장씩이나 되시는 고위 공직자께서 유언비어 확산에 그렇게 적극적으로 앞장서시면 안 될 것 같은데.”

         

         “……….”

         

         싫어하는 기색을 분명히 하며 조심스럽게 지적하되, 괜히 긁는다는 느낌을 주면 곤란하니 어디까지나 주고받는 잡담의 연장선처럼 자연스럽게 웃음기를 담아.

         

         특급 아나운서의 말주변이 그새 옮았는지 툭툭 한마디씩 내뱉는 게 일상이던 나치고는 꽤 우아하게 표현했다 내심 자화자찬한 것도 잠시.

         

         적당히 놀리라는 의미를 꽉꽉 눌러 담은 부탁 겸 근황 토크가 건너가자마자 곧바로 묘한 눈초리가 이쪽에 되돌아왔다.

         

         차라리 일용직 모델이 친근히 대해주는 것도 모르고 건방지게 군다며 정색하거나, 재미없는 스타일이라며 혀를 차는 건 이해한다. 음, 그럴 수 있지.

         

         하지만 기색을 살피는 듯한, 주어진 정보의 진위 여부를 들여다보는 듯한 속내를 알 수 없는 반응. 이건 어떤 논리와 근거를 두고 산출된 건지 난 전혀 모르겠는 걸?

         

         일단 잘 이어지고 있던 대화의 끈이 내가 한마디 끼어들자마자 무참히 잘려 나간 것 같아서 더럽게 민망하긴 하다.

         

         문득 예전에 인터넷에서 읽은 서글픈 유머들이 떠올랐다.

         ‘친구들끼리 떠들고 있을 때 제가 입을 열면 유달리 어색한 침묵이 길어져요.’, ‘야야, 농담이잖아 농담 모르냐?’, ‘왜 갑자기 정색하고 그래~ 이럼 내가 뭐가 돼? 그냥 좀 웃어 짜식아.’ 등등.

         

         으윽, 머리가…. 나, 어째서 눈물이…!

         

         “자자, 이제 촬영 들어가야 하는데 그런 사소한 문제 가지고 얼굴 찌푸리시다간 아무리 모델님이 아리따우셔도 분위기가 안 삽니다? 우리 모건 보도국장님이야 원래 말투가 혹독하기로 유명하신 분이니까 사소한 거에 크게 개의치 마시죠!”

         

         “……뒤에선 그딴 소리가 나오고 있었나? 그것 참 자세히 좀 듣고 싶어지는구먼.”

         

         “힉….”

         

         어색하게나마 구도를 수습하는 더기 MD, 툴툴거리는 혼잣말로 차례를 넘기는 모건 국장의 마무리까지.

         

         방금 그건 누가 봐도 억지로 대화 주제를 피한 거지?

         

         조금 캐물어서 할 말이 궁해진다고 바로 피하는 건 어른스럽지 못한데… 그렇다고 내가 더 물고 늘어질 건덕지도 마땅치 않네. 쩝.

         

         ‘장난이 심한 성격’이라 퉁치고 넘어가기엔 뭔가 숨긴 배경이 있는 것 같긴 하다만, 여기서는 그냥 서로 좋게 좋게 넘어가는 게 최선인가.

         

         “뭐, 아무튼. 평소라면 부조정실에 계셔야 할 국장님이 녹화용 데이터 촬영하러 가는 길에도 따로 얼굴을 비치실 정도로 극진히 대접한다는 게 나쁜 일은 아니잖습니까?”

         

         “어… 그걸 그렇게 단숨에 비약해도 괜찮나요?”

         

         “비약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겁니다.”

         

         와중에 눈치가 보였는지, 고개를 숙여 슬쩍 속닥이는 걸로 보충 설명을 해주시는 더기 씨에게 일단은 대충 알았다는 태도로 납득하는 척만 했다.

         

         그러니까~ 나로선 그 이유를 알고 싶다는 거였지만! 일부러 알려준 것치고는 전혀 도움이 안 됐지만! 쓸데없이 중간에 낀 그를 갈궈봐야 뭐하겠어. 으휴.

         

         여하간 수상쩍은 인간의 동향을 신경 쓰느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얼마나 아래로 내려왔는지조차 이젠 잘 모르겠다.

         

         이 건물이 총 몇 층이었더라? 50층, 60층? 더군다나 네오 헤이븐의 기업 명의 건물들은 일종의 영토 역할도 겸하고 있어서 성처럼 수평 방향으로도 널찍한 기반에 짓는 게 보통이라 하나같이 미로가 따로 없으니까.

         

         길은 뭐… 여차하면 건물 안내도를 펼쳐 놓고 모험하듯이 쏘다녀도 되고, 지나간 통로는 제로가 알아서 외우고 있겠지.

         

         …짬처리 같은 지탄받을 행동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효율적인 업무 배분의 일환이라고 주장하겠다.

         

         – 현위치는 메모리얼 타임즈 27층 통칭 스튜디오 플로어입니다. 그리고 따로 떨어진 드로이드는 미스 베서니께서 의식을 되찾으시는 대로 이쪽에 합류하는 게 아닌, 단독으로 행동하면서 계속 해킹 작업을 수행하는 걸로 괜찮겠습니까? –

         

         ‘나한텐 너밖에 없다. 진짜로!’

         

         우선은 흐뭇하게 곁에 있는 0호기의 등허리 반응 장갑을 토닥여주었다.

         봐라,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딱 필요한 순간에 끼어들어서 내 양심의 가책을 덜어주는 완벽한 동료를!

         

         자기가 살아가는 데는 내 인정과 동력원만 있으면 된다는 둥 세상 낯간지러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녀석이니, 오늘도 이걸로 충분히 힘내 주리라 믿는다.

         

         이제 문제는 난데… 이 망할 방송국은 수평으로 넓어도 너무 넓다. 이러니 다들 시간에 쫓기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진지하게 슬슬 다리가 피곤할 지경이다.

         

         대체 얼마나 더 걸어야 하는데요. 이럴 거면 공항처럼 수평 에스컬레이터나 실내 전동차라도 좀 놔주세요 제발.

         

         풍채 좋은 국장이 걸을 때마다 수염이 흔들리는 걸 멍하니 구경하면서 딴생각 하는 것도 일이 분이지 원.

         

         수염, 수염…이라. 왜 서양 남자들은 그렇게 수염 기르는 걸 좋아하는 걸까.

         가끔은 얼핏 집착이 심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당장 모건 국장은 자기 머리만한 털뭉치를 턱 밑에 달고 있고, 옆에 있는 더기 씨도 귀밑부터 턱까지 이어진 멋들어진 구레나룻을 관리하는 걸로 보이고, 이 시간에도 신나게 영업하고 있을 헤멧 씨는… 그 인간은 그냥 다듬는 걸 모르는 짐승 스타일이네.

         

         음, 물론 우리 할아버님의 하얗게 센 수염이 최고로 멋있지만 말이다!

         

         원체 잘 어울리기도 하고, 숙련된 메카닉 느낌도 물씬 더해주고. 그러고 보니 오늘 광고가 잘 찍히면 놀라시지 말라고 미리 슬쩍 언질이라도 드려야겠는 걸?

         

         솔직히 아무리 각 지역 방송국에 퍼진다 한들 상품 홍보도 아닌 성형 관련 광고가 저 멀리 떨어진 황무지 개척촌까지 닿을지는 회의적이긴 한데….

         

         “…오?”

         “아하핫! 놀라시는 걸 보니, 역시 이런 건 웬만한 기업에도 잘 안 들여놓긴 하나 봅니다?”

         

         고민거리가 해결되어 긴장도 풀렸고 딱히 방해받을 여지도 없겠다.

         

         그렇게 의식의 흐름대로, 자칫 완전히 삼천포로 빠질 뻔한 내 정신머리는 다행히 제때 도착한 스튜디오의 신기한 풍경 덕에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 녀석, 일하기도 전에 벌써 딴생각부터 하고 있어?)

    GC아수라 님의 50코인 후원!
    대뮈 님의 200코인 후원! 두 분 모두 감사드립니다…. 아파서 휴재 박은 못난 저에게 응원의 말씀을 일부러 이렇게 챙겨 주시다니.

    해당 코인은 전액 병원비와 약값으로 겸허히 지출하도록 하겠습니다. 으에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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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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