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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69

     아버지가 어디로 사라졌는가 고민을 하는 사이.

     무언가, 왕성 전체에 이상현상이 발생했다.

     나의 기감을 자극하는 정체불명의 현상으로, 회귀 전에도 후에도 처음 겪어보는 기이한 현상이다.

     황금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슬라임.

     슬라임?

     아니다.

     이건 단순히 오염지대에서 볼 수 있는 마물 같은 것이 아니다.

     왕궁의 바닥에서 솟아나는 이 황금의 액체는 근본적으로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황금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인 존재다.

     그것이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거나, 무언가 기사와도 같은 모습을 갖추고 있다거나 하는 건-

     ‘적이라면 벤다.’

     상관없이, 나를 죽이려고 한다면 바로 베어넘기는 수밖에.

     서걱.

     몸을 반으로 갈라버린다.

     지팡이에서 뽑은 칼에 오러를 담아, 그대로 사선으로 가른다.

     오러의 칼날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감촉은 영락없이 사람을 벤 감각이었으나, 피 대신 튀는 황금색 액체에 시각과 촉각의 괴리감이 느껴졌다.

     “폐하, 이건….”

     “재미있군.”

     내가 나를 향해 달려드는 황금의 기사를 베어넘기고 고개를 돌리니, 황제의 앞에도 황금의 액체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재미있군, 재미있어. 그레이 지브롤터. 자네는 지금까지 이런 현상을 본 적이 있나? 자네의 ‘일생’을 통틀어서?”

     “아니요. 처음 겪는 현상입니다.”

     왕가에 이런 게 있었다고?

     이런 게 있는 줄 알았다면, 회귀 전에 노스트럼 왕궁이 그렇게 쉽게 제국군에 점령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흐음, 그렇군. 설명은 가는 동안 천천히 하는 게 낫겠지.”

     황제가 가볍게 손을 털며 앞으로 걸어간다.

     “나 때문에 잠시 사고가 멈춘 모양인데, 이 황금의 기사는 왕궁 전체에 나타나고 있는 모양이야.”

     “……!”

     바로 앞으로 달린다.

     순간적으로 스친 황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내 뒤로 따라붙었다.

     “누구에게 가려나, 우리의 총독께서는.”

     “당연히, 한 명이잖습니까!”

     왕궁에 나타난 기이한 현상.

     누구를 구하러 가느냐는 적어도 그레이 지브롤터에게 있어, 정해져있는 수순이다.

     “그런가.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지만….”

     “아스타시아!”

     단숨에 아스타시아가 있는 방에 도착하여 문을 열어젖힌다.

     “그, 그레이?!”

     아스타시아는 커튼봉을 들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황금으로 된 액체가 바닥에 흥건하게 펼쳐져 있었다.

     두 개.

     그 황금의 일부가 아스타시아의 커튼봉에 묻어있었다.

     “그레이, 그게-”

     

     와락.

     

     “그, 그레이?”

     “…….”

     

     정신을 차려보니, 나도 모르게 아스타시아를 안고 있었다.

     뭔가 그 황금의 액체가 튄 모습이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어, 나는 나도 모르게 아스타시아를 안고 말았다.

     “저, 저 괜찮아요.”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뜨겁군. 뜨거워.”

     뒤에서 손뼉을 치며 황제가 들어왔다.

     “왕성 전체의 위기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구하러 온 사람이 국왕도 아버지도 정치적 어머니도 아닌, 약혼을 맺기로 한 사랑하는 여인이라니. 감동적이군.”

     “…….”

     “그렇게 노려볼 필요는 없다, 아스타시아. 내가 인도를 한 것도 아니고, 그레이 지브롤터가 이쪽으로 달려온 것이니.”

     “……!!”

     

     아스타시아가 놀라서 나를 꽉 붙잡는다.

     놀랄 수밖에 없는 게, 황제가 아스타시아에게 말을 건 경우는 공적인 상황을 제외하면 거의 없었으니까.

     “그레이 지브롤터. 나는 현 상황에 대하여 세 가지 추론을 할 수 있는데, 자네는 어떤가?”

     “…….”

     “아무래도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모양이군. 괜찮아. 왕국 내부의 전설이나 역사의 이면, 동화나 환상 속에 있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의 편린과도 같은 것이니.”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황제는 세 가지나 알고 있는 걸까.

     “궁금해보이는데, 알려줄까?”

     “대가는 무엇입니까?”

     “대가라. 섭섭하군. 아카데미에서 교수가 학부생들에게 문제를 낼 때, 대가를 바라고 문제를 내지는 않잖나.”

     “하지만 우수한 답을 내놓은 학부생은 대학원으로 끌고 들어가려고 하죠.”

     “그렇지. 그리고 나는…적어도 완전히 새로운 과목을 배우고 익히게 되는 상황을 가지고 문제를 내는 그런 악덕교수까지는 아니야.”

     합스베르크 황제가 손을 가볍게 옆으로 휘둘렀다.

     “그러니, 지금은 가볍게 강의하도록 하지. 자네가 나리아 여왕에게 다 떠먹여주는 것처럼, 내가 다 알려주겠다는 것이야.”

     푸화ㅡㅡ악.

     “하나. 이들은 [황금의 노예]들일 것이다.”

     “그건….”

     “죽은 자의 시신을 황금으로 엮든, 아니면 황금 그 자체에 사자의 영혼을 불어넣든 거기에서 거기지.”

     벽에서 튀어나온 황금의 괴물이 황제의 손길에 그대로 터지며 바닥에 흩뿌려지고, 황제는 자신의 손에 묻은 황금의 액체를 만지작거렸다.

     “노스트럼 왕성을 지키는 수호병이라고도 할 수 있다네. 액토플라즘, 호문클루스, 다양하게 부를 수 있는데, 그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근원은 바로 이 황금이지.”

     “그게, 황금이라고요?”

     “그래. 내가 추론이라고 했지? 아직 성분 분석은 하지 않았지만….”

     황제는 품에서 작은 병을 꺼낸 뒤, 유리병 안에 황금의 액체를 집어넣고 뚜껑을 바로 닫았다.

     “이건, 황금과 99% 동일한 마나일 걸세.”

     “…….”

     “어쩌면 마나 자체가 황금으로 연성된 것일 수도 있어. 인류의 기술로는 닿을 수 없는 기적과도 같은…그야말로, ‘마법’. 노스트럼 땅에 있는 말도 안 되는 양의 황금의 비결을 이제는 알겠어. 후후후. 아스타시아?”

     “아, 네…?”

     “제국 연금술에서 말하는 비원이 무엇이지?”

     “황금의 연성…?”

     “그래. 그게 바로 두 번째.”

     촤륵.

     “노스트럼의 황금은 진짜 황금이 있는 동시에, 마법의 기적으로 만들어진 황금도 있는 듯하군. 그게 바로 이 마나가 흐르는 액체형 황금인듯 하고.”

     황제는 손에 움켜쥔 황금의 액체를 꽉 움켜쥐어 터뜨렸다.

     “무엇이 진짜 황금이고 무엇이 거짓된 황금인지는 분석해봐야 알겠지만, 아마도 이건 드래곤이 남겨둔 안배가 틀림없겠지. 황금이 아닌, 황금을 대신하여 남겨준 무언가. 노스트럼 왕국이 위기에 빠졌을 때, 왕국을 지킬 수 있도록 남겨둔 무언가.”

     “…왕가의 기적?”

     “그래. 세 번째.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른 배후는 당연히 노스트럼 왕가의 사람이야.”

     황제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제국에 이런 기술이 있었다면, 이런 황금을 고작 상급기사의 영혼을 묶어두는 용도로 쓰지는 않을 테니까.”

     “…흑마법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나는 아스타시아의 손을 붙잡은 뒤, 밖을 가리켰다.

     “범인은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이겠군요.”

     “나리아 지오 노스트럼일 수도 있지 않겠나?”

     “나리아에게는 이런 걸 다룰 능력이 없습니다.”

     “…당사자가 들으면 섭섭하겠군.”

     “섭섭하다는 걸 떠나서, 나리아에게 이런 능력이 있었다면 주변에 학생회 임원들이 아니라 황금으로 만들어진 상급기사만 주렁주렁 달고 다녔겠죠.”

     “…그것도 그렇군.”

     내가 밖으로 나서자 황제가 나와 아스타시아의 뒤에 섰다.

     불안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황제는 당장은 믿을 수 있다.

     콰득.

     앞으로 걸어나가며, 바닥에서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황금의 노예를 발로 짓밟아 터뜨린다.

     나타나기 전부터 바로 발에 오러를 담아, 그대로 황금의 액체에 흐르는 마나의 흐름을 끊어내며 육신을 터뜨린다.

     “이거, 이거. 아무래도 죽은 자의 영혼을 황금에다가 묶어둔 것 같은데. 혹시 ‘리치’라는 존재를 알고 있나?”

     “흑마법사들이 자신의 영혼을 라이브 베슬이라고 하는 그릇에 묶어두고 불멸의 존재가 된 언데드 아닙니까?”

     “100점.”

     “지금 이들이 리치와 비슷한 존재라는 건가요?”

     “300점.”

     옆에서 튀어나오는 황금의 노예를 베어넘긴다.

     뒤에서도 계속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아스타시아의 떨리는 손을 꽉 붙잡고 옥좌가 있는 태양의 홀에 도착했다.

     푸화아악.

     황금의 노예기사들이 하나둘 터져나간다.

     본래는 검은색이었던 흑장미의 제복에 황금이 피처럼 튀고, 원형으로 진을 갖춘 기사들은 옥좌를 지키고 있었다.

     “그레이 경!”

     “테르시안 제국의 황제 폐하와 황녀 전하를 모시고 왔습니다.”

     빠르게 앞을 훑는다.

     나리아, 카르멘, 윈체스터 대공, 헥스 자작.

     그리고 왕실기사단을 대신하여 이 자리에 온 흑장미 기사단 다수.

     “아버지께서는, 어디에?”

     “같이 있던 게 아니었습니까?”

     “뭐…?”

     카르멘 왕비의 표정이 순간 사색이 되었다.

     “백작님과 같이 있던 게 아니었어?!”

     “진정하렴, 카르멘.”

     “아버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버지를 백작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카르멘 왕비는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정하시오, 카르멘 왕비.”

     짝.

     합스베르크 황제가 손뼉을 치자, 곧 방 안이 조용해졌다.

     “이곳이 위험하다면 위험했지, 크림슨 지브롤터 후작이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오.”

     “지금, 무슨…?”

     “마나로 억눌렀을 뿐.”

     태양의 홀 아래에서, 황금의 액체들이 꿈틀거리며 솟아나려고 한다.

     하지만 유리로 된 판에 막혀 다른 출입구를 찾아나서는 것처럼, 황금의 액체들은 꿈틀거리며 벽을 기어다니기 시작했다.

     “일종의 결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오”

     “그건….”

     “오해하지 마시길. 마스터급이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거지. 그렇지 않소, 윈체스터 대공?”

     “……고맙군.”

     윈체스터 대공이 쓴웃음을 지으며 카르멘 왕비를 토닥였다.

     “뭔가 일이 터지고 나서 입도 풀리신 것 같군요, 합스베르크 폐하. 이렇게까지 해주시고.”

     

     나는 바닥에 흐르는 합스베르크 황제의 결계를 발로 두드렸다.

     오러로 검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더 많은 마나를 소모해야 하는 결계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렇게 자신의 마나를 직접 사용하여 노스트럼의 사람들을 지키는 결계를 만들어냈다.

     “신나신 것 같아보이기도 합니다만.”

     “아아, 그래보이나? 음,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그런 게 있지.”

     황제는 부정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신비와 환상과도 같은 상황. 이것은 일반인은 알지 못하는, 관계자도 알지 못하는 기적일까? 아니면 노스트럼 왕궁 뿐만 아니라, 노스트럼 왕국 전체에 솟아나기 시작한 재앙일까?”

     “……!”

     “만일 황금의 재앙이라고 한다면, 시사하는 바는 하나지.”

     황제가 비어있는 옥좌를 가리켰다.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의 사망.”

     “……아뇨, 아닐 겁니다.”

     나리아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자는,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닙니다.”

     “혹시 모르지 않나? 크림슨 지브롤터가 기어이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을 죽여버렸을지.”

     노골적인 황제의 말에 기사들 중 일부가 인상을 찌푸렸으나, 그들도 차마 반박하지는 못했다.

     “남은 반 년을 참지 못하고 유일한 성인 노스트럼을 죽여버려 왕국에 성인 왕족이 한 명도 없으니, 골드 드래곤이 왕국에 남겨둔 저주가 시작된 것이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는, 황금의 저주가.”

     “크림슨 후작은….”

     “아무도 모르지.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 그 자가 크림슨 후작이 기어이 칼을 빼들게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실제로 그럴 것 같았고, 그게 제일 가능성이 컸다.

     나조차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예.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죽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꽂혔다.

     “호오, 근거는?”

     “죽이려고 했으면 이미 9년 전 지브롤터를 찾아왔을 때, 얼굴에 주먹을 꽂는 게 아니라 칼을 박아넣었을 테니까요.”

     “지금까지 몰랐던 비밀을 안 나머지, 폭발했을 가능성이 있지 않나?”

     “…….”

     만일.

     우리가 회의와 만남에 집중하느라, 아버지가 따로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을 만났을 경우.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이 목숨이 두 개인 것처럼 까불다가, 아버지에게 숨겨져있던 진실을 밝히는 경우.

     아버지가,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을 죽인다?

     “아니요.”

     그럴 리가 없다.

     “아버지가 폭발하기에는, 아버지는 아버지라서요.”

     “…….”

     “합스베르크 황제께서는 아마 이해하지 못하실 겁니다. 크림슨 지브롤터라는 사람이 어떤 성정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회귀를 한 번 한 나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데, 누가 아버지의 속내를 속단할 수 있을까.

     “물론, 저도 확신은 못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나도 아버지가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을 죽이려고 했다는 추측에 확실하게 반박하지는 못한다.

     “참 왕성의 중심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그렇기는 하지만….”

     가능성이 있다면.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 국왕 전하께서 크림슨 지브롤터 후작을 보고, 자신이 살해당할까봐 겁을 먹어서 이런 짓을 벌였다는 게 더 가능성있지 않을까요?”

     “…….”

     합스베르크 황제가 침묵했다.

     

     순간, 고요해졌다.

     나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을 내비쳤지만, 다들 그 가능성을 순간적으로나마 부정하지 못했기 때문.

     “그레이 경.”

     나리아만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이 자기가 살해당할까봐, 쫄아서 이런 짓을 벌였다?”

     “그, 여왕님. 쫄았다는 표현은 조금.”

     “자기가 썰릴까봐 이런 짓을 벌였다는 거 아닙니까.”

     “…….”

     그 누구도, 나리아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반박하기에는-

     “저기, 그레이. 저기 밖에….”

     “……!”

     왕궁의 광장을 향해, 모두 시선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으니까.

     “저건….”

     “크림슨 지브롤터.”

     광장의 중앙.

     아버지가 검을 바닥에 꽂은 채, 수십에 이르는 황금의 기사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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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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