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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69

    차가운 빗방울이 콘크리트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골목길을 메웠다.

    은발 소녀, ‘청’은 앞서가는 동료들의 등을 바라보며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의뢰인으로부터 중요한 화물을 운송해달라는 요청을 받아서, 열심히 운반 중이었다.

    자유 도시 연합을 지배하는 세 가문의 손이 닿지 않는 무법지대로 어떤 화물을 옮겨달라는 의뢰였다.

    보통의 운송 의뢰라면 차량을 사용했겠지만, 이번 의뢰는 차량을 이용해서 옮길 수도 없을 만큼 길이 좁고 거미줄 같은 통로를 지나야 했다.

    하아. 하아.

    평범하게 숨쉬기도 쉽지 않은 마스크를 끼고 달리는 것은 청의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비까지 오고 있어서, 청은 힘들어서 죽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 조금 몽롱한 정신으로 앞을 내다보자, 약간 아련한 느낌이 들었다.

    바닥을 때리는 빗줄기의 모양.

    세차게 내리는 빗속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무거운 가방을 멘 동료들의 뒷모습.

    얼음장처럼 차갑고, 몸에 달라붙는 것 같은 기분 나쁜 비.

    분명 예전에는 비를 꽤 좋아했었는데….

    비가 내리면 나는 흙 내음과 비 오는 날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했었다.

    하지만 이 도시에서 내리는 비는 도무지 좋아할 수 없었다.

    차갑고 기름처럼 이상한 냄새가 나는 비.

    이 도시에 내리는 비는 그 성분 대부분이 물이 아니었고, 어째서인지 굉장히 차가웠다.

    마치 이 도시라는 거대한 기계를 식히기 위한 열교환용 액체 같았다.

    ‘몸이 무거워.’

    당연할 정도로 순수한 인간에게 해로운 빗물이기에, 청은 방수가 확실한 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확실한 성능을 가진 만큼, 옷의 무게는 소녀를 무겁게 짓눌렀다.

    하아. 하아.

    두꺼운 필터가 달린 마스크에서 새어 나오는 소녀의 숨소리는 굉장히 거칠어져 있었다.

    “이 블록만 지나면 도착이야.”

    그런 소녀의 정신을 일깨우는 것처럼 가장 앞장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겠어?”

    은발 소녀의 곁을 뛰던 여자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 운송 의뢰에서 청의 역할, 보안 벽을 여는 것을 할 수 있겠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 벽은 도시들이 아직 연합하지 않았던 시절의 흔적이었는데, 워낙 튼튼하게 지어져서 아직도 남아있는 곳이 많았다.

    물론 그 벽을 빙 돌아서 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벽을 통과하는 쪽이 훨씬 가까웠다.

    “할 수 있어.”

    청은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힘들었지만, 의지를 담아서 말했다.

    그 순간, 남자는 큰 소리를 내면서 손에 들린 방패를 들어 올렸다.

    “멈춰!”

    남자는 커다란 방패 두 개를 벽처럼 세우고 나머지 손에는 중화기를 든 채, 사방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어두운 골목 속에서 잔상을 남기며 흐르는 붉은 안광들.

    “망할! 스캐빈저들이야.”

    무법지대에서 몰려다니며 사냥감을 쫓아다니는 하이에나들이 그들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마치 피 냄새를 맡은 상어들 같은 모습이었다.

    ***

    언제나 따뜻하고 평화로운 세희 연구소 격리실.

    나는 침대 위에 비스듬히 누워서 황금 사신과 놀아주고 있었다.

    내 배 위에 올라선 황금 사신을 내려다보며, 손가락을 피아노 치듯이 까딱이면 황금 사신은 복싱 자세로 펀치를 날렸다.

    마치 미트를 치는 것처럼 내 손가락을 향해서 휙휙.

    내 손가락을 피하고 때리기도 하고, 내 손가락을 향해 주먹을 날리기도 했다.

    그 자세가 정말 그럴듯해서, 권투 선수 같았다.

    ‘황금 사신들은 전부 운동을 잘하네.’

    그렇게 황금 사신과 놀아주고 있었더니, TV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한국 오브젝트 협회에 따르면, 현재 상당량의 ‘황금뿔’이 중국으로 유출된 정황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그 황금뿔은 중국 내 대표적인 무법지대로 알려진 ‘자유 도시 연합’ 쪽으로 흘러든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해당 지역은 중국 당국의 통제가 미치지 않아 범죄자들의 은신처로 악용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로 인해 추적에 어려움이 예상됩니다.]

    [한국 오브젝트 협회는 중국 협회와 긴밀히 협조하여 범인의 행방을 쫓고 있으나, 아직 뚜렷한 진전은 없는 상황입니다.]

    자유 도시 연합이라….

    꽤 유명한 지역이긴 하지만,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지역이었다.

    중국은 오브젝트 사태에 미국이나 일본 수준으로 대처를 잘한 편이었지만, 저 ‘자유 도시 연합’만큼은 인외마경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황금 사신이 시무룩한 얼굴로 내 손가락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힘이 약해서 제대로 들어 올리지도 못하면서, 같이 놀자는 것처럼 힘겹게 들어 올리고 있었다.

    ‘알았어. 그래, 조금만 더 놀자.’

    내가 손가락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복싱 황금 사신은 신나는 얼굴로 펀치를 날리기 시작했다.

    ***

    미니 사신 정원, 마시멜로 평원.

    나는 황금 사신과 잔뜩 놀아준 뒤, 미니 사신 정원을 걷고 있었다.

    4발로 다니는 수많은 황금 사신과 마치 구름처럼 떠다니는 주황 사신의 모습은 이상하게 대자연의 아프리카 같은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그렇게 한적하게 날아다니는 주황 사신을 보다 보니, 문득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주황 사신에게 장난 친지도 상당히 오래됐네.’

    생각해 보면 예전에 붉은 사신 인형 옷으로 불을 붙인 뒤로 장난을 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주황 사신은 착해서 그런지, 내가 장난을 쳐도 반격을 해 오지 않는 상냥한 아이들이었다.

    나는 그런 주황 사신들을 위한 장난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주황 사신.

    황금 사신의 얼음 궁전.

    내 뛰어난 두뇌는 이 두 가지를 엮어서 재미있는 장난을 떠올려 버렸다.

    그 장난은 간단했다.

    주황 사신에게 같이 얼음 궁전을 부수자고 한 다음, 내가 몰래 빠져서 황금 사신에게 고자질하는 장난이었다.

    히히.

    나는 즐거운 미소를 머금은 채, 주황 사신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왜 이렇게나 많은 숫자의 스캐빈저들이 몰려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겨우 3명이 가진 화력으로는 도무지 물리칠 수 없는 숫자의 적들이었다.

    ‘도대체 뭘 노리는 거지?’ 

    의뢰로 옮기는 중인 화물? 

    약간의 의약품과 탄약으로 이런 습격은 수지가 맞지 않아.

    청이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지금 상황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청은 작은 권총을 꺼내 들고 필사적으로 반격을 시도했지만, 빗속의 어둠 탓에 조준이 쉽지 않았다.

    설사 명중한다 해도 강철처럼 단단한 오브젝트로 피부를 대체한 스캐빈저들에겐 소용없을 것이다.

    “너무 많아!” 

    길쭉한 소총을 든 여자가 절망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는 정확한 사격으로 적들을 하나둘 쓰러뜨렸지만, 골목 사이를 누비는 스캐빈저들의 숫자는 끝이 없어 보였다.

    괴물처럼 커다란 네 개의 팔로 두 개의 방패와 두 개의 중화기를 다루는 남자는 이미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네 개의 팔 중 하나의 팔이 관통당해, 축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다친 팔로 인해 총 한 자루를 놓친 상태였다.

    그는 최선을 다해 반격했지만, 남자의 실력으로는 어둠과 빗줄기를 뚫고 정확한 사격을 할 수는 없었다.

    그 순간, 밝은 불꽃이 긴 꼬리를 늘어트리며 짙은 어둠을 가르기 시작했다.

    ‘삐이익’하는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와 함께 수제 유탄이 일행을 향해 날아들었다.

    “젠장! 조심해!”

    남자의 절박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견제 사격으로 눌러 앉힌 뒤, 유탄 발사.

    도무지 피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남자와 여자가 청을 감싸며 몸을 날렸고, 강력한 폭발이 대지를 뒤흔들었다.

    순간 정신을 잃었던 소녀는 뿌연 흙먼지 속에서 천천히 의식을 되찾기 시작했다.

    ‘어지러워.’

    ‘토할 것 같아.’

    어지럽고 구역질 나는 기분이었지만 청의 상태는 비교적 양호했다. 

    으웩.

    척 보기에도 치명상을 입은 남자는 입으로 피를 잔뜩 토하고 있었다.

    여자는 이미 정신을 잃은 건지, 청을 몸으로 덮은 채, 눈을 감고 미동도 없었다.

    저벅저벅.

    스캐빈저들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 부주의해 보이는 걸음 소리를 들으며, 청은 이를 악물었다.

    청은 남자의 배낭에서 예비 샷건을 집어 들고, 발소리 쪽을 조준하기 시작했다.

    ‘무거워.’

    아마 제대로 쏘지도 못하겠지.

    오브젝트 급의 근력이 아니면 제대로 들지도 못하고, 제대로 반동을 잡지도 못할 것이다.

    분명 총을 쏘는 순간 어깨뼈가 부스러지고, 총을 놓쳐버리겠지.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야만 했다.

    “후우.”

    청은 천천히 숨을 내쉬며 총을 단단히 붙들었다.

    흙먼지가 점점 사라져가는 도중, 시야 구석에 이상한 하얀색 털 뭉치 같은 것이 보였다.

    구름 같은 하얀 털 뭉치를 보자, 이상하게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을 느끼며 방아쇠를 당겼다.

    펑!

    폭탄이 터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샷건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불행하게도 청의 어깨뼈는 멀쩡했다.

    그것은 제대로 견착 못 했다는 증거였고, 가장 중요한 첫 사격이 제대로 맞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믿기 힘든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사방으로 흩날린 산탄이 스캐빈저들의 급소를 정확히 꿰뚫은 것이다. 

    그야말로 마법!

    게다가 그 이후로도 신비로운 일이 계속 이어졌다.

    소녀가 놓친 샷건은 뭔가 망가졌는지, 바닥에 떨어지는 충격으로 다시 한번 격발하며 공중을 날았다.

    그리고 그렇게 격발 된 산탄은 다시 한번 스캐빈저들에게 치명타를 입혔다.

    우연히 일어날 법한 일이었지만, 연속으로 일어나니 위화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말도 안 되는 광경이 청의 눈앞에서 펼쳐졌다. 

    청은 잔뜩 당황한 채로, 반동으로 허공을 스스로 날아다니는 샷건이 스캐빈저들을 모두 죽여버리는 것을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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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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