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27

       날씨가 좋은 날.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기분 좋게 소풍이라도 나갈 날이었지만, 프란체는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왠지 모를 초조함과 불쾌감.

         

       진 때문이었다.

         

       ‘얘는 금방 온다면서 왜 안 와?’

         

       카자르 유플레인인지, 요플레인인지 모를 사람을 찾으러 간 지 벌써 3일이 지났다.

         

       ‘사실 도망치려고 예전부터 계획했던 건가?’

         

       정말 진이 찾으러 간 사람이 마법사라면, 그것도 수준이 높은 상위 마법사라면 노예 구속을 푸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설마…?”

         

       프란체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옆 서랍을 뒤졌다. 노예 구속구를 꺼내 바라봤다. 다행히 신호는 끊기지 않았다.

         

       “후우…….”

         

       자신도 모르게 나온 안도의 한숨. 진이 처음으로 생긴 아군이자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서 그런 것일까. 괜히 그에게 마음을 주게 된다.

         

       ‘이런 감정 소모는 의미 없다는 걸 알고 있는데.’

         

       프란체는 노예 구속구를 매만지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턱을 괴고 톡, 톡,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헬레나가 디저트와 홍차를 들고 들어왔다.

         

       왠지 표정이 좋지 않은 프란체를 확인한 헬레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별로.”

         

       왠지 묘한 기류 속에서, 헬레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테이블에 디저트와 찻잔을 올려두었다.

         

       “무, 무슨 일 있으시면 종을 울리세요…?”

       “그래.”

         

       헬레나가 쟁반을 품에 안고 서둘러 문을 닫고 나간다. 프란체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창밖만 응시했을 뿐.

         

       “…….”

         

       힐끔. 테이블 위에 놓인 디저트와 따뜻한 홍차를 바라봤다. 에덴이 전속 시종을 바꿔준 이후부터는 이런 게 자주 테이블 위로 올라온다.

         

       ‘이런 거 필요 없는데.’

         

       입맛에 맞지도 않고.

         

       에덴의 전속 시종 교체 사건 이후로 시종들은 더이상 프란체를 괴롭히지 않았다. 본보기로 그 시종이 귀족 능멸 죄로 노예가 됐다나, 뭐라나. 분명 그 탓일 거다.

         

       그래도 시종들이 자신을 데카르트 공녀로, 상급자로 인정하지 않는 건 여전했지만.

         

       아무튼. 에덴이 그렇게 나온 건 의외였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던 사람이 갑자기 그렇게 변할 수가 있나.

         

       ‘그래도 나를 데카르트의 일원으로 취급은 해주고 있었나 보네.’

         

       피식. 에덴을 향한 어처구니없는 비웃음이 프란체의 입가에서 새어 나왔다. 지금까지 무시하고, 취급도 안 해줄 때는 언제고.

         

       ‘그나마 라인이 일관성 있지.’

         

       그 망할 자식은 자신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놈이다. 차라리 라인처럼 끝까지 대해주면 계속 원망할 텐데.

         

       괜한 기대를 하게 만든다.

         

       기대 같은 건 배신으로 돌아온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데.

         

       ‘믿을 건 진뿐이지.’

         

       노예 각인이 되어 있어 자신이 풀어주지 않는 이상 절대로 배신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사람. 유일하게 내 편이 되어주겠다고 말한 사람.

         

       후아, 크게 한숨을 내쉬고, 프란체는 노예 구속구를 만지작거리며 창밖을 바라봤다. 그러던 그때였다.

         

       순간적으로 잔상이 생기며 창문으로 뭔가가 들어왔다. 탁! 지면과 신발이 부딪히는 소리까지.

         

       ‘진인가?’

         

       프란체는 황급히 시선을 돌려 옆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진 바렌베르크가 있었다.

         

       처음 보는 여자를 안은 상태로.

         

         

       * * *

         

         

       카자르를 바닥에 내려두고, 고개를 꺾으며 스트레칭을 하니 프란체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공녀님? 무슨 일 있으세요?”

         

       그저 입만 뻐끔거리며 할 말을 잃은 프란체. 나는 그녀를 보며 다시 불렀다.

         

       “공녀님?”

       “…그 여자는 누구니?”

       “카자르 유플레인입니다.”

       “…여자였어?”

         

       적지 않게 당황한 프란체. 너도 놀랐지? 놀랄만하다. 이름만 들으면 남자라고 생각되니까. 나는 피식 웃었다.

         

       “저도 남자인 줄 알았는데 여자인 줄 알고 놀랐어요.”

       “그러게…… 이름만 보면 무조건 남자였는데…….”

         

       우리의 대화가 불쾌하다는 듯 카자르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 엄연히 여자 맞거든요? 레이디 유플레인!”

         

       씩씩거리며 입술을 삐죽이던 그녀는 결국 휙, 고개를 돌려버렸다.

         

       “성별 헷갈린 건 미안하게 됐으니까, 부탁한 거나 들어주지.”

       “공녀님한테 마법을 가르친다는 거요?”

       “그래.”

         

       후아, 카자르는 한숨을 내쉬곤 프란체에게 다가갔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재능이 없어도 저는 몰라요?”

       “그럴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마.”

         

       영 못마땅한 표정을 짓던 카자르는 프란체의 손목을 쥐었다.

         

       “공녀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래.”

         

       화아악…! 작은 빛이 반짝이며 프란체의 손목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오오…….”

       “어떤데?”

       “재능은 출중하시네요.”

         

       그거야 그렇겠지. 게임에서도 흑마법을 다루는 마법사는 적었거든.

         

       “그럼, 이제 마법을 익힐 수 있는 건가?”

       “네. 남은 건 마법식을 이해할 수 있냐가 문제인데…….”

         

       힐끔. 카자르가 나를 바라봤다.

         

       “그것도 문제없다. 공녀님은 수학을 잘하시니까.”

       “그래요? 확실히 데카르트 공작가의 공녀님 정도 되시면 못하는 게 없나 보네.”

         

       으음, 데카르트 공작가의 사정을 알려줘야 하나. 나는 프란체를 바라봤다. 그녀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뭐, 나중에 자연스레 알게 되겠지.

         

       “종이랑 펜 없어요?”

       “있어. 기다려.”

         

       나는 문을 열고 나가 헬레나에게 말했다.

         

       “펜이랑 종이 가져와.”

       “네? 갑자기요?”

       “빨리.”

         

       내가 노려보자 헬레나는 다급하게 움직이며 어디선가 펜과 종이를 가져왔다.

         

       “여, 여기요.”

       “그래. 고맙다.”

         

       펜과 종이를 받고, 그녀들에게 전해줬다.

         

       “여기.”

         

       카자르는 즉시 펜으로 종이에 마법식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러 획으로 나누어진 마법식과 언어로 이루어진 술식이었다.

         

       “자, 처음은 이거예요, 아주 기초적인 거라 그리 어렵진 않을 거예요.”

         

       나는 프란체에게 말했다.

         

       “그동안 배운 거 기억하시죠? 그대로만 푸시면 돼요.”

       “그래.”

         

       프란체는 고개를 끄덕이곤 펜을 잡았다. 한참을 마법식을 노려보더니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다 됐어.”

       “그럼 확인할게요.”

         

       심드렁하게 종이를 바라보던 카자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정말 푸셨네? 사실 좀 어려운 문제로 냈는데.”

         

       저 자식이?

         

       “그러니? 생각보다 쉽구나.”

         

       카자르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문제를 만들었다. 프란체가 그걸 쏙쏙 풀어내자 카자르의 눈빛이 빛났다.

         

       “이것도 푸셨네? 당장 마법 사용하러 가보죠!”

         

       내가 물었다.

         

       “밖으로 나가는 건가?”

       “네! 마법을 안에서 사용할 순 없잖아요?”

       “미안하지만 그건 안 돼.”

       “네? 어째서요?”

       “공녀님은 함부로 밖에 못 나가시거든.”

         

       카자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공작님이 엄청나게 아끼셔서?”

       “그런 이유가 아니야.”

       “그럼…?”

         

       나는 프란체를 바라봤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을 얘기해도 된다는 뜻이겠지.

         

       “지금부터 내 얘기 잘 들어.”

         

       카자르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프란체가 이 공작가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왜 마법을 익히려 하는지까지. 그러자 카자르는 입을 틀어막고 휘둥그레진 눈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된 거야.”

       “그, 그게 사실이에요? 공녀님이신데?”

       “그래.”

         

       카자르가 고개를 꺾으며 “와, 이거 쉽지 않네.” 하고 중얼거렸다.

         

       “근데 대단하시네요. 기초 교육도 못 받으셨는데 저 마법식을 풀어내신 거 보면…….”

         

       그래. 나도 놀랐단다. 가르쳐주는 대로 다 흡수하는데 얼마나 아쉬웠겠니.

         

       “근데요. 그럼 저는 어떡해요?”

       “뭘?”

       “공작저로 오면 생활하는 건 다 해결해주신다고 하셨잖아요?”

         

       프란체가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말렴. 내가 이 공작저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게 돈이니까.”

       “휴, 그거 다행이네요. 저는 마구간에서 자야 하는 줄 알고 깜짝 놀랐네.”

         

       기구한 프란체의 인생을 듣고도 그런 걱정이나 하고 있다니,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자식.

         

       내가 말했다.

         

       “아무튼. 방안에서 사용할 수 있는 마법 위주로 부탁하지. 큰 마법은 술식을 풀어내는 데만 사용하고.”

         

       카자르가 “아, 네!”하고 대답하곤 프란체에게 마법을 사용하는 법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이걸로 프란체의 마법 능력은 확보되었고, 카자르를 포섭하는 것도 완료됐군.’

         

       남은 건 프란체가 마법적 재능을 꽃피우는 것과 계획 중인 사업을 성공시키는 것뿐이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프란체가 마법을 배우는 걸 지켜봤다. 권태로운 표정만 짓던 그녀가 무언가를 하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모습을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플레이어의 몰입도가 상승합니다.]

         

       [동기화가 심화합니다.]

         

       ‘…또?’

         

       [인물 – 진 바렌베르크.]

         

       [인물의 기억을 일부 계승합니다.]

         

       찌릿! 눈이 질끈 감길 수밖에 없는 고통이 휘몰아쳤다. 마치 두개골을 깨부수는 듯한 느낌. 나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와 동시에, 귓가에 어떤 한 마디가 들려왔다.

         

       「이번에도 실패인가.」

         

       ‘이건…?’

         

       진 바렌베르크의 일부 기억이 나에게 스며들었다. 이러다가 몰입도가 완전히 채워지면 진 바렌베르크한테 먹혀버리는 거 아니야? 그건 좀 싫은데.

         

       ‘조심해야겠군.’

         

       그래도 몰입도가 상승하는 조건은 알았다. 내가 프란체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느끼면 동기화가 심화한다. 이걸 막기 위해서는 언젠가 프란체의 곁을 떠나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나는 나 자신을 잃고 진 바렌베르크가 될 테니까.

         

       내가 머리를 부여잡고 휘청거리자 프란체가 걱정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아프니…?”

       “아닙니다. 자주 있던 두통이에요.”

       “저번에 파티장에서도 그러지 않았니? 검사라도 해보는 게…….”

         

       나는 고개를 휘저었다.

         

       “괜찮습니다. 소드 마스터인 만큼 제 몸은 제가 잘 아니까요.”

       “그러니…?”

         

       걱정에 가득 찬 프란체와는 다르게, 카자르는 소드 마스터라는 단어에 놀랐다.

         

       “소드 마스터라고요?!”

       “그래.”

       “제국에서도 얼마 없는?! 당신 정체가 뭐예요?”

         

       이걸 대답해줘야 하나. 노예라는 사실을 밝히면 쟤한테도 존댓말 써야 할 거 같은데. 뭐, 언젠간 밝혀질 내용이니 미리 말해둘까.

         

       “나는 진 바렌베르크.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바렌베르크 왕국의 제1 왕자다. 지금은 노예 신분으로 공녀님에게 종속되어 있지만.”

         

       카자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헉!”하면서 입을 틀어막았다. 오늘만 해도 저런 반응을 몇 번 보는지 모르겠다.

         

       “아니, 당신 노예였어요? 심지어 바렌베르크의 왕족?!”

       “그래. 속여서 미안했군.”

       “그럼 저한테 존댓말 써야 하는 거 아니에요? 노예 신분인데.”

         

       으음, 왠지 모르게 쟤한테는 존댓말을 쓰기 싫은데.

         

       “나는 공녀님의 명령만을 따르고 공녀님만을 위해 움직이지. 그래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와, 완전 충신이셨네. 뭐, 이해할게요. 저는 그런 사소한 거에 신경 쓰는 타입은 아니라서.”

         

       그래, 고맙다. 털털한 성격이 좋구나. 게임에서 나온 카자르 유플레인은 그런 성격이 아니었는데. 조금 어색하기도 하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에덴 데카르트다.

         

       아니, 저 새끼는 왜 자꾸 찾아와? 프란체가 동그래진 눈으로 손짓했다. 어서 숨으라는 뜻. 나는 카자르를 데리고 침대 안으로 숨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며 에덴이 들어왔다.

         

       카자르가 속삭였다.

         

       “뭐, 뭐예요? 갑자기 왜 침대로…!”

         

       나는 그녀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속삭였다.

         

       “지금은 조용히 있어.”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는 카자르. 나는 이불을 살짝 열고 에덴과 프란체를 지켜봤다.

         

       “프란체 데카르트. 혼처는 결정했나?”

       “아직입니다.”

       “데카르트 공작가를 탈출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고개를 까딱이며 대답을 재촉하는 에덴. 프란체는 그저 고개를 떨구고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이제 혼처를 결정해라. 그리고 이 데카르트 공작가에서 나가거라. 그게 너에게도, 우리에게도 좋을 터이니. 굳이 싫은 사람끼리 얼굴을 볼 필요가 없지 않나?”

         

       ……그가 전속 시종을 바꿔준 건 그저 변덕이었나 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다음화 보기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