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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7

       ……어쩌면.

        

       어쩌면 말이다.

        

       어떻게든 예사라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계모의 정신적 학대에 시달리다가, 완전히 망가져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완전히 망가지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비관해버린 나머지, 결국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어졌는지도 모른다.

        

       만약 예사라가 수면제 한 움큼을 삼키지 않았다면, 죽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내가 그 스트리머의 영상으로 봤던 예사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그저 스스로를 완벽히 파괴해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는 회장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결국 회장마저 자신을 모른 척하고 버리게 만들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유하늘을 괴롭혔을지 모른다.

        

       나는 예사라가 성인이 되면 회장의 손아귀에서 탈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만한 재산이 있고, 그 재산을 움직일 권리가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다시 생각해보면, 회장은 이미 수년간 예사라를 세상으로부터 격리했다. 나야 자유롭게 살면서 이것저것 배울 수 있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이미 세상으로부터 유리되어 살고 있었던 예사라가 과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을까?

        

       예사라가 바라본 세상에서, 자신에게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이는 것은 회장 하나뿐이었다. 한 해에 고작 네 번 찾아오는 회장 하나뿐.

        

       그렇기에, 예사라는 회장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만큼 증오했다.

        

       예사라의 심정은 이 유서에 쓰여있는 것 보다도 훨씬 복잡했을 것이다. 사랑해서 함께 하고 싶지만, 동시에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 멀리서 와 자신을 구해줄 사람을 망상하고, 그 망상을 하나의 소설로 풀어낼 수 있을 정도로 매일같이 구원을 갈구하였다.

        

       그러니까, 어쩌면.

        

       만약 예사라가 살아서 학교에 가게 되었다면.

        

       정말로 게임에서 그랬던 것처럼, 주변 모든 것을 망가뜨리고 자신도 망가뜨림으로써, 회장이 도저히 자신을 거둘 수 없도록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설령 그 끝에 기다리는 것이 죽음이라고 하더라도, 예사라는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마침내 회장에게서 벗어나는 탈출구로써.

        

       그리고—

        

        

       부디 어머님께서 저를 사랑하시길. 제가 어린 시절 어머님을 사랑했던 것만큼이나 저를 사랑하시길.

        

        

       —그래,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을 정말로 사랑했다는 증명으로써.

        

       “…….”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펼쳐보았던 노트와 편지는, 다시 고이 접어서 책상 서랍 깊숙한 곳, 원래 그 물건들이 있던 곳으로 돌려두었다. 안타깝게도 찢어진 편지 봉투는 그대로이긴 했지만.

        

       유서에 쓰여 있는 내용은 단편적이긴 했다. 사실 아무리 짧았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의 생을 전부 적기에 종이 몇 장은 그 양이 턱없이 부족하긴 했다.

        

       하지만, 그 내용만으로도 충분했다.

        

       예사라가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무슨 생각으로, 무엇을 느끼며 살아왔는지. 어째서 끝에 죽음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등에 있었던 멍 자국에 대한 것도. 내가 깨어나면서 그렇게 큰 고통을 느낀 이유도.

        

       처음에는 내가 전생에 사고로 사망하며 이쪽 세계의 예사라에게도 영향을 준 건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금방 치워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전생에 물리적으로 받은 상처가 옮겨왔을 거라는 생각은 좀 이상한 것 같았으니까. 그보다는 훨씬 더 현실적인 가정도 있었고.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얻어맞았다든지.

        

       그래. 회장에게 가정폭력을 당했다면 그럴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그래, 그게 훨씬 더 그럴듯한 가정이었다.

        

       하지만, 예사라는 그런 직접적인 폭력에 노출된 적이 없었다. 유서에 쓰인 대로만 생각해보면, 회장은 이곳을 찾아올 때마다 예사라에게 제한적인 사랑을 베푼 모양이다. 만약 회장이 육체적으로 예사라를 굴복시키려고 했다면, 예사라가 회장에게 ‘가족으로써의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폭력에 의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등 뒤가 멍들어있던 이유는 무엇일까. 몸 전체가 으스러질 듯 아팠던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의 몸속에서 피가 한 곳에 고이지 않고 계속 흐를 수 있는 이유는 심장이 뛰기 때문이다. 만약 심장이 멈추면, 사람이 취하고 있던 마지막 자세에 따라 몸속의 피가 고이게 된다. 사람이 우주에서 죽지 않는 한, 지구의 중력 때문에 피는 땅이 있는 방향으로 고이게 되고…… 만약 어떤 사람이 ‘누워서’ 죽었다면, 자연히 피는 등 쪽으로 몰릴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멍과 같은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

        

       그걸 시반(屍斑)이라고 부른다. 예전에 추리 소설에서 봤던 기억이 난다.

        

       ……온몸이 으스러질 정도로 아팠던 이유도, 아마 이 예사라의 몸이 문자 그대로 ‘죽었다 살아나서’ 그랬던 거겠지. 사후 경직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완전히 꺼졌던 신경이 갑자기 다시 작동하기 시작하면서 극심한 통증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

        

       그렇다면 예사라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수면제는 어떻게 되는 건가. 정말로 죽었던 시체에 영혼이 들어온다고 살아날 수 있는가. 몇 시간이나 혈액이 공급되지 않은 뇌가 대체 어떻게 동작하고 있는가.

        

       온갖 의문이 떠올랐지만, 해답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세상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어떤 초자연적 현상이 적용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겠다. 그렇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애초에 나부터가 원래 다른 세상에 살던 인간이고.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예사라는 포기했다. 더 이상 삶을 살아갈 이유를 느끼지 못했으니까.

        

       이 세계의 예사라는, 내가 알던 게임 속의 예사라가 아니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설령 내가 이쪽 세상으로 넘어오는 일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예사라가 본편 시작 전에 자살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도.

        

       어쩌면, 다른 루트를 탈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남주인공 루트의 악역이 아닌, 유하늘과 이어지는 예사라 루트가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평생을 고통받다가, 결국 유하늘에게 구원받아 오랫동안 행복하게 사는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을지 모른다.

        

       아니, 아니지.

        

       어쩌면 게임 속의 어떤 예사라와도 다른 길을 걸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스스로 망가지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어쩌면, 어떻게든 친구를 만들겠다고 발버둥 쳤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결국 학교 모두와 친해지고, 어떻게든 회장의 손에서 벗어났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토록 소망하던 평범한 삶을 손에 넣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쩌면……

        

       그래, ‘어쩌면’ 뿐이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예사라는 이미 죽어버렸으니까.

        

       그저 평생을 고통받으며 살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으니까.

        

       이제 예사라가 학교에 갈 수 있는 일은 없을 테니까.

        

       친구를 사귈 일도,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해 사과할 기회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한 삶을 보낼 기회도.

        

       하나도 남지 않았으니까.

        

       예사라는 그 모든 기회를 소모하여 마지막 복수를 시도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불청객이다. 예사라의 그 계획의 제일 마지막에 뜬금없이 튀어나와, 그 모든 것을 건 한 방을 무효로 만들어버렸으니까.

        

       “…….”

        

       침대에 누워있는 나를 누군가가 천천히,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결국 결론을 내렸다.

        

       나는 아직 죽고 싶지 않다.

        

       전생에서, 딱히 남들에게 자랑할만한 인생을 살지는 못했다. 그냥 아무 존재감 없이 그저 남들이 다 하니까, 다들 그렇게 먹고 사니까, 그저 나도 변변찮은 직장을 구해 매일 출퇴근만 하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그 지루한 삶의 사이사이에, 예사라는 평생 가져보지 못한 것들이 있었으니까.

        

       가족, 친구, 취미,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것, 해보고 싶은 것.

        

       죽어야 할 이유보다 죽지 않아야 할 이유가 더 많았다. 그렇기에, 나는 내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별로 삶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건 말건, 나는 지금의 내 생활이……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꽤 마음에 들었으니까.

        

       그렇게 맛있는 것들을 먹을 수 있는데 굳이 죽어야 할까?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껏 여성 친구들이 생겼는데, 심지어 동성애가 배척받지 않는 세상에서 아무 시도도 해보지 않고 그냥 포기하라고? 아니, 절대로 그렇게는 못 하지.

        

       잘하면 대기업 그룹 하나 수준의 재산을 그대로 손에 넣을 수 있는데, 그걸 포기하라고? 장난하자는 건가?

        

       그래, 그렇게는 절대로 안 돼.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내가 이 몸으로 누리고 있는 삶은, 원래 내가 누릴 수 있었던 삶이 아니었으니까. 원래의 주인이 어떻게 된 건지 알고 났으니, 무거운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예사라, 미안하지만, 나는 너의 계획에는 어울려줄 수 없어.

        

       나는 내 성격대로 살 거다.

        

       어쩌면 이쪽 세상에 왔을 때처럼, 어느 날 뜬금없이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지. 눈을 떠보면 내가 기억하던 내 집에서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몸에는, 죽었던 예사라의 영혼이 다시 들어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어리둥절하게 생각하겠지.

        

       어째서 나는 죽지 않은 거지?

        

       어째서 나에게 친구가 있는 거지?

        

       어째서 나를 간섭하는 사람이 없는 거지?

        

       그야 당연히,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예사라는 스스로 목숨을 버려가면서 복수를 꿈꿨지만, 나는 아니다. 복수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나는 행복하게 살고, 상대는 절망해야 한다. 그래야 좀 코스트가 맞다. 이게 당연한 공식이 아니던가?

        

       원래 소설이건 게임이건, 빙의한 사람은 절대로 이길 수 없었던 악역을 어떻게든 처단해버리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나도 예사라의 몸에 들어왔으니, 아마 그 게임의 악의 원천이었을 회장을 어떻게든 몰아내야지. 그게 당연한 거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까…… 뭐, 그런 거다.

        

       예사라 너는 걱정할 필요가 하나도 없다.

        

       언젠가, 만약 깨어나고 나면 분명 네가 꿈꾸던 그 평범한 일주일을 보낼 수 있을 테니까.

        

       복수건 뭐건 아무래도 상관없을 정도로 행복한 삶을 보내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삶은 고작 일주일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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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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