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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7

       어두컴컴한 하수도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

        우리는 숨을 죽인 채 침묵했다.

        ​

        그 상태로 기다리고 있으니, 흐릿한 인영이 우리가 숨은 곳 근처로 다가왔다. 우리는 아예 빛이 닿지 않는 구석진 곳에 숨었기에 다행히 들키진 않았지만, 이곳이 워낙 조용하고 소리가 울리는 곳인지라 작은 소리만 내도 들킬 것이 분명했다.

        ​

        긴장으로 온몸의 근육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마리아도 마찬가지인지 조금 꼼지락거렸다.

        ​

        또각, 또각.

        ​

        그들의 윤곽이 또렷하게 보일 정도로 가까워지자, 마리아는 수정구를 가동했다. 아주 작은, 마리아와 딱 달라붙어 있기에 겨우 느낄 수 있었던 진동과 함께 수정구가 그들의 모습을 비췄다.

        ​

        누군지 알수 없는, 아마 성인 남성쯤 되지 않을까 하는 사람 셋이 신중하게 서로를 확인했다.

        ​

        “하늘?”

        ​

        “파도.”

        ​

        “빨강.”

        ​

        암구호로 서로를 확인한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휴우, 다행히 다들 무사했던 모양이구료.”

        ​

        “젠장, 울름 남작, 자신만만해서 까불더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

        “하필 황녀를 직접 도발할 건 뭐란 말입니까. 그럴 거면 들키지나 말지.”

        ​

        아무래도 황후 파벌의 일원인 것 같았다. 남작과 황후의 연결고리를 증명해줄 좋은 증거가 될지도 모를 이들의 등장에 마리아의 심장 고동이 빨라졌다. 아마 조금 흥분한 모양이지.

        ​

        “에휴, 이미 지나간 일로 더 떠들어서 뭐 하겠습니까. 그보다, 여긴 확실히 안전한 것 맞겠지요?”

        ​

        “요 며칠간 살펴봤지만, 여길 확인한 이들은 없습니다. 아마 남작이 철저하게 비밀에 부친 게 아니겠습니까?”

        ​

        “그걸로는 좀 부족한데, 혹시 감찰단에 연줄 없소?”

        ​

        서로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이 유독 침묵을 지키던 사람에게 물었다.

        ​

        “…감찰단에서도 이곳을 알아냈다는 소식은 들은 바가 없습니다. 애초에 감찰단이 집중하는 부분은, 이런 접견 장소가 아니라 장부에 나온 가문들이니까요.”

        ​

        눈을 가늘게 뜨고 대답한 사람을 유심히 살폈다.

        ​

        저 사람, 지금 태연하게 감찰단에 자기 사람이 꽂혀있다는 걸 시인하고 있었다. 다른 두 사람은 어쨌든, 반드시 저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내야 한다고 직감했다.

        ​

        워낙 어두워 얼굴을 살필 수는 없었지만, 윤곽으로 체형이나마 겨우 살필 수 있었다.

        ​

        호리호리하지만, 가냘프진 않았다. 키는 나보다 약간 작은 것이, 이 세계의 평균을 고려하면 꽤나 큰 편이었다.

        ​

        목소리는, 확실히 남자의 그것이었다.

        ​

        하지만 혹시나 싶어 마리아에게 물었다.

        ​

        ‘마법 중에 목소리 변조에 대한 마법이 있어?’

        ​

        목소리를 낼 순 없었기에 손가락으로 마리아의 손등에 글자를 적었다. 마리아도 마찬가지로 손가락으로 내 손등에 답했다.

        ​

        ‘있긴 하지만, 쓰이진 않았어요. 마력의 유동이 느껴지지 않아요.’

        ​

        마법에 재능이 뛰어난 마리아조차 이렇게 답할 정도라면, 정말 마법이 쓰이지 않은 것일테지.

        ​

        그렇다면, 저 사람은 확실하게 남자였다. 그 체형을 확실하게 머리에 새겨두었다.

        ​

        “다행이구려. 아무튼, 그럼 안심하고 본론으로 넘어가 보겠소이다.”

        ​

        다른 두 명의 사람은 이미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

        “그래서, 부탁한 물건은 어떻게 가져오셨소?”

        ​

        “음, 여기 있소.”

        ​

        심상찮음이 절로 느껴지는 남자가 궤짝 같은 것을 건넸다.

        ​

        ‘여길 밀거래에 이용하는 건가.’

        ​

        과연, 마리아의 말대로였다. 황후 파벌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마 이곳이 굉장히 안전한 장소로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어차피 자기네 사람들끼리 거래한다는 전제하에, 떳떳하지 못한 물건을 주고받기에 여기만큼 좋은 곳은 없겠지.

        ​

        다만 신기한 건, 궤짝을 받은 사람이 자기가 물건을 제대로 받았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그냥 넘어갔다는 거다.

        ​

        이건 둘 중 하나였다. 이런 것조차 확인하지 않을 정도로 신중하지 못하다거나, 혹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신뢰하고 있다거나.

        ​

        그리고, 적어도 이 경우에 한해서는 후자가 확실했다. 이들은 상대가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기에 암구호로 상대를 식별한 이후로는 거의 확신에 가까운 신뢰를 보이고 있었다.

        ​

        ‘분명하다. 저 사람이 누군진 몰라도, 황후 파벌의 중심에 보다 더 접근한 사람인 건 확실해.’

        ​

        감찰단에 지인이 꽂혀있어 그쪽을 통해 감찰단 내부 소식을 알아낼 수 있을 정도의 위치를 가진 사람이다. 만약 이 사람조차 말단이라면, 그냥 황후가 눈 달린 피라미드로 세상을 조종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

        ‘이대로 덮칠까?’

        ​

        마리아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거부했다.

        ​

        ‘상대가 누군질 모르겠어요. 말하는 것만 보면 다들 작위를 가진 귀족인 건 분명한데….’

        ​

        쯧.

        ​

        속으로 혀를 찼다.

        ​

        이미 수정구를 통해 비밀스런 장소에서 접선하는 것 자체는 증거를 확보해놓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저들을 제압하면 현행범으로 바로 황제에게 배달해버릴 수 있겠지.

        ​

        하지만, 상대가 귀족이라는 게 문제였다.

        ​

        정확히는, 귀족 중 마법사의 비중이 생각보다 높다는 게 문제였다.

        ​

        물론, 마리아는 어지간한 마법사들보다 강하긴 했다. 하지만, 도달한 경지에 비해 전투 능력이 조금 떨어지긴 했다.

        ​

        다른 곳이면 몰라도 수도에 거주하는 귀족 중에는 마법과 관련된 부서에 일하는 이들이 있어 안 그래도 마법사의 비중이 높은 귀족 집단 중에서도 더욱 비중이 높았다.

        ​

        만약 저들 중에 전투에 능한 4위계나 5위계 마법사만 있어도, 이렇게 제한된 공간에서는 충분히 도주가 가능했다.

        ​

        그리고 만약 놓치면, 그는 저들은 더욱 꽁꽁 제 정체를 숨기겠지.

        ​

        마법으로 빛을 뿜어 수정구에 저들의 얼굴을 기록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것도 위험부담은 마찬가지였다. 만약 그렇게까지 했는데 여기서 저들을 바로 제압하지 못하면, 황후 파벌은 기를 쓰고 증거를 지워낼 거다.

        ​

        우리의 목표를 위해서는, 조금 더 참고 기다리며 빠져나가지 못할 덫을 마련하고 일망타진해야 한다는 게 마리아의 설명이었다.

        ​

        “음, 물건도 받았겠다. 요새 워낙 정세가 흉흉하니 나는 먼저 돌아가 보도록 하겠소.”

        ​

        궤짝을 받은 사람은, 그대로 바로 돌아갔다.

        ​

        “내가 부탁한 건 어떻게 됐소?”

        ​

        남은 사람이 요주의 인물에게 물었다.

        ​

        “아쉽게도 부탁하신 약점은 찾지 못했습니다. 물론 자잘한 실수는 여럿 찾긴 했지만, 이걸로 귀하의 가주를 무너뜨리기엔 부족합니다.”

        ​

        “쯧, 그 인간, 여간 철저한 게 아니군.”

        ​

        …패륜아?

        ​

        하여튼, 패륜아인지 패륜아 지망생인지 모를 사람이 되물었다.

        ​

        “그럼 그건 됐고, 약은 어떻게 됐소?”

        ​

        “그건 이미 댁으로 보냈습니다. 항상 보내던 그곳으로요.”

        ​

        “음, 그 정도면 됐소. 쯧, 아쉽구먼.”

        ​

        “공께서 이리 열정적으로 폐하를 위해 노력 중이신데, 머지않은 미래에 보답이 있지 않겠습니까?”

        ​

        “말뿐이라도 고맙소.”

        ​

        패륜아는 그렇게 말하곤 손을 휘휘 저으며 돌아갔다. 이제 요주의 인물만이 남았다. 그는 다른 이들이 모두 떠나간 상황에서도 돌아가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

        ‘이런 젠장, 대체 언제 돌아가는 거야?’

        ​

        안 그래도 마리아와 계속 이렇게 딱 붙어있어서 곤란한데, 이대로 조금만 더 있으면 진짜 엄청 많이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

        속으로 욕을 뱉으며 기다리던 찰나였다.

        ​

        “이제 나오시지요.”

        ​

        그 말에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

        마리아의 몸도 딱딱하게 굳었다.

        ​

        들킨 건가?

        ​

        어째서?

        ​

        우리의 흔적은 꼼꼼하게 다 지웠을 텐데? 혹시 야간투시의 마법 같은 거라도 있는 건가? 하지만 그런 게 있다면 마리아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

        온갖 생각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바짝 긴장했는지 살짝 떠는 마리아의 몸을 끌어안고 진정시키며 가만히 기다렸다.

        ​

        “흠, 일은 잘 처리했군.”

        ​

        ‘하아.’

        ​

        한숨이 절로 튀어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

        정말 다행히도, 우리 말고도 일행이 또 있었는지, 어둠 속에 숨어있던 사람이 걸어 나왔다. 저곳은 마리아와 함께 이곳에 오자마자 불을 켜고 다 확인했던 곳이었다.

        ​

        그때는 확실하게 사람이 없었으니, 저 사람은 틀림없이 아까 들어온 세 사람과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

        “이만하면, 저들도 이탈할 생각은 않겠지요?”

        ​

        “이미 우리가 주는 선물에 일상을 의존하는 이들이네. 지금의 편안함을 위해서라도 꾸준히 협력하겠지.”

        ​

        “하지만, 생각보다 감사의 강도가 강해지면 어떡할까요?”

        ​

        “걱정 말게. 그 부분은 각하께서 적당히 손봐주실 테니.”

        ​

        그 말에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

        생각도 못 한 단서가 튀어나왔다.

        ​

        각하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관료들 중 대신 소리 들을 사람이나 그와 맞먹는 위상을 가진 작위(대부분 백작 이상의)를 가진 이들 정도였다.

        ​

        물론 이곳 팔츠에 각하 소리 들을 사람이 한두 명인 건 아니었다. 제국의 중심이니만큼, 각하 소리 들을 수 있는 사람이 꽤 많긴 했다. 아마 이들만 추려도 스물 남짓은 가볍게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

        하지만, 같은 각하 소리 듣는 사람들이라도 다 격이 같은 건 아니었다.

        ​

        ‘제국백 소리 듣는 사람조차도 말단으로 부려 먹히던 파벌이야.’

        ​

        심지어 황제 직속 기구인 감찰단이 나서서 움직이는 감사의 범위를 조정할 수 있을 권세를 가진 사람은, 각하 소리 듣는 사람 중에서는 몇 명 되지 않았다.

        ​

        수색의 범위가 확 줄어든다고 할 수 있었다.

        ​

        마리아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연신 내 손등을 두드렸다.

        ​

        다행히 새로 등장한 사람은 그저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따라온 것뿐인지, 저들은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갔다.

        ​

        그들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팔을 풀었다.

        ​

        “자, 이제 이 기분 나쁜 곳을 나가자고.”

        ​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

        그리고, 마리아의 상태가 조금 이상한 걸 깨달았다. 간단한 1위계 마법으로 작은 광구(光球)를 만들었다.

        ​

        “…마리아?”

        ​

        마리아는, 어째선지 팔을 가슴께로 딱 웅크리고 수정구를 감싸 쥔 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

        “뭐야,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

        ​

        이건 중대 사항이었다. 바로 마리아의 앞으로 돌아가 여기저기 상태를 살폈다. 적어도 옷 위로 드러나는 이상은 없었기에 더욱 걱정스러웠다.

        ​

        마리아는 그런 내게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

        “호, 혹시, 제 심장 고동이 다 느껴졌었나요…?”

        ​

        “응? 그야 그렇지. 근데 그게 왜?”

        ​

        내 말에, 마리아는 더욱 몸을 웅크리며 고개를 돌렸다.

        ​

        “그게, 저, 저도 빌의 맥박이 느껴져서….”

        ​

        그 말에, 나도 내 얼굴에 피가 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

        조금 전까지 긴장하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

        우리, 진짜 엄청나게 부끄러운 자세로 숨어 있었다는걸.

       


           


I Wished for Romance, but it Turned Out to be a Romance Fantasy

I Wished for Romance, but it Turned Out to be a Romance Fantasy

낭만 판타지를 꿈꿨는데 로맨스 판타지였다
Score 7.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dreamed of a life filled with romance¹ and romanticism, but I didn’t dream of a romance fantasy… —- ¹ The “Romance” here means a feeling or atmosphere of something new, special and exciting, e.g., a hero’s adven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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