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27

   

    “궁금해요?”

   

    서준의 물음에 추령이 입을 꾹 다문 채 그를 바라보았다.

   

    서준의 입꼬리가 삐죽 올라갔다.

   

    “별거 없는데요. 그냥 조금 미안해서요. 어떻게 보자면 연緣인 거죠.”

   

    우연히 만났고, 우연히 사건을 겪었고, 우연히 힘을 얻어, 우연히 재회했다.

   

    서준은 운명을 신봉하진 않지만 닿은 연을 아낄 줄은 알았다.

   

    그것이 어떠한 종류의 연이건, 이미 이어진 연은 도로 무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별거 없죠?”

    “…그렇네요.”

   

    힘없이 늘어진 추령이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서준으로서는 처음 보는 미소였다.

   

    이내 그녀는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시를 읊듯 말했다.

   

    “그쪽에게는 별거 아닌 일이었지만 제게는 아니었던 거네요. 본래라면 그쪽과 만날 일 없이 기녀로 죽었을 하잘것없는 삶이 우연히 연이 닿아 기적이 된 거겠죠. 이것 또한 연. 그렇죠?”

   

    밝은 미소. 그녀를 내려다보던 서준이 픽 웃었다.

   

    “이제 보니까 그냥 뒀어도 기녀로 성공하긴 했겠네요. 시를 읊든 노래를 하든.”

    “그러기 전에 죽었겠죠.”

    “그러려나. 이제 없을 일이니 아무래도 좋죠, 뭐.”

   

    읏차, 서준이 허리를 쭈욱 폈다.

   

    어쩐지 이쪽을 아니꼬운 기색으로 바라보고 있는 춘봉이의 모습이 보여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래, 연이지.’

   

    자신과 닿은 가장 소중한 연 하나가 저곳에 있었다.

   

   

    *

   

   

    데굴데굴 기녀들이 흙먼지 경단이 될 때까지 마음껏 굴려댄 서준은 그녀들을 거처에 넣어주고 다시금 연무장으로 나왔다.

   

    이번 갑주귀와의 전투. 압도적으로 이겼지만, 생각할 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많았던 전투였다.

   

    혼원일월지와 호신공.

   

    그 두 가지 무공을 제쳐두고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하나의 고민거리.

   

    ‘양기와 음기가 만나면 터진다. 그게 과연 맞는 걸까?’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만약 그렇다면 양기를 사용하는 무인과 음기를 사용하는 무인이 싸운다면 둘 모두 목숨을 장담하기 어려울 것이다.

   

    열양지공을 익힌 자와 음한지공을 익힌 자가 자폭 테러를 마음먹는다면 경지를 훌쩍 뛰어넘은 힘을 쓸 수도 있겠지.

   

    뭐, 사실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어찌 됐든 무공은 잘 써먹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식으로 넘어가면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춘봉이가 위험해.’

   

    최초, 그녀에게 영약을 먹이고 음양반전의 수법으로 절맥을 치료했을 때.

   

    만약 그때 춘봉이의 몸 안에서 양기와 음기가 만나 터졌다면?

   

    “후우….”

   

    숨을 내쉰 서준이 눈을 감았다.

   

    눈꺼풀 너머로 빛이 아른거린다. 

   

    그는 옅게 비치는 노을빛을 따라 정처없이 걸음을 옮겼다.

   

    이내 눈꺼풀 위로 그림자가 졌다.

   

    눈을 떴다.

   

    그의 눈앞을 벽 하나가 가로막고 있었다.

   

    벽 위로 손을 올렸다. 

   

    돌로 이루어진 단단한 벽. 지금의 자신이라면 어렵지 않게 부술 수 있었다.

   

    쿵! 쿵!

   

    하지만 맨손으로 아무리 두드려본들 벽은 부서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멍하니 벽을 두드리던 서준은 문득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붉게 물든 주먹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린다.

   

    피를 옷에 문질러 닦은 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뭘까.”

   

    아직 피가 묻은 손을 벽에 짚고 벽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피로 이어진 선이 그의 걸음을 따라 함께 이어진다.

   

    그렇게 걷던 끝에 문에 다다른 서준이 문지방을 넘었다.

   

    “옳거니.”

   

    취한 듯 비틀거리며 양손에 음기를 휘감았다.

   

    차갑게 얼어붙은 바람이 그의 손에 머무른다.

   

    스쳐지나간 나무를 떠올리고 걸음을 되돌려 그 앞에 섰다.

   

    똑똑

   

    노크하듯 두드리니 나무가 하얗게 얼어붙었다.

   

    “음陰이로다.”

   

    하얗게 웃은 서준이 황룡도하의 수법으로 나무 꼭대기까지 단숨에 뛰어올랐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은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었다.

   

    떨어지는 해. 물드는 하늘. 그 위로 달이 떠오른다.

   

    달빛에 반짝이는 백색의 나무. 서준이 손가락 끝에 온기를 담아 살짝 문질렀다.

   

    화아악-!

   

    녹아내린 나무의 잎사귀가 모조리 떨어져내렸다.

   

    그것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서준이 한숨을 내쉬었을 때, 그의 발밑에서 작은 새순 하나가 솟아났다.

   

    “양陽이로다!”

   

    신이 나 나무에서 뛰어내린 서준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언젠가 다시 겨울이 온다.

   

    음과 양이 순환하니 그것이 곧 태극이라.

   

    “오호통재라!”

   

    삶의 덧없음이 이토록 처량하구나!

   

    꺼이꺼이 울던 서준이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머리 위로 떠오른 달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을 뻗었다.

   

    하지만 달에 손끝이 닿는 일은 없었다.

   

    무림. 이 무정한 세계.

   

    하늘에 떠있는 달의 모습은 변한 것이 없는데,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은 너무 크게 변해버렸다.

   

    “이 또한 연.”

   

    떠오른 달이 질 때까지, 뻗어진 손은 달을 붙잡지 못했다.

   

   

    *

   

   

    “…야!”

   

    희미한 목소리에 눈을 떴다.

   

    “야! 정신 차려! 너 여기서 뭐 해!” 

    

    춘봉이? 퍼뜩 몸을 일으키니 춘봉이가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 괜찮은 거야?”

    “어? 뭐가?”

   

    자리에서 일어나 몸에 묻은 흙먼지를 탈탈 털었다.

   

    “아, 피.”

   

    주먹에 달라붙은 피딱지들이 갈색으로 굳었다. 서준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나 어제 술 마셨냐?”

    “아니.”

   

    춘봉이 바짝 다가와 진지한 눈으로 물었다.

   

    “너 진짜 어디 이상한 데 있는 거 아니지?”

    “아니? 완전 멀쩡한데?”

    “그러면 다행인데….”

   

    서준의 몸을 주욱 훑은 춘봉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 있으면 꼭 나한테 말해야 된다?”

    “도와주게?”

    “당연하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진지하게 말하니 몸둘 바를 모르겠다.

   

    “이, 이 새끼…! 이 기특한 자식!”

   

    춘봉이를 번쩍 안아들어 목마 태웠다. 웬일인지 춘봉이가 난동을 피우지 않고 얌전하다.

   

    “…오늘만 봐준다 내가.”

    “뭣…! 오늘 금춘봉 이용권이 공짜라고!?”

    “이 새끼 씨발…. 너 꾀병이지 개새끼야!”

    “꺄아악…! 머리카락은 안 돼…!”

   

    금춘봉의 손아귀로부터 필사적으로 머리카락을 지켜냈다.

   

    “너는 오빠가 대머리가 되면 좋겠니?”

    “흠…. 민머리는 좀 때려보고 싶긴 했어. 찰싹찰싹. 재밌을 거 같은데.”

    “…나중에 하나 잡아줄 테니까 때리렴. 오빠 머리카락 벗길 생각하지 말고.”

   

    금춘봉 무서운 아이…!

   

   

    *

   

   

    몸을 씻으러 방으로 돌아온 서준은 피딱지 진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흠.”

   

    어렴풋이 남아있는 어제의 기억.

   

    다른 것보다도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깨달음이 아지랑이처럼 눈앞에서 일렁이는 게 아주 좆같았다.

   

    그것뿐이었다면 그냥 좆같구나 하고 끝났겠지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기에 오히려 기분은 좋았다.

   

    “춘봉이 몸이 터질 일은 없겠네.”

   

    음기와 양기가 만난다고 무작정 터지는 게 아니다.

   

    태극을 이루려다 실패했기에 응축된 기운이 터져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알아듣기 쉬운 예를 들자면…, 그래. 아주 좁은 공간 안에 물을 넣고 가열한 셈이다.

   

    물이 증발하며 수증기가 되고, 그 부피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탓에 겉껍질이 버티지 못한 거다.

   

    그러면?

   

    퍼엉-!

   

    혼원일월지 완성이다.

   

    “흐음.”

   

    문득 드는 충동에 서준이 손 위로 황운신공의 내기를 둘렀다.

   

    “어?”

   

    금빛으로 일렁이는 기운이 평소보다 진하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서준이 방을 뛰쳐나갔다.

   

    “금춘봉! 이거 봐!”

    “어? 뭘 보라는…, 푸웁…!”

   

    춘봉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야! 야! 이 정신 나간 새끼…! 옷! 너 옷 안 입었잖아 미친놈아!”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그거만큼 중요한 게 어딨는데 미친 새끼야!”

    “이거 보라고!”

   

    서준이 손을 내밀었다.

   

    춘봉이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려다 퍼뜩 위로 치솟았다.

   

    “어, 어!? 뭔데!”

    “진해졌어! 이게 강기罡氣냐!?”

    “강기겠냐!”

    “이런, 아니야?”

    “아니니까 빨리 들어가! 남들 보면 어쩌려고 이러는….”

   

    홱-! 춘봉이의 고개가 돌아갔다.

   

    “…어머.”

   

    추령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저 정도면…. 히익….”

   

    배꼽 언저리를 손끝으로 문지르던 추령이 고개를 숙이고 후다닥 사라졌다.

   

    “저, 저…! 저 변태 같은 년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춘봉이가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얘는 왜 이렇게 화났어. 알몸 노출은 내가 했는데.

   

    “아무튼 난 다시 들어간다?”

   

    이게 강기가 아니네. 아쉽게 됐다.

   

   

    *

   

   

    목욕을 마치고 나와 이유도 알 수 없이 춘봉이에게 실컷 얻어맞은 뒤.

   

    서준은 제 손의 진해진 내기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냥 태극에 대해 뭔가 깨달은 게 있어서 그런 건가?”

    “그렇…, 겠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제 뺨을 찰싹 때린 춘봉이가 고개를 홱홱 저었다.

   

    용서할 수 없다.

   

    “아니! 내 뺨 왜 때려!”

    “뭔 개소리야? 내 뺨 때렸는데.”

    “네 볼따구는 내 거야!”

    “…지랄.”

   

    한숨을 내쉰 춘봉이 손을 내밀었다.

   

    “강기는 그리 단순한 게 아니야. 검기성강劍氣成罡이라는 말은 들어봤냐?”

    “어…, 대충?”

    “검기성강. 검의 기가 별을 이룬다는 말이야.”

    “별? 뭐 시적인 표현인가?”

    “아니. 말 그대로야.”

   

    춘봉이의 눈이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듯 흐려졌다.

   

    “…아버지의 검강을 본 적이 있어. 그때 비로소 깨달았지. 기氣에 스스로의 별을 새기는 것. 그것이 곧 초절정의 경지라고.”

    

   

    

   

    

   

   

   

   

   

   

   

다음화 보기


           


Martial Arts Ain’t That Big of a Deal

Martial Arts Ain’t That Big of a Deal

무공 뭐 별거 없더라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fell into a phony martial world. But they say martial arts are so hard? Hmm… is that all there is to it?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