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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7

    <27 – 0.1%의 지뢰는 피해야죠>

     

    서부귀족연합.

    게임에서도 종종 등장했던 조연패거리다.

    다른 지역에도 귀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쪽 귀족들은 특히 존재감이 크다.

     

    “그런 비싼 마갑을 입고도 불 피우는 법을 모른단 말입니까?”

    “아아? 그런 거 알 리가 없지 않느냐. 불은 하인들이 알아서 피워주는 건데.”

    “…….”

    “그 엄청난 무기들은 들고 어디다 쓰려고?”

    “사냥감은 잡았다! 이 꼴이 되었지만…….”

     

    걸레짝이 되어버린 몽구스를 들어 보이는 화려한 귀족예복을 입은 귀족.

    쓸데없이 비싼 복장과 번쩍거리는 무기 때문에 지뢰라도 밟은 것처럼 아작 난 몽구스 시체가 한결 더 처참하게 대비된다.

     

    “그,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라! 이 몸은 서부귀족연합에서도 서열 3위, 고속검의 앤서니란 말이다!”

     

    앤서니.

    근사한 별명이야 어찌됐건 이름보다는 성이 더 유명한 녀석이다.

    성이 소보로거든.

    유저 사이에서는 소보로빵이 부스러기가 잔뜩 떨어지는 것에 빗대어 멘탈이 약한 놈을 소보로급 멘탈이라고 부르고는 한다.

    요컨대 안 좋은 의미로 유명한 조연이다.

     

    “무시하지 마! 내가 베지 못하는 것은 모기와 피로, 졸음과 허기짐, 갈증밖에 없다!”

    “…….”

     

    스스로를 저 정도로 비하할 수 있다면 멘탈이 약하다고 봐야할지, 강하다고 봐야할지는 모르겠지만.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검술명가로 유명한 소보로가의 자제가 올해 입학시험에 도전한다고. 소문의 주인이 앤서니 소보로님이었군요.”

    “너 좋은 놈이었구나! 역시 턱수염을 기르는 놈 중에 나쁜 놈은 없어.”

     

    서러울 때는 가벼운 위로에도 마음이 크게 흔들린다더니 지젤 씨한테 호감도가 엄청 올라갔다. 아주 의형제라도 맺을 기세네.

     

    “아무튼 우리 좀 도와줘!”

    “사례는 뭐든지 할 테니까!”

    “너희는 미천한 평민이니까 이런 일은 익숙하잖아!”

    “…….”

     

    사례도 한다고 했고 무진장 불쌍해 보이니까 눈 딱 감고 한 번만 도와줄까…싶었던 생각이 와장창 무너져 내렸다.

     

    “흥, 그냥 가버리죠.”

    “동감이야. 아이까지 싸잡아 무시하는 자에게 온정을 베풀 이유가 없지.”

    “우하하, 쥐방울 녀석이 간만에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하는구나.”

    “그런 관계로 도움은 베풀어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이만.”

     

    손오천은 흡 하고 숨을 들이마시더니 기합으로 모닥불을 꺼뜨렸다.

     

    “아아아…!”

    “고기를 구워먹을 수 있는 불이!”

    “추, 추위에 얼어붙은 몸을 녹일 소중한 불이!”

    “미천한 평민이 지펴놓은 불을 쓰면 자존심이 상하겠지? 체면 걱정 안하게 해줬으니 고마워하라고. 우하하하!”

    “아까 헛소리 했던 놈 누구야!”

    “유타오 남작가의 자제입니다.”

    “가문에 편지를 써야겠어. 올해 수확제에는 유타오 남작가는 초대하지 말자고.”

    “지도 말단귀족인 주제에 무슨 생각으로 미천한 평민 같은 말을 쓰고 다니는 거야?”

    “멍청한 놈.”

    “우우, 우에엥…! 잘못했어요. 제발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그래도 우는 모습을 보니까 마음이 약해지네.

    재수 없긴 해도 아직은 철없는 어린애.

    고쳐 쓰지 못할 수준은 아니다.

     

    “그만.”

    “안데르센 공자님…….”

    “귀족은 자신의 발언을 책임질 줄 알아야 비로소 권력을 휘두를 자격을 지닌다. 유타오 가의 아이야. 네 실수를 수습할 기회를 주마.”

     

    이쪽이 마음이 약해진 걸 눈치 챈 걸까.

    서부귀족연합의 서열 1위.

    건국공신인 프레첼 대공가문의 차남.

    나름 비중이 있는 캐릭터인 안데르센 프레첼이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죄송합니다……훌쩍. 제 생각이 짧았던 탓에 기분을 상하게 해서…….”

    “심한 말은 나빠요. 아카데미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니까, 앞으로는 주의하세요.”

     

    지금쯤이면 악성향 패거리들도 본격적으로 설치고 다닐 무렵이다.

    질 나쁜 강자한테 걸렸다가는 시험이 끝날 무렵엔 서부귀족연합이 반 토막이 날지도 모른다고?

     

    “대신 아껴둔 간식 하나로 용서해줄게.”

    “저, 정말인가요?”

     

    유타오 가의 자제가 신이 나서 주머니에서 종이에 곱게 포장된 빵을 네 개 꺼냈다.

     

    “이거, 소형 마법배낭에 보관한 우리 가문의 비상식량이에요. 기름에 튀긴 빵인데 열량도 높고 맛도 좋은 편입니다.”

     

    참고로 유타오라는 건 실제로 있는 음식이다.

    이 세계의 귀족들에게는 현실의 요리이름을 가문이름으로 삼는 전통이 있다.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제작진이 샌드위치를 만들었다고 샌드위치 백작이라 불린 귀족의 일화에 감동이라도 받았나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이번 파파는 무슨 음식을 만든 가문일까?’

     

    얼굴도 모르는 파파가 어떤 가문명을 지니고 있을지도 은근히 두려운 부분이다.

     

    오크노디 찹쌀도넛.

    오크노디 갓김치.

     

    상상만으로도 아찔해져요…….

    물론 그렇게까지 토속적인 이름은 랜덤으로도 나오지 않는다.

    조나와 리프, 내게 배정된 가문의 사용인이 전부 서양인이었음을 떠올리면 한국음식을 본뜬 성이 나오지는 않을 거다.

     

    [요리도감에 일반요리 <유타오>가 수집되었습니다.]

     

    가문명 후보야 어쨌든.

    귀족가의 자제에게 은혜를 입혀두면 도감컬렉션에 음식을 추가할 수 있다.

    대귀족 가문까지 올라가면 레어요리도 준다.

     

    “우리 꼬마숙녀는 마음씨가 참 착하지 않습니까?”

    “쥐방울답게 물러터진 거지.”

    “사과받기 싫으면 그 빵은 저한테 주시던가요.”

    “으하하, 줄까보냐?”

     

    크큭. 바보 같은 사람들.

    식품도감을 채우려는 내 사악한 계획도 모르고 착한 아이처럼 생각하다니.

    이사벨도 깜빡 속았는지 따스한 손으로 머리를 어루만져주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착하게만 자랐으면 좋겠네.”

    “으히히.”

     

    이사벨의 곁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며칠만 더 착한 아이로 있어볼까?

    일주일. 아니, 이주만 더!

     

     

    * *

     

     

    식량사정이 풍족해진 우리는 적당한 곳에 자리 잡고 하룻밤 꿀잠을 자고 일어났다.

    숲이 꽤 길고 출구까지 비효율적인 동선으로 달린다는 사실을 기억하기에 느긋하게 하룻밤 휴식을 결정할 수 있었다.

    사실을 모르는 응시생들은 가장 마음이 급해지고 있을 무렵.

    숲 곳곳에서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주로 점수사냥에 당한 사람들의 비명이겠지.

     

    “두 번째 과제도 도전해볼 겁니까?”

    “재밌어 보이는데? 하자고.”

    “위험해. 비명소리가 끊이질 않잖아.”

     

    두 번째 보조과제는 쟁탈전.

    나무덩굴을 잔뜩 엮어서 만든 커다란 공 모양의 덩굴 중앙에 놓인 황금색 공을 뺏는 시합이다.

    공의 앞에는 심사를 맡는 교관이 야외테이블에 턱을 괴고 입장정원을 확인했다.

     

    “이 과제는 한 번에 여섯 명의 인원이 참여할 수 있고, 한 번 도전한 사람은 재도전이 불가능하다. 점수배점은 40점. 장외는 탈락이다.”

     

    다수에게 유리하고 소수에게는 불리한 과제.

    개인 단위로 활동하던 응시생들은 밑져야 본전이라며 도전하거나 빠르게 포기하고 다음 도전과제를 찾아 떠났다.

    우리야 이미 10점씩 점수를 얻어서 그런지 다들 여유가 넘쳤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크노디양.”

    “제가 결정해요?”

    “티켓시험과 1차 관문, 지난 보조과제까지 오크노디양은 마주한 모든 시험에서 뛰어난 재치를 보였죠. 신뢰하는 겁니다. 오크노디양의 판단을.”

    “뭘 재고 있는 거냐, 고용주 양반. 신뢰고 나발이고 이쪽은 네 명인데.”

    “그게 문제입니다. 저희는 모든 응시생의 눈에 띄었고, 4 대 2로 시험을 치를 사람은 없겠죠.”

     

    확실하게 6명을 모아 점수를 따는 것은 불가능.

    시험을 치르려면 인원을 쪼개어 도전해야 한다.

     

    “알고 있으면 다행이네. 한 명만 오라고.”

    “마침 우린 혼자 다니는 응시생만 다섯이 모였다.”

    “공평하게 개인전으로 가자.”

     

    함께 시험을 보자고 꼬드기는 응시생들.

     

    “오우. 그럼 내가 나설 차롄가?”

     

    손오천 아저씨가 자신만만하게 나서는 것을 팔을 붙잡아 말렸다.

     

    “안돼요.”

    “뭐냐. 네가 가고 싶냐?”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다음 과제나 치르러 가요.”

    “굳이? 저런 만만한 놈들을 놔두고?”

    “제 말 들어서 손해 본 적 없잖아요. 네?”

     

    손오천이 영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나와 대기자들을 돌아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1차 시험을 떠올려보면 쥐방울의 판단이 이 몸의 직감보다 뛰어나기는 했지. 알았다. 이번 한 번만 특별히 참아주마.”

    “참나, 기껏 신경 써줬더니 왜 그쪽이 선심을 써요? 그렇게 하고 싶으면 가서 하시던지.”

     

    새침하게 쏘아붙이니 손오천이 얄미운 표정을 지으며 앞장서서 멀어졌다.

     

    “가란다고 갈 줄 아냐? 멍청한 쥐방울. 절대로 안 갈 거다. 절대로.”

    “……다음부턴 절대로 힌트 안 줄 거야.”

    “으하핫. 어차피 뻔한 거였겠지. 다섯 놈이 한 편이거나 했던 거 아니냐?”

     

    위장 솔플 전략.

    2차 보조과제를 클리어 하는 공략법 중 하나다.

    확실히 그 전략을 구사하던 응시생이 네 명 있기는 했다.

    대략 9.9%의 확률로 등장하는 그룹이다.

    그것만이라면 나도 말릴 생각은 없었다.

    0.1%의 확률로 지뢰도 걸려서 말렸지.

     

    ‘절대로 이길 수 없는 대결이잖아.’

     

    덩치가 클수록 손해 보는 근력캐의 무덤.

    오크노디의 작은 몸을 지닌 지금이라면 잘하면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걸 감안해도 난이도가 지나치게 높다.

    0.1%의 확률로 마주하는 지뢰.

    그 정체는 악성향 조연캐릭.

    그것도 엄청난 강적이다.

    점수 좀 탐내다가 자칫 잘못하면 티켓시계까지 끊어진다고?

     

     

    * *

     

     

    “으아악! 풀어줘, 풀어줘어어!”

    “떨어지지가 않아, 떨어지지가 않는다고!”

    “이 자식, 우리가 연합한 걸 알아차렸던 거냐?!”

     

    넝쿨 공에 온 몸이 달라붙은 채로 내지르는 응시생들의 외침.

    무표정한 얼굴이 그려진 가면을 쓴 소녀는 키득키득 웃으며 그들을 비웃었다.

     

    “몇 명이 같은 팀이든, 누가 도전하든 상관없었어. 어차피 전부 쥐덫에 걸린 쥐새끼처럼 꼼짝도 못하게 만들 작정이었으니까.”

    “자, 잠깐! 티켓은 건들지 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제발 한 번만 봐줘!”

    “네, 탈락. 열등생들이 모인 하급 응시생들이랑 어울리러 내려가세요.”

     

    찌익 소리를 내며 경쾌하게 뜯어낸 티켓이 넷.

    당첨도 하나 있었는지 점수가 10점 올랐다.

    약탈점수 10점에 황금공 습득점수 40점.

    합격에 필요한 50점을 모두 모았다.

     

    “저, 저기! 난 쟤들 그룹이 아니야. 점수도 다 모았을 텐데 봐주면 안 될까?”

    “그럴까?”

    “휴우.”

    “라고 할뻔~. 봐줄 리가 없잖아. 이런 시시한 상대가 앞으로 몇 년간 얼굴 마주볼 상급반 동급생이라니. 상상만으로도 역겨워서 손이 떨린다고?”

    “아악!”

     

    찌익.

    시원스레 다섯 명 전원을 탈락시킨 소녀.

    쓰레기가 된 티켓시계 다섯 장을 등 뒤로 휙 내던지며 경쾌하게 걸음을 옮겼다.

    하다못해 꺼내주기라도 해달라는 외침은 이미 귓가에서 잊혀진지 오래였다.

    그녀는 1차 관문의 수석, 감이 좋은 아이를 떠올리고 있었으니까.

     

    ‘내 실력을 알아차린 눈치였지. 어떻게 알았을까?’

     

    자신의 기술을 보이기도 전에 간파 당했다니, 처음으로 겪는 일이었다.

     

    ‘다음에 보면 꼭 물어봐야지.’

     

    암살자들 사이에서만 전해지는 기술.

    이 기술을 알아차렸다는 건 너도 역시 암살자인거냐고.

     

    긁적긁적.

     

    “…….”

     

    그리고 모기한테는 어떻게 안 물렸냐고도 잊지 말고 물어봐야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모기퇴치를 게을리한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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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아카데미 흑막의 딸이 되었다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From the side, she looks pitiful and worn out, but in reality, she’s living her joyful survival story in the world of games.

But how can someone’s name be Okno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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