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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7

       일정이 늦춰질 걸 감안해 원래 시각보다 일찍 등교했다.

         

       아카데미 북쪽은 골렘으로 만선이었다. 지계마도사 몇 명이 마도골렘을 운영하며 무너진 건물 외벽을 수리했다.

         

       나는 그들의 작업에 방해가 가지 않도록 샛길로 돌아갔다.

         

       할 일이 많았다. 우선 도서관에서 마도이론 책 몇 권을 찾아봐야 한다.

         

       아직 학생증이 나오지 않아서 곧바로 도서관에 들어가는 건 무리였다. 학사팀에 이야기한 뒤 임시 통행증을 발급받았다. 예전에 ‘노예는 신분 인정이 안 된다’라며 도서관 출입증을 절대로 발급해주지 않았던 사람에게 아카데미 합격증명서를 보여주자 많이 놀란 얼굴이었다.

         

       “오.”

         

       도서관 내부를 방문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입시를 준비했을 때는 헤를라인 선생님이 대신 책을 대출해 주셨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내가 원하는 책을 마음대로 보고 고를 수 있다는 것이 뜻깊게 느껴진다.

         

       [□연구개발 중 : 마소─에너지 교환성 정리]

         

       우선 이 정리를 증명하려면 수학 서적을 찾아봐야 했다.

         

       학부생 수준으로는 될 것 같지 않다. 나는 대학원 열람실이 있는 5층까지 올라갔다. 누군가의 인생이 갈린 냄새가 진동했다.

         

       논문까지 찾아볼 필요는 없고, 딱 그 수준에 해당하는 수학 서적만 있으면 된다.

         

       [선형대수로 이해하는 4원소론]

       [고급 마도수리학]

       [화계마도에서 군론과 표현론이 쓰이는 방법에 관하여]

         

       이 세 권을 빌리기로 했다.

         

       내가 수학을 개못한다… 라고 하면 그건 기만이다. 하지만 현직 이론물리학을 하거나 순수 수학을 전공한 사람들에 비교하면 모자란 점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마도이론을 개발하려면 보다 어려운 수학이 필수적이다. 나는 이 부분을 다시 공부하려고 열람실을 찾았다.

         

       대출을 받은 뒤 교실로 직행했다. 나보다 먼저 온 학생들이 보였다. 그중 한 아이가 나를 발견하더니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에테르!”

         

       적색 머리칼에 홍색 눈동자.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은 빗으로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고, 별다른 화장을 하지 않았음에도 피부는 새하얗다. 귀족가의 자제와도 같은 외양이었다.

         

       실제로 그랬다. 로테는 서쪽 변경을 관리하는 살리에르 변경백의 영애였으니까.

         

       교실에 먼저 들어온 사람이 원하는 자리를 선점하는 건 그 학생의 특권이다. 대개 그런 학생은 맨 뒷자리에 앉으려는 경향이 있다. 이건 이쪽 세계나 저쪽 세계나 똑같았다. 예상대로 먼저 온 몇몇 학생이 뒤쪽 창가 자리를 차지한 상태였다.

         

       로테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맨 앞자리에 앉아있었다.

         

       그것도 교탁 바로 앞이다. 이쯤되면 학생보다 선생이 더 부담을 가질 듯 싶은데.

         

       어떻게든 새로 만날 담임선생님과 진한 아이컨택을 하겠다는 의지가 돋보인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학구열로 불타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나는 로테와 인사를 나눈 뒤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칠판이 정면에서, 그것도 가장 가까이에서 보이는 자리였다.

         

       뒤이어 여러 명이 더 들어왔다. 그중 몇몇은 한 번 봐서 익숙한 얼굴이었다.

         

       “야! 우리 역시 같은 반이었구나?”

         

       프레이. 성씨가 아마 ‘셸커니’였나.

         

       제국식 성씨는 아니다. 그렇다고 엘프국에서 쓰는 성씨도 아니다.

         

       키가 작은 걸 가지고 꼬맹이라고 놀리면 발작하던데, 정작 자신은 스스로를 드워프라고 생각하며 자랑스러워했다. 아이러니였다.

         

       또 다른 한 명은 엘프 남학생이었다.

         

       ‘버멜 호르데’, 현재로선 의문점이 가장 많은 녀석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제 마수 습격의 상황에서 여유롭게 대처했기 때문이다. 마치 그 일이 일어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혹시 나 말고 이쪽 세계로 건너온 지구인이 더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애초에 버멜은 내가 어떤 마도를 익히고 있는지도 아는 눈초리였다. 다른 사람들이 날 두고 ‘금안족이니까 마법을 못 쓰겠지’라고 생각하던 것과는 영 딴판이었다.

         

       [혹시 모르죠. 회귀자일지도.]

         

       회귀자?

         

       [시간 역행을 한 사람이요. 원래 이 세상에 살고 있던 엘프였는데, 모종의 이유로 시간이 한 번 되감긴 거예요. 그때 우리를 포함한 다른 인물들은 전부 그 사실을 잊어버렸는데, 저 엘프만 기억이 남아있다든지.]

         

       글쎄. 그쪽은 가능성이 없을 것 같다. 타임 패러독스가 생길 테니까.

         

       나는 실험물리학에서 오랫동안 구른 사람이었기에 관측되지 않은 건 쉽게 믿지 못하는 습관을 지녔었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평행우주나 웜홀, 암흑물질 같은 것들도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실험적으로 완전히 확인되기 전까진 그냥 무수한 가설 중 하나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버멜이 회귀자라는 가설은 내 머릿속에서 금방 지워졌다. 다만 여신이 나 말고도 다른 사람을 이 세계에 떨궈놨다는 가설은 나름 설득력 있었다. 이미 본인이 한 번 당했으니까.

         

       버멜이 그랬다면 본연의 모습 그대로 온 건 아닐 것이다. 지구엔 엘프가 없었으니까.

         

       가능성은 두 가지다. 애초에 엘프로 환생했다든지, 아니면 애초부터 잘 살아오던 엘프의 정신이 여신의 권능에 의해 덧씌워졌다든지.

         

       [그런 걸 보통 빙의자라고 불러요.]

         

       그래. 양장본 말대로 버멜이 빙의자라고 하자.

         

       그러면 나도 이쪽 세계에 있는 어떤 소녀의 몸을 빌려 빙의자가 됐단 소리였다.

         

       그리 생각하며 버멜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굴을 마주쳤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읽기 위해서였다.

         

       나와 정면에서 눈이 맞은 버멜은 필기시험을 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영 좋지 않은 얼굴색을 보이며 은근슬쩍 시선을 회피했다.

         

       쟤 왜 저러지?

         

       [뭐지. 그린라이튼가?]

         

       개소리하네.

         

       원래는 같은 남자였던 내 시선에서 봤을 때 저건 호감을 표하는 눈동자가 아니다.

         

       뭐라 해야 하나. 마치 날 꺼리는 것 같은데.

         

       [빙의자에도 여러 갈래가 존재해요. 소설을 보다가 그 소설 속 세상의 인물에 빙의하는 경우, 아니면 게임을 하다가 자신의 게임 캐릭터로 빙의하는 경우 등등 다양하죠.]

         

       소설? 게임?

         

       그런 얘긴 들어보질 못했다.

         

       오히려 여신이라는 존재가 자신이 관리하는 세계를 모티프로 그런 상품을 마케팅한 뒤 걸려든 사람을 그물로 낚았다고 생각하는 편이 개연성 있었다.

         

       여신이란 존재는 이미 내 안에서 관측된 존재니까. 이해할 순 없어도, 납득할 순 있다. 마치 물리학자들이 양자역학을 처음 받아들였을 때처럼.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는 게 낫겠네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설 단계다. 확증된 게 아닌 이상 여러 가지 가설을 세워둔 뒤 가능성 높은 걸 검증하는 식으로 다가가야 한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대놓고 ‘나 너와 같은 처지인데’라고 들이대면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만약 버멜이 빙의자가 아니라면 내 쪽에서 무안해지기도 할 테고.

         

       버멜은 나와 로테가 있는 쪽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그럼에도 그가 보내오는 시선이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대놓고 감시당하는 기분이다.

         

       당장 인간관계에선 저 엘프를 주목할 필요가 생겼다. 로테나 프레이하고는 잘 지내는 편이니까. 

         

       “하스펠트 공작 밑에 있던 노예가 넌가?”

         

       이 새낀 또 뭐야.

         

       다음으로 들어온 녀석은 보기만 해도 피곤해지는 외모였다.

        

       모든 손가락에 금반지를 끼었으며, 그 외에도 목걸이나 팔찌 등등 몸에 장신구를 걸치고 다녔다. 마치 자신이 높은 사람이라고 사방에 아우성치는 느낌이었다.

         

       뭐라 해야 하나.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의 러시아 궁전이 살아서 걸어다니는 것 같았다.

         

       “누구세요.”

       “이런, 천민 출신이라서 날 잘 모르나? 하긴 그렇겠지. 보통이라면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대화조차 할 수 없는 몸이니 말이야.”

         

       싸가지가 바가지인 녀석이었다.

         

       잠시 내가 왜 틸레트 아카데미에 합격하려고 했는지 되짚어봤다. 그러자 눈앞의 이 녀석이 왜 나한테 시비조로 말을 걸었는지 알 수 있었다.

         

       필리우트 제국의 제2황자.

         

       아마 이 새끼가 그 새끼일 것이다.

         

       운 한 번 더럽게 안 좋네. 실력은 있다 이건가? 입시에 지원했다는 얘기는 소문으로 들었지만, 설마 합격한 것도 모자라 특별반에 배정되었을 줄은 몰랐다.

         

       이제 와서 문제가 될 만한 사항은 아니었다. 내가 궁중으로 팔려나간다는 등신같은 시나리오는 진작 무너진 지 오래였으니까.

         

       내가 할 일은 하나, 틸레트의 마당에서 보호받으며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모든 마도를 익히는 것이다.

         

       겸사겸사 절멸급 마수를 잡을 수 있는 방법도 개발하고. 안 그러면 마법을 다 익히기 전에 대륙이 망할지도 모를 테니까.

         

       “그렇다면 내 소개를 하지. 나는 이 나라의 차기 황제 되실 분이다.”

         

       그러자 곁에 있던 로테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내게 귓속말을 전했다.

         

       “클리온 필리우트 제2황자야. 여색을 밝히기로 유명해. 신분 좀 낮고 반반하게 생겼으면 일단 들이대고 본다는 모양이야.”

         

       그럴 거 같더라.

         

       “그쪽은 살리에르 영애였나? 방금 뭔 말을 주고받은 거지?”

       “전하 이름을 알려드렸어요.”

       “그렇군. 아, 참고로 오해하지는 마. 나는 신분에 상관없이 아름다운 여인이라면 받아들인다는 주의거든. 가문 따위엔 얽매이지 않아.”

         

       그걸 그렇게 포장하는 것도 재주라고 생각한다. 백작급 이상은 건드렸다간 반항이 있을 수 있으니까 일부러 남작이나 평민 애들만 찾아다가 골라서 먹는단 소리 아냐?

         

       당장 황제한테 가서 왜 자식 교육 제대로 안 했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자칭 차기 황제라는 녀석이 이러면 나라 꼴이 어떻게 될까? 아, 너무너무 궁금하다!

         

       “오늘은 첫 대면이니 이 정도만 얘기해주지. 날은 많으니까 앞으로 천천히 대화해 보자고.”

         

       황자와의 초면은 영 좋지 못했다. 적어도 내 쪽에선 그랬다. 몸이 여자가 되니 별 병신같은 녀석한테 대시를 받는구나.

         

       조금 열이 뻗친다. 대륙에 인간도 많고 엘프도 많은데 왜 하필 소수종족인 금안족 소녀의 몸으로 들어왔을까 해서.

         

       황자가 떠나자마자 나는 로테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저 황자라는 사람, 원래 저런 성격이야?”

       “아니, 어릴 적 만났을 땐 저 정도까지 밝히진 않았어. 언젠가부터 선을 넘을 정도로 여자에 미쳤다고 하더라고. 왜 저렇게 됐는지는 나도 몰라.”

         

       어느덧 남은 학생들도 들어와 하나둘씩 제 자리를 찾아갔다. 고딕 양식으로 지은 첨탑에서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조례를 알리는 종소리였다.

         

       아카데미 저학년은 사실상 고등학교 학제와 다를 바 없다. 반별로 담임이 있고, 학생들은 한 반에서 수업을 들으며, 한 선생님이 여러 반을 돌아다니며 같은 수업을 여러 번 한다는 점에서.

         

       물론 대학식 학사제도가 아예 남아있지 않은 건 아니다.

         

       일단 수업 시 앉는 자리가 자유다. 전공책이나 기타 소지품은 복도에 있는 사물함에 넣어두고 필요할 때마다 가져오면 된다.

         

       으음, 대학교 중에 지정좌석제가 있는 곳이 있었나? 만약 그런 데가 있으면 웃기겠다.

         

       “선생님 오신다!”

         

       복도 밖에서 구둣발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마치….

         

       [제반 이론 : 도플러 효과]

         

       아, 존나 깨네.

         

       이럴 땐 좀 가만히 있으면 안 되나?

         

       [미안해요. 근데 이거 자동이라서요.]

         

       그래, 이 정도는 괜찮지. 오늘이 어떤 날인데.

         

       지금의 난 텐션이 올라간 상태였다. 오랜만에 가르침을 받는 입장으로 돌아오니 나름 기대된다. 담임선생님만 좋은 분이시라면 더할 나위 없겠다.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렸다. 담뱃내가 섞인 라벤더 향이 코끝을 찔렀다.

         

       담임 될 사람이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이내 교탁이 있는 바로 앞까지 걸어왔다. 교탁에서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분필을 집어든 담탱이가 자신의 이름을 한 글자씩 적기 시작했다.

         

       ─ 클라이스 하스펠트

         

       “…만나서 반가워요. 이번에 특별반 담임을 맡은 클라이스 하스펠트입니다. 일 년간 잘 지내봐요.”

         

       말을 마친 담탱이가 나를 잠깐 내려다봤다.

         

       [오우 앁…….]

         

       내일부터 뒤에 앉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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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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