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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7

       

       

       

       

       

       제 3 대공녀의 이름에 별안간 소란스러워졌던 응접실의 분위기가 다시금 가라앉았다.

       아리엘이 머쓱히 웃으며 자리에 앉아야 했다.

       

       “너, 너무 나 혼자 떠들었지? 미안.”

       “…괜찮습니다.”

       “대공녀님께서 주인공인 소설을 5번이나 읽었었거든. 애정하는 주인공 중 한 명이라 그만 호들갑을 떨어버렸네….”

       

       긁적.

       뒷머리를 긁은 아리엘이 혹시 책 제목을 묻지 않을까? 하며 기대했지만, 애석하게도 망상덩어리 자서전 같은 건 르미앙의 관심을 단 1도 끌지 못 했다.

       결국 기대를 접은 아리엘이 잠시 망각했던 본론으로 돌아가야 했다.

       

       “근데… 대공녀님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뵌 적도 없는, 자신의 존재조차 모르실 제 3 대공녀께서 대체 무슨 말씀을 전하시려는 걸까.

       그것도 이 야밤을 틈타, 어둠 속에서 말이다.

       다소 긴장된 얼굴로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는 아리엘.

       온기를 느껴보고자 함이었지만, 어느새 찻잔은 식어있었다.

       응접실의 기류처럼.

       

       잠시 후.

       

       에린시아의 입에서 또 다른 이름이 나왔고, 그제야 대공녀께서 제 사람을 보낸 이유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아리엘이었다.

       

       “요즘 엘든 라펠리온 공자님과 함께 독서하고 계시죠?”

       

       시녀가 혼약대전 후보자와 겸상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했었던 이유와 비슷하리라.

       하지만 엘든은 기권자였고, 그 기권 선언에 일절 개입하지 않았기에 대공녀께 쓴소리를 들을 일도, 책을 잡힐 일도 없을 거라 단언했었다.

       

       우연히 재회한 아카데미 동급생.

       공통된 취미를 함께 즐길 뿐인 동급생.

       밥 먹을 친구가 없어 함께 식사할 뿐인 동급생.

       독서란 새로운 세계에 이제 막 눈을 뜨고 있는 동급생.

       

       아리엘에게 엘든은 그런 존재였다.

       

       물론 함께 하는 시간이 너무도 즐거워 미소가 끊이지 않았지만, 추천해 준 책을 재밌게 읽는 그의 모습에 자꾸만 눈길이 갔지만, 그건 그저 독서 친구가 생겼다는 것에 기뻐서 짓는 미소였고 눈길이었을 뿐이다.

       엘든과의 독서 시간이 기다려지는 것도 모두 그러한 이유였을 뿐이며, 그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지는 것도 같은 이유였으며, 헤어짐에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도 모두 같은 이유였다.

       순수 문학이란 공통점으로써 시작된 관계였고, 그것이 아니었다면 시작조차 되지 않았을 관계.

       엘든 또한 자신에게 이성적 관심이나 호감을 보이고 있지 않았으니, 이 건전한 독서 모임이 문책을 당할 일은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응.”

       

       편히 대꾸한 아리엘이었다.

       동시에, 르미앙이 눈매를 날카로이 좁혔다.

       이제부터 [사랑]이란 가설의 본격적인 검증 시간이 시작될 것임을 시사하는 시선이었다.

       

       “함께 식사도 하시고요.”

       “응. 왜?”

       “그럼 엘든 라펠리온 공자께서 기권 선언을 하셨다는 것도 들으셨겠네요?”

       “응. 근데 반려됐다고도 들었어.”

       “혹시 이유에 대해서 얘기하던가요?”

       “자격이 부족해서 그랬다고 하던데?”

       

       들었던 것과 같은 이유에, 르미앙이 옅게 고개를 주억였다.

       초장부터 원하는 것을 쟁취하게 되리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집요하게, 그리고 은은하게 파고 들어 엘든의 기권에 대한 해답을 캐내고 마리라.

       

       “…그런가요. 다른 말은 없었고요?”

       “다른 말?”

       “뭐, 기권에 대한 이유가 더 있을까 해서요.”

       “없었어.”

       “그럼, 향후의 계획에 대해선 얘기하지 않던가요?”

       

       어제 점심이었다.

       한창 독서 얘기를 하다 문득 나왔던 주제가 바로 향후 계획.

       기권자가 우승할 리 없을 거란 전제를 바탕으로 깐 채, 혼약대전이 끝나고 나면 무엇을 할 거냐 물었던 것이다.

       그에, 엘든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었다.

       이미 그 계획을 실행한 것처럼 행복한 얼굴로 말이다.

       

       “식도락 여행을 떠날 거라던데?”

       “…네?”

       

       르미앙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동시에, 찻잔을 쥐고 있던 오른손의 검지가 튕겨지기 시작했다.

       엘든과 첫 대면 때, 저도 모르게 했던 버릇.

       흥미로운 주제를 관찰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고, 엘든의 향후 계획에 [식도락 여행] 같은 것이 있으리라곤 상상하지 못 했던 르미앙에겐 흥미로운 정보였다.

       

       “식도락 여행이라…….”

       “응. 그래서 나한테 몬스터 요리에 관련된 책도 추천해줄 수 있냐 묻더라고. 아쉽게도 그쪽은 취미가 없어서 못 해줬지만.”

       “…네? 몬스터 요리요?”

       

       몬스터 요리.

       그 단어가 대화에 끼어든 순간, 르미앙의 머릿속엔 혐오스런 붉은 롱거의 다리를 맛있게도 뜯어 먹던 엘든의 모습이 떠올랐다.

       살점을 한 입 야무지게 뜯어 먹고는 손가락 끝에 묻은 기름까지 빨아먹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설마, 자신이 당했던 식고문의 공포를 알려주려 했던 것이 외려 새로운 맛에 눈뜨게 만들어버린 걸까.

       

       ‘어쩐지… 정말 맛있게 먹더라니.’

       

       기권자란 이유로 한 입만 먹겠다던, 그 한 입을 뜯고 붉은 롱거의 다리를 내려놓는 손이 못내 아쉬워 보였던 것이 진심이었다니.

       찻잔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어금니가 억세게 맞물렸다.

       제 계획을 헝클며 얄밉게 빠져나가는 엘든에게 외려 ‘좋은 일’을 해준 듯한 느낌은 벌레를 씹던 그때와 다를 바 없었다.

       역했다.

       치가 떨려왔다.

       그럼에도, 아리엘 앞에선 평정을 유지해야 했기에 한숨 한 번에 모든 것을 털어냈다.

       

       “하….”

       “왜 그래?”

       “아니에요. 혹여 기권을 철회할 생각은 없다던가요?”

       “없는 거 같던데?”

       “…눈곱만큼도 없다는 건가요?”

       “내가 보기엔 그랬어.”

       “….”

       

       삶은 감자를 물없이 연거푸 먹는 듯한 답답함.

       마나 베리어라도 걸린 듯 던지는 족족 튕겨져 나오는 질문들.

       기대했던 상황과 정반대로 흘러가는 흐름에, 르미앙이 본론을 꺼내들기로 했다.

       

       “…혹시 영애님께선 기권의 다른 이유에 대해 짐작가시는 건 없나요? 이를 테면 다른 이와 사랑에 빠졌다던지?”

       

       한데, 아리엘이 입술을 오므렸다.

       서늘해진 밤공기만큼은 아니지만, 적갈색 눈동자에 차가운 빛이 서렸다.

       왜인지 취조를 당하는 듯한 기분은 늘 유쾌했던 아리엘의 눈동자에도 불쾌감이란 게 서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왔다.

       

       “근데, 대공녀님의 말씀을 전하러 온 거야. 아니면 나를 취조하러 온 거야?”

       “아… 불쾌하셨다면 죄송해요. 모두 대공녀님께서 답을 얻어오라 하신 질문들이라.”

       

       마음 같아선 자신이 르미앙 윈터펠 3대공녀임을 알리고 올바른 대답을 강요하고 싶었지만, 그저 제 3자일뿐인 아리엘 영애에게 그러고 싶진 않았다.

       악인과 어울리지 않는 선인에겐 강요보다 부탁이 옳은 법이니까.

       오늘은 만남은 회유의 부탁과 가설의 신빙성을 확보하기 위함일 뿐이다.

       그에 한 발 물러서며 진심으로 사과한 르미앙이었고, 아리엘도 불쾌감을 거두며 한 발 물러섰다.

       

       “뭐, 딱히 누군가와 염문이 도는 것 같지도 않던데?”

       “그런가요….”

       

       르미앙이 아리엘의 표정, 호흡, 손짓, 반응 하나하나를 유심히 관찰한다.

       위증과 거짓의 미세한 흔적을 찾고자 함이었지만, 애석히도 눈에 걸리는 건 없었다.

       엘든과 독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진실되어보였다.

       짜증스럽게도 말이다.

       

       “근데, 이런 걸 왜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외려 모든 질문을 튕겨낸 아리엘에게 질문을 받게 된 르미앙.

       바랬던 상황이기에, 머뭇거리지 않고 답을 전해주었다.

       

       “대공녀님께서 영애님께서 누설하시지 않으리라 믿으시기에 전하는 말씀입니다.”

       

       “뭔데…?”

       

       “대공녀님께선 엘든 공자의 기권 선언이 철회되길 바라고 계십니다.”

       

       “왜?”

       

       “또한, 엘든 공자께서 혼약대전에 사력을 다해주길 바라고 계십니다.”

       

       “…왜?”

       

       이전까진 가설을 검증하기 위한 준비 단계에 불과했다.

       준비가 끝났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차례.

       르미앙이 호호 웃으며 그 다음 단계를 위한 포문을 열었다.

       

       

       “대공녀님께선 엘든 공자를 사랑하고 계시니까요.”

       

       

       [사랑]

       그것으로써 시작된 가설을, 그것으로써 검증하는 것이다.

       만약 엘든과 비밀연애를 즐기거나, 혹은 그 엇비슷한 감정이라도 교류하고 있다면 미묘한 반응을 보여야 했다.

       훼방을 놓으려는 강력한 경쟁자의 등장을 달가워 할 이는 없을 테니 말이다.

       예상대로, 아리엘의 얼굴이 충격에 굳었다.

       엘든의 기권 선언 이후, 처음으로 보는 좋은 반응이었다.

       

       “뭐…? 에, 엘든을.. 사랑하신다고..?”

       

       르미앙이 미소를 숨겼다.

       검증을 거친 가설이 입증을 앞두고 있다.

       충격이 가신 후에, 반감 또는 견제가 비춘다면 엘든의 기권은 [사랑]때문이었을 테니까.

       가문의 재건을 내팽개칠 정도의 감정이라면, 분명 얄팍한 외사랑이 아닌 진한 사랑일 테니까.

       풀리지 않는 최악의 난제에서 드디어 해방될 수 있을 터였다.

       

       “네. 첫눈에 반하셨다고…”

       

       애석하게도.

       

       

       “대—박! 그, 그럼 엘든이 기권 선언을 철회하면 대공전하의 사위가 될 수 있는 거야? 위대한 윈터펠 대공가의 사람이 되는 거야?”

       

       

       그저 엘든과의 독서 시간이 행복할 따름인, 그저 엘든과 감상을 공유하는 것이 즐거울 따름인 한 명의 독서광에겐 ‘달가워’ 할 일이었지만 말이다.

       제게 기쁨을 주는 이에게 기쁨을 돌려주는 일은 누구나 달가워 할 일이니까.

       

       “그럼 대공녀님께선 내가 엘든이 기권 선언을 철회하도록 용기를 전해주길 바라시는 거구나!”

       

       반짝~반짝.

       

       존경하는 소설 속 주인공, 비밀 설원의 여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리란 기대감에 눈빛을 반짝인 아리엘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결의를 다진다.

       내일 아침, 도서관보다 엘든의 별채부터 들려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

       

       빠직.

       

       난제를 해결해줄 유력한 가설이 깨져버린, 짙은 안개를 걷어줄 유일한 등불이 꺼져버린, 상륙지를 앞에 둔 채 좌초되어버린 배의 선장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분을 삭혀야 했다.

       결국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 했다.

       결국 가설의 실패만 반복했다.

       부글대는 화마에 속에선 천불이 타오르기 시작했고, 르미앙은 해갈되지 않는 갈증에 다시금 휩싸여야 했다.

       

       배움의 열망을 꺼뜨리지 못 해 시들어가던 그때처럼.

       탐구의 집념을 삭히지 못 해 말라가던 그때처럼.

       

       

       “대공녀님께 이 아리엘만 믿어달라고 전해줘!”

       

       

       그렇게 대면식 전, 마지막 평가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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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후피집물의 후회캐가 되었습니다
Score 10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was curious about what a female-oriented tragic romantic fantasy was like, so I skimmed through only the free chapters. And then… “…Ha.” I found myself transmigrated into one of the main male characters, destined for tears of regret, exhaustion, and obsession. So, the first thing that had to be done was… “I, Elden Raphelion, hereby declare my withdrawal from the competition for the betrothal of the Third Northern Duchess.” To escape this trage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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