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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71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계단을 향해 올라갔다.

        

       나를 보는 이들 모두가 움직임을 멈췄다. 어떤 물리적인 힘이나, 여신의 힘이 작용한 것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수는 우리가 훨씬 더 적다.

        

       황제를 따라온 기사들이 있었으니까. 사실 내가 지금 당장 그 기사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보증은 없다.

        

       이전에 내가 법국의 수많은 기사와 싸워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온갖 무기와 탄환, 거기에 내가 살던 현실에도 존재하지 않는 오버 테크놀로지가 적용된 강화복까지 있었기 때문이니까.

        

       지금 내 손에 들려있는 것은 텅 비어버린 작은 호신용 권총 하나. 예비탄환은 챙겼지만, 굳이 다시 채워 넣지는 않았다.

        

       황제가 총에 맞아 쓰러졌다. 루카스가 총에 맞아 쓰러졌다. 대체 평범한 십 대 소녀가 어떻게 그런 결과를 끌어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검성이 나의 편을 들고 있었다. 몹시 흥미롭다는 듯 우리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은 느슨해 보이는 그 모습과는 반대로, 누군가가 나를 해하려 들면 검성이 곧장 움직일 거라는 걸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벨라도, 데미안도. 얼어붙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딱히 노린 것은 아니지만…… 뭐, 상관없겠지.

        

       루카스도 쏴서 쓰러뜨릴 수 있었으니, 동료들의 도움을 받으면 벨라나 데미안도 그렇게 할 수 있을 테니까.

        

       “무엇을 원하는 거지?”

        

       황제가 물었다. 흉부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그게 정말 궁금했던 모양이다.

        

       “해피엔딩.”

        

       나는 대답했다.

        

       “여신의 힘으로?”

        

       “아니.”

        

       내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은 여신 덕분이긴 했다. 그 점은…… 고맙다고 해야 할까? 사실 아직은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좋아하던 캐릭터들과 만나고, 내가 동경하던 모험을 하고, 나름대로 캐릭터성도 구축해보았다. 그 좋아하던 캐릭터들과 서로 목숨을 걸고 등을 맡길 수 있을 정도로 친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여신이 나에게 바라던 행위였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나의 삶을 잃었다. 이 세상에선 내가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그저 실비아, 실비아 블랙, 실비아 팬그리폰, 실비아 그레이스가 있을 뿐이다. 내가 구축한 캐릭터, 내가 구축한 이미지의 나.

        

       그게 조금은 유감스러웠다. 삶에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입에 풀칠하겠다고 죽도록 노력하고, 내가 좋아하던 것을 파고들며 시간을 쏟기도 했었으니까.

        

       해피엔딩을 맞이하고 원래 살던 세상으로 돌아가 사랑하는 가족을 만난다는 형편 좋은 이야기가 아니다. 애초에 그런 것은 포기하고 있었다. 내가 살던 세상의 내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도 못하니까.

        

       여신의 힘은 유용하다. 그 힘 덕분에 내가 친구들을 지킬 수 있었으니까— 아니, 그건 너무 오만한 소리인가.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 딱 그 힘 하나가 있었기에 친구들 옆에 설 수 있었다. 그래, 이게 맞는 말 같다.

        

       하지만, 만약 그 힘 때문에 내가 겨우 모아둔 친구들이 죽을 위기에 처한다면, 그런 힘은 필요 없다.

        

       “가장 큰 위험이니, 가장 확실하게 없애버려야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기계장치를 향해 다가갔다.

        

       이전까지 느끼던, ‘그래야 할 것 같다’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는 온전히 나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질서고 혼돈이고 아무래도 상관없어. 나는 그냥 내가 원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을 뿐이니까.”

        

       기계장치 앞에 서서 혼자 중얼거리듯 그렇게 말하자, 황제는 바람 새는 것 같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야말로 팬그리폰이 할 법한 말이로군.”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클레어.”

        

       내가 부르자, 클레어의 어깨가 떨렸다.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는 클레어를 보고 죄책감이 들었다.

        

       못 볼 꼴을 보게 했네. 그것도 셀 수 없이 반복해서.

        

       내가 돌린 시간이 더 많을까, 아니면 클레어가 돌린 시간이 더 많을까.

        

       뭐, 앞으로는 굳이 셀 필요는 없을 거다.

        

       “언니.”

        

       어느새 내 앞까지 다가온 클레어가 말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그렇게…… 살아온 거야?”

        

       “한 번.”

        

       이것만큼은 대답할 수 있다.

        

       내가 살아온 생은 딱 한 번. 그저 그 한 번의 생에서 많은 것을 겪었을 뿐이다.

        

       “무, 무슨 일이죠? 지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건가요?”

        

       그때까지 멍하게 서 있던 샤를로트가 급하게 물었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기계 앞에 나와 클레어가 서 있을 뿐이었지만, 우리 두 사람이 무언가를 할 거라는 직감은 느낄 수 있었을 테니까.

        

       “걱정할 거 없어. 조금 있으면 다 알게 될 테니까.”

        

       나는 클레어 쪽을 보았다.

        

       “좋아. 그럼 우리가 했던 대로, 다시 한번 하면 돼.”

        

       아, 그런데.

        

       “다시, 라고 하는 건 조금 그럴지도 모르겠네. ‘시간을 돌리려는’ 건 아니니까.”

        

       나는 장치로 손을 뻗었다.

        

       내가 손을 뻗는 것만으로는 장치가 기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클레어가 손을 뻗자—

        

       은은하게, 푸른 빛이 비친다.

        

       “……돌아가게 되면, 언니한테 정말 하나하나 다 물어볼 생각이니까.”

        

       “대답해줄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클레어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깨가 조금 떨리고 있어서, 나는 클레어의 어깨에 내 손을 얹었다.

        

       진짜, 진짜 멀리도 돌아왔다.

        

       “그럼, 기다리고 있으마.”

        

       검성이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디 제대로 된 설명을 들을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누님.”

        

       침묵을 지키고 있던 레오가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들은 레오의 목소리 중에서 가장 많이 화가 난 것 같은 목소리였다.

        

       단순히 자기만 모르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는 아닐 거다. 레오는 원작에서도 착해빠진 호구였으니까.

        

       따지자면, 아마 자기 친구들이 자기 모르게 위험을 감수하고 있었다는 것이 화가 나는 거겠지. 게다가 나는 지금은 레오의 ‘누나’였으니까.

        

       순간 클레어가 큿, 하는 소리를 냈다. 명백한 웃음소리였다. 이해한다. 솔직히 나도 웃을 뻔했으니까.

        

       “……그런 말을 했다는 걸 후회하지 않기를 빌게.”

        

       “……예?”

        

       오랜만의 반말이었다. 나의 말을 들은 레오는 얼빠진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지만, 굳이 대답하지는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어차피 시간은 많을 테니까.”

        

       앨리스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런 앨리스에게 웃어주었다. 앨리스의 표정도 순식간에 얼빠진 표정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당황하지 않은 사람은 어린 시절 나의 웃음을 기억하던 클레어 정도였다.

        

       “좋아, 그럼 뭐라고 말할까?”

        

       “계속, 은 어때?”

        

       나의 말에 클레어가 물었다.

        

       “계속?”

        

       솔직히 ‘다시!’도 그다지 멋진 대사는 아니었다고 생각하는데, ‘계속’은 더 이상한 것 같다. 꼭 애니메이션 한 화 끝날 때 붙는 내용 같잖아. 다음 주에 계속, 이런 식으로.

        

       “응, 그러니까 계속이야. 언니는 해피엔딩이라고 했지만, 이야기가 이걸로 끝일 리는 없으니까.”

        

       그런가.

        

       자꾸 게임만 생각해서 ‘엔딩’을 떠올리고 말지만, 확실히 그렇다.

        

       우리는 이제 막 열다섯과 열 여섯의 경계를 지나고 있었다. 나는 이전의 삶이 있긴 했고, 온전히 이 세상에서 십오 년을 살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데도 이 뒤에도, 뒤에도 이야기는 이어질 거다.

        

       여신의 힘이 있건 없건.

        

       “좋아, 그럼 그렇게 하자.”

        

       그러니, 속편을 기대하자는 의미에서 그럴싸한 말이기도 했다.

        

       내가 동의하자, 클레어는 환하게 웃었다. 여전히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고,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질 듯 그렁그렁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오면서 크게 다치지 않았다.

        

       그거면 된 거지, 뭐.

        

       “그럼 셋에 같이 외치자.”

        

       “좋아.”

        

       우리 둘은 눈을 마주친 채 셋을 세었다.

        

       그리고—

        

       “계속!”

        

       음, 그런데 솔직히 직접 말하고 나니 더 이상—

        

       *

        

       —한 건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아.”

        

       침묵 가득하던 공간이 갑자기 소음으로 가득 찼다. 마치 우리가 어떤 사건 중간에 다시 끼어든 것처럼.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만 다녀온 거겠지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진짜였다고 하더라도, 지보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면, 그 세상에서 대부분의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제대로 된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가짜 앨리스의 영향을 받고 있던 앨리스나, 지보와 적성이 아주 잘 맞는 클레어나, 아예 여신이 만들어낸 몸을 쓰는 나라거나.

        

       그랬는데—

        

       “어?”

        

       가장 먼저 그런 소리를 낸 사람은 미아였다.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을 보면, ‘뭔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마법에 적성이 있어서 그 미묘한 차이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걸까—

        

       까지 생각하고, 나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언니!”

        

       클레어가 비명을 질렀다. 저쪽에서 “실비아!”하고 외치는 앨리스의 목소리도 들렸다.

        

       나의 시야가 옆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아, 그래, 생각났다.

        

       내 기준으로도 진짜 멀리 돌아와 버려서 바로 떠올리지는 못했는데.

        

       나 배에 구멍 났었지, 참.

        

       슬슬 한계에 다다랐던 모양이다.

        

       클레어가 급하게 나를 잡아서 땅에 눕힌다. 싸우는 소리가 더 격해지고, 내 의식이 천천히 멀어지는데—

        

       쾅, 하고,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유리 깨지는 소리도.

        

       벽이나 문을 뚫고 들어온 건 아닌 것 같다. 소리가 들린 곳은 저 위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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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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