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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71

       삶이란 본래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세상에 내던져지는 것이라고 했던가.

        

       해석하기 나름이라지만, 두 차례나 내던져진 입장에선 이보다 정확한 표현이 없다고 생각한다. 첫번째 삶을 내가 선택해서 시작하지 않았듯이, 두번째 삶 역시 내 선택은 아니었으니.

        

       하지만, 결국 그 안에서 세상을 받아들이는 건 내 몫인 고로.

        

       전생이 이미 끝났다는 것을 받아들였듯, 이예나로서의 삶 역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더랬다. 죄책감도, 업보도, 행복도, 모두 함께. 피하거나 선별하지 않고, 오롯이.

        

       그러니-

        

       모른 척 회피하는 건, 그만둘 때가 된 거겠지.

        

       -툭툭

        

       이불을 치운 소파 한 켠. 옆자리를 비워두었음에도 멍하니 서있는 진희에게 눈짓하며, 빈 자리를 두들겼다.

        

       남의 집에서 남의 소파에 초대하는 모양새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아, 응! 얘기 좋지. 뭐 마실래? 맥주, 맥주라도 가져올까?”

        

       “음……전 괜찮아요. 술 안 마시고 하고 싶은 얘기여서.”

        

       움찔, 멈칫거리더니 불안한 표정을 띄우는 진희. 뭐가 항상 그렇게 걱정인 건지. 가끔은, 조금 캐묻고 싶게 되더라.

        

       나를 어떻게 보기에 그렇게 일거수일투족에 격하게 반응하냐고, 조금은 짓궂게.

        

       언젠간 해야지. 머릿속의 ‘해야 할 일 목록’에 넣어둘 필요는 있겠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해야만 하는 얘기가 있다. 여태까지 피해왔던. 알면서도,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해왔던. 스스로를 속이고, 또 괴롭혀가며 숨겨왔던 이야기가 있다.

        

       전해야만 하는 마음이 있다.

        

       지니.

        

       아니, 아크.

        

       던져진 삶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해준,

        

       나의 방주에게.

       

       * * * *

        

       사람은 안 하던 짓을 하면 무섭다.

        

       그리고 예나가 술을 거절하는 건, 그 누가 뭐라 해도 안 하던 짓이다. 차라리 밀반입을 하고- 물인 척 소주를 마신다거나, 커피에 위스키를 넣는다거나……그런 일에는, 당황하지 않을 텐데.

        

       술을 안 마시고 하고 싶은 얘기라니.

        

       진희는 천천히 소파를 향해 걸어나가며, 예나의 표정을 조심스레 살폈다.

       

       조금은 결연해 보이고, 또 조금은 힘들어 보이는 얼굴.

        

       들킨 걸까.

        

       그럴 지도 모를 일이다. 좋아하는 마음이라는게 그렇게 쉽게 숨겨지는 건 아니니. 하도 티가 나서, 당사자 빼고는 모두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같은 이야기는, 너무나 흔하지 않나.

        

       더욱이……최근에는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기로 결심했던 마당이다.

       

       조금 전 술자리에서도 티를 냈던가. 떠올려보자면,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긴장해서 횡설수설해대다가, 행복에 겨워 소리높여 웃은 기억 뿐이었다.

       

       그게, 오히려 심하게 티를 낸 것 같기도 해서.

        

       ‘역시……부드러운, 거절을 하려고……?’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 마이페이스인 척하지만, 상대의 마음에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이니.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일이 생기기 전에 미리 돌려 거절하려는……거라면.

        

       그런 거라면, 술기운을 빌리지 않는 것도……예나 다웠다.  

        

       상상만 해도 가슴이 메여왔지만, 너무나 납득이 되는 이유여서.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듯했다. 미국에 간 동안 잘 연락이 되지 않던 것도. 공항에서 자신과 마주했을 때,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던 것도.

        

       ‘침대……를 피한 것도.’

        

       조금은 억울했다. 원치 않는데 손을 대는, 그런 사람이라고 오해한 걸까. 아니, 설마 아니겠지. 그랬다면 집으로 오지는 않았을 터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알고는 있었다. 과분한 행복을 꿈꿨다는 것 정도야, 당연히.

       

       ‘그래도, 오늘은 행복하게 끝내고 싶었는데.’

        

       진희는 필사적으로 눈을 깜빡이며 차오르려는 눈물을 참아냈다. 그리고 평소보다 더 큰 보폭으로, 아무 일 없이 행복하다는 양 성큼성큼 다가가서- 예나가 비워준 자리에 다소곳이 앉아,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띄웠다.

        

       첫사랑에게 당하는 첫 실연이니까.

        

       너무 추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나, 왼쪽이 더 예쁜데.’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시간. 애써 실없는 생각들을 떠올리며, 진희는 몸을 돌려 예나를 향했다.

        

       말을 고르는 듯, 고개를 기울인 채 입술을 달싹거리는 그녀는……여전히,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분명, 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자신의 가슴을 찢어 놓을 때조차도 변함없이 사랑스러워 보이리라.

        

       ‘뭐? 무슨 소리야! 내가? 아니, 아니야. 너무 과하지. 응? 내가? 아니, 예나 엄청 좋아하지! 근데 동생으로 아끼는 거야. 뭐? 우와, 내가 여자팬 여자팬 해서 그런 생각 한 거야? 날 어떻게 보는 거야?’

        

       그리하여, 진희는 어떻게든 자연스럽게 대응하기 위한 멘트를 머릿속으로 굴려보고 있었다. 예나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친구에게 상처를 줬다는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홀로, 조용히 마음을 접을 수 있도록.

        

       “……조금, 이상한 얘기예요. 듣고 비웃을 수도 있는 얘기고.”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뗀 예나의 말은 잔인했으나- 부정하기는 어려웠다.

       

       하기야. 이상한 얘기라고밖에 할 수 없다. 친해진 언니가, 여자가, 혹시 자기를 좋아하는 건지 의심돼서 미리 차단하는 마당 아닌가.

       

       시작부터, 전제부터 이상하다. 너무나도.

       

       하지만 그걸 인정하면……자신의 사랑이 이상한 거라고 인정하는 거라서.

        

       “응.”

        

       길게 대답했다간 코맹맹이 소리가 나겠지. 진희는 소파에 더 깊게 기대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에선, 무슨 소리냐며 펄쩍 뛰기 위한 멘트들을 끝없이 떠올리며.

        

       “혹시 예전에, 기억하시나요. 같이……펍에서 마셨던 날. 꿈, 이야기 했었던 날인데.”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예나가, 사실 여자를 좋아한다는 농담을 처음 했던 날이니.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녀가 결국 진희의 마음속에 파고들고 만 것 또한 그날이었다. 여자를 좋아한다는 농담 때문이 아니다. 그저 그날의 예나가 너무나 흐릿해보여서. 품에 안아주지 않으면 사라질 것만 같아서. 평생, 평생을 두고 꼬옥 안아주고 싶어지고-

       

       예나를 위해서라면, 그렇게 하기 위해 모든 걸 바쳐도 좋을 것만 같았던.

        

       그랬던 날인데.

        

       거기서부터 부정하는 걸까. 하필, 그날부터.

        

       더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하품, 하품이라도 하는 척을 해야-’

        

       -하암.

        

       진희는 하품을 억지로 참는 것처럼 자그마하게 입을 벌리고, 숨을 내쉬며, 양손으로 두 눈을 두들겨 물기를 닦아냈다. 하품 때문에 눈물이 난 양. 화장이 번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미안. 술기운에, 조금. 얘기해줘. 듣고 있어.”

        

       그 와중에도 예나가 기분이 상할까 걱정이 앞선 건, 어쩔 수 없는 일일까.

        

       진희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짧게……짧게 할게요.”

        

       그런 그녀에게 고개를 마주 끄덕여 보인 예나 역시, 조금은 어색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그 모습을 차마 보기 힘들어서, 눈을 살며시 감은 순간.

        

       “그날 했던 얘기……그러니까, 꿈에 지니님이, 아크가 나왔다는 이야기. 진짜였어요. 안 믿겠지만, 정말로. 꿈에서도, 아크는 나오나 방송을 하고 있었어요. 지하실까지 추락하는 게임 인기는 어쩔 도리가 없어서, 방송 규모는 훨씬 작았지만. 종종 봤어요. 자주는 아니어도. 꿈에서 깨기 전에는, 종종.”

        

       이건 대체 무슨 얘긴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이야기에, 진희는 벙찐 표정으로 예나를 올려다보았으나- 추억에 푹 잠겨버린 것만 같은 그 시선은 어느새 진희의 얼굴을 비켜나간 채다.

        

       -흐흫

        

       “말하면서도 이상한 얘기네요. 그래도……혹시 그런 적 있나요. 분명 꿈에서 깼는데, 현실이 더 낯설게 느껴지는. 다시 잠에 들어도 꿈은 돌아오지 않고, 아무리 술을 마셔도 서늘한 낯섦은 흐려지지 않는……그런, 그런 하루하루였어요. 매일매일이.”

        

       짧은 웃음을 흘린 예나의 물기어린 눈이 다시 진희를 향했다.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양 흐려졌던 눈빛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때, 숨을 쉴 수 있는 곳이 있었어요. 하나뿐인.”

        

       “……숨?”

        

       “네. 무서워서. 다, 무섭고……괴로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와중에, 발견한 거예요. 꿈에서만 보았던 사람을. 저 멀리, 어디인지도 모르겠는 곳에서, 구해주러 온 것만 같은…….”

        

       말꼬리를 흐린 예나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어둑한 거실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떤 잔인한 말을 듣더라도 밝게, 아무렇지도 않게 반응해줄 각오를 다졌던 진희로서도, 도저히 어떻게 답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이야기였기에.

        

       “그래서, 시청자참여를 조금, 응. 많이 했어요. 같이 어울리는 기분이나마 내지 않으면……죽을 것 같아서.”

        

       “……어?”

        

       “미안해요. 하지만……저도 살려고 한 거예요. 사람 하나 살리신 거니까……응. 뭔가 복받지 않으실까요. 이번 시즌 팀운이 좋아진다거나. 다음 생에는 챌린저를 다신다거나.”

        

       -흐흫

        

       “죄송해요. 늦었지만.”

        

       다시 고개를 꾸벅, 숙여보이는 예나. 어느새 입에는 흐릿한 장난기가 배어 있었으나- 눈은, 여전히 촉촉하게 반짝거리는 채였다.

        

       “……갑자기?”

        

       “네. 그러니까, 지니님은 미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것도, 저것도. 전부. 이미 저울이 많이 기울어진 상태니까.”

        

       조금 전, 방에서 홀로 들이 붓다시피 한 와인 때문일까. 아니면 상상을 훌쩍 뛰어 넘어버린 이야기 때문일까. 빙글 빙글 도는 머리로는, 도저히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러면……여기까지가, 해야만 했던 이상한 이야기고. 이제부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게요. 비웃을 수 있는. 그래도, 가능하면……다 끝나고 비웃어주세요.”

        

       진희는 그저 최면에 걸린 양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어느새 소파에 바로 앉은 자세로, 천천히.

        

       이젠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끄덕, 끄덕하고. 기계적으로. 멍하니-

        

       “좋아해요.”

        

       끄덕, 끄덕하고-

        

       “……아?”

        

       “……좋아해요.”

        

       잘못 들은 걸까. 아니, 그럴 리가. 혹시 그런 생각을 할까봐 두번이나 말한 걸까? 무슨,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뇌가 업무를 거부한 채 폭죽이나 터트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미친듯이 뛰는 심장의 쿵쾅거리는 소리에 귀에서는 이명이 들릴 것만 같아서-

        

       “나, 나?”

        

       “네. 고민 많이 했어요. 말 할 수 없는 고민도. 이야기하려면 너무나 길지만……응. 그렇네요. 좋아해요. 지니님을.”

        

       -흐흫

        

       비음 섞인 웃음.

       

       그와 동시에 예나의 눈에 고였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파르르 떨리기 시작한 입꼬리에 닿은 순간.

        

       그제서야 뒤늦게 조금이나마 정신이 든 진희는, 얼굴이 뜨거워지다 못해 불에 타는 것만 같았다. 저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고민했을까. 그 여리고, 쉬이 상처받는 예나가, 먼저 말을 꺼내게 만든 것이 너무나 부끄럽지만-

        

       또, 행복해서.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폭발하듯 터져 오르는 감정을, 도무지 언어로 형상화할 수 없어 뻐끔거리는 사이.

        

       “언니를. 좋아해요.”

        

       그 침묵을 오해한 듯한 예나가, 다시 한번 조용히 읊조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부터는,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손이 팔목을 쥐었다. 생각보다도 가냘파. 풀썩, 가볍게 당겼는데도 끌려온다. 흔들리는 숨소리. 훅, 끼쳐오는 온기. 두근거리는 박동이 느껴진다. 반짝이는 눈. 숨결이 간지러워. 머리를 넘겨주는 손길. 아, 양치, 양치를 했어야 하는데.

        

       부드러워.

        

       몇 초나 흘렀을까. 아니, 몇 분일지도 몰라. 벌써 이렇게 숨이 찬 걸 보면.

        

       영원하기를 간절히 바라던 순간이 끝나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사이.

        

       “와인 맛이네요.”

        

       휘영청 빛나는 두 눈을 초승달처럼 휘어 보이며, 눈 앞의 여우가 말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진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다시 몸을 기울여 그 품에 포옥 안겨 들 뿐이었다.

        

       예나가 말한 것처럼, 현실 같은 꿈이 있다면. 혹시 이게 그런 꿈이라면, 깨지 않기를 바라며.

        

       아니-

        

       설령 깨더라도, 예나만큼은 현실에도 있길 바라며.

        

       * * * *

        

       “있잖아.”

        

       “네.”

        

       “내가 예나 좋아하는 거, 알았어?”

        

       “네.”

        

       “……언제부터?”

        

       “비밀이에요.”

        

       “……그러면, 나 언제부터 좋아한 거야?”

        

       “……비밀이에요.”

        

       “……무슨……그러면, 무슨 고민했는지 얘기해줘.”

        

       “배치고사, 플래티넘 나왔던데. 한국어가 통하려나, 하고……아파요.”

        

       “아프라고 한 거야.”

        

       “억울하네요.”

        

       “나 좋아해?”

        

       “……네.”

        

       “더 길게 얘기해줘.”

        

       “네에에에- 아파요.”

        

       “……좋아해.”

        

       “저도요.”

        

       “나, 어디가 좋아?”

        

       “음……그러게요. 어디가 좋은 걸까요.”

        

       “나 진짜 운다?”

        

       “아. 우는 모습도 좋아해요. 잠깐, 지튜브로-”

        

       “야아아-! 너 진짜!”

       

       

       

       

       

       

       IF : 아크 외전- 나의 방주에게. 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아크를 위한 IF 외전, 나의 방주에게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나 궁금해하실 분들을 위해 말씀드리자면, ‘나의 방주에게’의 1화가 시작되는 시점은 본편 248화이고, 이번 화에서 언급된 예나와 진희가 술집에서 이야기한 씬은 본편 137화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IF니까요. 외전에서 묘사된 감정과 기억, 그리고 사건들은 모두 본편과 무관합니다.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이제 레반을 위한 IF 외전을 집필하러 가보겠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돌아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등록된 마지막 회차입니다


           


It’s Not That Kind of Malicious Broadcast

It’s Not That Kind of Malicious Broadcast

그런 악질 방송 안ㅣ에요
Score 3.7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 am a healthy skill-based broadcaster.

I don’t hate priests.

It’s not that kind of broadcast.

What?

Clarify the controversy that’s been posted on the community?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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