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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72

       누가 봐도 명백하게 판타지인 세상에서 몇 년을 살아도 자꾸 잊어버리는 것이 있다.

        

       마법의 존재는 이제 그럭저럭 적응해서 큰 문제 없다. 적어도 누가 내 앞에서 화염구 같은 것을 만들어낸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다. 솔직히, 인제 와서는 화염구니 얼음창이니 하는 마법보다 길거리 야바위꾼의 손놀림이 훨씬 신기할 지경이다.

        

       하지만 그런 마법이 신기하지 않은 이유는, 그 마법을 부리는 존재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 세상에 마법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이상, 그걸 이용하는 것은 당연히 인간이다. 내가 살던 세상에서 반도체와 내연기관을 만들어내고 사용하는 존재가 인간이었던 것처럼.

        

       그런데 말이다.

        

       이 세상에서는 짐승들도 마법을 쓴다.

        

       그렇다. 뭐 대단한 신수나 그런 걸 말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길거리 가다 보면 있는 짐승들을 말하는 거다. 도시 시궁창을 기어 다니는 거대 쥐나 들판을 뛰어다니는 늑대도 마법을 쓴다는 말이다.

        

       대체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겠다. 원작과 비슷한 세상이라서 시스템을 따라간다기에는, 여신이 준비해두었던 건 세상 그 자체가 아니라 내가 속을만한 장치들 뿐이었다.

        

       인간은 마법을 쓰기 위해서 주문을 외우고 지팡이를 휘둘러야 하는데 짐승들은 그런 것도 없다. 입에서 불을 뿜는 곰이나 코로 얼음 망치를 만들어 휘두르는 코끼리를 보면 기가 막힌다. 좋은 의미에서 기가 막히는 게 아니라 문자 그대로 어이가 없어서 기가 막힌다는 뜻이다.

        

       그리고 치유마법을 쓸 줄 아는 그리폰도.

        

       “퓌요오오오!”

        

       그런 소리밖에 내지 못하는 그리폰이, 미아가 정신을 집중해서 걸어줘야 하는 치유마법을 사용한다고 하면 솔직히 인간 시선으로는 좀 치사하다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게, 그리폰은 솔직히 그냥 짐승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존재잖아. 사람들 상상에서나 존재하던 엄청나게 강한 괴수.

        

       그런 존재가, 성당 꼭대기 부근의 창문을 와장창 깨뜨리며 성당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치유한 직후에도 더럽혀진 깃털이 완전히 깨끗해지지는 않은 상태였는데, 그 사이 며칠 동안 어디서 단장이라도 하고 온 듯 그리폰의 흰색, 갈색 깃털에선 윤기가 흘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쫙 펼쳐진 날개.

        

       솔직히 날개 크기만 보면 ‘정말 저렇게 생긴 동물이 저만한 날개를 가지고 있으면 물리적으로 비행하는 것이 가능한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 정도로, 좌우로 펼친 날개는 거대했다. 다큐멘터리에서나 보던 독수리 날개를 연상시켰지만, 그 크기 때문에라도 비슷하다고는 차마 말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그리폰은 그 날개를 굳이 펄럭이지도 않았다. 그리폰의 자세는 한없이 자연스러웠지만, 깃털만을 살짝 펄럭이면서 멋진 자세로 천천히 하강하는 그 모습 자체는 전혀 ‘물리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날개 깃털을 따라서, 비슷한 모양의 하얀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폰이 내 쪽으로 천천히, 더 가깝게 내려올수록, 배에서 느껴지던 뜨거운 감각이 천천히 나아졌다.

        

       아니, 진짜냐고.

        

       이렇게 보니, 그리폰이 왜 그렇게 다루기 힘든 존재인지 알 것 같다. 이미 신체 요건만으로 비교할 존재가 거의 없는데 이런 마법까지 사용한다면.

        

       ……법국 인간들은 진짜로 어떻게 그리폰을 잡아 가둔 거지? 갓 태어난 새끼라도 주워온 건가?

        

       존재만으로 주위를 적막에 휩싸이게 만든 그리폰은, 그대로 내 위에 착지했다. 그렇다고 나를 밟거나 하지는 않았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그리폰이 눈을 내리깔면 나와 눈이 마주칠만한 위치에 그리폰이 딱 버티고 섰다.

        

       그렇다. 그리폰은 고개도 숙이지 않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입술이 아닌 부리를 가진 그리폰이었으니 그 표정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 소리를 듣고 떠올릴 수 있는 건 딱 하나였다.

        

       이 새끼 지금 나 비웃었어.

        

       그런데 그렇다고 내가 뭐라고 하면 그대로 발톱에 허리가 절단될 것 같았으니 나는 꾹 참았다.

        

       그리폰은 그대로 오른쪽 발을 들었다.

        

       그리고 내 옆구리 아래로 능숙하게 발톱을 끼워 넣더니.

        

       “으겍.”

        

       그대로 나를 뒤집었다.

        

       아니, 잠깐만. 일으켜 줄 거면 일으켜 주고, 아니면 일어날 때 까지 기다렸으면 하는데.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가는 그리폰이 나를 한 번 더 뒤집을 것 같아서,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그리폰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이런 녀석한테? 라는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거만하게 바라보던 그리폰은, 일전에 그랬던 것처럼 내 쪽으로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

        

       주변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기 세워주기라도 하는 건가? 아니면 이건 이거대로 그리폰의 문화이기라도 한 걸까?

        

       짐승과 말이 통할 리가 만무했으니, 내가 이 녀석의 의도를 읽는 법은 바디랭귀지 뿐이었다. 솔직히 그리폰어 같은 게 있어도 배우고 싶지는 않고.

        

       나도 저번에 이 녀석 앞에서 했던 것처럼, 양손으로 치마 끝을 잡은 채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한동안 우리는 서로를 향해 그렇게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나는 뒤로 돌아섰다.

        

       음, 솔직히 배에 구멍 난 걸 알았을 때만 하더라도 어쩌나 싶었는데.

        

       아직 확인은 하지 못했지만, 여신의 힘을 온전한 기계장치로 날려버린 직후였다. 이렇게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만 보아도 그렇다. 언젠가 여신이 돌아오게 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 나의 남은 생애 안에서는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여신이 처음부터 다시 계획을 짠다고 하더라도 수백 년은 족히 걸릴 테니까.

        

       “팬그리폰…….”

        

       누군가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지. 팬그리폰이지.

        

       여기서는 나도 팬그리폰이긴 했다.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지만.

        

       “하, 하하!”

        

       뜬금없이 웃는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려보니, 루카스가 웃고 있었다. 딱히 실성하거나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그야말로 유쾌해서 웃는 모양이다.

        

       “그런가.”

        

       황제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루카스. 네가 저 실비아를 나에게 데리고 왔던 이유가 무엇이냐?”

        

       그렇게 물어보는 황제, 아서 팬그리폰의 목소리는 그저 평탄했다. 마치 학교 다녀온 자기 아들에게,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니?’하고 물어보는 아버지 같은 목소리.

        

       “엉? 그야 당연하지 말임다.”

        

       겨우 웃음을 멈춘 루카스가, 여전히 한 손으로는 옆구리를 잡은 채 말했다.

        

       “아버지가 여신의 힘을 찬탈하고, 세상을 발아래 두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던 것과 같은 이유지 말임다.”

        

       루카스는 정말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린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상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그게 더 재미있을 것 같았으니까.”

        

       실로 루카스다운 이유였다.

        

       그리고 그렇기에 아서 팬그리폰의 아들다운 말이었다.

        

       “……그렇구나.”

        

       황제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처음부터 자기 자식들에게 ‘너는 정말로 나의 자식이다’라고 말했다면.

        

       능력을 고르겠답시고 이상한 곳에 던져두지 않았다면.

        

       그래서 아이들이 지독하게 결핍된 삶을 살게 되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달랐을지 모른다. 아니,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하지만 황제는 자기가 친딸이라고 공언한 앨리스에게조차 충분한 사랑을 쏟아주지 못했다. 자기 자식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하긴 했지만, 그 사랑만큼이나 쓸모도 중요했으니까.

        

       뭐, 이제 와서 따지는 건 중요하지 않다. 어쨌거나 이제부터는 두 번의 기회는 없으니까.

        

       그런데, 뭐.

        

       솔직히, 나한테 이렇게 개쩌는 그리폰이 있는데 시간 돌리기가 무슨 상관이겠어.

        

       “퓌요오오오!”

        

       그런 생각을 하는데 머리 위에서 갑자기 들려온 큰 소리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고개를 돌려 그리폰을 올려다보니, 그리폰은 뭔가 할 말이 잔뜩 있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각이라도 읽었나? 그런 마법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없겠지?

        

       저 황금색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그런 확신도 조금 떨어진다.

        

       그래도 나를 버리고 갈 생각은 없는 것 같아서, 나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총이고 뭐고 죄다 내팽개쳐버린 상태라서 손에 무기는 없었지만, 그래도 바닥에 굴러다니는 것들이 보이긴 했으니까.

        

       필요하다면 하나 주워서—

        

       “으꺅!?”

        

       —뭘 하나 고르기도 전에, 내 발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어, 어, 잠깐만.

        

       목덜미 쪽이 묵직한 걸 보니, 그리폰이 내 옷 목덜미를 물어서 올리는 것 같은—

        

       그리고 나는 공중으로 휙 날아 올려졌다.

        

       뭐라고 비명도 못 지른 채 위로 날아오른 나는, 그대로 폭, 하고 그리폰의 넓은 등에 안착했다.

        

       “…….”

        

       그, 기왕 태워줄 거면 조금 더 얌전한 방법은 없었을까.

        

       나 치마 입고 있었는데.

        

       아니, 그보다 안장도 없는 등에 앉혀두고 멋대로 날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나는 그리폰 등 뒤에 바싹 엎드리듯 자세를 잡았다.

        

       “퓌요오오오!”

        

       이번에는 내 생각을 읽었는지 아닌 건지, 그리폰은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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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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