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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72

        

         가장 먼저 방으로 우르르 몰려들어온 건, 역시 일반인을 아득히 상회하는 날카로운 감각을 자랑하는 추적자를 비롯한 에나마 탐지반 무리.

         

         어디를 가나 전선 다발에 금속 뭉치, 온갖 전자기기투성이인 방송국에서 어떻게 폭탄이나 유해 물질 같은 잠재적 위협을 탐지할지는 모르겠다만. 쩔쩔매면서도 어떻게든 임원 경호를 완수하겠다는 모습은… 생각보다 익숙했다. 음.

         

         나한테 유달리 사근사근해서 그렇지, 보통 그들의 ‘상관’은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일이 잦고 기본적으로 업무 전반에 걸쳐 과격한 실력 행사가 많은 부서였으니까.

         

         …다들 여전히 고생 많으십니다 그려.

         

         “……후우.”

         

         하여간 사병들은 주변들 점검하고, 일반 사무직 비서들은 들어오자마자 바로 근처 스탭들에게 달려가서 뭔가를 막 확인하고 바쁘게 절차 진행을 위한 서류를 준비하거나 말거나.

         

         에나마 코퍼레이션의 감찰 이사이자 지배 가문인 아마기의 혈족 말석, 그리고 아마 오늘의 ‘남자 모델’ 역할을 담당한 게 절대 분명한 당사자께서는 특유의 검보라빛이 감도는 머릿결을 쓸어 넘기며 스튜디오에 입성하셨으니.

         

         의료 분야 독과점 메가코프의 헬스 케어 시스템이 그리 허술하지도 않으련만.

         

         그 파티장에서 헤어진지 뭐 얼마나 오래 되었다고, 어딘가 생기가 부족해 보이는 건 물론 푸석푸석한 기색 또한 가득한 쇼우가 저 멀리에 보였다.

         

         “이야~ 이렇게 선뜻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다마츠 이사님! 메가코프 이사가 친히 출연하는 광고라니… 방송사 전체를 놓고 봐도 거의 한 2년? 3년만에 송출해보겠네요 이런 건! 직원들에겐 어마어마한 경력이 될 건 물론이고, 주목도도 장난 아닐 겁니다.”

         

         “아뇨, 저야말로. 자리를 마련해주신 점에 감사드립니다. 마침… 이런 기회가 오기만을 바라고 있던 상황인지라. 다만…….”

         

         대체 저 육중한 몸에서 가공할 속도와 순발력이 어찌 나오는 걸까?

         친분을 과시하듯, 한걸음에 반갑게 달려가서 악수하는 보도국장과는 극렬히 대비되게.

         

         여전히 무표정하고 냉기가 풀풀 날리는 태도를 유지한 쇼우였으나, 드물게 악수한 손을 맞잡은 채 어깨를 가까이 끌어당겨 가볍게 서로의 팔을 토닥이기까지 하는 사교적인 모습을 연출했다.

         

         방송국 한복판인만큼 보도국장의 체면을 세워주는 건 역시 임원에겐 정치적으로 불가피한 스탠스일지도 모르겠다.

         

         “……촬영한 그녀의 원본 데이터는 무슨 일이 생겨도 무조건 약속대로 저희 쪽에 넘겨주셔야 합니다. 모건 국장.”

         

         “흐흠…! 아무런 걱정 마시지요. 뭣하면 아예 저기 대니 주임에게 의뢰해서 입맛에 맞게 커스텀 해 가셔도 무방합니다. …유부남으로서 주제넘은 참견을 하자면, 먼저 연인분께 허락을 구하시는 게 좋다 봅니다만.”

         

         …어째 피부가 좀 오싹한데.

         둘이서 뭔가 불길한 음모라도 쑥덕이고 있나? 권력자 간의 야합에 함부로 관심을 줘선 안 된다는 사실은 알지만 저 두 사람이 떠들만한 건 필시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리라.

         

         이따 집에 가서 드로이드 DB에 저장된 동영상이 있나 없나 뒤집어 털 때, 방금 귀엣말이 녹음된 보이스 로그가 있는지 확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 …악성 코드 이외에도, 스튜디오 서버에 존재하는 외부 접속 차단 기능을 우회하기 위한 백도어 설치 또한 최대한 서두르도록 하겠습니다. –

         

         “아, 뭐야. 그냥 단순히 촬영 관련된 얘기였어? 그럼 다행이고.”

         

         드물게 먼저 제로가 적극 대응하겠다 나서길래 자세한 내용을 꼬치꼬치 캐묻기보단 알아서 잘 해결하라 맡겨 둔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한 게 얘는 원래 에나마 연구소 출신 AI였던 것치고는 묘하게 저쪽 고위층이 엮이기만 하면 한층 더 경계가 심해지는 것 같단 말이지.

         

         윤리 규정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환경에서 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의사 결정권자와 최종 권력자를 불신하게 된 걸지도 모르겠네.

         

         뭐 어쨌든, 그래도 난 이걸로 한가지 긍정적인 가능성을 봤다.

         

         그게 뭐냐고? 생각보다 간단하다. 바쁘신 이사님이 오직 나 하나 때문에 여기에 왔다 가정하는 건 너무 자의식 과잉일 수도 있다는 것.

         

         아니, 농담이나 현실 도피가 아니라 제대로 좀 봐라.

         저렇게 오자마자 긴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모건 보도국장 개인이나 메모리얼 타임즈와 기업 단위로 협업할 거리가 있어서 온 걸 수도 있지 않겠나?

         

         에린 씨의 ‘일이니까 죽어라 하는 거지, 일일이 따지고 들어서 어디다 써먹어!’ 이론은 분명 회사 소속인 이상 쇼우 녀석도 피해갈 수 없는 불변의 진리가 틀림없….

         

         “…아나스타샤!”

         “어.”

         

         이런 시발, 가만히 있었으면 중간이라도 갔을 텐데 나는 왜 신나게 5초면 산산이 부서질 희망적인 관측을 떠들어댄 걸까?

         

         자기가 흥미를 가지는 게 곧 일정이 되는 위치까지 올라가면 해당 사항이 없나 보네요. 기억해 두겠습니다. 네.

         

         우선 컨디션이 나빠 보인다고 섣불리 평가했던 것부터 전부 취소해야겠다. 기운이 없긴 무슨 활력이 철철 넘쳐흐르네 아주 그냥.

         

         잠들어 있던 꽃봉오리가 만개하듯, 모임에 나타난 여인이 미모를 가리고 있던 면사포를 걷어내듯.

         

         어딘가 음울하고 스산한 분위기가 감돌던 미장부가 갑자기 활짝 웃으며 이쪽으로 다가오자, 외야에 있던 일부 스탭 사이에서 ‘어머!’ 라거나 ‘꺄악!’ 같은 원초적인 감탄사가 마구 튀어나왔다.

         

         오버한다…고 비아냥거리기도 뭐한 게, 기생오라비 타입을 원래 싫어하는 사람일지라도 얘가 표정만 밝으면 취향을 불문하고 첫인상 자체가 나쁠 수가 없는 외모래서.

         

         아무래도 플레이어에겐 에나마가 약간 적대 성향이 강한 세력이다 보니, ‘헤이롱의 경우-제복-처럼 유저 선호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미남 캐릭터를 넣어줬다!’ 비슷한 논지가 있었는데 내가 보기엔 아마기 가문의 혈통이 그냥 원체 좋은 게 아닐까 싶다.

         

         어딘가의 유럽 왕가처럼 미남미녀의 유전자가 줄곧 이어지는 영험한 핏줄이라 할까? 심지어 미국 이민계라 동서양의 조화까지 이뤘네. 부러운 인간들.

         

         “정말. 그 때 언질도 없이 훌쩍 사라지셔서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영락없이 무슨 나쁜 일이라도 생긴 줄로만 알고, 파라다이스의 그 인간이 찾아오기 전에 못해도 수색대를 10개 조는 내보냈습니다.”

         

         “아니, 그건 정말 여러 사람한테 미안하게 됐는데…… 잠깐, 쇼우 너 일단 손부터 좀…! 너무 불순해!!”

         

         어쨌거나 내 앞까지 반갑게 다가온 그가 멋대로 머리칼을 만지려 들길래 일단 손을 들어서 쳐냈다.

         그랬더니 쳐내려 뻗은 손을 그대로 타고 올라오고자, 웃으며 붙잡길래 다시 떨쳐내고… 파티에서처럼 연기할 이유도 없는데 허리춤으로 쑥 들어오려는 팔을 또 바쁘게 견제하고!

         

         한참을 아옹다옹하다가 비로소 흥분을 가라앉히고 시무룩하게 진정하기끼지. 주변 사람들이 이 지나치게 허물없는 광경을 당췌 어떤 식으로 해석하고 있을지 알아보는 게 무서울 지경이다.

         

         그나마 내 탈주 -퇴사- 행위에 살짝 유감은 있을지언정 깊은 원한은 없어 보여서 마음이 놓였지만. 시도 때도 없이 거리를 좁혀오려는 버릇마저 이렇게 여전할 필요는 없었는데, 쯧.

         

         관객석에 있는 모건 국장이 굉장히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이쪽 동향을 살피고, 일이 돌아가는 꼴을 슬슬 이해한 더글라스 디렉터는 대박의 조짐을 느꼈는지 함박웃음을 짓느라 바쁜 와중에도.

         

         각자 맡은 바 소임이 명확한 경호원들은 정해진 위치로 가 알아서 침묵을 지켰는데. 딱 한 명. 한 추적자는 스르륵 들어와서 내 뒤편, 제로와 약간 거리를 두더니 꾸벅 인사를 해왔다.

         

         ……특정할 물증은 좀 부족하지만, 이건 누가 봐도 마사나리지?

         

         솔직히 모건 국장 같은 경우야 배신감이니 뭐니 그런 걸 따지고 자시고 할 정도로 친하지 않아서 내 정보를 팔아 넘겼던, 불구경을 하겠답시고 심지를 점화했던 별유감이 없었다. 나중에 이 빚을 받아낼 기회가 있다면 갚아주겠다 다짐했을 뿐.

         

         하지만 너. 너는 임마, 내가 매일 밥도 사주고!

         괜히 짠한 방식으로 수상하게 서성이지 말라고 외출할 일정도 있으면 미리미리 다 알려주는 걸로 상호 존중 관계도 구축하고 그랬는데 은혜를 이따구로 갚아!?

         

         그렇게 꼬박꼬박 인사만 하고 예의만 표하고 넘어가는 게 다가 아니라니까??

         

         꼼꼼하게 따지고 보면 그걸 다 보고하는 게 쟤 업무라고 해도 단순히 ‘대상이 외출했습니다~’하고 기록을 남기는 거랑 ‘대상이 언제 어디로 나갈 예정이니 맞춰서 움직이시면 만날 수 있습니다.’하고 보고하는 건 전혀 다른 얘기가 아닌가.

         

         나도 전속 상담사라는 명목으로 많이 불려 다닌 터라 대충 쇼우의 관심사에 한해선 정보가 어떤 식으로 오고 가는지 알만큼 안다.

         

         이 나쁜 년, 야박하기 그지없는 특무 요원 같으니라고…!

         

         “…아무튼 그래서. 설마 진짜 광고 찍으려고 출장 나온 건 아닐 거고. 이제 와서 에나마로 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설득하려고 온 거라면 시간 낭비야. 다른 일도 많을 텐데 괜한 고생하지 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건 정말…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요.”

         

         다른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최대한 소근거리는 성량으로.

         혹시나 여지가 있는 줄 알고 덤벼들라, 미리 거절해두는 셈치고 기껏 선수를 쳤는데 그는 외려 가까워진 물리적 거리와 ‘고생하지 말라’는 부분에서 활짝 웃는 것으로 자신의 기쁨을 표현해왔다.

         

         아니, 환장하겠네. 진짜로 걱정한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돌려서 거절하는 말이 그렇다는 거지.

         

         설마 나 같은 일개 프리랜서 엔지니어가 기업 이사님께서 들이는 수고에 비해 벌이가 시원찮을까 충고하겠냐? 엉??

         

         타박하는 데도 그렇게 기뻐하면 난 대체 뭐가 되는데. 왜 내 주변에는 상식을 초월한 변태밖에 없냐니까 정말?

         

         “……아무래도 아샤의 ‘후원자’ 때문에 노골적으로 만날 수 없기도 하고, 제가 너무 강압적으로 대답을 보챈 것 같아서 그간 좀 반성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가끔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그대가 미룬 대답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또 무엇보다도….”

         

         거기까지 말한 쇼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더니.

         

         왠지 요사스러운 빛이 일렁거리는 시선을 감출 생각도 안 한 채로 지그시 이쪽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명실상부하게. 확고한 영상 기록을 남겨두는 것도 중요하니까요. 그 과정에서 제 사심도 조금이나마 채울 겸.”

         “……어지럽네.”

         

         해자는 바깥에서부터 차근차근 메워 나가는 법이라 주장하듯, 무서운 말을 태연하게 일삼는 그를 보며 나는 제로에게 조용히 퇴로 확보를 지시했다.

         

         저… 아무리 생각해도 실수였던 것 같은데 광고 안 찍고 나가봐도 될까요? 어차피 계약한 것도 딱히 없는데 아무 문제없지 않나요?

         

         ………예? 이미 에나마 쪽 실무진이 서류 작업까지 다 마치고 나가셨다고요?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헛소리인데.

         

         기업이 퇴사자 신원을 무단 도용해서 도장 찍는데 방송국이 그걸 대놓고 막 받아주면 어떡해 미친!

         

         니들이 그러고도 ‘네오 헤이븐 No.1 검증된 사실만을 보도하는 방송국, 메모리얼 타임즈’라 떳떳하게 홍보할 양심이 있냐! 시청률 잘 나오면 다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아론 억제기가 열일해서 겨우 이 정도. 였다는 오싹한 괴담.

    그렇지만 광고 촬영…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요? 태풍의 눈은 먹구름을 몰고 다니는 법인데.

    항상 재밌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눌러 주신 추천, 남겨 주시는 댓글 다 너무 큰 힘이 됩니다!
    최근 컨디션이 안 좋아서 대댓글 달 시간에 그냥 널브러져 있는데. 몸이 낫는 대로 몰아서 인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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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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