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273

        

       

       

         

       케리드나 화이트클락.

         

       화이트클락 공작 가문의 영애로, 명문 메르헨 아카데미 내에서 최상위권을 차지하는 학생이다. 그녀는 미모며, 혈통이며, 능력이며, 못 가진 것이 없는 팔방미인이었다.

         

       즐기는 것은 연극이나 소설이다. 캐릭터에 감정을 쉽게 이입하고 마는 성격이나, 연기 실력은 썩 좋지 못하다. 간혹 어설픈 악역 영애를 연기하는 것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런 그녀가, 오늘은 허망한 표정으로 오르핀관 게시판에 게시된 반 배정표를 바라보고 있었다.

         

         

       “으어어어….”

         

         

       멍하니 좀비 소리만 낸지도 어느덧 10분째다.

         

       반 배정 평가 결과, 케리드나는 B 클래스가 되었다. 그녀 대신 A 클래스에 올라간 자가 누구인지는 불 보듯 뻔했다. 아이작이었다.

         

       당연히 비켜줘야 할 상대였다. 다른 A 클래스 학생들을 맹수에 비견할 수 있다면, 아이작은 자연 재해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최고의 클래스를 경험하며 자부심을 느껴온 자가 아래 단계로 추락하고 마는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착잡하다. 슬프다. 괴롭다. 피눈물이 날 것만 같다…!

         

         

       “뭐 하냐.”

        “꺄악!”

         

         

       돌연 남학생이 뒤에서 다가와 말을 걸자 케리드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익숙한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뒤로 휙 돌리는 케리드나.

         

         

       “아, 아이작….”

         

         

       다가온 남학생은 아이작이었다.

         

       안경을 쓴 모범생 스타일. 그러나 순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유례 없는 최연소 대마법사이자 얼음의 원왕이라는 무시무시한 타이틀이 뒤따르는 괴물이었다.

         

       문득 케리드나는 화이트클락 대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곤 얼굴을 붉혔다.

         

       에이첼과 아이작 사이에 정분이 난 건… 아닐 터다. 그러나 부끄러운 행위를 한 것은 틀림없었다.

         

       케리드나는 에이첼을 추궁했고, 에이첼은 씨익 웃으면서 검지를 입술에 대고 ‘쉿’이라고 했을 뿐이었다.

         

       화이트클락 공작가가 빙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는 소문이 귀족 사회에 고루 퍼졌다. 백룡이 화이트클락 대저택에 이르는 걸 많은 사람이 봤으니. 소문은 발이 빠른 법이었다.

         

       자연스레 힘의 균형이 기울어져 화이트클락 가문의 위신이 높아졌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에이첼과 아이작. 두 사람은 서로를 이용하고 있는 걸까.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남자가 제 언니와 그렇고 그런 행위를 했다는 사실만 떠올려도 케리드나는 몸이 후끈 달아오르고 말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케리드나는 고개를 빠르게 가로저어 상념을 털어냈다. 그 모습을 아이작은 의문스럽게 지켜보았다.

         

       현실로 돌아오자.

       

       그녀는 심호흡하며 감정을 진정시켰다.

         

         

       “무슨 일이에…, 일이야?”

       

       

       저도 모르게 존댓말을 할 뻔했으나, 곧바로 반말로 고치는 케리드나.

       

       

       “아까부터 저것만 쳐다보길래. A 클래스 떨어지니까 슬퍼서 그래?”

       “…….”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정답이었다.

         

       케리드나는 울상을 짓더니 고개를 옆으로 떨구었다.

         

         

       “왜 너랑 내가 동기가 된 것일까…. 야속하구나아…. 난 A 클래스에 쭉 머무르고 싶었다고….”

         

         

       회의감에 젖어드는 목소리.

         

       너만 없었더라도 난 A 클래스에 안정적으로 잔류할 수 있었을 텐데.

         

       케리드나의 말은 그런 의미였다.

       

       

       “어쩌겠냐, 네 실력을 탓해야지.”

        “끄으…!”

         

         

       냉혹한 대답.

         

       케리드나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냥 위로 한마디만 해주면 될 텐데, 왜 저런 재수 없는 소리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뭐라 따질 수 없었다. 그저 울분을 삼킬 수밖에.

         

       애당초 아이작이 한 말엔 틀린 게 없었고.

         

       에이첼의 말을 빌리기로, 아이작은 화이트클락 가문과 긴밀하게 교류하는 관계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분노의 화살을 자기 자신에게만 겨눌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케리드나를 슬프게 했다.

         

         

       “후우.”

         

         

       케리드나는 다시금 한숨으로 감정을 가다듬은 뒤, 도끼눈을 뜨고 아이작을 노려보았다.

         

         

       “무슨 말 하러 온 건데? 설마 나 비웃으러 온 거야?”

       “그러겠냐. 그냥 멍하니 서 있길래 말 건 거지. 너무 슬퍼하진 마라. 신경 쓰이잖아.”

       “내가 이 정도로 슬퍼할 리 없잖아.”

         

         

       케리드나는 실소를 내뱉곤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난 화이트클락 가문의 영애야. 이대로 A 클래스에서 영영 떠나 있을 것 같아? 도리만천하에도 내 우수함은 영영무궁하지. 다음 학기엔 반드시 A 클래스에 다시 들어갈 테니 날 맞이할 준비나 해.”

       “그러냐.”

         

         

       아이작은 싱긋 웃더니 손에 들고 있던 보온병을 케리드나에게 건넸다.

         

       

       “그럼 이거 받아라.”

        “응? 이게 뭔데?”

       “코코아.”

        “뭐야, 그 뜬금없는 건…?”

         

         

       케리드나는 이해가 안 가서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했다.

         

         

       “이따 수업 중이거나 공부할 때 심심하면 마셔.”

       “아니, 이런 걸 왜 나한테 주냐니까?”

       “저번에 네가 직접 나한테 차 타줬잖아. 보답으로 나도 고급품 중에서 마실 걸 준비해본 거야. 마음에 들진 모르겠지만.”

       “으응? 대체 왜 그런 결론이 나온 거야…?”

         

         

       아이작은 상심했을 케리드나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다.

       

       화이트에게서 황실에서만 맛 볼 수 있는 것이라며 선물 받은 코코아 가루를 타서 만들었다. 샤를관 메이드가 도왔으며, 케리드나의 고급 입맛에도 부족함이 없으리라.

       

       애당초 코코아가 여기선 흔한 음료가 아니기도 했다.

         

         

       “그럼 파이팅하고.”

         

         

       아이작은 선하게 미소 짓고 케리드나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곤 그 자리를 떠나갔다.

         

         

       “……?”

         

         

       어안이 벙벙했다.

         

         

       “이런 걸 대체 왜 주는 거야…?”

         

         

       케리드나는 떠나가는 아이작과 코코아가 들었다는 보온병을 번갈아 보며 한동안 의문을 느껴야만 했다.

         

       병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한 모금 마셔보는 케리드나.

         

         

       “음…?”

         

         

       맛있었다.

         

         

         

       * * *

         

         

         

       저번 주에 반 배정 평가를 마치고 클래스가 결정되었다.

         

       나는 A 클래스에 배정되었고, 대신 케리드나 화이트클락이 B 클래스로 떨어졌다.

         

       코코아 선물이 마음에 들었을진 모르겠다. 차를 타줬다는 점에서 기인해 나도 마실 걸 준 것인데.

       

       돌아보면 꽤 어이없는 선물 같기도 했다. 선물을 줬을 때 케리드나가 보인 의구심 어린 반응이 이해가 갔다.

       

       왜 선물을 주고 나서 이런 후회가 드는진 모르겠지만, 뭐 상관없겠지.

         

         

       “자네들의 2학기를 책임질 필립 멜트런 교수라네.”

         

         

       2학년 A 클래스 강의실. 나는 가운데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학기에 따라 각 클래스별 담당 교수가 바뀐다. 예외는 최하위 클래스인 D 클래스뿐. 거기는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 담당 교수를 바꾸지 않는 편이다.

       

       이번 A 클래스 담당은 붉은 머리칼을 가진 중년 남성, 합동 실습 평가 때 나와 팀원들의 협공에 털렸던 신분 차별주의자, 필립 멜트런 교수였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땐 잠깐 눈을 찌푸렸지만, 내게 악감정은 없어 보였다. 단지 서로 서먹서먹한 관계라서 그런 듯했다.

         

         

       “자네들 중 네 사람은 알겠지. 나는 차후 황국을 이끌어갈 원석들, 바로 자네들처럼 우수한 엘리트를 좋아하네.”

         

         

       시작부터 비행기 태워주는 필립 교수.

         

       그는 나와 눈을 마주쳤다.

         

         

       “아이작. 이번에 새로 A 클래스에 올라온 자네도 예외는 아니네. 성적, 성과만을 중시했던 내 가치관만으로 자네를 판단하는 건 그른 짓이었네. 이 자리를 빌려 사과하지.”

       “아, 예….”

         

         

       내게 고개를 숙이는 필립 교수. 형식적인 사과였지만, 진심은 담겨 있었다.

       

       이미 흠씬 패준 적이 있어서 나도 악감정 같은 건 더 없었는데…. 안 그래도 어색했던 분위기가 더 어색해졌다.

         

       다시 고개를 드는 필립 교수.

         

         

       “그리고 자네에게 한 가지 묻고 싶군.”

       “예.”

       “자네는 정말로 기본기를 갈고 닦고 싶어서 수업을 듣는 것인가?”

       “예에…. 그런데요?”

       “아무것도 아닐세. 그럼 수업을 시작하지.”

         

         

       이 사람. 티는 안 났지만, 내가 자기 수업 듣는다고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필립 교수 수업을 실제로 듣는 건 처음이었다. 수업 스타일은 담담하고 정석적인 느낌이었다.

         

       눈을 굴려 카야와 루체를 쳐다보았다.

         

       카야는 당장 내 옆에 앉고 싶어도 공부에 방해될까 봐 참고 있었다. 힐끔힐끔 내게 곁눈질하다 눈이 마주치곤 했는데, 그럴 때면 얼굴을 확 붉히곤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청춘 드라마 속 한 장면 같았다. 풋풋해.

         

       루체는 덤덤하게 수업을 경청했다.

         

         

       “크릉…. 스으으….”

         

         

       한편 시엘, 저 녀석은 구석 자리에 앉아서 세상 편히 잠들어 있었다.

         

       작년에 내가 준 베개를 꼭 끌어안은 채였다.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 아직도 그 베개를 품에 달고 산다.

         

       우수한 엘리트들에겐 너그러워도 지나치게 너그러운 필립 교수다. 익숙한 일이라는 듯, 시엘을 깨우려는 노력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미 포기했는지도 모르겠지만.

         

       

       

       ……

         

         

         

       쉬는 시간, 화장실에 들렀다 복도로 나왔을 때였다.

         

         

       “아이작.”

       “누나?”

         

         

       갑자기 이브 로펜하임이 나타나 내 앞에 섰다. 마치 날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화장실에 들어갈 때까진 안 보였는데.

         

         

       “오늘 나랑 같이 하교할래? 부담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옆으로 묶은 머리를 짜내듯 쓰다듬으며 부끄러워하는 이브.

         

       로펜하임 남작의 구속도 사라졌고, 나와 이야기도 잘 풀렸으니 내 일상에 차츰 개입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아이작이고, 이브는 이 몸의 유일한 혈육이다. 이브에게 유달리 정감이 가고 마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브가 용기 내서 꺼낸 말을 들어 주는 건 곤란했다.

         

         

       “같이 다니는 친구가 있어서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은데.”

       “아…. 그래?”

         

         

       이브는 눈을 옆으로 굴렸다.

         

       늘어지는 음성, 가라앉는 눈과 입꼬리에서 은근한 불쾌감이 읽혔다.

         

       이내, 이브는 다시 날 보며 싱긋 웃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다음에 시간 나면 보자.”

       “그러자.”

         

         

       나는 한번 웃어 주고 이브를 제치고 지나갔다.

         

         

       “근데 너무 붙어 다니더라, 너희들. …방해되게.”

       “……?”

         

         

       대뜸 침잠하는 목소리가 귀에 또렷이 들려왔다.

         

       발을 멈추고 고개를 뒤로 돌려 이브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이미 내 반대편으로 떠나가고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1. 늦어서 죄송합니다…. 써놨다가 문제점을 뒤늦게 발견해서 갈아엎었습니다…

    2. 페미학살자 님 110코인 감사드립니다!!!! 생략해서 죄송합니다.. 요즘 제가 정신 머리가 없네요ㅠㅠ 저도 초반부가 정말 아쉽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이렇게 소설 적는 게 처음이라 미숙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도 따라와주시고 재밌게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화 보기


           


The Academy’s Weakest Became A Demon-Limited Hunter

The Academy’s Weakest Became A Demon-Limited Hunter

AWBDLH, 아카데미 최약체는 마족 한정 먼치킨이 되었다
Score 8.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I possessed the weakest character in my favorite game’s Hell Mode. I want to survive, but the way the main character is being controlled is atrocious. It can’t be helped. I have to stop the bad ending myself.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